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8화 〉병(충)해 (78/164)



〈 78화 〉병(충)해

"저, 적이 돌아갑니다!"
감시탑에서 망을 보던 병사가 그렇게 소리쳤다.


"저걸 보면 당연히 쳐들어올 줄 알았는데..."
영주의 말에 요나는 웃으면서 기지개를 폈다.

"저쪽 지휘관은 신중합니다. 저항도 못하고 있던 상대가 갑자기 자신의 공격대를 몰살시켰다면 당연히 경계하고 진열을 재정비하겠죠."
"...그렇다면, 완전히 끝난 건 아닌 겁니까?"
아직도 조금 어안이 벙벙한 영주에게 요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끝나다니요, 진열을 재정비하고 총력으로 쳐들어올 겁니다."
영주는  말에 안색이 하얘지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왜 굳이 적들을 도발한 겁니까? 이제 저들이 병력을 준비해 오면 우리는 전부 죽을 거예요! 아아, 역시 타협하는 방향으로 갔어야..."
"정신차리세요. 그게 지금까지 당신들이 지기만 한 이유입니다."
"...네?"
"매번 같은 상대와 전투하며 이제는 노련할 법도 한 당신의 병사들이 왜 그렇게 나약하고 무기력할까요. 그들에게 길들여 진 겁니다. 저항한자들이 잔인하게 죽었고, 얌전히 있으면 적어도 나랑 내 옆사람은 무사하니까. 그래서 서로서로 저항을 포기하게 된 겁니다."
요나는 이제 20명정도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병력들을 돌아보았다.

"당신의 병사들이 이렇게 생기 넘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필요했던  승리입니다."
"...그건 저렇게까지 해야만 얻을  있는 것이었나요?"
"아뇨, 하지만 저게 제일 효과가 좋았을 겁니다."

영주는 그녀의 분위기에 조금 주눅들었다. 금색 갈기를 가진 사자같은 여자다. 모두의 주목을 끌으며 당당하고 압도적으로 모두를 이끈다.

"자, 그럼... 영주님은 놈들이  들어올 때까지 얼마정도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주는 퍼뜩 놀라다가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 보았다.

"몇명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총력으로 온다면 100정도는 찾아올 겁니다. 그러면 2~3일정도 걸리지 않을까요?"
2일. 그들의 총력을 여기서 2일동안 버텨내야 한다.

"지휘관님, 잠깐 괜찮습니까?"
영주와 대화중인 요나를 부른 것은 이리하였다. 요나는 반사적으로 구겨지는 얼굴을 피며 이리하에게 다가갔다.


"짧게 말해   있겠나?"
"칼린에게 무슨 말을 했던 겁니까?"
"...그건 너무 짧군."
요나가 도발처럼 웃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표정이다.


"전장에서 무슨 말을 하셨던 겁니까?"
"내가 그걸 말해줘야 하나?"
"들어야겠습니다."
칼린의 그런 모습을 보았다. 이리하는 들어야 했다.

"이리하, 귀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나의 종자에게 험한 말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 그러지는 않으실 거라고 믿고 자리를 비켰었습니다. 지금 칼린이 어떤 꼴이 됐는지 직접 말해드려야 하나요?"
"그게 내 잘못이라고?"
사교장이 서툰 요나였지만 그래도 귀족이다. 일개 자신의 병사와 기싸움으로 눌리지는 않는다.

"...안 말해 주시겠다면 칼린에게 직접 묻겠어요."
"칼린이 말하지 않아서 나에게 온 게 아닌가. 내가 그런 것도 파악 못할 팔푼이로 보이던가?"
"당신은 괴물이예요."
"그리고 네 상관이지. 할말 끝났다면 자리로 돌아가라."


둘은 더이상 지휘관과 병사의 관계처럼 보이지 않았다.  순간을 기점으로 둘은 완전한 적대관계가 되었다.


이리하는 분한 듯 요나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요나는 그런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냈다.


"괜...찮은 겁니까?"
영주가 둘 사이의 분위기에 주눅들어 물었다. 나 참, 이렇게 기가 약한 사람이 영주니 영지가 이런 꼴이 되는 것이다. 요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웃었다.


"걱정 마세요. 오히려 잘 풀리는 중이니까."


"칼린!"
도르베가 비척거리며 걸어오는 칼린에게 달려왔다.


"도르베! 뭐야, 왜 그러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칼린을 보며 도르베는 조금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다시 표정을 풀었다.

"왜 그러냐니, 태평하긴! 어제 기마대로 나가고 살아 돌아왔다고는 하는  찾을 수가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다!"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며 팔을 벌렸다.


"하하,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괜찮아요! 부상도 없는 걸."
칼린은 그의 말에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도르베는 그를 껴안은 상태로 물었다.

"그래, 적의 실력은 어느 정도였나?"
"음... 꽤 강하던데요? 그래도 뭐. 지금까지 해 온 일에 비하면 많이 쉬웠어요."
"그러냐! 하하! 하긴, 넌 강하니 말이다!"
도르베는 그를 다시 떼어내며 웃었다.


"그러면 어제는 그... 바로 전쟁 중 죽은 자들을 보러 갔던 거냐...? "
그는 그 말을 하면서 말 끝을 조금 흐렸다. 흐름상 묻게  질문이었지만 입 밖으로 뱉고 나서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아, 그러네요. 아직 그분들을 뵙지 못했네요... 하지만 이제 뭐, 부상자실을 다닐 것도 아니고."
"뭐야, 더이상 부상자 운송을 맡지 않는 거냐?"
"네. 이제는 전방 돌격부대로 들어 가려구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전방 돌격부대가 생겼다고?"
"네. 요나님께서 필요하실  같다고..."
그런가. 작전을 바꿨나. 어느정도 전황을 읽어낼 수 있는 도르베가 보기에도 이 농성전은 막바지에 도달했다.


"지원자도 받나?"
"오후에 요나...님이 사람을 모아서 이야기할 거예요."
"그런가. 같이 가자고."
"도르베씨가 와주시면 믿음직스럽죠. 근데 제 생각에는 소금부대원은 전원 참가일 것 같긴 해요."
칼린은 웃은 뒤 다른 동료들도 보러 가야겠다고 하며 등을 돌렸다. 도르베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칼린은 강하다."
그는 그와 칼린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 있던 아스타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스타는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가..."
"뭘 그런가, 냐. 멀쩡하지 않느냐."
도르베와 멀쩡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스타는 조금 납득이 되지 않는 다는  뒤통수를 긁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미 한군데  가버린 것 같은데..."





"소금부대원들은 전방 돌격부대로서 전쟁에 참가한다.  그들의 총 전력이 쳐들어올 것이다. 우리도 총력을 다해야 한다. 영주님이 아낌없는 지원을 약조하셨다."
총력이라는 말에 병사들이 서로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총력이다. 활을 잡을 수 없는 부상병들은 전원 소금부대원과 함께 전방 돌격부대에 참여, 마을의 민간인들은 협곡 측면에 땅굴을 파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부상병을 전투로 몰겠다는 겁니까?"
 병사가 놀라서 그렇게 되묻자 요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당연한 것이다. 병력의 구멍이 너무 크다. 부상자 8명중 상대적으로 부상이 옅다고 판단된 5명은 전투에 복귀한다. 인원은 본인의 부대원이 직접 선별한 것이니 불만없이 참여하라."
"하지만..."
"총력전이다. 총병력 불만없이 따르도록 한다."
단호하게 말을 마친 요나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짧게 말한 그 공지를 끝으로 소집은 끝났다. 모두가 각자의 각오를 담으며 흩어질 때였다.


"잠깐 시간 됩니까?"
요나에게 개인적으로 다가간 것은 라드였다. 요나는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담배를 꺼내며 대답했다.

라드는 생각하던 것을 제안했다. 요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웃었다.

"도대체 내가 왜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나?"
다 알면서 굳이 묻는 것 인가.


"지휘관님에게는 아직 제가 필요하니까요. '다임상회'의 제가 필요한 거 아닙니까?"
요나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정도 피해는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감내 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이외에는 일절 건드리지 않는 것이냐?"
"건드리게 해 주실 겁니까?"
"그것도 그렇군. 좋아."
요나는 웃으며 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비슷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해보도록."
"감사해라."
라드는 비열하게 웃으며  영지의 영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속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륑게가 이상해."
릴로의 말에 도르베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야..."
도르베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충족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이게 상당한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발언이다만... 저기 박혀 있는 시체들이 륑게와 아는 얼굴이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그것 때문인가?"
"난 그렇게 생각한다만..."
릴로는 도르베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웃었다.


"도련님도 많이 바꼈구만. 첫 임무 끝났을 때 까지만 해도 이런 말하면 짐승이니 뭐니 한마디씩 꼭 했던 것 같은데."
"...철이 없었지. 미안했다."
"아냐, 지금은 그걸 탓하려는 게 아니라..."
릴로의 눈이 얇아졌다. 도르베는 약간의 위기감이 느껴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도련님, 여자경험은 있-"
"야 릴로! 소니아가 부르던데!"
도르베에게 천천히 다가가던 릴로를 부른 것은 아스타였다. 릴로는 분위기를 깬 사람쪽을 돌아 보았다가 거기에 아스타가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얼굴을 폈다. 릴로는 어둡고 웃던 얼굴을 조금 곤란한 듯한 얼굴로 바꾸었다.

"아...그래?"
"응. 급한일이래. 빨리 가봐."
아스타는 웃으며 릴로에게 다가와 손을 얹었다.

"뭐, 소니아 물건이라도 손 댔어? 많이 화나 있던데..."
"그래? 그런 일 한적 없-"
"남에  건드리면 화나잖아. 그치?"
아스타의 표정은 변함없었으나, 릴로는 그 말에 얼굴이 조금 하얘졌다.

"그, 그러네! 그건 화나지!"
"그지. 그렇고 말고. 얼른 가봐."
아스타는 왔을 때 그 웃음 그대로 릴로를 보내 주었다. 릴로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아스타를 보며 도르베는 조금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니아는 나랑 대화하다가 감시탑으로 돌아갔었는데... 감시탑에 다녀온 거냐, 아스타?"
"뭐, 그런거지! 그런 것보다 도르베! 대련한판 할까?"
"뭐? 지금?"
도르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저히 대련할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감을 잃으면 안되지! 하자고, 대련!"
"아니, 분위기라는게..."
"하자고, 대련."
한층 목소리를 깔며 다시 말하는 아스타에게 도르베는 조금 주눅들었다. 마치 자신의 잘못을 추궁하는 듯한 분위기였지만, 딱히 잘못한 것은 없었기에 혼란스러웠다.


"... 열 합만 주고 받자꾸나, 그러면..."
"그거면 돼지!"
둘은 대련을 시작했다. 아스타는 평소보다도 격하게 검을 휘두르며
"방심하니까 이런 검도 못 막는 거야! 방심  하지마!"
따위의 말을 뱉어댔다. 도르베는 그녀의 검을 조금 억울한 기분으로 받아내며 대련에 임했다.


륑게는 가만히 감시탑 위에서 꽂혀 있는 막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꿀꿀한 기분을 날릴 수가 없어서 3개피째의 담배를 꺼내려고 했지만, 자신에게 담배가 부족한 것을 알고  주머니를 뒤집어 꺼냈다. 그런 그에게 소니아가 다가왔다.


"담배 부족하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륑게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기분이 꽤 좋은 가봐, 어젠가 그저께만 해도 죽상이었는데 말이지."
"그래? 그렇게 보여?"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뺨에 손을 갖다 댔다. 륑게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등을 돌려 소니아를 바라보았다.

"하긴, 나름 여기 온 후로  대승리를 거둔 건데 기쁜  당연한가... 좋겠다, 생각 없어서."
"왜 시비냐?"
소니아는 눈쌀을 찡그리며 륑게를 노려보았다가, 이내 그의 표정을 보고 얼굴을 풀었다.


"...아는 사람도 있었어?"
소니아의 말에 륑게는 그녀의 눈을 피했다. 담배를 깊게 빨아 마신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맨 앞에 있던 놈. 어렸을 때 친구였지."
"그런가..."
소니아도 그제서야 감시탑에 기대서 그 막대 쪽을 바라보았다.  앞의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전부 시체를 해체해서 설치한 것이었다. 지휘관은 저 꼬라지가 될 때까지 장난처럼 고문했다고 들었었다.

"...미안하네, 내가 윌레인 대표로 사과할게."
"됐네. 마땅한 말로야. 저자식도 여기 영민들로 똑같은 짓을 했었을 테니까. 여기 처음 왔었을 때 봤던 풍경 기억 안나?"
"그건 그렇지만..."
륑게는 소니아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담뱃불만큼이나 찬란하게 태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냥... 저 자식 유언을 들은 건 나뿐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인과응보라는 생각도 들지만..."
륑게도 지금 자신의 기분을 정확히 전달하는  할 수가 없었다. 아마 마레였나, 그 떠벌이였다면 이 기분을 어떻게든 표현해 줬을 수도 있었겠다.


"모르겠다..."
설명하기 복잡한 그 감정 속에는 라드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라드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방식까지 륑게가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다. 조용해진 륑게를 조금 쳐다보던 소니아가 입을 열었다.

"...역시 넌 이번 전투에는 빠지는 게 좋지 않아?"
"아니, 싸워야지."
"왜 굳이..."
"저들의 방식이 싫어서 도망쳐 나왔던 거니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소니아가 더 할말은 없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륑게의 담배연기를 손으로 헤치며 조금 물러났다.


"너랑 릴로는 뭔가... 그런 감정이 없는 건 줄 알았어. 근데 아니었네. 릴로는 몰라도 넌, 넌 그냥 강했던 거구나."
"뭐야, 낯간지럽게."
"별 거 아냐. 잠깐 내려간다."
"아, 잠깐."
륑게의 말에 소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이 감시탑에 홀로 서 있는 것은 외로운 일이고, 소니아는 오늘따라 퍽 이쁘게 말한다. 역광 때문에, 이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을 알지만 햇빛에 빛나는 약간 탁한 그녀의 금발이 계속 그의 생각을 방해한다. 륑게는 잠깐 말을 멈추다가 그냥 웃기로 했다.

"담배 한 개피만 더 주고 가라."
"하, 뭔가 했다, 하여간..."
소니아는 웃으며 그녀의 담배갑을 꺼내 륑게에게 내밀었다.

"전부 펴도 돼."
 말을 남기고 그녀는 감시탑을 내려갔다. 륑게는 손에  담배갑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하늘을 보며 연기를 빨아들였다. 바람이 좋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 간은 청량한 하늘이 유지될 것이다.



"기다렸어?"
그렇게 말하며 라드에게 다가오는 것은 소니아였다. 둘은 꽤 빠르게 대화를  수 있었다. 라드가 적당히 소니아의 성격을 파악해 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소의 그 경계심을 부르는 듯한 말투를 제외하면, 라드는 꽤 사교에 능했다.


"뭘 그렇게 뛰어와, 밀회하는 것도 아니고."
"하하하, 그런가..."
사실 소니아는 이걸 일종의 밀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몰라도, 륑게는 자신이 라드와 대화하는 것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길 것이다. 결국 그것 뿐인 일이지만 소니아는  밀회라는 상황 자체를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라드도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부른건데?"
"별건 아니고, 연극 좋아해?"
"좋아해!....ㅆ었지."
소니아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일종의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마레라는 각본가를 접하고 나서 소니아는 약간 환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뭐야, 이젠 싫어하는 건가. 이번 일 끝나면 왕도에서 같이 연극이나 보러 가자고 하려 했지."
"엥? 진짜?"
 말이 공짜 기회도 걷어 찰 정도로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눈이 반짝이는 소니아를 보며 라드는 웃었다.

"지난번처럼 왕성에서 보기는 힘들겠지만 말이야, 오페라하우스에 들어갈 수 있거든. 마레씨랑 친하게 지내니까 언제든 오라 하더라고."
소니아는 얼굴을 밝히며 바로 받아들이려다가 한번 숨을 멈췄다. 그리고 약간의 경계심을 담아 물었다.

"...왜 나랑 가려는거야?"
"연극 좋아하는 줄 알았지. 그리고... 혼자 연극 보러 가는 건 싫었거든. 대신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부탁 듣고 판단할게."
라드는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소니아를 보며 담배갑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 손을 흔드는 것으로 지금 담배가 없다는 신호를 했다.

"무리한 부탁 같은 게 아냐... 그렇게 태도 싹 바꾸지 말아줘. 그냥 륑게랑 나랑 어색한 것 좀 푸는 걸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약간 긴장하던 소니아가 얼굴을 풀었다.


"뭐야, 진짜?"
"슬슬 나도 부대원으로서 정착이 되야 한다고 생각해서 여러가지로 고생 중인데, 륑게랑 이리하는 계속 나랑 거리를 유지한다는 거지... 아스타도 애매하고. 다른  명은 내가 알아서 관계를 회복해 보겠다만, 륑게는 아무래도 동료인 네가 잘 말해주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
소니아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륑게는 라드를 엄청나게 싫어하고 있다. 솔직히 소니아가 뭐라고 말하든 그를 설득할 수는 없을 듯했다.

"아니 뭐, 한번 자리를 만들어 달라, 이런 건 아니고. 그냥 나쁘지는 않은  같다, 이런 식으로 화두만 던지는 걸로도 괜찮으니까. 이건 그냥 부탁이고, 이걸 들어주던 말던 연극은 같이 보러 가줬으면 해."
"...진짜 그게 다야?"
"진짜 그게 다야."
라드의 단언에 소니아는 고뇌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둘만 가자고?"
"다른 부대원을 데리고 가도 되긴 할 텐데... 되도록이면 둘이 가자고. 어때?"
그녀는 그 말에 조금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뭐야, 꼬시는 거야?"
"어땠어, 능력 좋지?"
"나쁘지는 않았어. 괜찮네."
그녀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렇게 말하고서 잠깐 머리를 붙잡고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일단   살아남는 게 급선무겠지만 말이야."
라드는 그 말에 아마도 지금 다임상회가 계획했을 일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 상황이 위험해진다면 자신이라도 여기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요나는 예상대로라고 했지만, 그녀가 거기에 대한 대책이 있을까는 다른 문제이다.

"그건 그렇네."
"뭐,  좋아. 연극 같이 보자. 기대하고 있을게."
라드는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가는 소니아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소니아 말이 맞았다. 일단 살아 남는  최우선이다.




"칼린, 바쁜가."
"아, 요나님."
부상자 텐트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칼린은 문을 열었다. 그의 정장은 피로 흥건했다.

"상황은 어떤가?"
의무병이 아닌 굳이 자신에게 묻는 것은 그녀의 신뢰표현이리라. 칼린은 그 생각에 조금 웃으며 말했다.


"한 명이 더 죽었어요."
요나는 그런 칼린을 바라보며 웃었다. 설마 그가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웃음을 머금는 날이 올 줄이야. 자신의 검이 완성되기까지 앞으로  한보였다.

"이리하가 자네 걱정을 하던데, 혹시 힘든가?"
"아, 이리하씨는 가끔씩 조금 과민하니까요... 괜찮을 거라고 봐요."
"그렇지. 아무 문제없으니까 말이다.  소중한 동료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시대에는 살생도 당연한 일이고. 내 말이 맞나?"
"? 네, 그렇죠."
망가진 가면 너머로 보이는 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는 눈빛. 요나는 그제서야 만족할 수 있었다.

"...출동 때 지장이 없도록 건강관리는 조심하도록. 그리고 이제는 동료들을 의심하라는  따위는 하지 않겠다, 칼린."
"...갑자기 왜요?"
왜냐니, 네 동료들은 널 움직이기 최고로 좋은 수단이 될 것 같구나.

"네가 그 정도로 아끼는 동료 중에 배신자가 있을 리 없잖느냐. 칼린, 이제 너를 믿어보겠다.  판단을 믿겠다."
"믿어 주시는 건가요?"
그럼. 네가 알아볼 필요는 없다. 언젠가 내가 직접 밝히는 편이 더 충격이  테지.


"물론이다. 이제 너도 어엿한 군인이니까. 계속 고생하도록."
"...감사합니다."
"그래. 지금까지 무리한 말을 해서 미안했다. 부디 계속해서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다오."
이젠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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