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1화 〉숙청회(肅淸會) (91/164)



〈 91화 〉숙청회(肅淸會)

원탁에서는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손이 꿰뚫린 종자조차 그 신음을 억누르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지금 이 자리에서 함부로 소리를 낼  없었다.


네르바의 영주는 웃음짓고 있었다. 요나의 종자가 자신에게 다가왔었을 때의 그 압박감. 저들은 지금 그 압박감의 반이라도 느끼고 있을까. 그는 눈을 감고 침묵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은 네르바뿐이 아니었다. 요나는 자신이 이 공간을 장악한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미쉘의 태도였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썩어도 대국의 한기둥을 차지할 영웅의 기개라는 것일까. 그녀가 그녀의 종자만큼 혼란스러워 하고 절망하길 바랬다.


그러나 그건 어찌되든 상관없다. 요나는 미소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


"제 의견에 아무도 이의가 없다면, 지금부터 그녀를 체포하겠습니다. 곧바로 국왕전하님에게 상황보고를 하고 신원을 인도할 예정입니다. 부디 저항하지 말아 주십시요."
이게 중요했다.  자리에서 끝내서는 안된다. 그녀를 왕의 어전까지 데리고 가는 일,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원탁의 가운데에는 긴급한 순간에 왕의 병력들을 부를  있는 단방향 호출기가 있다. 요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칼린, 그녀를 구속해라."
순조롭다. 순조롭다. 그녀는 호출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미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칼린이 움직이지 않았다.

"칼린?"
요나는 약간 당황해 그녀의 종자를 바라보았다. 칼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검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정신이 다른 어딘가에 팔린 것은 그 자리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의 동공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요나의 앞으로 날아가듯 달리며 소리쳤다.
"전부 숙이세요!"


#

라드는 천천히 칼린의 방을 둘러봤었다.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창가였다. 그는 창문을 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말이 안되는데..."
그가 '꼭 챙겨야 할 것'은 분명 그의 방 안에 있었겠지. 들키면 평생 누군가를 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물건이니 꼭꼭 숨겨 놨을 것이다. 그럼 그 물건이 그의 방에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리쿠르트를 구하기 전에 무조건 자신의 방을 먼저 거쳤을 것이다.


그러나  성은 외부 창틀이 없었다. 리쿠르트의  위치는 모르지만, 척 봐도 외부 창틀을 통해 어딘가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니 칼린이 자신의 방 문을 통하지 않고서 그녀를 구출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칼린이 들어왔을 당시 그녀가 어디에 있었든지 간에.

그러나 그는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근위병들은 그를 보지 못했다. 애초에 리쿠르트가 그 순간에 자신의 방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좀 빡쎄네..."
라드는 웃으며 창틀 밖으로 빼낸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창틀 그 자체에 눈이 갔다. 거기에는 뭔가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건?'
자세히 보니 그건 자국같은 것이 아니었다. 원뿔모양으로 파인 듯한 모양새. 그런 것이 일정 간격으로 네 개가 있었다.


라드는 그 형태를 잘 안다. 고문을 조금만 해봤다면 알 수 있다.


"말도 안돼..."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보았다가, 그대로 손을 반 바퀴 돌려 창 밖에서 손을 걸치는 듯한 자세를 해 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 자국에 맞춰 걸어 보았다.

어색하긴 해도 딱 들어 맞았다.

그는 튕겨 나가듯 자국에서 손을 뗐다. 여기서 가설이 하나 더 생기게 된다.

'칼린은 정문 같은 데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 외벽을 기어올라  것이다.'
이게 영주가 숨기던 것과 관련이 있을까. 불현듯 그의 머리속에서 또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주가 처음부터  방안에 있었다면 기어올라온 칼린과 마주쳤을 것이다.'
니미좆, 이런 걸 바로 생각할 수 있을  없다. 라드는 터져 나오는 웃음에 입을 가렸다.


칼린이 숨기던 것은 어쩌면 영주의 방에 있을지도 모른다.


영주실의 위치는 알고 있다. 그는 칼린의 침대 다리에 올가미를 묶었다. 그리고 창 밖을 통해 몸을 던졌다. 밧줄의 팽팽함을 유지하며 몇 번 외벽을 타며 내부를 살펴본 그는, 곧 영주의 방을 발견했다. 시종이 창문을 잠구는 것을 깜빡한 것인지 쉽게  수 있었다. 여러가지로 라드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영주의 방에 들어가 밧줄을 잘라 냈다. 저 밧줄은 나갈  회수하면 된다.

"어디 보자..."
영주의 방은 살풍경했다. 물건이 애초에 많이 없어 무엇인가 숨길 장소는 많이 없어 보였다. 아니, 숨길 장소만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방 안에 사람 사는 흔적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약간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걸 느낄 여유가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영주의 방에 있는 것을 발각 당하면 바로 끝이다.

30분 정도를 뒤져 봤을까, 아무리 찾아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방이었다. 심지어 서랍장까지 텅 비어있었다.  이상 찾을 곳이 없는 방이기도 했다. 자신의 지휘관은 생각보다도 훨씬 공허한 자였다.

"하, 씨발."
아무리 그라도 조금 실망했기에, 그는 무너지듯 자리에 앉아 버렸다. 담배라도 한 대 필까 고민이 드는 때였다.


무거운 울림이 들려왔다. 미묘한 파장. 아직은 약하지만, 확실한 진동.


"뭐야-"

#


"전원이 복귀했군."
피로만은 그렇게 말하고서 시계를 보았다.

"2분 후면 첫 폭탄이 터질 예정이다. 돌아가자."
"네."
 짧은 말이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흩어졌다. 몰려다닐 필요는 없었다. 교단은 애초에 따로 활동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이리하는 마차를 잡기 위해 광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은발을 향해 모이는 시선들. 그녀는 그게 귀찮았지만, 굳이 후드를 눌러쓰지는 않았다. 곧 그녀는 마부들의 여관에 도착했다. 그리고 느긋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마부를 향해 말을 걸었다.

"혼자입니다. 로가까지 가고 싶어요."
그 마부는 술에서 입을 떼고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았다.


"12생텀."
평균 요금에 두배는 올려 친 가격. 이리하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러나 미망인을 마차에 태워준 다는 것부터, 그에게는 미망인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것을   있었다. 그저 요금을 올려 칠 순간을 잘 알고 있을 뿐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냈다. 총 20생텀이었다.

"잔돈은 가지시죠."
마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피고서 자신이 들고 있던 술병을 그녀에게 건냈다.

"마시겠소? 올가에서 나온 새로운 술인데, 끝 맛이 아주 미치거든."
"괜찮습니다."
"히히, 당신 손해요. 가자, 실바스타! 귀빈이시다!"
자신의 말에게 신나게 말을 걸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리하는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코트 깃을 내리고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마차에 올라타려고 할 때, 그녀는 약한 진동을 느꼈다.

"어라, 너무 많이 마셨나..."
바닥이 떨리고 있는 듯한 느낌, 공기가 무거운 느낌.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씹-"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큰 진동이 시작되었다. 당황한 마부를 말에서 끌어내리며, 이리하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지진이다!"

#

갑작스럽게 퍼지는 진동에 모두가 당황했다. 다행인 것은 원탁이 아주 넓다는 것이었다.

"전원! 원탁 아래로 들어가세요! 지금!"
아수라장 속에서 칼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요나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영주님! 지금입니다!"
"부탁한다!"
가만히 있던 미쉘은 그 지진과 동시에 의자에서 튕겨 나듯 일어나 등을 돌렸다. 바로 추적하려는 요나를, 칼린이 눌러 막았다.

"놔라! 지금 잡지 않으면 선수를 빼앗긴다!"
"위험해요!"
칼린은 요나를 원탁의 안쪽으로 밀어 넣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잡아오겠습니다!"
"어림도 없지, 씨발!"
흔들리는  안에서, 미쉘의 종자는 창을 고쳐 쥐고 그녀가 도망친 문 앞에 섰다.

"우리 영주님은 분명 병력을 보냈어! 모두의 협의안에도 반대표를 던지셨던 분이었다!"
흔들리는 바닥에서도 그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정도의 실력은 있는 자 같았다.

'더러운 새끼들, 아무도 이 문밖으로 못 나가! 우리 영주님이 먼저 왕에게 협의자들의 명단을 말하면 이 지랄도 끝이야!"
그는 침착함을 잃고 망언을 뱉기 시작했다. 칼린은 요나를 원탁 더 깊숙한 곳까지 위치시키고서 원탁에서 나왔다.

"우리 영주님은 너네처럼 이익을 위해 긍지를 버리지는-"
그리고 계속해서 소리치는 그 종자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종자는 좁은 문의 정면을 창으로 완전히 견제 중이었다.

"말 좀 들어, 개새끼야! 미쉘의 종자, 뒤낭이다!"
칼린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먼저 원탁을 밟고, 그가 휘두른 창을 즈려 밟았다.

"무슨-"
그리고 그의 창이 완전히 떨어지기도 전에, 그걸 발판삼아 그의 머리 위로 점프했다. 그리고 좁은 문의 천장 쪽부터 발을 디디며 다시 땅에 발을 댔다. 말도 안되는 움직임이었다.

"실례!"
칼린은 그 말을 남기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낭은 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때마침 강하게 울린 진동에 무릎을 꿇었다.


"기다려, 씨발련아!"
그는 창으로 천장에서 조금 떨어져 나간 파편을 베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점점 강해지는 진동이 그를 방해했다. 그는  진동속에서도 똑바로 달리는 칼린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필사적으로 창을 받침대 삼아 일어났다. 그리고 기어가듯 움직였다.

#

"씨발, 씨발!"
라드는 드물게도 평정을 잃었다. 갑작스러운 지진에 몸이 무너진 그는 네발로 바닥을 기며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영주의 책상이었다. 그는 몸을 굴리며 책상으로 다가가 그 아래에 숨었다. 몸을 웅크리고 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안 좋다.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 최악이다. 지진이 끝나면 시종들이 이 방에 들어올 수도 있다.


"개 씨팔, 운수가 좋더라니...!"
그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어떤 식으로든 빠질 구멍을 찾아내려 했다. 바로 도망쳐서도 안된다. 그랬다가는 칼린의 방에 걸린 밧줄을 두고 나가야 한다.

"어웈!"
그는 잠깐 머리를 들어 올렸다가, 흔들림에 책상의 뾰족한 부분에 머리를 박았다. 얼얼한 뒷통수를 잡고서 그는 욕설을 뱉었다.


"지미-"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이 책상 아래임이 떠올랐다. 책상 아래에 뾰족한 부분이 보통 있을 리 없다. 그는 자신이 머리 박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버튼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다.


"허허, 씨팔..."
운수가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계 탔다. 라드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

"뭐, 머머머머 뭐야!"
"숙여!"
이리하는 자신에게 달라붙는 마부의 머리를 눌렀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약 진도 5의 지진. 일단 어딘가 안전한 버팀목을 찾아야 했다.

"사, 살려줘!"
"떨어져!"
이리하는 마부를 조금 밀어낸  안전해 보이는 곳을 찾았다. 여관 바깥쪽의 테이블이었다. 그녀는 마부의 멱을 쥐고 그를 질질 끌 듯 테이블 아래로 데려갔다.

"안돼! 라문!"
"실바스타 아니었어?"
"그건 저 아이 성이었다고! 젠장!"
그는 눈물을 흘리며 테이블 아래에서 자신의 말이 날뛰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히 무너질 것이 없는 곳이었지만, 이제 저 말의 미래는 아무도  수 없다. 결국 몇  요동치던 말은 고삐에 걸리고 넘어졌다.

"아이고, 씨팔! 장사 공쳤네!"
"조용!"
옆에서 계속 소란스러운 마부를 두고 이리하는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진 자체는 별로 심하지 않았지만-


"저, 저건 뭐야?"
그래, 저게 문제다. 그녀는 마부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광장 끝 쪽에서, 정거장 바깥으로 탈선하며 밀려 나오는 열차가 보였다.


"이 씨발..."
열차는 탈선한 방향 그대로 속도를 낮추지 않았다. 그것이 향하고 있는 장소는 비나흐의 전화국 방향이었다. 시설 안에 있던 자들은 지진의 진동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다행이도 열차는 거기에 갖다 박을  있는 속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동력원이 끊어져 점점 속도를 잃고 있던 열차였다. 천천히 멈추던 열차는, 결국 아주 느리게 움직이다가 전화국 외벽에 톡 박고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시설을 나온 자들은 거기에 안심할 틈도 없이 주변 어딘가의 숨을 곳을 찾아다니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곧 열차에 남아있던 자들도 창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대체적으로 살찐 그들은 창에 끼고 서로 깔리며 상당한 대혼란이 생기고 있었다.


"끄, 끝난건가?"
마부의 말에 이리하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마부는 그런 이리하를 두고 아직 멀쩡한 자신의 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라문! 괜찮아! 그냥 거기 가만히만 있어! 위험한 거 끝이야!"
그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신의 말을 향해 웃음을 보냈다. 말도 안심했는지 고개를 떨구고 그냥 진동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아직 안 끝난 것 같-"
이리하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의 사이로 들려오는 폭음. 그건 시간차를 두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건 뭐-"
마부는 말할 틈도 없이 다음 폭음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연기가 뿜어 올라오는 것은 기차의 정류장 방향이었다. 그리고-

기차가 폭발했다. 도망쳐 나오던 자들, 창에 끼어 나오지 못하던 자들, 서로 밟고 밟히며 엉켜 있던 자들, 기차 안에서 몸을 숙이던 자들, 전화국으로 다시 들어갔던 자들. 전부 폭발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몸 더 숙여요!"
마부는 이리하의 말을 따라 바닥에 몸을  바짝 붙였다. 곧 전화국이 바싹 타버린 열차 위로 무너졌다. 여기 저기에 무너진 열차와 터져버린 사람들의 파편들이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라문! 우린 살았어! 맙소사, 저쪽으로 안가서 다행이다!"
마부는  와중에 기쁘게 말했다. 전화국 근처에도 마부전용 여관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듯 그의 말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곧 지진의 진동으로 다시 다리가 겹쳐 쓰러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넘어진 말의 머리에, 어디선가 날아온 열차의 기어가 박혔다.

"라-문!!!!!!"
마부가 비통하게 소리쳤다. 이리하도 소리치고 싶었다.


#

진동하는 세상 속에서, 칼린은 계속해서 회랑을 따라 달렸다. 그리고  넘어진 미쉘을 볼 수 있었다.


미쉘도 곧 칼린을 보았다. 그녀는 넘어진 상태에서 뒷걸음질 치며 드레스의 안쪽에서 작은 통을 하나 꺼내 그를 향해 던졌다.  통은 곧 내용물을 흩뿌리며 칼린에게 날아왔다.

'이건-'
칼린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액체. 수은이었다. 그는 그것을 그녀의 마지막 저항으로 받아들이고 계속 달렸다. 그러나 곧, 그녀의 손 끝이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칼린의 주변으로 떨어지던 수은들이 낙하를 멈추고, 길게 뻗어 나가 가시처럼 그를 꿰뚫었다. 그 순발력으로 치명상은 피했지만 다리와 손등이 꿰뚫렸다.

미쉘은 그가 잡힌 것을 보고서 다시 힘겹게 일어났다. 그리고 신고 있던 힐을 벗어 던지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칼린은 자신의 근처로 어지럽게 뻗어진, 고형화  수은 송곳들을 부시고 뒤따라 갔다. 그의 다리 부상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신체능력의 차이 때문에 그녀는 곧 칼린에게 붙잡혔다.

칼린은 그녀의 머리를 움켜 쥐고 잡아당겼다. 뒤로 넘어지며,  칼린이 그녀의 얼굴어 내려다보는 모양세가 되었다. 미쉘은 이미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여기저기 잔 상처가 나 있었고, 터질 듯이 붉었던 입술은 진짜로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칼린은 그녀가 다시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배려가 무색하게, 미쉘은 거칠어진 숨이 진정되자 마자 바로 다시 드레스의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칼린은 그 손을 붙잡아 억지로 꺼냈다. 그녀가 가슴팍에서 꺼내려 했던 것은 또다른 수은이 담긴 통이었다.

칼린은 그것을 잡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수은을 조종하는 마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했기에 한 판단이었고, 그건 정답이었다. 그는 분한  자신을 올려 다 보는 미쉘을 향해 짧게 말했다.

"끝났습니다."
미쉘은 조금 침착함을 되찾고 자신을 잡은 자의 얼굴을 보았다. 완벽한 조형물. 이정도로 생겼으니 이제는 잘생긴 사람을 보는 감정보다는 아름다운 건물을 봤을 때의 감탄에 가까운 감정이 느껴졌다. 어쩌면 지나치게 무표정한 표정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울리고 있는 회랑 속에서, 그들은 잠깐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이번에도 역시 미쉘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을 뻗어 칼린의 뺨을 향했다.

"칼린이라고 했던가요."
"네."
"칼린... 마지막으로 푸념이나 들어주고 가시죠. 괜찮을까요?"
아직 지진이 한창이고, 회의실에는 자신의 영주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칼린은 마지막 자비를 배풀기로 했다.


"말하세요."
"고마워라, 당신은 허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미쉘은 웃었다.

"칼린, 현장에 있던 당신은 알겠죠. 저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만들어진 말이예요. 하지만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귀족이라는 자가 언제나 사실만을 두고 싸울 수는 없기 때문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혀를 움직여 자신의 어금니 쪽을 건드려 보았다. 그녀가 언제나 장비하고 다니는 독약. 그 이빨정도 크기의 캡슐만 깨면, 그녀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바로 죽을 것이다.


"오히려 저는 당신의 영주님에게 병력을 보내지 않기로  자들에게 반대한 3인 중 한명이예요. 당신의 영주님에 진짜 적은 제가 아닙니다. 나머지 다섯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나요?"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즉시 나오는 답. 하지만 미쉘은 알고 있다. 칼린이라는 자를 알고 있다. 잠깐 본 것이었지만, 대도시의 영주라는 자에게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 그렇게  시간은 필요하지 않다. 그가 봤던 칼린은 상냥하고 유약한 인간상이었다.


"그런가요... 하긴, 요나, 그 시궁쥐는 분명 반대파가 누구인지 전부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칼린, 무너져 가는 여인의 소원이나 하나 들어주세요."
그녀가 여기에서 죽는다면 사건은 동결된다. 문제는 남겠지만, 자신의 남동생이 바나루크의 영주자리를  이으며 위치는 사수할 수 있다. 영주 된 자, 자신의 짧은 목숨보다는 앞으로 있을 영주와 영민의 미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언제나 각오 되어 있는 상태였다.

"제 마지막을 봐 주세요."
게다가 아름다운 자의  안이다. 품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어쨌든, 아름다운 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나름 호사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한껏 웃음을 지으며, 혀로 굴린 캡슐을 꺼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진동이 멎어간다. 그녀는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며 기다린다.


.
.
.

기다린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 약이 그렇게 편히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의구심과 함께 그녀는 눈을 떴다.


그녀의 입 안에 이물감. 캡슐이 아니다. 입을 다물 수 없다. 시선을 살짝 내리면, 자신의 입에 박혀 있는 칼린의 하얀 손이 보인다. 그의 손은 마치 하얀색 뱀처럼 미려하게 빠져나온다. 그의  끝에 잡혀 있는 것은 눈에 익숙한 캡슐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칼린은 조용히 입을 연다. 미쉘의 눈이 경악을 담아서 한껏 커졌다.


"영주님은 당신을- 생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그녀의 입에서 꺼낸 캡슐을 무자비하게 부셔 버렸다. 하얀 가루가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당신은 죽으실  없습니다."
무표정. 한없이 차가운 얼굴. 경악은 곧 공포로 이어진다. 그는 이미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고작 한달 남짓한 시간동안 그가 봐온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 작은 의문조차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 채로,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칼린의 주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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