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숙청회(肅淸會)
영주의 종자란 보통 상당한 천재들이 자리잡게 된다. 대외로 보이고 다녀야 하니 겉모습이 단정하고 볼 만해야 하며, 기본적으로 어떤 상황이든 빠르게 파악하기 위한 순발력과 지능, 그리고 폭넓은 배경지식 등이 필요하다.
전투실력은 말할 것도 아니다. 모든 병력들이 쓰러졌을 때 최후까지 영주의 곁을 지키도록 명령받은 것이 그들의 종자이다. 요컨데, 모든 면에서 흠잡을 수 없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뒤낭은 다른 8영주의 종자들에 비해 조금 부족해 보였다. 그의 외모는 평범했고,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특출 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전투 실력은 영주의 종자를 하기에 충분했으나, 앞에 말한 점들을 전부 무시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의 특출난 점은 집념이었다. 그는 그의 부족한 모든 것을 집념으로 매꿨다. 다른 자들의 네 배, 다섯 배를 노력하여 밤낮을 지새우고 노력했다. 모든 것은 그가 차기 영주 후보를 봤을 때 시작된 것이었다.
요컨데, 첫눈에 반했다는 것이었다.
"영주님, 영주님!"
그는 회랑을 달리며 소리쳤다. 계속 흔들리는 바닥은 그를 몇 번이고 넘어지게 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출 수 없었기에, 중간부터는 거의 네발로 달리듯 뛰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진동이 멈췄을 때, 그는 너무 늦지 않았기를 빌면서 달렸다. 그의 시야 끝에 보이는 것은 얼굴이 터진 상태로 벨카 영주의 종자에게 짐짝 마냥 걸쳐져 있는 자신의 영주였다.
"내려놔...!"
그의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그는 창을 제대로 잡고서 상대를 갈아 마실 듯 쳐다보았다.
"영주님을 내려놔!"
이성을 잃은 돌격. 칼린은 너무 가볍게 그 공격을 돌려 막았다. 그는 싸울 생각조차 없는 듯 창 째로 넘어진 뒤낭을 발로 밀어냈다.
"씹새끼가...!"
그는 다시 무기를 잡고 일어나려 했으나, 칼린이 창 날을 밟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아직 미쉘을 들고 있었다.
"놓으라고 했잖아!"
창까지 놓고 덤벼드는 그를 칼린은 여전한 무표정으로 대응했다. 뻗은 그의 팔을 잡고 기묘하게 돌리는 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팔은 꺾인 채로 붙잡혀 있었다.
"진정하세요. 상황은 끝났어요."
"놔! 씨발! 놓으라고!"
발버둥 쳐보지만 헛수고였다. 그가 난리를 피울 수록 잡힌 팔이 점점 꺾여 올려졌다.
"이건 안될 일이야! 억울한 일이야!"
절규를 섞어서 소리치는 그를 바라보며, 칼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얌전해 지기를 기다리며 팔을 붙잡고 있을 때였다.
"그쯤 해 둬라."
요나의 목소리였다. 그녀와 영주들이 전부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왕의 병사들도 몰려 있었다.
"네 영주는 국가의 배신자다. 인정하고 물러나거라. 네 충정은 전해졌다."
망연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뒤낭은 허탈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력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 불 꺼진 눈으로 그는 생각했다. 가장 최선의 수를 필사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부족한 머리로는 어떤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저자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락으로 빠트리는 자들. 그의 영주는 부끄러움의 기준은 남달랐으나, 결코 자신에게 부끄러울 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그의 영주의 모습을 닮고자 했었다.
여기서 도망치는 것, 그건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 되리라.
"이이이이악!!"
기괴한 기합과 함께, 그는 잡혀 있는 팔이 쥐어 뜯길 기세로 앞으로 튀어 갔다. 그리고 반동으로 몸이 기운 칼린의 배를 차냈다.
그는 그대로 몸을 굴렸다. 그리고 왼팔로 창을 들었다. 오른팔은 방금 전 무리한 반동으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뜨아아아!"
그는 맞지도 않는 왼팔로 창을 잡고 그저 악바리로 달려갔다. 눈앞의 요녀, 요나만 잡으면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문제는 요나의 무력이 8영주의 종자들의 평균수준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이었다.
요나는 검조차 들지 않고 그저 달려오는 뒤낭의 머리를 걷어 찼다. 그의 몸이 칼린의 앞까지 다시 날아갔다. 맥없이 쓰러진 그는 부러진 턱을 잡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눈 앞에 미쉘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넝마가 된 몸을 끌고 미쉘의 앞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창을 놓지 않고 독기를 품은 눈으로 모두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절대 못데려가... 절대로...!"
집념으로 불타는 그 눈은 훈련 받지 않은 자들의 전의까지는 완전히 부셔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은 윌레인 최고급의 영주들과 그들의 종자들, 최강급의 영국병사들, 그리고 요나와 칼린이었다.
"칼린."
칼린은 그저 허무한듯 그 종자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요나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를 죽여라."
그는 다시 뒤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 상처가 가득한 상태로 창을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죽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고 있었다.
"죽여봐, 이 씨발..."
이젠 창에 거의 기대고 있는 그가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영주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 현장만 벗어나면. 어쨌든 이 순간만 넘기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 5인의 협의자의 이름을 먼저 말하면 살 수 있다.
"죽여 보라고!"
"칼린. 영주를 향해 무기를 돌렸다. 그것 만으로 사유는 충분하다."
양측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말들. 칼린은 이 회랑에서는 말이 너무 울린다고 생각한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으며 그는 마지막으로 제안한다.
"제발... 거기에서 비켜요. 다 끝났다구요."
"하나도 안 끝났어! 난 안 죽을 꺼야!"
아, 시끄럽다. 너무 울린다.
"하나도 안 끝났다고! 죽여! 내가 살아있는 동안 영주님은 못 데려가!"
"칼린!"
"죽여!"
"죽여라!"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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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멈췄다. 칼린의 검도 멈춰섰다. 단 한번의 궤도를 따라, 뒤낭의 목이 잘려 나갔다. 몇 번 회랑 밖으로 구른 그것은, 곧 흐른 피에 흙이 엉겨 붙어 더러운 꼴이 되었다.
칼린은 자신의 얼굴까지 튄 피를 조금 햝아 보았다. 따뜻하고 맛있다. 맛있다. 맛있구나.
목이 달아난 그 시체는 미쉘의 위를 덮어주듯 쓰러졌다. 그 모습을 조금 지켜보던 칼린은 발로 뒤낭의 시체를 차내고 미쉘의 다리를 잡아 끌었다. 그녀가 끌려가는 길로 뒤낭의 피가 선명한 붉은 자국을 남겼다. 흰색 회랑 바닥에서는 지나치게 눈에 띄는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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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을 눌렀으나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라드는 혹시 뭔가를 잘못했나 싶어 그 버튼을 몇번 더 눌러 보았다.
지진이 멎었다. 아마 이 방으로 종자들이 곧 찾아 들어오리라. 그는 책상 아래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책장 하나가 옆으로 밀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 확인으로 그는 버튼을 다시 눌러 보았다. 긁히는 소리와 함께 책장이 다시 원위치로 들어갔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그냥 기믹 같은 게 아니다.
그는 버튼을 누르고 열린 책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 뒤에는 작은 황색 상자가 있었다.
"저런... 보안은 이중으로 하셔야죠, 영주님."
라드는 그렇게 혼잣말하며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의 내용물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건-"
시시해서 깜짝 놀라 버렸다. 안에 있던 것은 작은 화장품 케이스였다. 약간의 실망감과 함께 탈진감을 느끼며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안에 있는 것이 결코 화장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그 화장품 케이스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깜짝 놀라 버렸다.
"맙소사."
안에는 피 묻은 휴지와 함께 이빨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머리가 지끈할 정도로 진하게 올라오는 오래된 피 냄새. 라드는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삼키고 그걸 다시 봤다. 아무리 봐도 진짜 이빨이었다.
"미친년..."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그 안에 있던 이빨을 하나 꺼내 보았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요나는 이빨과 피 묻은 휴지를 가보인 것 마냥 숨겨 놓았나.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빨?
그는 다시 한번 내용물을 봤다. 이빨들이다. 전부 송곳니이다. 크기까지 전부 똑같은 것이다. 몇개 깨진 것은 있었지만, 전부다 완벽하게 같은 형태와 크기를 가진 송곳니들이었다. 그는 이빨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지만, 일을 하다 보면 생니를 뽑아보는 일은 종종 있었다. 한 사람에게서 같은 부분의 이빨을 두개 뽑아도 이 정도로 일관적인 형태로 나오지는 않는다.
게다가 전부 송곳니이다. 동물의 것으로 치기에는 너무 작고 인간의 것으로 치기에는 너무 뾰족하다. 마치 짐승의 것을 사람에게 맞게 줄인 형태 같다.
그 화장케이스의 내용물은 라드가 인생에서 봐온 것 중 가장 기묘한 것이었다. 그래도 적어도 영주가 이걸 왜 숨겼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는 깨진 이빨 조각 하나를 챙겼다. 이게 진짜인지부터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다시 책장을 닫은 후, 그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창 밖에 아직 늘어져 있는 칼린의 방과 연결된 밧줄에 자신의 밧줄을 묶었다. 다시 외벽을 타고 칼린의 방으로 들어간 그는, 침대 다리에 연결된 밧줄을 풀어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유유히 칼린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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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췄나."
이리하는 상황이 진정되었음을 확인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 끝났어요. 일어나요."
"따흐흐... 실바스타 라문...!"
마부는 아직도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이름을 갖고 있던 그의 말을 애도 중이었다. 그 순간에 말하는 것도 미묘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이리하는 이 곳을 빨리 떠야 했다.
"저, 죄송하지만-"
"죄송하지만 뭐!"
"혹시 다른 마부를 연결시켜 주실 수는 없을까요?"
마부는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리하가 급하게 추가조건을 덧붙였다.
"먼저 드렸던 돈은 안 돌려주셔도 되니까, 그 조건으로."
마부는 그 말에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나 할 대답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아가씨, 미안하지만 이대로면 적어도 일주일은 마차들이 움직이지 않을 꺼야. 언제 또 여진(餘震)이 일어날 지 누가 알겠어?"
그건 곤란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출입 통제가 시작될 것이다. 마차가 안된다면 걸어서 노숙을 해서라도 일단 비나흐를 벗어나야 했다.
"하, 씨발..."
이리하는 그녀의 은발을 한번 쓸어 넘겼다. 그래, 이렇게 뭔가 펑펑 터진 순간에 미망인은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당연히 용의자 취급을 받게 될 것이고, 운이 나쁘면 상황을 빠르게 끝내기 위해 적당한 재판도 없이 형이 집행될 수도 있다. 진짜 그녀가 범인이니 할말은 없지만.
마부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애초에 열차를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승차장이니, 열차니, 언제 터질지 모를 것 같은 것들이 현대기술이라며 떠받들어지는 것이 불만이었다. 애초에 달리면서 터지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안 터질 리 없는 것이다. 그는 이 폭발이 폭탄으로 인해 이뤄진 것 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전제가 깔려 있었기에, 마부는 이리하가 지금 급하게 나가려는 이유가 미망인이 지진을 불렀다 느니, 재앙을 불렀다 느니, 그런 개소리에 휩쓸리는 것이 두려워 그러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까지 간다고 하셨지? 로가?"
"아. 네."
"로가 근처면... 하다트에 내 친척이 있어. 말을 한 필 빌려 줄테니까, 그걸 타고 하다트의 내 친척에게 돌려줘. 이름은 퀼비야."
"네? 진짜요?"
"그래. 아가씨가 살려 준거나 다름없는 목숨이니까. 라문은 죽었지만... 그래, 고마우면 라문의 장례식에나 와줘."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뭐, 부조금만 줘도 되고."
이리하는 웃으며 그에게 100생텀을 꺼냈다. 부조금 치고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아가씨... 라문은 분명 좋은 데로 갈게야..."
그는 그 돈에 감동했는지 눈을 감고 팔을 벌렸다. 이리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같이 팔을 벌렸다. 그리고 서로 짧은 허그를 했다.
"걱정하지 말라구. 미망인이 살기 얼마나 힘든 지는 알아. 자네를 봤다는 사실은 위병들에게 비밀로 할 게. 뭐 나쁜 짓은 안 했지?"
"...감사합니다."
이리하는 그 말을 듣고서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다시 소매속에 집어넣었다. 그가 먼저 말해줘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직접 제안해서 수락하는 방식이 되면 신빙성이 없어지니까.
"그러면, 내 친척한테 안부나 전해줘. 비나흐에서 픽투가 보내서 왔다고 하고. 친척 이름은 노라야."
"네? 퀼비는?"
"? 당연히 말이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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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미쉘은 위병들에게 끌려갔고..."
회의의 의장인 허버트가 그렇게 운을 띄웠다.
"지금 이 자리에는 대도시의 영주가 7명밖에 남지 않았군."
8인의 영주. 윌레인 초대 왕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 8인에게서 딴 숫자. 그들에게는 그 8이라는 숫자조차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제를 진행하기 힘들겠지만, 뭐 솔직히 타이밍이 좋았군. 이번 의제는 지금 이야기하기 딱 좋은 것이다."
그는 웃으며 요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얼굴에 피가 튀어 있는 칼린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난 새로운 8영주로서 벨카의 영주, 구국영웅 요나를 추천한다.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겠지. 원래는 내가 그녀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한 것이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반박하는 자는 없었다. 요나는 미소 지으며, 미쉘이 앉아 있던 의자를 잡아 끌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으며 속주머니에서 칼린의 담배를 꺼냈다. 최고의 순간에는 언제나 최고의 것을 피워야 한다.
"원탁에 참가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남은 분들은 감히 윌레인의 정의에 반하는 자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녀가 담배를 물었다. 칼린은 허리를 숙여 성냥을 꺼내 그녀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뿜어져 나오는 연기속에서, 요나는 담배향과 함께 다른 귀족들의 표정까지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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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라티아의 영주, 미로코는 그닥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모두가 손도 못쓰고 요녀의 계략에 당했다. 그것도 그것이었지만,.
"흐음...."
그녀의 종자, 니노가 계속 묘한 콧소리를 내며 성가시게 하고 있어서였다. 미로코는 그런 그녀를 필사적으로 무시하며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자 잠깐 조용해지는 듯싶더니
"흐으으으으음....."
이제는 아예 고개를 들이밀며 노골적으로 귀찮게 하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반응을 해 버렸다.
"...니노, 화장실은 이미 지나갔다."
"예? 아아! 들렸구나! 신경 쓰시게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고민하는 소리가 들렸구나! 이야! 죄송합니다! 진~짜 귀찮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녀는 조금 찰랑이는 단발을 휘저어 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런 점이 귀찮다고 생각하며, 미로코는 머리를 붙잡았다.
"하, 어디 보자. 회의장에서 일어난 일이 이해가 안 갔던거지?"
"와! 영주님은 진짜 똑똑하시네요! 그걸 어떻게 아셨을까?"
"난 천재니까 말이다. 원래 종자에게 해 줄 이야기는 아니다만..."
그녀는 잠깐 턱을 괴고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날뛰던 미쉘의 종자놈처럼 네가 상황을 못 읽고 일을 터트릴 것이 무섭구나. 나중에 있을 일을 위해 일단은 알려주마."
"오홍홍 좋아영-!"
방정맞게 기뻐하는 니노를 두고 미로코는 어디에서 부터 말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먼저, 요나와 소금부대를 그 자리에서 처분하자고 했던 다섯 영주는 기억나느냐?"
"음... 조닐의 영주님, 사갈의 영주님, 비나흐의 영주님, 네르바의 영주님, 데버만의 영주님으로 다섯이었죠?"
"맞지. 8인중 5명이 거기에 찬성한 이상, 요나를 충족과의 전투에서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확정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병력을 보내지 않았던 거잖아요?"
"그래. 미쉘은 미련하게 병력을 보내기는 했었지만... 뭐, 그녀도 형식만 맞춰 두려 했을 뿐이다. 바로 돌려보낸 걸 보면 말이야. 문제는 요나가 살아 돌아온 것, 그것도 이기고 돌아온 것이었지."
"흠, 확실히 도망쳐서 살아남은 것도 아니고 이겨서 돌아왔다면, 아무도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고 폐하에게 직통 보고도 가능해지니까요..."
"그래서 그녀가 살아 돌아온 순간, 그녀에게 뒤늦게 병력을 보낸 네르바의 영주를 제외한 자들은 전부 도마위에 올랐던 거다."
미로코는 작은 힙플라스크를 속주머니에서 꺼냈다. 안에는 40도짜리 술이 들어 있었다.
"허버트, 그 기생 오라비 말대로, 요나가 이 회의장으로 온 걸 결심한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두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8인중 5인이 국가 중대 사항을 걸고 음모를 펼친것을 인정해서 국가를 휘청이게 만들 것인지, 적당한 희생자를 골라내서 잘라낼지 말야."
"흠... 그러니까 이유나 방법은 어찌되었든, 그 자리에서는 요나가 지목하는 자가 반역자가 되는 거였군요."
"...니노."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서 입을 닦아냈다.
"이제는 그녀에게도 똑바로 존칭을 붙여라. 그녀도 나와 같은 위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녀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니노는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요."
"...됐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요나를 버리는 것을 찬성했던 자들은 뭐, 요나가 한 명만 골라 준다면 자신만 아니면 좋았을 것이고, 반대하는 자들도 굳이 반박하지 않지. 한번에 8귀족의 과반수 이상이 숙청된다? 전쟁 직후에? 국가 존망이 걸린 문제로 이어진다."
그 말을 듣고 니노는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 것들이 있었다.
"그치만 지목만 하면 되는 거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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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거창한 설명들을 붙여가며 굳이 바나루크의 영주님을 지목한 거예요?"
허버트의 종자, 샤오란이 그의 상의 끝자락을 당기며 질문했다. 허버트는 자신의 종자를 내려다 보았다. 목에 단 깁스가 조금 우습게 보여서 그는 그도 모르게 조금 웃어 버렸다.
"웃어서 미안하다. 목 깁스도 잘 어울리는구나. 하하... 그래. 넌 부상을 입어서 나와 요나의 계약 현장에 오지 못했었지."
허버트는 조금 속도를 늦춰 그녀의 옆으로 간 뒤 그녀의 정수리 위에 팔을 얹었다. 양 옆으로 땋아 올린 머리의 한 가운데는 손을 얹기에는 제격이었다.
"어디 보자... 그렇지, 먼저 나와 그녀가 했던 거래에 대해 설명해 주마."
얌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신의 종자를 보며, 그녀에게 걸쳐져 있는 목깁스를 보며, 허버트는 그 날 느꼈던 감각을 천천히 되새기면서 말했다.
"그녀의 제안은 그랬다. 자신을 버리기로 한 자들의 명단을 요구했고, 내가 그녀의 추천인이 되어주기를 바랬지. 이 순간 난 그녀가 자신의 반대파 5인을 전부 숙청할 생각은 없음을 눈치챘다. 5인이 한꺼번에 사라지면 8영주고 뭐고 자리에 의미가 없어지니까 말야. 그래서 그 제안을 수락했지."
"아하."
"그리고 이 조건들을 받아들일 경우 내가 얻을 이익은, 충족과의 책봉/조공관계로 이뤄질 모든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영지 그 자체였지. 그리고 나를 8영주중 유일하게 군사를 보냈던 자로서 인정하는 것. 그렇게 두가지였다."
샤오란은 그 말을 듣고서 조금 생각해 보다가 다시 허버트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제 질문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예요?"
"상관이 있지. 샤오란, 8영주란 위급상황시 왕명보다도 빠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이다. 아무리 내가 불리한 자리라고는 해도, 능력이 확정되지 않은 일개 풋내기가 8영주가 되고 싶다고 했다면, 가진 병력을 전부 동원해서라도 그 자리의 생존자를 전부 죽여 없애서 일을 묻었을 것이다."
확실히, 충족을 제압하기 위해 보냈던 그 병력들로 그 영지의 모든 생존자를 죽여 없애는 것도 방법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 일 것 같아?"
"왜죠?"
"요나, 그 여자는 임무 시작 전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어. 이미 그녀를 없애려는 계획의 주동자를 눈치채고 있었어."
"...아이델님이 주동자인걸 알고 있었다구요?"
아이델. 무역도시 데버만의 영주이자, 지난 8영주 회의의 의장이었던 자이다.
"그래. 그런데도 그녀는 그를 숙청할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를 묻기 위한 준비를 끝냈으니, 안심하고 자신을 따라 달라고 했어."
회랑의 끝에 그들의 마차가 보인다.
"난 8영주의 추천인이 되는 것은 그녀의 능력을 보고 판단할 일이라고 했지. 그리고 그녀는 그 장황한 가짜들을 말하며 미쉘을 고른 거다. 그녀는 애초에 미쉘을 묻을 준비를 하고 있던 거야. 난 그녀가 얼마나 '명분'을 잘 만들어 내는지 심사했던 것이고..."
샤오란이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같이 따라 들어가며 질문했다.
"...왜 미쉘이었죠? 한 명 골라 떨구고 들어간다면 당연히 그녀의 반대파 중에서 한 명 고르는 게 좋은 거 아닌가요? 오히려 형식상으로라도 병력을 보낸 미쉘이 요나님의 아군에 가장 가까운 위치였을 텐데..."
허버트는 창 밖을 바라보며 턱을 굈다.
"알 턱이 있겠니. 사적인 원한이라도 가지고 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