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에필로그
"그럼... 그냥 모르는 척 하라고? 애들한테 오해도 풀지 말고?"
소니아는 납득할 수 없어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칼린을 돕는 것 아니었어? 제일 힘들 시기에 그런 짓을 해도 되는 거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칼린이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야. 내 역할은 그 이유를 밝히는 거겠지... 영주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척하면서 말이야. 돕는 일은 지금 할 게 아니야."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이리하, 넌 칼린한테 등지지 마라. 영주가 널 경계하고 있어. 너 하나면 모두의 어그로를 한번에 잡아낼 수 있어."
"나, 나는?"
"넌 그냥 알고만 있으면 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고만 있으면 영주의 통신에서 유리한 걸 잡아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갤러한은 씹는 담배를 꺼냈다.
"그런가... 일단 알았어."
소니아는 머뭇거리다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3분쯤 후에 나와. 알지?"
"알아."
그녀는 돌아가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잠깐 그러고 있던 그녀는 결국 자리를 떴다. 그런 소니아를 보며 벽에 기대 머리를 잡고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씹어 대는 갤러한에게, 이리하가 다가왔다.
"이봐, 갤러한."
"왜."
"사실 아직 이해가 안가는 게 하나 있어."
"...뭔데."
"네 추리는 전부 영주가 '빚'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곳에서 시작된 거지."
갤러한은 기댄 자리에서 늘어져 앉았다. 쪼그려 앉은 상태로 몇 번 담배를 씹던 그는 곧 침을 뱉고 대답했다.
"그런데?"
"단순히 말실수만으로 그런 장황한 추리를 해내는 건 아귀가 안 맞는데. 안 그래?"
갤러한은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속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넀다.
"이게 뭔데?"
"내 여친이랑 주고받는 편지."
이리하가 그 편지를 받아 천천히 읽어 보았다.
"깨가 떨어지는군. 평소에도 이렇게만 말하고 다니면 꽤 이쁨받겠어."
"조용하고 추신부분만 읽어봐."
조금 성질부리는 갤러한을 향해 웃어 보이고 이리하는 추신부분을 읽어 보았다. 바나루크의 영주가 성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달한, 그 편지였다.
"이건... 조금 이상하군."
"그래. 조금 이상하지. 냄새가 난다고."
갤러한은 다시 그 편지를 돌려받아 소중하게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거랑 지난번에 칼린과 나눴던 대화. 이렇게 두개가 없었으면 나라도 속았을 거야. 그냥 납득하기 쉬운 방법으로 설명한 거지, 뭐. 담배 있냐?"
"난 담배 안 들고 다녀."
"그러냐, 젠장..."
그는 이리하를 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 씨발. 진짜 기분 이상하네..."
그는 한번 한숨을 뱉고서 달을 바라보았다. 밤이 밝다.
로토는 협곡 끝에 걸쳐 앉아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씁쓸한 마음이 도저히 가라 앉지 않아 그는 달을 안주로 그의 독주를 들이켰다. 여기저기 너저분히 퍼져 있는 시체들, 그 처참한 꼴이 마치 앞으로 이 영지의 미래같다. 그런 그의 옆으로 파리가 지나갔다. 그는 그 파리를 손으로 쫓아 내려다가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벌레인가..."
왠지 그 파리를 떨쳐낼 기운조차 잃은 그는 다시 술을 들이 부었다. 그리고 전장을 향해 한모금정도 흘려냈다.
"뭐하는 짓이요, 술 아깝게."
그런 그에게 어둠속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에 장신. 딱 봐도 위험하게 생긴 남자. 애꾸눈이면서 이상하게 다른 부위의 상처들은 말끔하다. 그는 지원 온 소금부대에 소속된 남자였다.
"아...음..."
"라드요. 혼자 술 마시니 재미 좀 보십니까?"
그 남자는 로토의 옆에 같이 앉았다. 로토는 딱히 허락한 적은 없었지만, 취기에 될 대로 대라는 느낌이었기에 그냥 웃었다.
"라드씨, 저 말쟁이놈들은 어땠습니까?"
말쟁이는 그들의 영지에서 충족들을 부르는 일종의 멸시 표현이었다. 라드는 그 말에 손을 내밀었다. 로토가 술병을 건내 주자, 라드는 그 술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 입을 닦았다.
"후, 센 술이구만. 저놈들이 어땠냐니."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신의 안대부분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로토는 조금 웃고서 그가 건낸 술병을 돌려받았다.
"그지. 딱 한달 전만해도, 저놈들은 우리에게는 재해였소. 상대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어.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그러면 더 몰아쳐서 우리 숨통을 막아버리는 재난 그 자체였단 말이요."
그는 독주를 들이 부었다. 입 틈새로 술이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댁들이 왔지. 구국영웅 요나경과, 네크로맨서를 잡았다는 왕국 최강의 부대님들이 오신거야. 그러니까 보이더군. 놈들은 재해가 아니었소.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었소. 재해가 아니라, 상대하기 어려운 괴물같은 거였던 거지."
라드는 그에게 담배를 건내 주었다. 그는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그것을 집었다. 라드가 불을 붙여주자, 그는 연기를 크게 빨아 머금고 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웃으며 라드의 어깨를 쳤다.
"미안합니다, 익숙하지가 않거든..."
"괜찮으니까 이야기나 계속 해 보쇼."
눈 앞의 애꾸눈이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그래, 그런데, 그런데 오늘 그 네르바의 쭉정이놈이 와서 뭐라고 했는지 들었는가? 놈들은 충족들을 벌레라고 했소. '그' 충족을! 쫓아내기 귀찮아서 그냥 두고 있던 것이라면서! 아직도 기억하오. 첫 승리를 거뒀을 때 생포한 충족놈들을 찢어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쾌감, 승리감, 이딴 것이 아니었어. 우리는 그것들을 분해해 보고 나서야 그것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란 것을 확신할 수 있었어!"
그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얼굴을 감쌌다.
"근데, 근데 그 괴물 같았던 것이, 저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거요... 충족은 신출귀몰하고 빨라서 병력들이 모이기 전에 후퇴한다, 일당백의 전사들이라 말 위에서는 누구도 상대할 수 없다, 다 거짓말이었어! 놈들은 우리를 '감당 가능한 손해'로만 판단한 게야! 말이 됩니까, 라드씨?"
"뭐, 확실히 떠돌아다니는 말에 비해서는 상대가 쉬웠지만 말입니다..."
라드는 협곡의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로토는 감싼 손을 점점 모으며 몸을 떨었다.
"우리 영주님만 가엽게 된게지... 그 어린 나이에 이런 곳에서 자라서 볼 꼴 못 볼 꼴을 전부 보았소.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어. 라드씨, 영주님의 마지막을 보셨습니까?"
"...미안하군."
"아아, 젠장. 사과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몇번 흐느끼던 그는 곧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어떻게 이곳의 대표가 되었는 줄 알아? 그냥, 군인출신으로 가장 연로자를 뽑았을 뿐이야. 놈들은 그저 보여주기 식으로 한 명 대충 꼽은 거요. 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그는 담배 꽁초를 집어 던지고서 술을 크게 한 모금 들이 마셨다.
"절대 네르바 쭉정이놈의 뜻대로는 둘 수 없소. 놈들은 충족을 벌레에 빗대었지. 진짜 벌레자식들은 사람 목숨으로 이율을 판단하는 저놈 새끼들이야. 라드씨, 난 요나님에게 이 영지를 넘기려 하오. 벨카의 이름을 받겠어. 부디 요나님에게 제 의사를 전해주겠습니까?"
라드는 그 말에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진심입니까? 방금 한 말은 조금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
"상관없어! 천수를 다한 목숨이다! 죽음이 이제 와서 두렵지는 않아! 그 벌레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흥분해서 눈을 부릅뜨고 침을 튀기며 열변했다. 라드는 크게 웃고서 그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하하, 하... 죽음도 두렵지 않은 겁니까... 멋지네, 그거. 각오가 되신 겁니까?"
"암! 각오는 되었소! 요나님이 받아만 주신다면-"
"진짜로?"
라드가 로토의 말을 끊었다. 로토가 고개를 돌려 보았다. 라드의 한 짝 밖에 남지 않은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의 눈은 마치 까마귀의 그것 같았다.
"우리 영주님은 네르바와 협력관계가 필요하시거든... 그래서 누군가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지. 네르바의 영주님이 이 곳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여론을 만들어 보라고 말이야."
술이 확 깨기 시작했다. 아직 취해 있는 몸과 각성된 정신 사이의 괴리감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당연한 거지. 내말은, 벨카의 중앙 분수대 만한 이 영지와, 8도시의 하나인 네르바라니. 성인군자도 네르바를 고를 거요. 그리고 이미 우리 영주님하고 그쪽하고 협약은 체결이 끝난 상태거든..."
로토는 조금 몸을 흔들어 그의 어깨동무를 풀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마치 바위에 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색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대표는, 댁 말대로 누구든지 고를 수 있고 말이야. 막말로, 술에 취한 영지 대표가 주정 부리며 협곡을 돌아다니다가 실족사... 이런 사건은 귀한 일도 아니잖습니까? 그럼 대리를 뽑아야지, 어쩌겠어. 내 말 맞나요? 로토씨?"
라드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로토는 발 밑을 보았다. 지금 다시 보니 말도 안되게 높아 보인다. 떨어진다면 구르기만 해도 살아남기 힘드리라.
"그래서 질문은 이건데..."
라드는 몸을 기울였다. 어깨동무를 잡힌 로토의 몸도 자동으로 같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에게 죽음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죽을 각오가 있다고 했지... 그 말 진짜요?"
로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즉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혀를 제치고 고개를 격렬하게 좌우로 흔드는 것으로 대답했다. 라드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실소를 터트렸다.
"핫, 하하핫! 로토씨, 자그만 농담이었습니다... 제가 뭔 짓을 하겠습니까, 맙소사... 하하.."
그는 로토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또 그런 생각같은 걸 하시면 글쎄, 우리 영주님에게 특별한 지시를 받은 '누군가'가 무슨 수를 쓸 수는 있겠지... 평화롭게 해결하는 게 제일이겠지만, 또 인류 역사상 폭력만큼 잘 먹힌 협상수단이 없거든. 그죠?"
발목이 쓸리는 감각에 그는 감았던 눈을 떠 보았다. 그의 발목으로 밧줄이 마치 뱀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면, 부디 그들을 용서해 주시길. 용서 안 하면 또 어쩔거겠냐만은..."
그는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로토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자신의 술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무력감에 몸을 웅크렸다.
소금부대의 세번째 임무, 충족의 토벌, 도르베의 오른손 중지와 왼손 약지 소실, 라드의 오른쪽 안구 손실, 임무 성공.
벨카로 돌아가는 길에는 부슬비가 내렸다. 부대원들은 서로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도르베는 결국 버티지 못했는지 의무실에서 고열을 일으키며 기절했고, 들것으로 이동 중이었다. 칼린은 그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네르바의 전화국에서 요나가 영지에 중간 전달을 하고 그들은 기차에 올랐다. 출발했을 때 약속했던 술자리가 열렸지만, 과반수는 참여하지 않았다. 자리에는 칼린과 요나, 이리하, 핀 뿐이었다.
"우리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도르베의 무사 복귀를 위해."
요나는 잔을 높이며 그렇게 말했다. 11명을 위해 준비된 식탁은 4명이서 건배하기에는 너무 컸다. 제법 조촐하게 이뤄진 그 축제는, 술병의 반도 비우지 못 한 채로 조촐하게 끝을 마주했다.
자리로 돌아가던 칼린을 잡은 것은 핀이었다.
"칼린씨. 다들 칼린씨를 매정한 놈이라느니 뭐라느니 매도하고 있지만... 전 아무리 생각해도 칼린씨가 그럴 사람으로 안보여요."
핀은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칼린은 가만히 기차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뭔가 이유가 있었던 거잖아요. 왜 아무 말도 안하시는 거예요..."
그 말에 칼린은 조용히 핀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리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칼린씨..."
"핀. 아무것도 틀리지 않았어요."
가면 너머로 콧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실소인지 흐느낌인지 알 방법은 없다.
"모두의 말이 맞아요. 전 냉혈한에 겁쟁이예요."
"하지만!"
핀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다가 곧 그 말을 삼켜냈다.
"...저는 어쩌면, 다른 분들에 비해서 이번 전투에서 많이 편하게 지냈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걸지도 몰라요. 그래도... 전 역시 칼린씨를 믿습니다."
핀은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도르베씨도 그럴거예요. 확신할 수 있어요."
그리고 지팡이를 짚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칼린은 망연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죄인 것처럼 느리게 방을 향해 걸어갔다.
요나의 방은 그 초호화 열차 속에서도 특별한 것이었다. 그녀의 방에는 무려 벽난로까지 딸려 있었다. 그녀는 그 방 안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그 말에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라드였다. 요나는 미소로 그를 배웅했다.
"무슨 일인가. 이쪽에 앉아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책상 맞은편의 의자에 턱짓했다. 라드가 움직이자 그녀는 라드의 움직임을 멈췄다.
"아, 잠깐. 거기 있는 위스키를 가져다 주겠나. 충분히 취하지 못해서 말이야."
라드는 선반에 올려져 있는 위스키와 잔 두개를 챙겨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 요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잔을 두개 챙겼나... 뭐, 상관없지. 술은 계속 갖다 주니까 말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라드는 위스키의 뚜껑을 열어 잔에 따랐다. 그리고 한잔을 영주에게 내밀고, 자신의 잔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할말은 많은데... 먼저 이것부터 물어봅시다. 그 노인네 협박하는 일, 그걸 왜 나한테 시킨거지?"
"내가? 협박을 시켰다고?"
라드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실례. 설득시키는 일 말이오."
"아, 그건가. 당연히, 네가 적격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라드는 자신의 잔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지, 그게 아니야... 꼬리자를 준비를 한거잖소?"
그 말에 요나의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곧 도발적인 미소와 함께 몸을 뒤로 뺐다. 요컨데, 말해보라는 자세였다.
"만약에 그 로토라는 노인네가 미쳐버려서 자신이 요나의 부하에게 협박... 설득당했다고 시인하면, 내가 제일 잘라내기 쉬운 가지거든. 소금부대를 음해하기 위해서 다임상회가 저지른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곳의 영주랑 마지막까지 있던 것도 나였으니, 모든 책임을 다임상회로 뒤집어 씌우는 일까지 가능해졌겠지. 내 말 틀렸소?"
요나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서 웃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면 질문이 하나 더 생깁니다만, 들어 보시렵니까."
라드가 몸을 기울였다.
"그렇다면, 만약 방금의 전제가 맞다면, 그럼 우리 영주님은 나한테 이런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지. 가만 둬도 다임상회의 해결사인 내가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니까. 아니면 뭐, 적당히 겁만 주라고 명령해서 그 노인네가 진실을 고발할 용기정도는 남도록 만들던가. 이 둘 중에 한 방법을 썼을 수도 있단 말이야. 아닙니까?"
"그럴 듯하군. 계속 말해봐."
라드는 술잔을 들고 몸을 더 수그렸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나에게 강경하게 그자의 설득을 명했다. 다임상회에게 큰 죄를 씌울 수 있는 방법들을 제치고 '굳이' 그런 방법을 쓴거요. 이건 진짜로, 네르바와 벨카 사이에 협상으로 얻어낸 이득이 더 클 거라는 뜻이거든. 그리고 어쩌면... 상회에게 줄 피해도 더 크다는 뜻이고."
"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회가 무슨 준비를 했는지 당신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밝힐 수는 없어. 증거가 없거든. 그러니까 당신은 딱히 그걸로 다임상회에게 데미지를 줄 카드를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제가 궁금한 건 이겁니다, 영주님."
그는 술을 한모금 들이 마셨다. 알싸함이 혀 끝을 맴돌았다.
"도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길래 이 모든 걸 포기했나. 이걸 알아야 겠어요, 나는."
영주는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담배를 꺼냈다.
"라드, 자넨 머리가 꽤 비상해. 여러가지를 생각한 것 같군."
"하, 감사."
"그러니 그 비상한 머리에 경의를 담아... 조금만 설명해주도록 하지. 네르바의 영주와 한 협상. 그 내용을 전부 말해 줄 수는 없다만, 간단히 말하자면 그 협상의 내용은 나에게 큰 이익을 불러올 거다. 일개 상회 따위가 어떻게 막아낼 수 없는 이득이지... 미안하지만, 네가 이번에 저지른 영주 살해같은 건 문제로 쳐지지도 못하게 될 거야."
"뭐, 그건 내가 적당한 핑계거리가 있으니까 넘어가죠."
"그리고 상회가 무슨 준비를 했는지 알고 있던 것을 카드로 쓸 수 없다라, 그건 좀 말이 다르군. 왜 그걸 사용할 수 없겠나?"
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나는 담배불을 빨아들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마레... 그 자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지. 꽤 마음에 드는 말을 해주던데, 뭐랬더라... 그래. 진실은 만드는 것이라고 했지."
"무슨-"
라드의 말을 끊어내며 괘종시계가 울렸다. 그 종소리는 총 21번을 울리고 다시 멈추었다. 흐트러진 분위기 속에서 요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나가 보거라, 난 할 일이 많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라드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에 고개를 돌려 웃었다.
"궁금한 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말입니다."
"아껴 두거라."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업무에 들어갔다. 라드는 그런 요나를 보다가 문을 닫았다.
열차는 침묵을 싣고 달려간다. 숙청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