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1화 〉병(충)해 (81/164)



〈 81화 〉병(충)해

도르베는 피가 흘러나오는 눈을 연신 닦아내며 시야를 확보하려 했다. 한번씩 시야를 닦아낼 때 마다 눈에 보이는 적의 수가 늘고 있었다. 이대로면 모두가 위험하다. 도르베는 이를 악물고 욱신거리는 눈을 똑바로 떴다. 그리고 마나 회복을 위한 물약을 마셨다.

"도르베!"
발굽소리 사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도르베는 고삐를 잡고 몸을 낮춰 달렸다. 흙먼지를 넘으니 라드가 보였다.

"젠장! 영주가 당했어!"
그답지 않은 다급한 목소리에 도르베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주변에 영주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는 라드를 질책하기 위해 다가갔다.


"무슨 짓을-"
그리고 라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쪽 눈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흘러내리는 피에 흙먼지가 달라붙어 괴로워 보였다.


"너, 너...!"
"이야기는 나중이다! 도르베! 영주의 상태를 봐줘! 화살만 뽑고 따라가겠다!"
도르베는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화살을 맞은 것은 방어막을 치지 못한 도르베의 실책이다. 그가 영주를 지켜내지 못한 라드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영주는 어디에서 사라졌지?"
"여기서 조금  왼쪽으로 가!"
"끝나고 대화하자!"
상당한 자책을 느끼고 있었지만, 도르베도 군인출신이다. 감정때문에 망설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말머리를 돌려 빠르게 움직였다. 라드는 그런 그를 보며 눈알에 박힌 화살을 잡아냈다.

"하, 원... 편한일이 없어요..."
그는 한번 얼굴을 찡그리고 양 손으로 화살을 잡아낸  방해되지 않도록 화살을 짧게 부러뜨렸다. 뽑아내는 것은 상황이 진정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금방 8영주들의 원군이 올 테니까.


"씨발, 생각보다 아프네, 이거."
그는 웃었다. 극한의 상태에서는 결국 웃을 수밖에 없다. 누님은 그렇게 가르쳐 왔고 행했으니까.




도르베는 급하게 영주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전방위에서 달려오는 충족들을 혼자 견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후달리는 마나에 과도한 물약 복용으로 인지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상태였다. 그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며 필사적으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아내면서 전진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안장을 끼고 있는 말의 시체를 발견했다. 충족은 말에 안장을 씌우지 않는다. 도르베는 스쳐 지나며 그 말 아래에 깔려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

목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복장은 확실히 영주가 입던 그것이었다.


그는 이를 악 물고 검을 고쳐 쥐었다. 상심하거나 멈춰 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10명의 돌격대중에 한 명이 죽었다. 오히려 조금  필사적으로 전투에 임해야 한다.


"하아압!"
영주의 시체를 회수조차 하지 못하고 도르베는 다시 전투에 임했다. 약물의 부작용이 그의 손 끝을 점점 푸르게 만들고 있었다.



"조금 더 속도를 높이자!"
아스타가 공격을 막아내며 그렇게 말했다. 칼린이 아스타에게 검을 들이 밀던 자의 목을 베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나도 슬슬 한계야! 저쪽이랑 합류하자!"
"야!"
륑게가 그렇게 소리치며 그녀를 향해 물약을 던졌다.  아슬아슬하게  물약을 잡아낸 아스타에게 륑게가 말했다.


"일단 마법은 그만 써! 저쪽도 슬슬 마나가 한계일 꺼다!"
"하지만!"
"하지만이 아냐! 66생텀짜리 목숨이 되고 싶은 거냐?"
그 말에 아스타가 말을 멈췄다. 마법이 없으면 그녀의 전투력은 상당히 감소된다. 단순히  실력으로만 따지면 핀, 릴로와 함께 최약을 달릴 그녀이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써! 저쪽이랑 합류하고 써도  늦어!"
"지금은 륑게의 말을 따르도록!"
요나까지 합세해서 그렇게 말한다면 더더욱 할 말은 없다. 아스타는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물었다.

"낙심할 시간 없어! 가자!"
"... 미안하다!"
아스타는 물약을 삼키고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과 함께 왼쪽편으로 계속해서 돌입했다.


칼린은 일종의 각성상태를 겪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오히려 전장에서 잊게 된다. 혼자 남아 손을 씻을  보다 주변에서 목이 날아다니는 이 광경이 오히려 더 비현실 적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익숙치 않은 살육전 중에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사고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때문에 그 전장 속에서 그의 마법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지금 그의 마법은 전장에서 가장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검이 되어 있었다.


'확실히 강하다.'
이리하는 그런 그를 보며 그렇게 느꼈다. 몰려오는 적들을 척살해 내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칼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기술은 점점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무너지고 있는 정신과는 별개로.


그녀는 거기까지 파악하고서 언젠가 적이 될 지도 모르는 요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녀를  둬야 습관이든 약점이든 대적하게 되었을 때의 파훼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혼자서는 무리다.'
이리하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전차라는 별명이 어떻게 생겼는지  수 있었다. 그녀는 지나는 길의 모든 생명을 짓밟으며 감속없이 달려 대고 있었다. 마법은 없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보면 볼수록 전투에서는 약점을 찾을 수 없는 자였다. 이리하는 검을 바꿔 잡았다. 살점과 피, 기름이 묻어 이가 나간 검을 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저자와 함께 라면 오늘 저녁까지는 버틸 수 있다.'
칼린을 어디로 빼돌릴 필요는 없어졌다. 다시 한 번, 이리하는 말의 속도를 높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고전하고 있는 도르베를 마주했다, 아니, 도르베가 너무 안쪽까지 파고 들었기에 먼저 마주한 것이었다.


"저거 도르베 맞지?"
아스타가 재차 확인한 이유는 그의 푸른 머리가 붉어 보일 정도로 피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르베가 맞는 것을 확인하자 아스타는 말의 속도를 높였다.

"아스타!"
"도우러 왔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손목을  긁어 냈다. 륑게는 그 모습에 잠깐 얼굴을 감싸 맸지만, 사실 나쁘지는 않은 판단이었다. 아스타가 만들어낸 빈틈으로 분할되어 있던 부대원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휘관님! 영주가!"
"지금 말고! 다른 부대원들은 어디 있지?"
"아직 후방 쪽입니다!"
"합류하라!"
요나의 호령에 도르베는 한쪽 코를 막고 콧김을 냈다. 코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던 코피가 분출되어 나왔다.

"소니아! 적들은 어디까지 들어왔나!"
'아직 견제 가능한 거리입니다!'
"전진하라! 뒤로 오는 적들을 상대하지 마!"
후면 견제 없는 일렬 진, 요나를 선두로 그들은 착실하게 모이고 있었다.

"잠깐!"
 달리던 요나가 갑작스레 말머리를 돌리며 방향을 꺾었다. 바닥에 보이는 습기, 이 냄새. 바닥에 기름이 깔려 있었다. 요나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스타! 내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피를 뿌려라!"
"얼만큼요?!"
"한방울이면 돼!"
기름진 웅덩이는 충족들이 밟고 지나간 덕분에 오히려 넓게 퍼져 있었다. 그 웅덩이를 기준으로 부대가 반으로 갈라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방으로 속도 낮추지 마! 지나면서 부대원을 마주치면 최대한 전방으로 이동시켜!"
"못 찾은 동료는-"
"어쩔 수 없다!"
그 말에 칼린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무슨 작전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한다면 저는 반대합니다!"
그는 요나의 뒤를 바짝 쫓으며 그렇게 말했다. 요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미 임무 전달은 끝났고, 부대는 분할되었다! 번복하지 않는다!"
"말도 안됩니다!"
"칼린! 이건 전쟁이다!"
강하게 다그치는 말에 칼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요나도 굳이 더 다그칠 생각은 없었다.

"불만은 전쟁이 끝나고 듣겠다! 달려!"



갤러한은 멀리서 달려오는 아스타를 보았다. 그는 맞대고 있던 검을 팅겨 내고 검날을 잡아 검의 코등이로 마주하던 충족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튄 피를 닦아내며 그는 아스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아스타가 마주 흔드는 손의 손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건-'
갤러한은  피를 보자 마자 주머니에서 있는 기름 통을 전부 꺼냈다. 그리고 주변의 병력들에게 뿌려대기 시작했다.


"아스타! 마나-"
"다 있어! 영주가 똑같은 거 묻더라! 뿌리고 튀어!"
"확인!"
갤러한은 그렇게 답변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옆쪽에서 소니아와 릴로가 나오는 것도 확인했다. 추격해 오는 충족들보다 빠르게 달리는 것은 불가능 했지만, 적절한 지원 덕분에 어찌저찌 병력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은 가능했다.


"지금!"
요나의 호령에 아스타는 마지막으로 인원들을 파악해 보았다. 라드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라드가-!"
"터트린다!"
도르베의 말을 끊어내며 아스타가 엄지를 내렸다. 번쩍, 하고  사이에서 빛이 나는 듯하더니 삽시간에 전장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라드씨!"
소리치며 다시 말머리를 돌리려는 칼린을 요나가 막아 섰다. 그리고 가만히 불이 번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충족들에게 불이 옮겨 붙으며 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옮겨 붙는 불보다도 빠르게 그들의 진형이 바뀌기 시작하더니, 곧 불길을 감싸며 병력이 이분할되기 시작했다. 계획만큼 큰 피해는 입힐 수 없었다.


"화살!"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조금 더 전장의 후방 쪽으로 향하기 위해서 였다. 날아오기 시작하는 화살들을 막아내던 도르베는 곧 생각을 바꿨는지 말머리를 돌렸다.

"어디가!"
"베리어도 금방 사라진다! 얼른 전방으로 달려!"
소리치는 아스타를 뒤로하고, 도르베는 다시 충족을 향해 달렸다. 칼린도 요나에게서 떨어져 말머리를 돌렸다.


그 둘은 베리어를 타고 불을 넘어갔다. 잠시 뒤, 약간 재를 묻힌 상태로 그들이 불길을 뚫고 나왔다. 칼린의 말 뒤에는 라드가 기대고 있었다.

"계속 쏴! 그들을 뒤쫓지 못하게 해!"
화살은 멈추지 않았다. 둘은 전력으로 달렸고, 곧 다른 부대원들에게 합류해 초소 쪽으로 돌아 갈  있었다.

"맙소사..."
요나는 충족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다. 그들은 말로 불 주변을 돌면ㅅ허 흙먼지로 불을 꺼내고 있었다. 불이 붙어 있는 동안까지는 시간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겨우 살아 돌아온 9명의 기마부대원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이 불을 끄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곤란하다.'
차다레마는 반정도가 줄어든 자신의 병력들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정도로 병력손실이 생길 줄은 몰랐다. 기름이 깔린 대지는 말들의 속도를 낮추거나 화공으로 충족들을 당황 시키는 것은 무리였지만, 차다레마의 토벽의 범위를 제한 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기마부대의 지휘관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아마도 자신을 능가할 수준이다.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저들도 이번이 최종 국면이라는 것 정도 뿐이었다. 적진에는 어린애들도 분명 보였다.

일단 자신을 죽일 '붉은 눈'의 견제는 끝내 뒀다. 성가신 베리어를 사용하던 자도 어느 정도 견제를 해냈다. 지금 결단을 내려야 했다. 평소였다면 망설임없이 들어갔겠지만, 쿠탕카의 실수는 그녀의 가슴속에  깊숙이 경계심을 박아 두었다.


그녀는 적들을 교란시키고 다시 후방으로 빠져나간 상태였다. 토벽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전황을 읽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불이 꺼지는 것을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선택을 내렸다.

"후퇴!"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이라도 쓴 듯 우렁찼다. 소란스럽던 그 전장 속에서 적진에까지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로도 겁을 줘서 적들의 사기를 줄이고는 했다.

"기름이 마르면 다른 씨족들과 합세해서 다시 쳐들어간다! 일단 퇴각이다!"
불이 거의 다 꺼지자 남은 병력들은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곧 들어왔을  만큼이나 빠르게 그들은 돌아갔다. 4시간의 전투, 오후를 넘어갔지만 아직 지원병력은 오지 않은 상태였다.


"륑게, 저자들은 뭐라고 하고 간거냐."
요나의 질문에 륑게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더 몰려들 겁니다. 새벽에  수도 있고."
굳건히 버티던 마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황은 심각했다. 부상자가 6명, 사망자가 13명. 그 중 6명은 16살을 채 넘기지 못한 나이였다. 정신적 지주였던 영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살아남은 영지민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갈렸다. 의욕을 잃거나, 불만을 가지거나.

"끼리끼리 목숨은 잘도 지켰군. 처음부터 우리 영주님은 보호대상도 아니었던 거다."
"애초에 충족에게 맞서 싸운다는  말이 안되는 일이었어."
"...지금이라도 저들을 생포해서 충족에게 넘기면 마을은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몰라."
물론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그들이 충족들과 싸움을 비등하게 만들고 있는 비대칭전력인 소금부대원들을 생포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 전시상황은 그들의 사고를 흐리고 있었다. 영지 내부는 그런 불온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소금부대원들의 상태도 좋지는 않았다.

"...라드, 괜찮아 보이는군..."
"넌 별로 그렇게 안보이네."
라드는 하얗게 질린 도르베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누워있는 그의 양 손을 칼린과 아스타가 붙잡고 있었다. 얼음장 같았다.


"왜, 왜 이렇게 차가운 거죠? 도르베도 죽는 건가요?"
"죽지는 않아. 그냥 마나포션의 부작용일 뿐이야."
라드는 가볍게 대답하며 눈에 감긴 붕대를 만져 보았다. 벌써 다시 피로 축축해져 있었다.


"손 끝부터 피와 마나의 흐름이 둔해지지. 가만 두면 괴사돼서 손가락부터 떨어질 거다. 계속 잡아주고 있으라고."
"아아, 안돼..."
칼린은 도르베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떨구며 머리를 갖다 댔다.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지만 도르베는 이미 손 쪽에 감각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다.


"괜찮을거야, 도르베. 조금만 버텨. 병력들이 오면 바로 네르바의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어."
"하하... 네가 할 말이냐."
안심시키려는 듯 웃으며 말하는 아스타를 보며, 도르베는 웃었다. 그런 아스타의 어깨를 이리하가 붙잡았다.


"거기서 비켜."
"왜."
"너도 비슷한 상태야. 저 정도로 심하지 않을 뿐이지. 손 끝은 이미 차가울 껄?"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 보았다.


"봐 봐. 차갑네. 너도 누워 있어."
"난..."
"아스타."
주저하는 아스타를 향해 도르베가 웃었다.


"지랄 말고 가거라. 또 어떤 빚을 지게 하려고."
하얀 그의 안색을 보며 아스타는 고개를 떨궜다. 그나 그녀나 안색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가만히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아스타는 천천히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많이 말이 거칠어 졌어, 도련님."
"뭘, 스승 따라가는게지."
아스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빈 병상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자리는 넘쳐났다. 이 영지에서 가장 넓은 것이 시체 안치소였기에.


"미안하다, 라드."
"응? 나?"
"그래. 내가 방어막을 잘 폈더라면 그 부상은 입지 않았을테지... 내 실책이다."
라드는 도르베의 사죄에 턱을 긁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꺼냈다.

"그 꼴인데 마법 쓰면서 날 살려줬잖냐. 쌤쌤으로 치자고."
"그래. 뒤탈없게 확인해보려고  말이었다."
"나쁘지 않군."
신발 밑창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웃음기없이 도르베를 쳐다보다가,  불붙은 담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는 도르베와 이리하와 칼린만이 남았다.

"도르베."
"왜 부르냐."
"죽지마요."
낮고 지친 목소리였다. 그의 미성도 피로는 못 이겼던 것일까, 조금 쉬어서 우스운 목소리이다.


"... 이걸로는 안 죽어. 마나 순환만 다시 되면 회복 가능하다. 걱정하지 마."
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리하가 입을 열었다.

"...마사지라도 해줘, 칼린. 순환을 도와줄 거야."
"...네."


"왜 지원병력이  오는 겁니까? 이제 20시에요!"
갤러한이 분개해서 요나를 잡고 묻고 있었다.


"영민들 지금 폭동 나려는 거 륑게랑 소니아랑 릴로가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다고. 네르바랑 연락수단도 없는 겁니까?"
"...받지 않는다."
"뭐라고?"
당황한 갤러한을 향해 요나가 통신기를 꺼내서 들이 밀었다.


"응답하지 않아. 고립 당했다."
잠깐 멍하니 있던 갤러한은 곧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먹을 쥐었다.


"...모두가 배신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라느니, 잘난 말만 해대더니 이 꼬라지입니까? 이대로면 전부 죽을 거라고, 이 씨발! 뭐가 안전한 임무입니까!"
"진정해라. 연결불량의 이유는 아직 몰라."
"진정하게 생겼어요? 지금 충족새끼들 들어오면 전부 죽는 거라고!"
갤러한은 안전(案前)조차 잊고서 소리쳤다. 그러나 요나는 굳이 화내지는 않았다. 그저 가볍게 대답했다.

"... 오늘은 넘길  있을 것이다. 내일 새벽에 전령을 보내 보도록 하마."
"그게 대답이요? 그럼 영지민들한테  말 전달은 직접 하시던가."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갤러한은 발을 돌렸다. 그를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요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찾던 그녀는 뒤에서 다가온 라드를 마주했다.

"찾으시는 거 있습니까?"
"...둘 다 찾은 것 같군."
요나는 라드가 들고 있던 등불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예상이 현실이  것 같은데..."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담배도 꺼냈다.

"설마 지원병력이라는  이 시간에 찾아올 것 같지는 않거든. 어떻게 대응할 생각인 겁니까?"
등불을 올리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라드를 보며, 요나는 깊게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확답할  없어. 도박이 될 거다."
"...뭐?"
담배를 걸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라드가 묻자, 요나는 하나하나 짚어가듯 말했다.


"타이밍의 문제가 될 것이다. 8영주의 병력이야. 의심하는  마저도 중죄가 될 수도 있지. 무조건 전령을 보내 확인할 필요는 있다는 거다... 확실히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여야 해."
"하, 전략적인 사람은 아니셨구만."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요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네게 불리한 상황은 아닐텐데. 하려던 일도 끝냈겠다. 지금 탈영한다면 오히려 네놈에게는 기회가 아닌가?"
라드는 요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굳이  말을 꺼낸 의도는 무엇인가. 이득 볼 것이 없는 말이었다. 라드도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고.

"...떠보는 겁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를 걸칠 뿐이었다. 라드에게 또 한번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자기 패는 보여주지도 않을꺼면서, 무작정 고르라는 겁니까?"
지금 흐름을 보면 요나의 편에  이유는 전혀 없다. 그녀가 이 상황을 예측했다고 해도, 대응책이 도박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걸 따라갈 이유가 없다. 이성은 그렇게 말했다.

"나, 참. 이쪽은 오늘 눈 한 짝이 없어졌다고. 너무 가혹한 거 아뇨?"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의 감이 이미 선택을 끝냈다.


"아편이나 좀 꽂아 주쇼. 눈이 아파서 죽어버릴 것 같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금은 눈앞의 웃음을 믿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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