소설리스트

〈 96화 〉여진(餘震) (96/164)



〈 96화 〉여진(餘震)

라드는 에테롬의 말에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우리 부대가 임무 중일 때... 상회의 병력을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라는 말입니까?"
"네. 그리고 라드씨가 현지의 반란군과 내통을 해줘야 해요."
그는 에테롬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담배에 손을 가져다 대다가 동작을 멈췄다.

"...담배 좀 펴도 되겠습니까, 에테롬씨?"
"당연히 안되죠, 아직 식사 중인  안보이십니까?"
에테롬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를 막았다. 라드는 담배를 다시 집어넣고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꼼지락 댔다.

"그러니까, 소금부대 '안에서', 다임상회의 병력들을 들여보내고, 반동분자를 색출해 찾는 일을 하는 부대에서 반동분자들과 내통하라는 겁니까?"
"응. 그허히현 해히다."
폭 립이 잘 안 뜯기는지 뼈를 물고 말하느라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러면 된다 한 것이리라.

"...어떻게 말입니까."
"그건 라드씨가 알아서 해야죠. 방법까지는 제시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들만 정해준 거예요."
"...저더러 죽으라는 겁니까?"
"설마요! 라드씨에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일을 시키는 겁니다."
에테롬은 손가락을 한번씩 빨아낸 후,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할란이 그 접시를 들고 어디론가 들어갔다.

"죽으라고 보내는 게 아니에요. 성공하라고 보내는 겁니다. 라드씨는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렇죠?"
냅킨을 풀며 그렇게 말하는 에테롬을 보며 라드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아끼는  있는 사람은 강해지는 법이죠. 상인이라면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런 것 같군요."
"우린 같은 배에 탔어요. 그리고 지금 제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은 라드씨...와 이번에 모인 제 부대원들이죠. 그치만 제 부대원들보다는 라드씨가 이번 일에 더 적합할 테니까요."
"만약 우리의 다음 임무지가 칼타코가 아니라면?"
"그딴 질문은 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이것만 알아 둬요..."
에테롬은 담배를 꺼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서, 아직 불이 붙어있는 그 성냥을 라드에게 건내주었다.


"이 칼타코라는 지점, 지난번에 들었겠지만  말이 진짜라면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요. 전 무조건  지역에 제 지분을 얹어야 합니다."
라드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성냥불을 밟아 껐다. 그리고 가만히 에테롬을 노려보았다.

"그 교단의 싸이코 놈들보다 더 지분이 커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과 사이 좋게 밥그릇을 나눌 정도로 우리가 유복한 상황이 못돼요. 그러니까 제발 부탁인데-"
에테롬은 몸을 끌어 라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라드는 담배연기와 섞인 입냄새에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제가 당신과 당신 누이를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게 해주세요."


#

도르베와 아스타는 막 벨카에 도착해 말을 묶어 놓고 있었다. 아스타는 연신 웃고 있는 도르베를 향해 던지듯 말했다.


"아니, 그러다 얼굴에 경련난다니까, 너?"
"그렇지만... 이걸  봐라!"
도르베는 자신의 손을 펼쳤다. 투박한 나무 손가락이 걸려 있었다.

"두 개를 잃었더니  개로 돌아오는 구나...! 난 운이 좋다!"
그의 아버지가 전날 저녁에 그의 손을 보고 아무 말도 없이 만들어낸 것. 솔직히 투박하고 반응속도도  좋지 않다. 그러나 도르베는 마치 손가락이 다시 돋아난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내 꺼랑 같은 취급하네, 내가 사준 거는 진짜  비싼 거였는데..."
아스타가 작게 투덜댔지만 도르베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삐걱거리는 나무손가락을 연신 꼼지락대며 술집으로 향했다.


"다들 있느냐!"
"뭐야, 도르브...어?"
갤러한이  들어온 그를 보고 얼굴이 굳었다.

"뭐, 뭐야, 깜짝이야. 왜 애처럼 웃고 있는 거야, 기분 나쁘잖냐..."
"응? 내가 애처럼 웃으면 기분 나쁜가?"
"조금?"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가갔다. 그리고 도르베의 손가락을 보았다.

"뭐야, 의지(義指)샀냐?"
"오오! 파는 제품 같은 거냐!"
"...사도  이상한 걸 샀냐, 내가 같이 환불해 줄게. 바로 나가ㅈ-"
말하던 갤러한의 입을 틀어막은 것은 아스타였다. 그녀는 그대로 갤러한을 밀면서 소리쳤다.

"야, 나랑 도르베랑 돌아왔다!"
 명씩 계단을 통해 홀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일찍 왔네?"
"미안, 기념품은 없어."
"뭐? 어디 갔다  거야?"
뒷북을 치는 갤러한에게 릴로가 어이없다는 듯 다시 말했다.


"병신아, 도르베랑 아스타랑 도르베 아빠집으로 갔다 온다고 했었잖아."
갤러한도 당시에 그 자리에 있긴 했었다. 정신이 다른 곳에 있었기에 못 들었었을 뿐이다. 그제서야 그는 도르베가 끼고 있는 의지가 어떤 것인지, 아스타는 왜 자신의 입을 막았는지 등이 전부 이해되었다.

"...아하! 그, 그러면 거기 상점 같은 데에서 의지도 산거구나?"
"아하하! 갤러한, 이건 산 것이 아니다! 설명해주지, 모두 내려와라! 오늘은 내가 사마!"
신나서 홀 중앙 쪽으로 걸어가는 도르베를 보며 갤러한은 아스타를 쳐다보았다. 아스타는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 도르베를 따라  뿐이었다.

"왠일이야? 무슨 일 있었어?"
"아 시발, 방금 잠들었는데..."
"다시 자도 된다."
"공짜 술이면 깨야지..."
"핀도 오늘 내로 오지 않을까?"
금방 홀은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급하게 주인장이 테이블을 피고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분주할 때, 문이 또 열렸다.


"...뭐야, 좀 떠들썩하네?"
"뭐야, 너도 왔네? 요 몇일 어디 갔다 온 거야?"
"여기 저기 좀 갔다 왔어... 나도 낀다?"
"어어. 앉아, 앉아."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챙겨온 기념품들을 꺼냈다. 그건 술자리의 분위기를 무르익히는데 꽤  도움이 됐다.


#


"...이상입니다."
"그런가. 고맙다. 수고를 덜었군."
요나는 웃으며 종이들을 전부 정리했다. 그들은 이번 작전에 사용된 물자 등에 관련된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걸로 일단락이 났구나."
요나는 기지개를 피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칼린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집사일은 어떤가? 할 일이 많지는 않지?"
"그러네요. 알레프씨는 훨씬 바빠 보였었는데...제가 섬세함이 부족해서 일을 대충하고 있는 걸지도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대리로 갑작스레 세운 너에게  일을 전부 맡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너도 일단 소금부대에 속해 있으니까, 임무가 끝나고  휴식은 존중해 주고 싶구나..."
그녀는 그 말을 끝마치고 마치 방금 떠오른 듯 말을 꺼냈다.


"그렇지. 다른 부대원들과 관계는 조금 회복되었나?"
칼린은 그 질문에 잠깐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가 웃었다.

"글쎄요, 임무가 끝나고 따로 만난적은 없어서..."
"그런가..."
"네. 뭐, 이쪽이 힘을 쓰기는 더 좋으니까, 굳이 관계를 회복할 필요는... 없죠. 요나님이야말로, 저 때문에 오명을 쓰셨으니 한번 만나러 가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하하! 칼린, 나와 그들의 위치는 수직적 계약 관계란다. 심지어 그 충성관계 사이를 엮은 것은 사명감이나 애국심도 아닌 것이지."
그녀는 담배를 내밀었다. 칼린이 담뱃불을 붙여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최근에는 그녀가 스스로 담뱃불을 붙이는 걸 보기 힘들다. 칼린이 허리를 숙여 성냥으로 불을 붙여 주었다. 요나는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며 만족스러운 듯 눈을 조금 감았다.


"뭐,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곧 생길 임무에 대해서 미리 전달해 달라고 하려 했다만... 그래, 아직 확정난 것도 아니니까 말하는 것도 그런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의 반응을 살짝 보았다. 어떤 반응도 없었다. 칼린은 그저 무감각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칼린, 그들과 다시 마주할 게 두려운가?"
"전혀 아니죠."
"그래?"
요나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렇지, 칼린. 밤거리나 한번 돌아보겠나?"
"네? 지금 말입니까?"
'그래. 생각해보니 넌 벨카의 거리를 그렇게 제대로 본적이 없지. 이 시간대면 뭐, 나름 가장 시끌벅적   란다."
그녀는 회중시계를 닫고 칼린을 보며 웃었다.


"어쩌면 내가 너를 너무 꽁꽁 묶어 놨었을 지도 모르지. 칼린, 네가 이 세계의 여러가지를 경험해 보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저녁이고 저는..."
망설이며 두려워하면서도, 눈 뒤에는 분명히 즐거움이 보인다. 요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린의 양 어깨를 잡았다.

"너도 이 세계에  지  시간이 지났다. 네 주인이 무슨 도시를 일궈냈는지 정도는 봐도 괜찮지 않을까? 말이 길지만, 결국 너에게 도시를 자랑하고 싶을 뿐이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칼린을 껴안았다. 어떤 거부도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걸쳤다.

"가끔은 산책정도는 괜찮지. 널 그만큼 믿는단다. 칼린, 넌 나를 믿느냐?"
"...저 스스로보다 믿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 내가 하는 말이니까, 괜찮을 거다. 앞으로는 그렇게 밤풍경도 보며 산책도 나가자. 가끔은 같이 나가자. 분명 즐거울 것이다."
칼린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풀어진 얼굴을 다시 정리하고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오늘은 날이 아닌듯 싶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혼자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연습도 해야 할 테니... 참, 이렇게 말하니까 마치 애를 키우는 느낌이군."
"...믿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어라. 그렇게 큰일도 아니잖느냐."
요나는 서랍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조금 쥐어 주었다. 60생텀. 잃어버리거나 고가상품을 사지 않는 이상, 하룻밤만에 다 쓸 수 있는 돈은 아니다.


"겸사겸사,  동료들에게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너무 늦지는 말거라."
"돈까지..."
"뭘, 네 돈이나 다름없다.  따로 돈을 안 챙기니까 말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감격을 감추며 고개를 숙이는 칼린에게 요나는 손을 뻗었다. 그가 조금 어리둥절해 하자, 요나는 웃으며 셔츠를 풀었다.

"어제는 하지 않았으니까... 최대한 만전을 다 하자꾸나."
들뜬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걸까, 칼린은 홍조를 띈 얼굴을 최대한 돌리며 요나의 목에 입을 갖다 댔다.


"부대원들을 만날 거라면... 다음 소집일은 다음주가 될 것이라고 전달해 두거라."
"혜."
입을 벌리며 대답한 탓인지 숨결이 닿는다. 잠깐 그대로 붙어있던 그들은 평소처럼 조금 어색하게 떨어졌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요나님."
"그래. 즐기려무나."
요나의 셔츠 단추를 잠궈 주고, 칼린은 등을 돌렸다. 문을 나서는 칼린을 보며 요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익숙하지 않은 그 감각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되도록이면 칼린이 자신의 성에서 나가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그의 세상에 자신만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계속 그러기를 바란다면, 칼린은 온전히 완성되기도 전에  세계에 흥미를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전략을 바꾸자. 이미 칼린이 그의 동료들과 관계를 회복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안심하고, 그의 관계들을 하나씩 꺾어내고, 그에게 이 세계에서 권력자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자. 그녀의 아래에서만 가질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하자.

#


칼린은 가면을 쓰고 거리를 달렸다. 혹여 흥분해서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달릴 것을 의식하면서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요나의 말이 맞았다. 가로등이 켜진 이 시간대는 확실히 북적였다. 임무를 하나 끝낼 때마다, 밤에 나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곳이다. 시시각각 높아지는 상가들과 기운 넘치는 사람들, 점점 밤거리에 익숙해지는 조명들까지. 요즘 그에게 이런 주변 풍경을 자세히 볼 시간이 있었는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던 그는  누군가와 부딪혀 발걸음을 멈췄다. 맞은편에 넘어져 있는 것은 막 10살을 넘긴 것처럼 보이는 꼬맹이었다.


"괜찮니?"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다가, 자신이 붕대로 칭칭 감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혹여 아이가 겁을 먹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아무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곧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칼린님이세요?"
"...날 알아?"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조금 놀란 칼린은 곧  아이만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눈높이를 낮췄다.

"영웅 칼린님이시잖아요! 몇 번이나 봤어요!"
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아이를 보며, 그는 조금 당황해서 뒤늦게 후드를 눌러썼다.

"잠깐! 작게 말해!"
"지, 진짜 칼린님이세요?"
"응, 맞아! 조용히! 조용히 넘어가자!"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렇게 말했다. 주목받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우와... 악수나 해주시면 안되요?"
칼린은 자신이 유명해졌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조금 자신의 상황을 다시 파악하고 후드를 눌러쓴 그가 조용히 아이에게 손을 내밀 때였다.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마치 데인 것처럼 뒤로 넘어지며 손을 뗐다.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키며 애써 자신의 손을 다시 노려보니, 평소처럼 하얀 손이 보였다. 피같은 것은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숨을 진정시키며 그 아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이는  것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아, 아니, 네 손을 피한 게 아니란다... 그런게 아니야."
칼린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조금 다가갔다. 아이는 울기 직전의 애매한 상태를 유지하며 코를 훌쩍였다.


"지, 진짜요?"
"그럼. 정말 그런게 아냐."
"그, 그럼, 우리 아빠 잡화점에서 뭣 좀 사가실래요?"
"?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아이는 다시 울  같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칼린은 당황해서 일단  아이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에게는 60생텀이나 있는 것이다.


"그래! 그래! 가자!"


#

그는 결국 그 아이의 아비가 하는 잡화점에서 10생텀짜리 술을 세 병 사게 되었다. 주인장의 추천으로 산 것으로, 정화주(正火酒)라고 부르는 상당한 고급주라고 한다. 그는 그 술을 들고 밤거리를 걸어 다녔다. 배회하면서 뭐라도 할 것아 생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미 알고 있듯이, 그가 하고 싶은 것은 정해져 있었다.

그가 향한 곳은 모두가 있는 여관이었다. 참문으로 불이 들어오면서 문은 닫혀 있는 것을 보아하니 오늘도 그들끼리 술잔치를   같았다. 칼린은 창 밖에서 그 불빛과 자신이 들고 있는 술을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고민하던 그는 술병들을 내려놓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안에는 모두가 언젠가 봤던 풍경처럼 놀고 있었다. 그들은 바뀌질 않는 듯했다.  모든 일을 겪여도 이겨내고 있는 듯했다. 칼린도 저런 일상감이 필요했다. 그리워 사무쳤다. 그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그는, 곧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도르베가 있었다.

"카, 칼린이냐?"
오늘은 이 질문을 많이 받는 듯하다. 칼린은 그가 마주한 것이 도르베라는 것을 눈치 채자 마자 그의 손부터 바라보았다. 크기도 맞지 않은 허술한 의지가 비참하게 덜렁거리고 있었다.

"칼린이구나! 지난 임무 이후로 단 한번도   없어 걱정했다고! 와줬구나!"
그는 취한 건지 조금 볼이 붉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 취기도 잊고 칼린에게 달려들었다. 칼린도 마찬가지로 반가웠기에, 달려드는 그를 붙잡고 가면을 벗으며 웃었다.


"도르베, 다 나으신 거예요?"
"별것도 아니었다! 다들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지 모르겠다니까! 왜 밖에서 그러고 있는 거냐, 들어가자!"
"자, 잠깐, 도르베!"
그를 끌고 들어가려는 도르베를 붙잡으며 칼린이 다급하게 멈췄다.

"제가 들어가면 분위기를 망칠지도 몰라요!"
그는 도르베를 잡고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 이런 말을 하게 된 처지가 웃겨서 조금 웃었다. 도르베도 그 말에 약간 술이 깬  표정이 가셨다.

"하, 하지만..."
"도르베씨가 무사한 걸 봤으면 그걸로 됐어요. 맙소사, 걱정했어요. 별 탈 없어 보이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떨궜다. 도르베는 그런 칼린을 보다가, 곧 그에게서 떨어져 그가 내려놓았던 정화주를 들었다.


"술까지 챙겼는데 그냥 가려고?"
"아, 그건... 한 병은 영주님에게 갖다 드리고 한 병은 라드씨에게 갖다 드리려고..."
"한 병은 우리 꺼, 맞지?"
그는 듬직하게 웃으며 그 술병을 들어 올렸다.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너라면 전부 이유가 있었겠지. 난 내가 동료라고 믿은 자를 의심하지 않아."
"그건-"
"이유를 구구절절이 설명해  필요도 없다만, 안에 있는 멍청이들은  해명을 듣고 싶을지도 모르지. 칼린, 정말로 그렇게 혼자서 모두 끌어안고 갈 생각이냐?"
칼린은  말에 숨이 탁 막히는 듯했다. 동료들을 위해서는 그쪽이 편한 것을 알지만,  상황은 역시 그에게 괴로웠다.

"나와 같이 들어가자. 들어가서 오해를 풀고, 다시 떠들썩하게 놀자. 너 없이는 재미가 없거든."
도르베가 내민 손을 바라보며 칼린은 기대해 버렸다. 희망을 가져 버렸다.

"모두가 널 나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야, 한번 대화정도도 못하겠느냐?"
어쩌면 그가 환각에서나 보았던  미래가 다가올 수도 있다. 그는 다시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다시 소속감 속에서 안정적으로, 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도르베는 아직도 망설이는 칼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따라와라."
그는 도르베에게 끌려가는 형태로 술집에 다가가게 되었다. 그를 잡고 있는 것은 그의 몸이 아닌, 두려움과 망설임이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때문에 그는 도르베에게 얌전히 끌렸다. 그리고-

"얘들아! 누가 왔는지 봐라!"
술집에는, 이걸로 라드를 제외한 전원이 모이게 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칼린에게 모였다.

시끄러웠던 술집이 조용해졌다.


"아, 안녕하세요...?"
머리가 하얗게 된 칼린이 먼저 인삿말을 건냈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도르베는 칼린보다 당황했다.


"칼린이 술을 사왔다! 분위기가 왜 그래?"
도르베의 말에도 대답은 없었다. 찬물이 뿌려진 듯한 술집 안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륑게였다.


"왜 왔냐?"
"아, 저, 저는-"
칼린은 진정하려고 애써 보았다. 그는 36살의 성인 남자다. 이런 분위기를 못이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그러나 몸이 너무 떨렸다.  세계에 온 뒤로 그는 가끔 자신이 젊어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의 통제같은 것이 다시 힘들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어요."
그는 중간에 침까지 삼키며 말을 끝마쳤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여전히 술집 안은 싸늘한 분위기였다.

"다들, 칼린은 이번 임무의 일등 공신이었다. 우리 전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이야기는 들어볼 수 있지 않겠느냐?"
"이야기는 이미 다 들었지."
대답한 것은 아스타였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고. 전부 죽을 수도 있던 상황?  새끼가 처음 그 땅을 밟자 마자 뿅! 하고 말들 조져 놨으면 충족들이 쳐들어왔을까?"
"아스타씨!"
소리친 것은 핀이었다. 그는 책상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칼린씨가 그러지 않을 사람인 건 다들 아시잖아요! 왜 그렇게-"
"사람속을 어떻게 아냐, 씨발. 그냥 우리한테 그렇게 보였던 거지. 안 그래?"
릴로가 그렇게 말하며 핀의 말을 끊었다. 아스타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라드는 눈알이 짝짝이가 됐고, 도르베는 이제 손가락으로 8까지 밖에 못 세. 부상이 이정도로 끝인거지, 우리 전부 싸우면서 여러 번 죽을 뻔했어. 빌어먹을 역병까지 돌았었고 말야. 도대체 무슨 낮짝으로 여길 들어온 거냐?"
"아스타, 난 괜찮다..."
"도르베, 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냐."
다시 륑게.


"저 새끼는 영주님  세워 줄라고 우릴 고기방패로 밀어 넣었던 거라고. 미안한데, 도르베가 용서해도  나 뒤질 뻔한 것까지는 용서 못하거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볼 꼴 못 볼 꼴  봤던 걸 생각하면 속이 꼬여."
륑게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자신의 옛 친구가 산채로 해체당하는 것도 봐야 했었다.

"다들 칼린 때문에  붙이고 있는 건데, 뻔뻔하기 그지없네. 애초에 누구 죽을 상황은 안 만들려고 했다는  알잖아?"
이리하.


"염병. 그래서 누구 한  진짜 뒤져 버리기 전까지  참고 있었냐? 지 혼자 고상한 척은 다하더니 제일 계산적인 새끼였네?"
릴로.

"얘들아, 너무 흥분하지 말고 일단 좀 진정하면서..."
소니아.

"진정은 까 잡수고, 저 새끼 우리가 시체 잡으러 다닐 때에는 전화기 들고 온갖 청승은  부렸었잖아. 그런거 생각하면 화도 안 나냐?"
륑게.

"그 시체를 부리던 놈은 칼린이 직접 죽였었지.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건데? 칼린이 너네들 똥 전부 안 닦아준 거?"
다시 이리하.


"진정 좀 하세요! 이리하씨도 말이 너무 심해요!"
핀.


좋았던 술자리의 분위기가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격해지기 시작한 말들이 오고 갔다. 당황한 도르베가 뭐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칼린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만!"
그리고 소리쳤다. 그 말에 다시 술집이 조용해졌다.


"그만..."
그는 말 끝을 늘이며 숨을 다잡았다. 아직 너무 일렀다. 시기상조였다. 너무 생각없이 달려들었다. 그들의 분노가 합당한 것임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드려던게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칼린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있는 도르베에게서 정화주를 돌려받았다.

"술만 두고 나갈게요. 전해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는 힘들게 호흡을 유지하며 최대한 평정을 가장했다.


"바로 다음주에 소집이 있을 예정입니다. 평소 모이던 곳으로 모이시면 됩니다. 라드씨에게는 제가 직접 전달할 예정입니다. 그걸 전하러  거예요."
그는 오만했다. 어떤 이유가 있었든, 다른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참가하던 전쟁에서 그는 힘을 아꼈다. 동물을 조종하는 능력같은 것이 아니다. 진심을 냈더라면, 첫날 밤에 모든 것을 끝냈을 수도 있었다.


"싸우지 마세요. 바로 나가겠습니다."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어떤 순간에도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보험이 있었으니까 그는 남들보다 상냥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 뿐이었다. 애초에 서있는 위치가 달랐으니 보일 수 있었던 위선이었다. 실제로 조금만 더 극한 상황에 대면하자 그는 망설임없이 사람을 죽여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말하고 다녔던 것, 그가 지금까지 민폐를 보였던 것, 그런 것들을 다시 회상해 보자면 스스로도 역겨웠다.



"죄송합니다."
그는 가면을 다시 썼다. 도르베는 그를 잡으려 했지만, 뻗은 손이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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