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병(충)해
"준비가 끝났다."
요나의 부대병력이 접견지에 대기한지 4일차, 차다레마는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며 그저 앉아서 풀피리를 불고 있었다. 그녀는 피리에서 입을 떼며 물끄러미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등 뒤에 자신을 부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쿠탕가. 우리 부족은 언제까지 연명할 수 있을까."
쿠탕카, 부족장이자 그녀의 남편 중 하나이다. 그는 두꺼운 팔을 이리저리 풀어내며 대답한다.
"우리는 연명하지 않는다. 그저 바람처럼 스쳐갈 뿐이야."
"그건 사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
쿠탕카는 그녀가 사색에 잠긴 것을 눈치챈다. 언제부터일까, 그녀는 가끔 그러고는 한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그녀의 깊은 생각이 부족의 앞길을 밝히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사는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차다레마."
그는 가만히 앉아있는 그녀의 옆에 와서 앉았다.
"우리는 바람이다. 한 점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저 변화를 지속한다. 한순간 휘몰아쳤다면 그걸로 좋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팔을 둘렀다. 차다레마는 그런 그의 팔을 내려다보고 웃는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나?"
"아니,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
그들은 느리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다레마가 먼저 일어섰다.
"고맙다, 쿠탕카. 부대를 모아 다오."
쿠탕카는 기운을 차린 그녀를 보며 웃은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 뒤, 그는 자신의 부대원들을 이끌고 온다.
"나의 형제 자매들아. 사냥의 때가 되었다. 보이는 모든 것을 유린하자."
차다레마는 그렇게 말하며 거대한 나무접시를 양손으로 들어 올린다. 거기에는 말 젖을 발효해서 만든 술같은 것이 담겨 있다.
"저항도, 단결도,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의 용서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탐하고 우리의 것으로 하자. 우리는 바람이다."
그녀는 단검으로 손을 베어낸 뒤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피가 말 젖 술에 담긴다.
"모두 말을 준비해라. 바로 출발할 것이다."
차다레마는 그렇게 말하고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한 그 말 젖 술을 들이마신다. 목을 울리며 그걸 전부 마셔낸 그녀는 곧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며 입가를 한번 닦아냈다.
"말 60필, 병력 50. 교체인원들은 바로 대기하고 있도록."
지평선에 걸치는 해를 등지며 그림자와 흙먼지가 다가온다. 감시탑에 서있던 륑게가 졸린 눈을 한번 비비고서 그 장면을 제대로 바라본다. 아직은 거리가 꽤 있다.
"전원! 전투준비!"
그 말에 아래에 대기하던 병력들이 하나 둘 고개를 쳐든다. 그 중에서는 잠들어 있다가 깬 자들도 있다.
"놈들이 온다!"
그런 소리가 눈깜짝할 새에 퍼지기 시작한다. 전원 분위기가 수선해진다. 말발굽으로 인한 진동소리가 그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한다.
"활 준비!"
요나는 단 한번도 교대인원으로 서지 않았었다. 그녀는 나흘 밤낮으로 꼬박 일반병사들 사이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곧 그들의 군세가 조금 더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50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데요?"
교대인원으로 들어가 있던 릴로가 눈을 비비며 그렇게 말한다. 칼린은 가면 뒤로 눈을 찡그리며 그들을 바라보다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말이... 사람보다 말이 조금 더 많아요."
"? 왜?"
"그런 것을 생각해 봤자 아무 의미 없다."
요나는 짧게 말을 자르고 나서 가만히 그들의 전진을 기다렸다. 그들은 생각보다도 빠르게 전진해 오고 있었다.
"기다려!"
그녀의 명령에 모두가 활을 잡고 기다린다. 이제 충족은 한 명 한 명이 보일 정도로 뚜렷하게 다가왔다.
"아직입니까!"
"기다려! 단 한발도 헛되이 쓰지 말아라!"
칼린도 익숙하지 않은 활을 들고 있다. 그래, 초기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점점 말발굽소리가 울려오며, 충족 대장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위치까지 다가온다. 그들은 고삐조차 잡지 않고 말 위에서 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화살들이 날아왔다. 요나의 병사들이 긴급하게 만들어낸 바리케이드에 화살들이 박혀왔다. 푸대 자루로 급조했던 장벽에 작게 작게 구멍이 생겨난다. 바리케이드 뒤에 참호를 파 두지 않았다면 몇명이 이번 눈먼 화살로 사상을 당했으리라. 저들이 안 오는 때를 기회로 생각하며 계속해서 방비시설을 늘린 요나의 선택이 옳았다.
"전부 일어서!"
몰아치는 화살속에서 요나는 일어났다.
"륑게! 작전 실행!"
요나의 명령에 륑게가 마나를 모아 쏘았다. 그러나 충족을 노리고 쏘지는 않았다. 황량한 그 들판의 어딘가, 아직 충족이 도달하지 않은 점을 향해 쏘았다. 그 충격에 함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래로 쌓여 있던 평지 아래에서, 밧줄이 튀어 올라 나왔다.
"지금이다! 전군 쏴라!"
화살이 쏘아 올려진다. 병사 하나하나가 분주하게 화살을 쏘아 댄다.
충족의 선두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밧줄에 반응했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빠르게 말의 방향을 꺾어내며 옆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그렇게 해내지 못한 자들은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말 째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릴로는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에 경악했다. 그 밧줄트랩에 걸린 것은 10명조차 되지 않았다. 그들은 넘어진 자들을 뒤로하고 말의 속도조차 줄이지 않은 채 밧줄을 빙 돌아오기 시작했다.
"계속 쏴라!"
그러나 60도 안되는 부대를 상대로는 상당한 전적이다. 사기가 무너질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의 활이 넘어져 있던 자들을 꿰뚫었다.
"측면! 사람이 아닌 말을 노려라! 말의 수부터 줄여라!"
그녀의 명령에 따라 낮은 화살이 날아가기 시작한다.
"저게 뭐냐?"
한 병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측면을 드러내던 그들의 앞에 거대한 토벽이 생겨난다. 언젠가 라드가 꺼냈던 것과 비슷하지만, 규모가 조금 더 작은 것이었다.
"이런 젠장, 저 새끼 아직 살아있었냐..."
륑게가 낭패라는 듯 말하며 망원경으로 그들 쪽을 바라본다. 그의 예상대로, 주황색 머리를 한 여전사가 선두에 있는 것이 보인다.
"요나! 선두에 여자! 저년이 토벽을 만드는 겁니다!"
"다시 화살의 궤도를 위로!"
충족은 그들의 함정 견제를 하기 시작했다. 선두의 여성이 연신 마법을 부리며 흙벽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왼쪽을 향하던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흙벽을 라인으로 커브를 돌며 위치를 바꾼 후, 그 흙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아!"
설마 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계단 순차로 쌓은 흙벽 위를 타고 다니며 기예와도 같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돼!"
소니아의 안색이 하얘진다. 충족 전사들은 이윽고 그 토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부대를 두 조로 나누었다. 그리고 정면에서 활을 쏘는 자들과, 측면을 바라보며 활을 쏘는 자들로 부대가 두 분할 되었다.
"아스타!"
"오케!"
아스타는 화살에 자신의 손을 베었다. 그리고 피가 묻은 화살을 쏘아냈다. 그렇게 세발정도를 더 쏜 그녀는 곧 엄지를 눌렀다.
흙벽이 폭발하며 무너졌다. 선발대를 따르던 병력 9명이 서로 엉키며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 그 뒤의 4명은 다시 즉각적인 반응으로 토벽의 옆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한순간의 무방비를 넘어갈 병력들은 아니었다.
"큰일 했다, 아스타!"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시위를 잡아당겼다. 계속해서 날아오며 참호를 넘어서까지 오는 화살은 도르베가 막아냈다.
"조금만 더 버텨라!"
충족의 병력은 이미 많이 줄었다. 절반도 줄지 않은 것이지만, 충족에게 전멸은 없다. 조금 더 빡쎄게 버틴다면 그들은 돌아갈 것이다.
"아악!"
그렇다고 아군이 하나도 다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직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벌써 화살에 맞은 자가 둘이다.
"칼린! 부상자를 후방으로!"
"네!"
부상자들을 옮기는 것은 칼린의 일이었다. 활을 배우지 않은 칼린이 도맡은 일중 하나였다.
"오른쪽 끝 견제! 중앙으로 몰아! 2차함정 가동 준비해라, 륑게!"
"확인!"
륑게는 한쪽 눈을 감고 손을 펼치고 대기한다. 화살을 견제를 피하며 중앙으로 달려가던 충족은 낌새를 눈치챈 듯 정면이 아닌 왼쪽 측면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대하게 곡선을 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냅다 쏴 맞추기에는 더 편한 형태였다.
"대장! 적들이 화살을 뒤지게 안 맞습니다!"
신병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 외친다. 병력이 소수라는 것은, 그들 사이의 거리를 얼마든지 벌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멀찍이 떨어지기 시작한 상대 병력들을 맞추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적의 부대는 또다시 이 분할을 시작해서, 정면으로 오는 적들과 측면으로 오는 적들, 왼쪽 측방에서 정면으로 향하는 적들로 삼분할이 되었다.
"륑게! 지금!"
륑게의 두번째 마법에 밧줄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예측된 듯, 어떤 충족의 마법에 의해 밧줄이 맥없이 잘려 나갔다. 튀어 오르는 밧줄 사이로 그들은 속도를 낮추지 않으며 활을 쏴 댔다.
일부 활들은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충족 측의 마법이었다. 곡선 궤적을 그리다가 한번 더 똑바로 날아오는 화살에 요나의 병력 두 명이 죽었다.
"갤러한! 수류탄, 파쇄성으로!"
요나는 참호에 몸을 숨기며 그렇게 소리쳤다. 갤러한은 꺼내 둔 수류탄을 하나 아스타에게 건내주었다. 아스타는 거기에 피를 묻히고 요나에게 던져주었다. 요나는 그것을 급하게 화살에 묶어낸 뒤 활에 장전했다.
그녀는 전신의 마나를 끌어 모은 뒤 그것을 발사해냈다. 수류탄이 묶여 있는 묵직한 화살이 기운차게 그들에게 날아갔다.
적들은 뭔가가 매달린 화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흩어졌다. 하지만 자각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었다.
"바로 터트려라, 아스타!"
그 수류탄이 터지며, 돌과 철 파편들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들의 가벼운 무장을 뚫어내며 파편들이 박혀왔다. 부상을 견딜 수 있는 적들도 말이 무너지며 넘어지기 시작했다.
충족의 인원이 대략 30명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들은 참 빠르게도 말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계속 쏴라! 할 수 있는 만큼 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퇴각을 결정한 충족을 맞출 수 있는 화살이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유유하게 전장에서 도망쳐 나왔고, 요나는 그들이 완전히 지평선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활을 잡은 손을 멈추었다.
40분간의 전투였다. 첫 농성은 성공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녀의 예상보다 좋지 않았다.
"칼린! 부상자의 상태는?"
"부상자 총 4명... 바로 전장에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뒤에 누워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팔에 맞은 자가 두 명, 다리에 맞은 자가 한 명, 배에 맞은 자가 한 명이었다.
충족의 화살촉은 옅은 보라색을 띄며 화살에서 빠지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화살촉이 박혀서 빠지기 힘들도록 만들어진 구조이다. 오물에 담궈서 제련을 마치는 그들의 화살촉으로 생긴 부상은 늦게 대처할 경우 파상풍을 야기한다.
"A조는 앞으로 나가서 충족의 시체와 화살을 회수, B조는 진열 재정비 및 사상자를 안치시켜라! 쉴 시간은 없다! 놈들은 당장 오늘 다시 올 수도 있다!"
분주하게 전쟁 후 작업이 시작되었다. 첫 농성의 결과는 부상자 네 명과 사망자 둘이었다. 그리고 충족 전사 18명을 사살했다. 좋지 않은 결과다. 벌써 사상자가 나와서는 안 되었다. 이제 그들의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요나까지 포함해서 28명뿐이었다.
"놈들의 저항이 거세다."
차다레마는 한마디로 지금의 전황을 설명했다.
"못 이길 쪽수는 아니다만, 손실이 크다. 평소와 달라."
그녀는 그렇게 말학 자신의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18명, 너무 손해가 크다.
"총력전은 삼가야 한다. 위험부담이 커."
한 전사가 그렇게 말했다. 타당한 말이지만, 차다레마는 오늘 그들의 저항에 이상함을 느꼈다.
"체계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를 전부 멸살하려는 부대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곰방대를 꺼냈다.
"지원병력을 기다리고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것이라면 저들이 농성하게 두면 안돼."
"그러면 어쩌려는 거냐?"
전사의 말에 차다레마는 곰방대를 입에 물고, 그 위에 검은 가루를 조금 뿌렸다. 곧 검은 연기가 곰방대 끝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아. 그들이 못 버티도록 쉬지 않고 교란한다."
"반대다. 50씩으로는 저 안으로 진입할 수 없어."
"아니, 50이 아니라 30이면 족해. 계속 치고 빠지며 그들을 압박한다."
그녀는 검은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며 걸치고 있던 가죽을 벗어 내렸다. 곧 그녀의 양 옆에 서있던 동자들이 그 가죽을 들고 텐트로 들어갔다.
"그들도 소수야. 지원병력이 오기전에 쥐어짜내고 총병력으로 밀어낸다."
18명의 입이 줄었다. 그래 봤자 이 부족은 1달도 못 간다. 말의 다리가 멈추면 살아남을 수 없다.
"부지런하게 움직여라. 저녁에 또 한번 간다. 대기인원 50을 새로 꺼내."
칼린은 부상자들을 돕고 있었다. 충족의 화살을 뽑아내는 작업은 상당히 고된 것이었다.
"으아아아악!"
먼저 뺀치를 상처 안으로 깊숙하게 밀어 넣는다. 그렇게 화살촉을 뽑아내고 나면, 달군 쇠로 그 상처를 지진다. 파상풍을 막기 위해서라고 는 하나 그것이 효과가 있을 지는 칼린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조금만 참아요..."
"으으으으... 씨팔..."
꽉 다문 아래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주먹을 쥐며, 치료를 받던 남자는 연신 눈물을 흘려 댔다. 그 옆에는 배에 화살을 맞은 병사의 숨이 옅어 지고 있다.
"정신 좀 차려, 개새끼야!"
그의 애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그의 손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더이상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했다. 화살촉을 뽑아내고 할 수 있는 조치를 전부 취했지만, 이미 그의 배는 푸른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바짝 마른 입술로 연신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아아..."
칼린은 그가 내지르는 음침한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생명이 꺼지며 나는 소리. 그가 할 수 있던 것은 비싼 진통제를 빼돌려 먹이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산 자의 오열과 죽어가는 자의 단말마, 둘이 동시에 들리는 이곳이야 말로 그에게는 지옥이었다.
필사적으로 뒤의 현장을 무시하며 다리부상자의 다리에 약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옷자락을 잡는 미약한 손길에 그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손가락 끝까지 새하얗게 된 그는 힘겨운 듯 칼린의 옷 끝자락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몇 번 입을 마르게 뻥긋 거리다가, 가래가 섞인 목소리로 울컥대며 말했다.
"저...저 주, 죽 기 싫어요..."
칼린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 뒤에 언뜻 보이는 희망이 그의 가슴을 가장 매섭게 찢는 것이었다.
"살, 살려만 주시면 저... 진짜, 다, 다 할게요..."
꺼져가는 목소리로 헐떡이며 나오는 그 목소리에, 그의 반대쪽 손을 잡고 있던 애인은 결국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무릎이 무너지며 마치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아 달라는 듯 그의 하얘진 손을 연신 얼굴에 비벼댔다.
"제, 제.제발... 죽고싶지 않아요...!"
마지막 안간힘이라도 되는 듯 그의 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칼린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 독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는 희망을 놓지 못했고, 그래서 얼마 안되는 기력으로 눈물까지 쥐어 짜내고 있다. 칼린은 그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같이 있을 게요...! 지켜봐 드릴 게요!"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멍해져 가는 머리속에서 그는 절망보다 먼저 수용을 찾았다. 꺼져가는 정신속에서 안식을 찾은 그는 얌전하게 칼린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오...래전... 앤의.... 집에는..."
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부상병들도 멀쩡한 팔을 들어 올리며 눈을 가렸다. 조용한 통곡속에서 그는 노래를 계속 불렀다.
"돼...지가...세마리....."
노래는 힘없이 끝났다. 칼린과 그의 애인 둘 다, 그의 손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힘이 빠진 것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더 무거운 무언가가 분명히 빠져나갔다. 칼린은 그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일개 병사의 손을 왜 인지 놓칠 수 없었다.
"칼린, 적습이다. 나오도록."
그 공간을 이름 짓는다면 통곡이리라. 그곳에 찾아오는 불청객은 언제나 나쁜 소식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걸 원망할 수는 없다. 지금 칼린의 일은 이 모든 것을 마주하는 것이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떠나가려는 칼린의 팔을 누군가 붙잡았다. 다리를 다친 부상병이었다.
"저도, 저도 죽는 겁니까? 허만처럼 죽는 겁니까?"
그런가. 그의 이름은 허만이었나. 칼린의 흩어진 정신은 단편적으로 그 정보만 집어낸다. 칼린에게 보이는 것은 깊은 어둠을 보고 있는 눈. 그래서 칼린도 그 어둠을 마주하고 있다. 바로 옆에서 일어난 동료의 죽음에 공포는 전염된다.
"그, 그렇다면 옆에 있어주세요...! 혼자, 혼자 죽어가는 건 싫어요!"
울부짖듯 매달리는 그의 팔을 뿌리쳐야 한다. 그는 고작 다리 부상이니, 죽을 일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어떨까. 그는 죽지 않는 걸까?
"...괜찮을 거예요. 모든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칼린은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팔을 쳐냈다. 다시 다가오려는 그를 요나가 막아냈다.
"그 이상은 방해다. 침착하고 얌전히 누워있어라."
차라리 요나의 단호함이 더 구원이 되었던 것일까, 그는 천천히 팔을 거두며 몸을 웅크렸다. 칼린이 천막을 등지자, 그 뒤에는 어둠과 고요한 흐느낌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 그 천막은 통곡이었다.
"...칼린, 바로 가야한다. 익숙해져라."
"문제없습니다."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그들에게 쉴 시간 따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