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숙청회(肅淸會)
라드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손목을 까닥거리며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그는, 곧 수술실을 나온 의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습니까."
의사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주변을 조금 둘러보다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곧 쾌차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반년에서 일년정도만 이 병원에서 제대로 휴식을 취하신다면..."
"그런가."
라드는 그 말에 안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신경질적으로 손목을 까딱였다. 그가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의사가 움찔했다.
"제대로 숨겼겠지."
"ㄴ, 네. 프롤라인씨는 이번 수술을 임상실험의 일환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아요. 이 돈은 임상실험의 보답으로 치면서 그녀에게 주도록 해. 반은 이 병원에 기부금으로 넘기지."
그는 까딱거리던 손의 반대손으로 트렁크케이스를 집어 의사에게 내밀었다. 의사는 감히 거기에 손을 뻗지 않았다.
"참, 줘도 못 먹습니까. 알았어요. 금방 나가 드릴게."
라드는 그를 비웃으며 까딱이던 손목을 들어 올렸다. 밧줄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차려, 누님. 안내해야지."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세 구의 여기저기 박혀 있는 시체 사이에서, 한 명이 배관을 통해 위로 걸려있는 라드의 밧줄에 목이 매달려 있었다. 숨을 헐떡이던 그녀가 밧줄을 끊어내려 검을 집자, 라드는 다시 손목을 내렸다. 텅, 하고 천장에 머리를 한번 박고 잠깐 매달려 있던 그녀는 밧줄을 잡고 바둥거리다가 점점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라, 라드씨!"
"걱정마."
뒤에 의사가 그에게 소리치자, 라드는 짧게 답하고 손목을 올렸다. 다시 숨을 헐떡이며 거친 기침을 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라드가 걸어갔다.
"이제 안내해도 좋다고. 말했잖아, 결과만 보고 나면 얌전히 따라간다니까... 나도 신경질적인 상태였으니까, 쌤쌤으로 치자?"
그는 그녀의 목에 걸린 밧줄을 풀어주었다. 저항의지를 잃은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두려움으로 얼룩진 눈물을 닦아냈다.
"미안해, 의사양반. 수술때 시끄럽지는 않았고?"
"저, 전혀 문제없었습니다!"
"그래, 다행이고. 문제가 있으면 안 돼지."
라드는 그렇게 말하고, 여자의 머리를 잡아 끌며 복도를 나섰다. 그는 지금 꽤 기분이 좋았다.
갈색 피부의 쾌남이 차를 따른다. 주전자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완벽하게 차를 따라내는 것이 상당한 실력이다. 잔을 들고 있는 에테롬에게는 단 한방울도 튀지 않는다.
"이거야 원, 할란. 점점 실력이 느시네요."
"과찬이십니다."
에테롬은 차의 향을 조금 음미해보다가 곧 얼굴을 조금 찡그린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듯 오른쪽을 돌아본다.
"제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맙소사! 당신 피냄새가 너무 지독하네요! 뭘 먹고 사시는 겁니까?"
"햐, 햐혀후헤효..."
얼굴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남자가 쇠고랑에 묶여 그렇게 말했다. 안면이 완전히 움푹 패여 있었다. 그의 옆에는 삿갓을 눌러쓰고 특이한 의복을 입은, 검을 차고 있는 여성이 서 있었다.
"일찍 말했으면 서로 좋았잖아요! 성가시기는..."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차를 몇 번 더 킁킁거리다가 곧 찻잔을 내렸다.
"하, 차 냄새도 음미할 수 없는 곳이라니... 라드씨가 빨리 와줬으면 좋겠네요... 이런 곳은 사양이라구요. 할란, 실례지만 차를 가져다 놓으시고 커피로 다시 가져와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각설탕도 가져와 주세요. 정말 죄송해요. 맙소사."
에테롬은 차를 못 마신 것이 영 불만인 듯 테이블에 손가락을 몇 번 탭 하다가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그 때,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에테롬의 말에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 들어온 것은, 기절한 자신의 부하였다. 앞으로 풀썩 쓰러지는 그녀의 뒤에서 라드가 들어왔다.
"여, 건강하셨소?"
"라드씨, 조금 늦었는데요."
에테롬은 볼멘소리로 그렇게 말하고서 쓰러진 자신의 부하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전 분명 당신을 모셔올 부하를 네 명 보냈는데요?"
"미안, 조금 다퉜지 뭡니까."
라드가 멋쩍은 듯 웃으며 기절한 여성을 한번 밟고 에테롬의 맞은편 자리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에 일어나고 있는 참상을 보았다.
"선객이 계시네?"
"라드씨가 너무 늦어서 말이죠. 그러니 간단하게 끝내죠."
할란이 다시 자리에 왔다. 그의 손에는 커피포트와 각설탕이 있었다.
"고마워요. 이제 쉬세요."
"라드씨 잔은 준비해 드리지 않아도-"
"라드씨는 금방 돌아 가실 거예요."
에테롬은 커피를 보니 조금 기분이 풀려서 웃으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컵에 커피를 따른 후 각설탕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물론, 대답에 따라 조금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만일의 경우로 여기 오래 머물게 되어도 커피는 필요 없을 거예요... 질문이나 하려고 부른 건데, 대답해 주실 꺼죠?"
각설탕 세 개 째가 짤랑, 하고 커피에 들어갔다. 라드는 그 커피잔을 구경했다.
"라드씨, 그곳은 우리 상회도 발을 들이기 힘든 곳이었거든요. 상황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라드씨의 보고를 기다렸답니다. 일주일 동안이나요."
각설탕이 네 개, 다섯 개.
"사실 일주일이나 기다리다 보니, 그래, 당신보다 빠르게 전달된 소식이 있었죠. 소금부대, 이번에도 전원 무사로 임무 성공! 하고."
각설탕이 여섯 개, 일곱 개.
"그러면 자동적으로 궁금해지는 겁니다... 이번에는 도대체 어떤 힘겨운 임무를 해내셨길래-"
각설탕이 여덟 개. 커피는 더이상 그 많은 설탕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좆같이도 당당한거냐."
아홉 개. 아홉 개 째는 집게째로 커피에 쳐 박아 넣은 것이었다. 라드는 맞은 편 자신의 얼굴까지 튄 커피를 찍어 햝아 보았다. 너무 달아서 먹을 게 못되었다.
"호출에 응답도 하지 않아, 네놈이 있을 게 뻔한 병원으로 사람을 보내 보니, 세놈은 죽여버리고 한놈은 두들겨 패서 이 방안으로 들어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에테롬은 그렇게 말하며 각설탕 집게로 그의 커피를 휘저어 댔다. 끈적하게 섞이는 그것은 더 이상 커피로 보이지는 않았다. 라드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먼저 할 말없소? 내가 옷 입는 스타일을 좀 바꿨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안대를 톡톡 쳤다. 에테롬은 벙찐 표정으로 그런 라드를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뱉었다.
"이정도로 당당하다면, 확실히 뭔가 했나 보군요. 아니면 끝내 주는 변명거리가 있다 던가... 좋아, 들어 봅시다."
"그곳의 영주를 죽였소."
"...호."
에테롬은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마치 주판을 움직이듯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서 탭하기 시작했다. 잠깐 그러던 그는 곧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로는 단가가 부족해요."
"걱정마쇼, 끝내 주는 변명거리도 준비했거든."
라드는 웃으며 몸을 낮췄다. 그리고 천천히 손목에서 밧줄을 흘려 내렸다.
"당신이 먼저 계약파기를 했으니 말야. 그걸로 부족한걸 쌤쌤치는 거 어때."
에테롬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할란을 돌아보았다. 할란도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들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의미없이 살려고 막 뱉은 말이라면 무덤자리를 찾아야-"
"그럴 리가 있나. 8영주의 추가병력에 대한 이야기요."
에테롬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라드를 바라보았다. 라드는 피식 웃고서 양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테이블 아래로는 밧줄을 뻗어 나가고 있었다.
"8영주의 병력교란. 내가 소금부대에 있는데도 병력을 차단시켰지. 그러면서 나에게는 어떤 귀띔도 없었고, 탈출 수단도 없었어. 나까지 같이 죽일 생각이었던거 아닙니까?"
라드는 그 밧줄을 에테롬의 발목에 걸 생각이었다. 진실을 인정하게 하기 위한, 약간의 준비였다.
그러나 밧줄이 걸리는 느낌, 손맛이 오지 않았다. 라드는 조금 당황했으나 테이블 아래를 확인할 수는 없었기에 평정을 유지했다.
"음, 무슨 말을 하는 지 전혀 모르겠는데..."
에테롬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찡그리며 생각해 보다가 라드의 뒤 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운?"
"내가 알 턱이 있나."
라드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급하게 몸을 틩겨 올리려 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어깨와 목 사이에 얹어진 검날을 보고서 움직임을 멈췄다.
'내가 뒤를 잡혔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분명 자신의 왼쪽편에 서있던 삿갓을 쓰고 있는 자였다. 깊게 눌러쓴 그 모자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라드씨, 상황이 급해서 소개를 못 드렸네요. 송 운 씨에요. 동방 제일검이라고 불리죠."
"반갑다."
"...난 수줍음이 많아서 말야."
라드가 웃으며 양 손을 들어 올렸다. 그제서야 밧줄이 에테롬에게 닿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밧줄의 올가미 부분이 베여 있었다.
"정말 생각 나는게 없는데 말이죠..."
"이렇게 넘기려는 겁니까?"
라드가 그렇게 묻자 검이 더 가까이 붙었다. 에테롬은 그런 라드를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곧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 신호와 함께 검이 치워졌다.
"가벼운 장난이었어요, 라드씨. 전 거짓말은 안 해요. 상인인 걸요."
에테롬은 끈적한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거기까지 아셨다면 제가 할 말은 없죠. 실수를 인정할게요, 라드씨."
"...고맙군."
"고맙긴요. 우린 동등한 관계인걸요."
그렇게 말하고서 에테롬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나가죠. 들을 이야기도 다 들었으니... 할란, 전부 뿌려 놨나요?"
"여기만 뿌리면 됩니다."
"좋아요."
에테롬은 그렇게 말하고서 라드의 뒤쪽에 뻗어 있던 자의 뺨을 한 대 톡톡 쳐 보았다.
"이런, 안 일어나네... 라드씨, 이분 좀 업고 가주시겠어요?"
"나도 나가야 됩니까?"
"? 타 죽으시게요?"
당연하다는 듯 묻는 에테롬의 말을 듣고 나서야, 곳곳에 기름을 뿌리기 시작하는 할란이 눈에 들어왔다. 라드가 기절한 자를 업었다.
"하해! 하해! 하혀주힌하해효!"
할란이 쇠고랑에 묶여 있는 남성을 향해 기름을 뿌려 댔다. 남자는 기름을 뱉어 대며 계속해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번 임무도 수고 많으셨어요, 라드씨. 하지만... 다음에는 조금 더 큰 성과를 기대하겠어요. 그나저나, 의안이 필요하시다면 상회에서 질 좋은 유리의안을 하나 맞춰 드릴게요."
에테롬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그리고 라드에게 건내 주었다. 라라드는 그 성냥을 건내 받으며 가볍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도 새로운 대응책을 준비중이라서요. 슬슬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라... 저도 저만의 부대를 만들어 봤죠. 운씨가 첫 번째에요."
할란이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 오두막 안에 남자의 절규소리가 들려온다. 라드는 담배연기를 한번 빨아들이고, 불붙은 성냥을 오두막을 향해 던진다. 빠르게 불이 옮겨붙는다.
"곧 있으면 지금 라드씨의... '영웅'의 지위를 이용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그래서 라드씨를 살려주는 거예요. 전 이미 다른 수단들도 생각해 두고 있어요. 그러니 부디, 라드씨. 다음에는 조금 더 확실한 성과를 보여줘요."
삿갓녀가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고 등을 돌린다. 에테롬도 같이 등을 돌리며 비에 씻기듯 말한다.
"오두막집 하나 더 태우는 건 아무리 저라도 아까우니까요~."
라드는 빗속에서도 기세 좋게 불타오르는 오두막을 보며 연기를 빨아들였다. 분명 지하에도 사람이 있었지. 아마 얼굴이 벗겨진 자의 가족이.
아무튼 누이를 미리 대피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허단 디알테스타만."
"허단 디알테스타만, 자매님. 급한 일이 뭐 길래 저를 만나 뵙고 싶으셨나요."
이리하는 벨카에 복귀 하자 마자 교단으로 달려갔었다. 그리고 교주와의 접선을 요청했다. 일주일 후, 이리하는 교주를 만날 수 있었다.
"교주님. 제 이름과 제가 가진 가장 고결한 것, 신앙을 걸고서 맹세합니다. 제가 할 말에 거짓은 일체 섞지 않겠습니다."
"믿습니다. 말해주세요."
"제가 성자(聖子)를 찾은 것 같습니다."
이리하는 자리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그러나 겁먹을 것은 없었다.
"...이리하."
"네."
"전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독실한 신도입니다. 신앙을 걸고서 거짓을 말할 자가 아닙니다."
교주, 프레데리카는 그렇게 말하며 후드를 걷어 내렸다. 그녀의 눈은 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성자에 관한 것이라면 가볍게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드리려 합니다."
이리하는 천천히 그 때 있던 일을 회상해 보았다. 그리고 다시한번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는?"
"초월적인 회복마법에 말들을 자신의 수족처럼 다루었습니다."
교주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리하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존엄이 우리의 하늘을 덮으시매, 지성이 있는 것들은 감히 불손한 생각틀 떠올리지 못하며 두려워 찬미하고, 지성이 없는 것들은 그저 그의 뜻을 따르는 종일지어다'. 이리하 자매님, 하고자 하는 말은 잘 알았습니다. 분명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그 자에 대한 말이겠지요."
"네."
프레데리카는 웃으며 이리하의 손을 감쌌다.
"정말 행운이네요. 그 분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를 가져다 주실 겁니다. 박해당하며 핍박당하는 민중의 별이 되어 주실 분이십니다. 정말 디알테스타만의 선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그를 모셔와 주시겠습니까?"
"그건 힘듭니다. 아직은..."
"이유는?"
이리하는 영주를 떠올렸다. 민중의 영웅이기에 손을 뻗으려 했었지만, 그런 그릇이 아니었다. 디알테스트그롬에 찬동할 자가 아니다.
"사악한 전차가 가는 길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레데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리하에게서 손을 풀어내며 다시 원래의 정갈한 자세를 만들었다.
"그게 당신의 대답인가요."
"네. 요나는 신성한 뜻을 따라갈 인재가 되지 못합니다."
"당신의 안목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유감이라는 듯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잠깐 기도하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그와 직접 접촉해 보겠습니다. 그 때 그자가 성자임을 마땅히 보여준다면. 그 때부터 디알테스트 그롬이 움직이겠습니다."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왜죠?"
이리하는 칼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연하게 일어나는 갖가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짓눌리기 시작한 그의 선의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떠올렸다.
"세상에 악(惡)이 너무 팽배합니다. 그걸 악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자들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시대에 현혹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가올 정의를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제가, 제가 그의 정의로운 눈을 속세로 흐렸을지도 모릅니다, 교주님."
"...이리하. 고개를 드세요."
교주의 말에 이리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상은 커다란 시련의 연속입니다. 모든 것은 인과의 흐름 안입니다. 이 흐름조차도 위대하신 그 분의 뜻일 겁니다. 지금은 그저 기도하고, 당신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할 생각을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교리에 맞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일은 금방 벌어질 겁니다. 그분의 큰 그림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이리하 자매님도 그 그림을 위한 붓을 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비나흐의 철로를 폭파시키는 계획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네."
"그 자리에 참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리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정확한 날짜가 정해진 겁니까?"
"네. 일주일 후입니다."
"...조금 너무 급하게 앞당겨 진 것 아닙니까?"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일주일 후 8영주의 회의가 이뤄집니다."
"아..."
"네, 그 동안 비나흐는 영주의 부재상태가 됩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손을 모았다.
"기꺼이 참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단 디알테스타만."
"허단 디알테스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