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병(충)해
해가 뜬다. 결국 지원병력은 오지 않은 채로 날이 샜다. 부상자와 사상자의 관리, 남은 영지민들의 사기 관리 등으로 결국 변변찮은 준비조차 하지 못했다.
칼린은 안치소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에 아침이 왔음을 눈치챘다. 꼬박 반나절을 도르베의 양손을 붙잡고 있던 그는 조용히 그 틈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고 있는 것은 요나였다.
"하루 종일 여기에 있던 거냐."
"요나님... 아스타랑 도르베는 이번 전투 무리예요. 제가 3인분을-"
"칼린."
"아니, 라드씨도 부상이 심하니까, 제가 조금 더 노력할게요, 제발..."
"칼린. 나를 봐라."
요나는 가까이로 가서 횡설수설하는 칼린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가면을 벗겼다. 잔뜩 위축되어서 시선을 이리저리 굴려 대는 것이 꽤 심각한 상태가 된 듯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저들의 빈 자리를 메꾸는 것은 네 일이 아니야."
"하, 하지만-"
"마을의 퇴역병들까지 돌격부대로 밀어 넣었다. 이 마을에서 살아남아서 퇴역을 마친 병사들이야. 베테랑들이다. 오히려 쪽수는 많아 졌어. 걱정마라, 저들은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그 말을 듣고 서야 칼린은 요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부족하다. 이대로면 오늘 우리는 전부 죽어. 하지만 아직은 후퇴도 할 수 없어. 네가 확인할 게 있다. 정신차려."
단호한 어조에 칼린이 조금씩 정신을 다잡는다. 하지만 아직도 많이 혼란스럽다.
"말 한 필을 가지고 네르바로 달려가라. 최대한 빠르게 가도록 해. 언제 놈들이 다시 들어올 지 몰라. 사병들이 모이기로 한 곳을 기억하지?"
"네, 네."
"그래. 거기에서 사병들을 데리고 와라. 연락이 두절 되었었다고 전해."
"저, 저 혼자 말입니까?"
"너 혼자다. 지금 가거라."
"하지만-"
그건 마치 저를 빼돌리는 게 아닙니까, 하는 말을 칼린은 억지로 삼켜냈다. 요나의 표정을 보고 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었다.
"지금, 가거라 칼린. 말이 준비되어 있다. 할 수 있겠나?"
칼린은 누워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엇이 최선이 될지 필사적으로 생각해 보았지만, 혼란스럽고 피곤한 머리속은 그런 사고를 허락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면 요나의 선택을 믿어야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믿고 있겠다. 바로 다녀오도록."
거기까지 판단한 칼린에게 더 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안치실을 나왔다. 텐트 밖에는 살짝 얼룩진 말이 한 마리 서 있었다. 그 말에 올라탄 칼린은, 가면을 고쳐 쓰고 곧잘 네르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듣고 있나, 도르베. 칼린은 방금 떠났다."
요나의 말에 도르베가 눈을 뜬다. 그리고 작게 웃어 보인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나도 마나과충전을 겪어봤으니 말이다. 잠을 잘 수 있을 리 없지."
요나는 칼린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이봐, 도르베."
"네."
"아스타는 완전 회복이 가능할 꺼다."
"그렇습니까."
담백한 대화. 요나는 계속해서 입을 연다.
"넌 손가락 한 두개 정도는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게 다인가?"
도르베는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검은 쥘 수 있습니까?"
요나는 담배를 꺼낸다.
"그건 네가 알겠지. 네가 지금 상태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쉴 것이라면 부담없이 쉬어도 좋아. 거기서 가만히 누워 편히 싸움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내 추천이기도 해."
그녀는 담배를 도르베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리고 묻는다.
"어떤가. 검을 쥘 수 있나?"
상관이 담뱃불을 붙여 준다. 퍽 좋은 기분이다. 그는 연기를 빨아들이며 대답했다.
"주먹은 쥘 수 있습니다."
"차다레마."
입을 연것은 얼굴에 주름과 상처가 가득한, 하얗게 쇤 수염과 머리를 가진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거대한 근육질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깨에는 곰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이 황야에서 곰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씨족은 충족 중에서 최초로 조공을 받기 시작한 초대형 부족이었다.
"용맹한 전사여. 부상을 입었군."
그가 말하는 것은 차다레마의 부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충족의 입장에서 같은 씨족의 동포들은 족장의 몸이나 다름이 없다. 차다레마는 눈 앞에 놓인 술을 들이 마시고 입을 열었다.
"도와다오. 쿠탕카가 죽었고, 저들의 저항이 강하다."
노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다시 가늘어지며 자신의 곰방대를 꺼냈다.
"그런가. 쿠탕카가 죽었는가..."
진심으로 침통한 듯 그의 주름이 깊게 일그러졌다.
"그는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아."
"고맙다."
"하지만, 그게 병력을 지원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차다레마, 내가 무엇을 요구할 지 알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상정하고 이쪽에 온 것이니 차다레마도 알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부족의 확대, 지금 그는 충족의 통합을 노리고 있다.
"...물론이다."
"그런가. 각오를 하고 온 것 인가. 현명한 선택이다. 내 씨족의 패배는 용납할 수 없지."
노인은 술잔을 기울여 크게 한 사발을 들이 마셨다. 그리고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아들과 혼인하도록. 네 남편들은 건드리지 않겠다. 하지만 내 아들이 정실이다."
"알았다."
"약식으로 하지. 머리를 땋아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빈 술잔을 던졌다.
"바로 출전한다. 200을 주마. 이기고 와라."
이걸로 병력이 보충되었다. 그리고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의 씨족들은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오는 반발은 그녀가 감내해야 할 것이다. 각오는 되어 있다.
마지막 기회, 달이 차오르기 전 놈들을 불태운다.
칼린은 출발한지 70분만에 네르바에 도착했다. 북적이는 네르바는 마치 그가 있던 지옥이 가짜였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격렬한 싸움을 할 동안, 다른 곳은 너무나도 평화로운 일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약간의 인지 부조화를 무시하며 칼린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바로 요나가 말했던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북적이는 인파들 속에서, 칼린은 모두가 누더기처럼 입고 말을 끄는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그 마을에서 1~2시간 바깥에서는 여기까지 쳐 들어올 충족들을 막아내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화려한 휴양도시는 시리게 들어왔다. 분명 충족과 싸우기 전에는 아름답고 멋진 도시라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저 낯설게만 느껴졌다. 단 1시간만에 그는 화장실조차 없던 곳에서 윌레인 최고의 온천이 있는 곳에 온 것이었다. 이리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스스로 생각해봐.'
이 도시는 다시 보니 아름답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기능하는 이 곳이 싫어진다. 왜 병력은 오지 않았는가.
조금 격양된 상태로 칼린과 말은 그 호텔에 도착했다. 칼린은 말을 묶어 두고 호텔의 문을 열었다. 1층의 홀이 비어 있다.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기요!"
그는 다급하게 카운터로 달려갔다.
"네?"
"소금부대에서 왔습니다! 연락이 두절되어서 직접 찾아왔어요! 여기 네르바의 영주의 이름으로 예약된 방에 머물고 있는 병사들을 전부 불러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카운터에 있던 아주머니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호텔 명부를 확인한다. 칼린은 그녀의 느린 행동에 조바심이 나서 버티기 힘들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 칼린에게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예약된 방은 16개가 있는데... 단 한명도 오지는 않으셨는데요."
"...네? 그럴리가..."
칼린은 그 명부를 빼앗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다시 살펴보아도 비어 있는 이름 칸이 채워지는 일은 없었다.
"곤란하다구요. 가을 휴가가 한창인 시기에 이렇게 예약만 해놓고 안 오시는 건... 정말이지 손해가-"
그 아주머니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바늘에 찔리고 있는 듯한 감각. 바뀐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카운터 밖의 사내에게 돌렸다.
"...아무도, 아무도 오지 않았었다는 겁니까...?"
"화, 확인해 보고 와도 좋아요.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녀는 급하게 예약되어 있던 방의 열쇠들을 꺼내 맞은편의 사내에게 넘겨주었다. 사내는 부드럽게 그 열쇠들을 받고 프론트를 벗어나 계단을 올라갔다. 3분정도 후, 그 남자는 다시 내려와 열쇠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조금 꺼냈다.
"문 수리비입니다."
주인장은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고 했다.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건지, 명부는 왜 가져가려 하는지, 문 수리비는 뭔지 일단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벌어진 입이, 열쇠를 든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문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주인장은 영문모를 안도감에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뭐였던거야..."
그는 카운터 안에서 거칠게 말에 올라타서 달리기 시작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되뇌었다. 왜 인지 따라갈 엄두가 서지 않았기에 그녀는 깔끔하게 명부를 포기했다.
"영주님! 알현을 바라는 자가 찾아왔습니다!"
네르바의 영주, 허버트는 그 말에 보라색 털쇼파에 걸쳐 누워있던 몸을 느리게 일으켰다. 어깨 끝에 걸쳐 있던 실크 로브가 결국 미끄러지며 흘러내렸다.
"뭐, 슬슬 올 것 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는 완전히 몸을 일으킨 뒤 제대로 고쳐 앉았다. 그리고 흘러내린 로브를 고쳐 입은 후 담배를 꺼넀다.
"병력들과 함께 들어오너라."
그의 여종자가 그 말에 웃으며 쪼르르 방을 달려 나간다. 곧, 문이 열리며 그의 방 안에 들어오기에는 좀 많은, 18명의 사병들과 그의 종자, 그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허버트는 거만하게 자신의 손님을 내려보다가, 곧 종자에게 손짓했다.
"술을 따라 주겠니, 흥이 죽었단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빈 술잔을 들자, 종자는 빠르게 술병을 들고 그의 빈 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빠릿빠릿 하지만 서툴러서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여자였다.
영주는 자신의 잠구었던 로브 깃을 다시 풀어 헤치며 술을 한잔 마셨다. 그리고 자신의 어전에서 아직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조금 무례한 손님을 내려다보았다.
"영주가 직접 찾아올 줄 알았건만... 아니었군. 실망이 크다. 넌... 넌 회의에도 참가했던 영주의 종자였지?"
붕대로 칭칭 감긴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비율은 타인과 착각하기 힘든 것이다. 그 손님은 그제서야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벨카의 영주, 요나님의 종자, 칼린입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건, 병력에 대한 것인가?"
칼린은 그 몸을 한번 흠칫 떨고서, 목소리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허버트는 도저히 흥이 안 사는 듯 다시한번 와인잔을 기울였다.
"나, 참. 미성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네만... 목소리가 완전히 가버렸군. 저자에게 레몬사탕을 가져다 주거라. 조금은 알아듣기 쉬워지겠지."
"괜찮습니다."
"8영주의 자비이다. 네가 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책장 쪽에 있는 유리 항아리를 가리켰다. 그의 작은 종자는 또 열심히 달려가 그의 사병들 사이에서 유리 항아리를 들고 뛰어왔다. 그리고 집게로 노란색 사탕을 하나 집어 들어 칼린에게 건냈다.
"먹어라. 이 앞에서."
조금 몸을 떨던 그는 곧 한 손으로 그 사탕을 받아낸 뒤 가면을 반정도 들어 올려 입을 벌렸다.
"그 가면. 완전히 벗어서 먹어라."
다시 한번, 칼린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그는 덜덜 떨면서 가면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고개를 숙여 사탕을 입에 집어넣었다.
'겁먹었는가.'
무리는 아니다. 8영주를 앞에 두고, 18명의 잘 훈련된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태이다.
"고개를 들어 보거라. 얼굴을 볼 수가 없구나."
그는 그의 잘빠진 턱으로 손을 옮기며 좀 더 자세를 풀었다. 파르르 떨던 칼린이 곧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말 다시 봐도 아름다운 자였다. 방 안에 작게 탄식같은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굉장하군."
짧게 감상을 말하고 오늘 처음으로 웃은 그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담배를 물었다.
"칼린이었나... 칼린, 난 아름다움이 좋다. 전사나 미인이나 정결함, 그런 것들은 '아름다운 것'들이지. 과욕을 부린다던가, 무모한 도전을 한다던가, 천박하게 구는 것... 그런 것들은 '추한 것'이다. 좋아하지 않아."
"그게 무슨-"
"요나는 추해졌지. 안 그런가?"
그는 한쪽 눈썹을 틩기듯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병력들은 어제 저녁에 돌아갔다. 연락이 없어서 말이야."
"...! 80이 전부 모이면 바로 도우러 와 주시는 것이 아니셨습니까...!"
"지속적으로 연락도 없는 곳으로 8영주의 사병들이 움직일 이유는 없다.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의 전사나 마법사들이다. 대답 없는 곳을 위해 대기할 시간 같은 건 없어."
"연락이 두절되고 있다는 것을 아셨을 텐데요!"
"이유까지는 모르지. 네놈들이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고, 연락을 피한 것일수도 있다. 이쪽은 네놈들이 충족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보아하니 아닌 듯하군."
칼린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허버트의 종자의 동공이 커졌다.
"...명부에는 그 누구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증거라도-"
칼린은 허버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품속에서 호텔의 명부를 꺼냈다.
"...그건 절도이다. 알고 있는가?"
"대답을 피하지 마십시요!"
"지금 네가, 같잖은 종자주제에 감히 8영주를 의심하는 것이냐."
심하게 불쾌한 듯 허버트는 눈가를 찡그렸다. 그의 종자는 몸을 조금 낮추며 등 허리 쪽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경계하는 고양이 같은 꼴이었다.
"네 가족을 의심하되, 권위는 의심하지 말지어다. 방금 나의 대답이 8귀족의 대답이다. 번복도 변화도 없다. 지원병력들은 어제 저녁, 네놈들이 연락을 받지 않아서 각자의 영지로 돌아 갔어."
꿇어앉아 있던 칼린의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그의 몸에 떨림이 사라진 것을 보고, 허버트는 슬슬이라 생각해 눈을 감았다.
"군인들은 맡은 바에 임하다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 걱정 말거라. 네 부대는 진위 여부를 밝히고 나면 적법한 절차를 따라 국가에서 할 수 있는 최우대의 조건으로 안치될 것이다. 마음을 추스리고 여기에 머무르며 기다리도록..."
말을 하던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묘한 감각이었다. 애초에 자신과 칼린 만이 말하던 공간이었지만, 조금 더 다른, 무거운 침묵이 생겨나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정지된, 그 모든 소리가 차단되고 있는 듯한 느낌. 분명 소리는 들려오지만, 무겁게 백색소음이 깔리고 있는 듯한 느낌. 미묘한 감각에 그는 눈을 떠 보았다.
눈 앞에서 칼린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을-"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칼린이 꿇은 무릎을 완전히 피고 일어날 동안, 그 방 안의 모든 것들이 움직일 수 없었다. 경험이 쌓은 감, 그것을 넘어선 생물로서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 그 감각들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눈 앞의 저것에게서 도망치라고 절규 중이었다.
사병 중에는 그 압박감을 버텨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자도 있었다. 패닉이 퍼지면서 실금하는 자들도 속출했다. 공기에 찢겨지는 느낌이었다. 허버트는 어색하게 들어올린 팔을 내리지도 못하며 눈 앞의 미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미인이 아니었다. 저건 마인(魔人)이다.
마침내 그가 얼굴을 들어 올린다. 분명 검은색이었던 그의 동공은 마치 타오르듯 붉게 안광을 흘려대고 있었다. 눈 안쪽으로 부터 붉은 빛이 일렁이는 듯했다. 허버트는 힘겹게 숨을 추스리며 이성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며 따라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의 종자는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챘던 자였다. 그녀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등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자신의 허벅다리를 찔러 정신을 날카롭게 유지했다. 억지로 솟아오르는 두려움을 정리해낸 그녀는 곧 자신의 영주를 향해 발을 옮기려는 칼린에게 덤벼 들었다.
"하아아아앗!"
악이 섞인 기합을 담고 단검을 휘둘렀지만, 칼린은 가볍게 그 검을 넘겨내고 그녀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 팔을 잡고 조금 저항하던 그녀는 곧 칼린이 그대로 바닥에 내리 쳐 박아서 움직임을 멈추게 되었다.
서로의 절규와 흐느낌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인위적으로 깔린 침묵 속에서, 허버트는 8영주의 자리에 걸맞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다시 입을 벌릴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칼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 늦지 않았다! 진정하고 대화를 하자!"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칼린도 마찬가지인 걸까, 그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허버트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악질적인 농담 같았다.
"발을 멈춰라! 이봐! 대화를 나눠보자!"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다방면에서 공기로 눌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심장이 고장난 듯이 빠르게 뛰면서 몸이 미친듯이 떨린다. 그는 이빨을 부딪히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한번 깨물고,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향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계속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병력! 병력을 보내겠다!"
그 말과 동시에 칼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허버트는 자신이 정답을 말했음을 직감했다.
"...얼마나?"
붉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그 사신은 질문했다. 영주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기, 기마부대 전 병력을 보내겠다! 나의 긴급소집 가능한 모든 병력을 출동 시키겠어! 약속하지. 일단 분노를 거두거라."
"전 병력이라면 어느 정도 입니까?"
"기마병이 127, 일반 병사가 146이다. 그 중 전투에 활용 가능한 마법사가 14이고. 처음에 보내려고 했던 나의 가장 강한 사병 10명도 같이 출전하게 될 꺼야. 즉각적으로 출동 시킬 수 있는 건 그 정도야. 믿어 주시게."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그는 머릿속에서 주판을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짧은 순간 동안 자신이 지금 내밀 수 있는 패를 계산해내서 뱉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진심이어야 할 겁니다."
사신은 불타는 눈을 자신에게 들이 밀며 마주했다. 그 아름다움까지, 허버트는 틀림없이 자신이 오늘 죽음 그 자체를 목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고 나서야 칼린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영주의 방 문을 나섰다.
칼린이 그 방을 완전히 나서고 문을 닫고 나서야 방 안에 있던 자들은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허버트는 땀으로 젖은 머리를 넘기며 자신의 흘러내린 로브를 벗어 내렸다. 그리고 셔츠를 꺼내 입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영주님!"
"아냐, 모두 최선을 다 해줬단다. 샤오란은 괜찮은 지 봐다오."
그는 셔츠를 잠구며 연신 땀을 닦았다. 아직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괜찮습니다. 기절했을 뿐입니다."
"의무실로 옮겨라. 다리와 머리 부상이다. 그녀를 옮길 두 명을 제외하고는 나를 따라와라. 충족을 토벌하러 간다."
"네? 영주님이 직접 지휘하실 겁니까?"
"그래."
"하지만-"
"하지만은 없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벨카의 영주에게 내가 적의가 없음을 밝힌다."
빠르게 겉옷까지 챙겨 입은 그는 장발을 묶으며 자신의 검을 쥐었다.
"실금한 병사들은 갑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오도록. 20분 주겠다. 최대한 빠르게 출발할 것이다."
아직도 조금 떨리는 손을 억지로 멈추며,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알약을 한 알 집어 삼켰다. 그 떨림이 지금 그의 선택이 맞는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