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병(충)해
하룻밤이 지났다. 어찌저찌 농성은 해내고 있었다. 충족은 하룻동안 100을 조금 넘는 군세로 4번을 침공해 들어왔다. 돌격대에서는 사상자가 없었지만, 전투 과정에서 급조한 땅굴은 무너졌다. 이제 그들은 지리적 이점이 없이 전투에 임해야 했다.
영주의 병사들은 이제 여섯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병영 내에 퍼져있던 역병과 전쟁의 격렬한 상황이 겹쳤기 때문일까, 4명은 전투조차 참여하지 못하고 죽었다. 총동원령에 따라 14살을 넘는 영주민들은 강제로 전쟁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아직 마나순환법을 익히지 못해 활 시위를 잡아당기지도 못하는 어린애들은 화살과 식품, 병자와 사상자를 옮기는 일을 맡았다.
방역복은 16벌 뿐이었다. 그마저도 10벌은 소금부대의 마차에 원래부터 꽁박혀 있던 것이었다. 요나는 부대원들에게 입힐 방역복을 영지의 어린애들에게 양도했다. 부대원들 모두 불만은 없었지만 불안은 있었다.
100의 병력이 하루만에 4번을 쳐들어 오는 것은 그들의 농성전을 더 괴롭게 만들었다. 그들은 마치 문어가 촉수를 뻗는 듯 불규칙하고 유연하게 진형을 바꿔 대었고, 이러한 전략은 상대의 수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다. 총병력으로 덤벼 들어도 적의 반도 되지 않는 병력이었기에 교대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단 한명도 제대로 된 수면을 가질 수 없었다. 버티는 데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버텨낼 수 있던 것은, 지원병력이 내일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 덕분이었다. 요나는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먼저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남은 자들의 사기를 올려세웠다.
"약해지면 안돼. 약해지면 안돼."
칼린은 손을 씻고 있다. 투명한 물이 그의 대리석같은 손에서 붉은 물을 씻어낸다.
"약해지면 안돼. 약해지면 안돼. 약해지면 안돼."
게속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손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군인은 살인마가 아니다.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함이다. 이 나라의 국민들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함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함이다.
"약해지면안돼.약해지면안돼.약해지면안돼.약해지면안돼.약해지면안돼."
그는 계속 손을 씻는다. 가만히 붉어지는 물을 바라보며 혼자서 계속해서 생각한다. 그래, 어쩔 수 없다. 그의 알량한 도덕감이 문제이다. 혼자 착한 게 아니다. 남들은 각오했을 뿐이다. 각오의 차이일 뿐이다. 이제야 각오했고, 이제야 자신도 누군가를 지키는 입장이 된 것이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지금 이 세계에서 그는 군인이다.
그런데 피가 안닦인다.
"약해지면..."
칼린은 반쯤 긁어내던 그의 손을 내려보았다. 전생에 보았던 시위가 떠오른다. 군인을 예비 살인자들이라니, 그런 말들을 하는 시위였다. 그 때 웃으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던 것이 떠오른다. 아무도 자신을 살인자라고 욕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방호수단으로 사용된 무력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살인자 본인이 해도 좋은 것일까.
전부 빌어먹을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맹새컨데 단 한번도 자신의 동료들을 살인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만큼은, 그들과 같은 짓을 했는데도 자신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씻던 손을 물 밖으로 꺼냈다. 차거운 물 때문에 손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 씻었어?"
이리하가 말을 건다. 칼린은 손을 두어번정도 털고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돌아가죠."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나요, 그런 질문은 필요 없다. 그런 질문은 오히려 이리하에게 불안감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자신과 함께 이곳으로 왔던 것도 같다. 아닐 수도 있고.
"칼린..."
이리하는 뭐라도 말 하고 싶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춘기 때 부터 전장을 전전하던 이리하이다. 교리에 따라 행동하며 나름 자신은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순간이 다가오니 필요한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네?"
방금 전에 그런 모습을 보이고도 그는 최대한 천진하게 답한다. 목소리에도 가면을 씌우는 듯 하다.
"난 네 편이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말.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동료밖에 남지 않았다. 하다 못해 그에게 의지할 수 있는 가지라도 되어 줄 수 있다면 좋다.
"...알아요."
영양가 없는 대화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 둘은 전장으로 발을 옮겼다. 해가 뜨고 있다. 농성전의 마지막날이 찾아왔다. 오늘 지원병력들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쉽게쉽게 가는 줄 알았더니... 역병이고 뭐고 참 지랄도 많았다."
소니아가 조금 거칠어진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불안한 듯 영지민들을 쳐다 보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갤러한의 말에 소니아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역병이 돌아다니잖냐! 가난한 곳이라서 물자 보급은 커녕 우리 물자까지 나눠줘야 됐었고... 아, 진짜! 우리 영웅된 거 아니었냐고... 왜 이렇게 힘들게 일해야 하는 거야..."
"힘든 일을 하니까 영웅인거지."
"전장에서 역병걸려 죽는 것도 영웅의 일이냐? 충족놈들은 잠도 없는지 저 병력으로 밤낮없이 쳐들어오고! 역병이 없어서 저 꼬맹이 놈들이 기침만 해도 손발이 달달 떨려! 아! 오늘로 끝이라서 감사합니다! 씨발! 빨리 와 줬으면 좋겠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붙잡으며 그렇게 말하고서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담배도 다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륑게쪽을 바라 보았다.
"야! 내 담배!"
"줬다 뺏으려 하네, 어림도 없지."
륑게를 향해 돌덩이를 던지려던 소니아의 손을 잡은 것은 라드였다. 그는 소니아를 내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담배는 내 꺼를 줄게. 그리고 역병은 뭐, 걸려서 죽은 애들을 보니까 조금의 잠복기를 가진 병인 것 같아... 아직 모두 멀쩡한 것 보면 우리 부대원 중에서는 역병으로 죽을 사람은 없을 꺼야."
"...그래?"
"오늘 지원병력이 올 경우의 말이지만."
라드는 그렇게 말하고 담배를 꺼냈다. 소니아는 그 담배를 건내 받으며 입에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의 질문에 라드는 조금 굳어있던 표정을 다시 평소대로 되돌렸다.
"그냥, 나라님은 절대로 일을 똑바로 안한다는 말이었지."
"야, 지금 치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농담같다, 라드."
갤러한과 소니아의 질린듯한 시선을 받으며 라드는 요나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이다. 그냥..."
그리고 말 끝을 흐렸다. 요나는 분명 그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크게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었다. 뭔가의 대처방법을 생각해 둔 거겠지. 아니, 거기까지 생각할 것도 없다.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질 확률은 적다. 그 때 부터는 정말 전면전이 되어 버릴 테니까.
"농담 한 번 쳐봤지."
그는 웃으며 영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생기지 않을 일에 쫄기 보다는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일어나도 아마 요나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라도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다. 일단 지금은 1초라도 더 오래 사는 것이 목표이다.
"슬슬 끝내자."
차다레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동포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다 이긴 싸움이다. 언제든지 꺼 버릴 수 있는 목숨들이다. 그래서 복수를 담아 그들을 말려 죽이려고 했을 것이었다.
"이유는?"
그래서 그 질문은 합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차다레마는 그 말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초광월에 자신의 사조성이 뜰 것이라고 말 할수는 없다.
"내 뜻에 반하는 자는 힘으로 질문하라."
조금 강압적인 질문. 그러나 거기에 그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는않는다. 그게 그들이 사는 방식이다. 차다레마는 어떻게든 의문을 삼키는 자신의 동포들을 보며 웃었다.
"오늘 전쟁을 끝낸다."
내일이 초광월이 될 것이다. 그 전에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소니아는 감시탑에서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 자리는 소니아와 핀의 고정석이 되어 있었다. 소니아는 핀의 담배를 뺏어 물고 가만히 기대서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잠 좀 자고 싶다, 씨발..."
그렇게 불만을 표하는 소니아의 말에 핀도 앉은 자리에서 고개만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다가 곧 졸려서 끄덕거리던 고개를 멈추고 몸을 굳혔다.
"씨발, 벌써 또 와?"
소니아는 핀의 반응을 보고 귀찮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평소처럼 통신을 위해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니, 그, 오긴 하는데-"
"오긴 하는데?"
핀은 조금 더 자세히 들어 보기 위해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다급하게 외쳤다.
"소니아, 이거 총병력인 것 같아요! 꾸덕하게 몰려옵니다!"
"뭐?"
소니아는 놀라서 망원경을 잡아 보았지만, 아직 모래먼지가 일렁이는 것조차 보이지 않는 거리였다. 자세히 보이지가 않았다.
"확실한거지, 핀!"
"엄청 몰려와요! 야생 물소떼같은 게 아니면 확실해요!"
"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보겠다고, 씨발..."
그녀는 그렇게 한탄하고서 요나에게 외쳤다.
"지휘관님! 총병력 같답니다! 육안에 들어오기 전에 준비 끝내요!"
요나는 그 말에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병력들을 보았다. 그리고 살짝 혀를 차며, 최대한 낭패감을 드러내지 않고 물었다.
"총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나?"
"어,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 그냥 많아요!"
"그거면 됐어!"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최대한 버텨라! 오늘 내로 원군이 온다! 버티기만 하면 우리 승리야!"
"이런 씨발, 저새끼들은 그걸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다 밀려들어오냐?"
갤러한이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검을 쥐었다. 그가 쓰던 검이 아닌, 충족의 곡도이다. 그의 전 검은 이미 부서졌다.
"빠르게 준비해라! 버티기만 하면 된다! 돌격부대는 먼저 전방에서 대기! 후방 부대는 화살을 최대한 많이 쌓아둬!"
이제야 흙먼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평소보다도 높게, 마치 황색의 해일 같았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 싸움이 시작되었다.
양측이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 부터 화살들이 위협적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후방의 주둔병력들에게 닿을 화살은 아니었지만, 전방 돌격부대의 행동을 제한하기에는 충분한 수의 화살이었다.
도르베의 방어막은 딱 화살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는 연신 물약을 삼켜대며 방어막을 펼치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이 그가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 지 보여줬다.
"속도 낮추지 마! 도르베의 방어막이 무사할 때 안쪽까지 돌입한다! 후방주둔병력들의 사거리 안에서 그들의 진입을 방해해야 돼!"
요나는 이제는 쉬어버린 목으로 계속해서 소리쳤다. 말발굽소리에 묻히지 않으려면 악을 섞어서 소리쳐야 했다.
충족의 시야에도 슬슬 돌격부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자신의 앞길을 막아내고 있는 부대이다. 달갑지 않다. 챠다레마는 그들을 다시 한번 천천히 뜯어 본다.
붉은 머리와 눈. 이 기마전을 성가시게 만드는 장본인. 저 폭발마법을 지닌 계집이 분명 자신의 사조성이리라. 저 눈이 '붉은 보름달'이리라. 그녀는 반쯤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후방에 대응사격을 하지마라."
차다레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그녀의 부대가 활을 등에 메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눈이 흰색으로 조금 빛이 나는 것과 동시에, 눈 앞에 높은 흙벽들이 생겨났다. 그 흙벽은 곧 ㄷ자 형으로 돌격부대의 정면을 가로 막았다. 왼쪽은 낮고 오른쪽으로 점점 높아지는 형태였다. 그 흙벽을 넘으며 병력들이 분산되기 시작했다.
"말을 멈춰! 각자 재량에 맞게 위치를 사수하라! 두 명 정도는 흙벽을 나와서 적진의 구멍을 확인해!"
요나의 말과 함께 부대원들이 원형을 그렸다. 전방위를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나랑 아스타가 나가겠다!"
도르베가 코피를 뿜어내며 그렇게 소리쳤다. 그리고 말의 속도를 높여 흙벽에서 나왔다. 아스타가 그를 따라 나섰다.
"아스타! 벽 바깥쪽에서 저걸 무너뜨려라!"
"확인!"
아스타는 그렇게 대답하며 검으로 자신의 팔을 그었다. 그리고 흐르는 피를 아끼기 위해 상처부위를 붙잡았다. 그녀도 빈혈이 왔기에 오래 버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네가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차다레마는 작게 혼잣말 하고서 그녀의 반대방향, 즉 흙벽을 타고 오를 수 있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 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휘관의 이동 방향은 신경쓰지 않고 충족은 하나의 거대한 액체괴물처럼 흩어지며 퍼져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거 왜 저기로가냐?"
"내가 가겠다!"
도르베는 간단히 대답하고서 차다레마의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 동안 나머지 병력들은 흙벽 안쪽으로 밀려들어 오는 충족들을 피하기 위해 원형진을 유지하며 후진하고 있었다.
"깔아 뭉게기만 해도 놈들은 죽어!"
그런 소리와 함께 흙벽의 안쪽으로 병력들이 내려왔다. 그러나 생각보다 후방의 화살은 매서웠다. 돌격부대가 후진하며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했다.
"칼린과 륑게, 이리하는 나와 같이 오른쪽을 향해! 아스타와 같이 화력을 맡는다! 나머지 병력은 왼쪽으로 빠져서 도르베의 지원을 받으며 적들을 견제해! 앞길을 막아내라! 그리고 라드!"
라드는 요나를 돌아 보았다. 요나는 라드와 영주를 한번씩 바라보고서 입을 열었다.
"목숨을 걸고 영주님을 지켜 드려라."
라드는 웃었다. 신호가 떨어졌다.
"맡겨만 주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옆에서 이번 전쟁을 통해 조금 성숙해 진 듯한 영주의 등을 한번 툭 쳤다.
"잘부탁한다!"
"걱정마쇼. 지켜드리지."
그 말과 함께 그 둘도 왼쪽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요나는 떠나는 부대원의 등과 무너지기 시작하는 흙벽을 바라보다가 칼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장난 아니구만...!"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며 여기저기에 피를 뿌려 댔다. 여기저기에서 불규칙하게 솟아오르는 흙벽을 충족들은 자유 자재로 넘나들며 그들보다 한 층 높은 곳에서 부대원들을 압박했다. 필사적으로 그 흙벽들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마나든 피든 한계가 찾아오고 있는 듯 했다. 말 위에서 중심을 잡는 것도 힘들어 지고 있었다.
"도우러 왔다!"
그 말과 함께 이리하, 륑게와 칼린, 요나가 도착했다. 기마전에 가장 공격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일행들이었다.
"왼쪽방향으로 밀고 나가며 저쪽과 합류한다! 확인했나?"
"옙!"
아스타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붙잡기 위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그리고 어느새 흙벽이 세워져 보이지 않는 왼쪽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왼쪽에서는 도르베의 배리어와 함께 병력들이 일렬로 서서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3차원으로 공격해 오는 충족을 계속해서 막아내는 것은 애초에 무리인 일이었다. 그들은 조금씩 후퇴하면서도 일단 어찌저찌 그들의 진입을 막아내는 것 정도만 성공하고 있었다.
"저놈들 화살도 다시 쏜다!"
갤러한이 그렇게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화살들이 떨어졌다. 도르베는 조금 더 필사적으로 마력을 끌어 모았다. 충혈된 눈에서 피가 조금 떨어지기 시작했다.
갤러한은 바닥에 기름을 던져냈다. 한마리라도 넘어지면 이득이었지만, 충족의 말들은 넘어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름 위에서 그 미끄러움까지 이용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무슨 씨발! 두다리로 뛰기도 힘들텐데!"
새삼 감탄하면서 갤러한은 욕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려고 했지만, 고삐를 잡으며 주머니에서 성냥을 찾아 꺼내는 것이 힘들었다.
"아, 젠장!"
결국 불을 붙이기도 전에 달려 온 충족의 병사의 검을 막아내느라 기름을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해 졌다. 요나가 여기에 있었더라면 통신을 시켜 불화살이라도 쐈을 것이다. 갤러한은 부디 저 기름이 오른편에서 모일 병력들의 방해만 되지 말아 주길 빌었다.
릴로는 싸우면서 점점 후퇴한 뒤, 피눈물로 시야가 뿌애진 도르베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게 달려가 날아오는 검을 막아냈다. 그리고 눈을 비비는 도르베를 뒤로 밀어냈다.
"누구냐? 릴로냐?!"
"맞아! 뒤로 조금 빠져!"
"릴로! 방어막이..."
"일단! 물약 먹고! 빠졌다가 피 멎으면 다시 돌입해!"
"...부탁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뒤로 빠졌다. 방어막이 회수되기 시작했다. 라드는 그걸 보고 지금이 타이밍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영주님!"
"뭐, 뭐냐!"
정신없는 와중에 애써 위엄을 유지하려는 그 모습에, 라드는 그래도 영주라는 생각을 했다.
"도르베가 후퇴했어! 그 자리 좀 매꿔야 겠소!"
"? 잠깐-"
안색이 바뀌는 영주를 뒤로 하고, 라드는 충족들을 헤쳐나가며 앞서기 시작했다.
"갑시다!"
영주는 그 말에 따라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저 라드라는 남자의 실력은 보증된 것이었다. 지난 전투에서도 봐 둔게 있다. 아마 그의 뒤가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래, 이 압도적인 병력차를 어떻게든 비비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연 재해와도 같았던 충족들과 이렇게 고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처음 그들이 왔을 때만 해도 상상으로만 했던 나날들이 다가오고 있는 듯 했다.
3달 주기로 충족들의 먹을 거리를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먹을 거리가 없을 때에 미리 무덤을 팔 필요도 없고, 잉여품목이 생겨서 그걸로 다른 영지들과 정상적인 교류를 하며 이 땅을 진짜 '영지'로 바꾸는 것. 전쟁중에 죽었던 아버지를 높이 세우는 것. 더 이상 아침해를 무기력하게 바라보지 않는 나날. 모든 것이 눈앞이었다.
그의 부풀어 오른 기대감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라드가 쥐고 있는 화살의 의미를 잡아내지 못했다.
"하, 씨발... 일단 살아야 겠지."
눈 앞의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그 화살을 집어 들었다. 영주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라드는 자신이 쥔 화살을 힘껏 오른 눈에 박아 넣었다.
"무슨-"
괴로워하는 라드의 모습이 기울어 진다. 아니, 세상이 기울어 지고 있다. 옆으로 갸우뚱, 하고 세상이 기울어 지고 있다. 아니, 이건-
격한 통증과 함께 다시 제정신을 차린다.모래먼지로 사방이 뿌옇다. 말째로 넘어졌다. 급하게 말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말의 오른쪽 앞다리가, 무릎째로 부서져 넘어져 있다.
그는 황급하게 원인을 생각해 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돌에 얻어맞은 듯한 그 다리를 까딱이며 그의 말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안돼,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영주는 필사적으로 말을 부둥켜 잡으며 일으켜 세워 보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상황도 말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오른 다리가 말의 몸체에 깔려 짓뭉개져 있었다.
"아, 이, 이런-"
그의 머릿속이 하얘진다. 죽음의 냄새를 느낀다. 필사적으로 말을 밀어내지만, 그게 악수(惡手)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차라리 들고 있는 검으로 그 다리를 잘라냈다면 당장은 모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괘, 괜찮아. 괜찮아."
그는 라드의 방향을 바라 본다. 흙먼지 때문에 그가 보이지 않는다. 최대한 호흡을 유지하며 그는 죽어가는 자신의 말과 비슷하게 버둥대기 시작했다. 눈물이 터져나오지만, 시야를 방해하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는 연신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내며 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럴순 없어, 이럴 순 없어!"
영민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 좆만하고 좆같은 땅을 못떠나 자신에게 매달리던 영민들이 나를 기다린다. 이제야 그들과 함께 이 땅을 살만하게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제발, 제발! 움직여!"
필사적으로 말을 밀어내던 그의 눈 앞에, 흙먼지 뒤로 검은 실루엣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아, 라드다. 그가 필시 자신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돌아와 주는 것이다. 이 영지가 안정화 되고 그가 복구부대를 나온다면, 그를 나의 기사로 삼자. 그 정도는 베풀어야 할 은혜이다. 만면의 미소를 머금으며, 눈물 콧물로 얼굴이 흥건해진 그가 한껏 손을 흔들어 보았다.
그런 그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흙먼지 속에서도 그 광채를 발하고 있는 충족의 곡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