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암투(暗鬪)
"어땠어?"
전상민은 하얀 공간에 앉아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하얀색 뿐이었다. 경계조차 없는 그 곳에서, 전상민은 하얀색 의자에 그저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공간감이 생기지 않는 이상한 곳이었다.
"이제 이세계의 수준이 조금 보이지?"
그 목소리는 마치, 그 공간 자체가 말하는 듯 울려 댔다. 뒤에서부터 앞으로 훑어 나가듯, 음파라는 벽이 이 빈공간을 빠르게 스쳐지나는 듯 울렸다. 실제로 그 소리가 이동하는 것과 동시에 얇은 파장이 그를 지나치고 있었다.
"네가 살던 곳 하고는 기본 수치가 다르지. 아, 물론 방금 네가 상대한 사람은 이 세계에서도 최강이니까, 그걸 평균으로 잡을 필요는 없어."
즐거운 듯 재잘거리는 목소리. 전상민은 그 목소리를 알고 있다. 낮으면서 아름다운, 분명 여자치고는 허스키하면서 남자치고는 지나치게 부드러운. 그런 미성을 분명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들 수도 있지 않아?"
그 목소리를 따라서 음파가 다시 이동한다. 얇은 장막이 그 평면같은 백색을 매우며, 지나가는 곳을 '공간' 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나씩 선이 생겨나며 어느새 백색의 공간은 일종의 경계와 함께 뼈대가 세워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조금 더 진심이 되어보자, 같은."
툭 떨어지듯, 그 말은 공허속을 한번 맴돌더니, 메아리도 없이 툭 끊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상민은 극장의 한가운데에 앉아있었다. 빈 극장의 한가운데에서 익숙한 붉은 커튼 쪽으로, 따뜻한 노란색 조명이 비춰진다.
전상민은 자신의 눈높이가 조금 달라졌음을 자각한다. 그는 어느 순간 다시 칼린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미성은 이제 무대의 관객석 뒤 즈음에 위치한 스피커를 통해 말하기 시작했다.
"어때, 정말 그런 생각을 했었어?"
무대가 조금 열리고, 고라니의 인형이 무대 뒤에서 익살스럽게 튀어나온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그것은 신명 나게 몸을 흔들어 대며 조잘거린다.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험난한 일에서 동료들을 지키고 싶지 않아?"
칼린은 계속되는 질문에 몽롱한 기분이다. 마치 천천히, 눈을 뜨고 잠들어가는 느낌에 그는 몸이 따뜻해 지는 것을 느낀다. 무대가 천천히 열린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줄곧 말하고 있던 자가 서 있다.
"너가 그러고 싶다면, 조금 도와 줄게."
무대 위에는 칼린이 서있다. 서로를 마주하며, 그는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2막이 열릴 때 다시보자, 전상민. 기대하고 있을게."
조용한 극장의 쓸쓸한 조명 아래에서,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요염하게 웃었다. 세상의 모든 위험한 것을 담은 듯한,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해내는 웃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면서도 손을 뻗게 되는 고혹적인 웃음. 흐려지는 시야속에서도 칼린은 눈앞의 자신의 표정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좋은 꿈 꿔."
무대의 불이, 꺼졌다.
천천히 눈을 뜬 칼린의 눈 앞에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영주가 있었다. 약간 덜컹이는 감각이 그가 지금 마차 안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머리를 배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다가, 곧 자신의 영주의 무릎 위라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일어나려고 했다. 영주는 그런 칼린을 부드럽게 눌러서 다시 눕혔다.
"무, 무슨..."
"얌전히 있거라. 재촉해서 뭐가 달라지겠나."
영주는 칼린을 팔로 덮으며 나즈막히 말했다. 칼린은 벙 쪄서 가만히 있다가, 곧 몸에 힘을 풀었다.
"...전 기절했었나요?"
"그래."
넓은 마차였다. 칼린이 다리를 뻗어 누워 있을 수 있는 정도로. 붉은 노을 빛이 마차 안에 향기롭게 깔려 있었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칼린과 요나 뿐 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먼저 윌레인으로 보냈다. 난 너를 데리고 왕도의 병원을 가겠다고 했고."
"...병원을 갔다 온 건가요?"
"하하하, 네가 의사를 얼마나 싫어하는 지는 잘 안다. 걱정마라. 애초에 부상도 없었어. 그냥 따로 빼돌려서 침대에 조금 눕혀 놨었을 뿐이다."
요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칼린도 웃었다. 그는 창으로 들어오는 진홍을 조금 즐기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영주님.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어요."
요나는 그런 칼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웃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살아있다. 그거면 성공한 거야. 사과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감사합니다."
한가한 분위기였다. 요나는 연신 칼린의 머릿결을 쓰다듬어 댔고, 칼린도 그게 나쁘지 않아 그냥 얌전히 누워 있었다. 말발굽만이 다그닥 거리는 소리 안에서 이번에는 요나가 말을 꺼냈다.
"지휘관이 그러더구나. 너도 상당했다고. 봤으면 어떻게든 말리는 데 급급했겠지만, 솔직히 못 본 것이 아쉽다고 느껴지더군."
"하하, 아뇨... 꼴사납게 방어에만 급급했는 걸요."
"네가 상대한 자가 윌레인 최강의 검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선전한 거야."
칼린은 그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었다. 언젠가 릴로가 말 해주었었다.
"오른팔이 없는 데도 그 정도로 강하다니, 놀랍네요."
그는 태평하게도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남자의 칭찬을 꺼냈다. 그러나 그가 하려던 짓을 둘 째 칠 정도로, 그의 실력은 감탄이 나오는 것이었다.
"조금 다르지. 그에게 신체 결손은 문제가 되지 않아."
요나는 예시를 떠올려 보려고 하다가, 특별히 예시를 지을 것도 없어서 그냥 직접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그는 오른손이 없다면, 그 신체의 불균형까지 이용해서 더 강해지는 쪽이다. 오히려 팔을 잃기 전보다 지금이 더 강해진 것 같더군. 난 그렇게 느꼈었다."
그의 진정한 강점은 빠른 적응력이라는 것 일까. 칼린은 그렇게 정리했다.
"넌 그런 놈에게서 버텨냈다. 백주 대낮에 말이야. 정말이지, 검을 가르친 자로서 상당한 보람을 느끼고 있단다."
"...감사합니다."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 대화를 끊어냈다.
"영주님."
"말하거라."
"저...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에게 이세계라는 것은 결국 스치는 길이다. 돌아가는 방법이 아예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에게 이세계는 자신의 정착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더 강해지고 싶었다.
처음으로 보인, 자주적인 향상심이었다.
"...노력해보마."
영주는 웃으며 대답했다. 해지는 마찻길을 따라, 마차는 정적을 가르며 나아간다.
"그러니까... 그 외팔이가 왕국 최강이라고?"
아스타의 질문에 도르베는 몇번이나 말하기 귀찮은 듯 말했다.
"그래. 계속 말했잖느냐."
부대원들은 조금 지쳐 있었다.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에 바짝 긴장 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러면, 요나랑 같은 전쟁영웅에 왕국 최강이신 분이 왜 칼린한테 시비를 턴 건데?"
"그것도, 계속 나는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도 의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현장에 없었지만, 상황을 전부 본 부대원들은 그와 칼린이 계속 무슨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칼린과 이 주제로 대화하지 마라."
요나는 이 말을 남기고서 자신들을 먼저 귀환 시켰다. 이제 지난번에 요나의 편린을 알게 된 부대원 이외의 부대원들도 요나와 칼린 사이에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뭐, 생각해보면 칼린은 원래 비밀이 많기는 했지. 애가 착해서 가볍게 넘어갔었지만..."
"아는 것 좀 있으세요? 칼린이 부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는 사이셨잖아요."
핀의 질문에 륑게는 내뱉듯 말했다.
"영주말은 쥐뿔로 듣고 어딘가의 귀족님이랑 즐기신 새끼한테는 못 말해주지."
"아니, 영주님이 저한테는 그런 말 안 했었단 말이예요! 따지고 보면 륑게씨 잘못인데!"
"오냐. 내 잘못이다."
"그럼 내가 물어 볼게.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어?"
자칫 흐지부지하게 넘어가려는 주제를, 이리하가 다시 붙잡았다. 륑게는 이리하가 조금 꺼려졌기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이정도는 말해도 되려나... 칼린 말야, 영주가 어디에서 주워 온 애거든. 워낙 잘생겼고 애가 다재다능하니까 영주는 팔 생각으로 길러주고 있었단 말야? 근데..."
"우리가 그의 가정교사와 합심해서 칼린을 탈출시키려고 했었지. 칼린은 성에 남아 이목을 잡던 가정교사를 구하기 위해 성에 돌아갔다가 잡혀버렸고, 탈출극은 실패로 넘어 갔어."
륑게의 말은 갤러한이 중간에 끊으며 지나갔다.
"영주는 칼린이 설득을 잘 해줬다면서 우리를 용서했지. 그리고 전후복구부대를 창설했어. 우리도 뭐, 반 쯤은 내 여친과 돈이었지만, 반 쯤은 우리 죄를 사면 받으려고 거기에 들어갔지. 어찌되었건 영주와 적대했던 거니까."
갤러한은 이리하를 어느정도 믿는다. 그는 이리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이상해. 어디까지나 근본없이 주워 온 칼린이 왕국 최강의 무력과 적대할 이유가 뭐가 있지?"
"야, 우리가 그런 걸 신경 써서 뭐하냐."
아스타의 말에도 갤러한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내 생각은 이래. 요나에게는 뭔가 숨기는 것이 있으며, 그건 칼린과 관련된 것이다. 아마 칼린이 요나에게 잡혔을 때, 우리를 구하기 위해 칼린이 일종의 계약을 제시. 그 계약을 이뤄 내기 위해 요나가 일종의 비리를 저질렀고, 그걸 알아챈 제리코가 칼린을 압박하는 것으로 경고를 한 것이다."
"...일리는 있군."
갤러한과 이리하는 서로를 마주하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아니, 그런 걸 알아서 뭐하냐고... 여기 비밀 없는 부대원 있어?"
"없지. 하지만 우리 고용주가 관련된 일이면, 운이 나쁠 때를 대비해야 해."
타당하게 들리면서도 어딘가 아구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반 쯤은 속죄를 위해 부대에 속해 있는 팀 원생텀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후에 들어온 부대원들은 언제든지 부대를 먼저 나올 수 있다. 정식 제대 후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될 뿐이다.
"뭐,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든 음모론 밖에 더 되냐. 어차피 다음 임무에는 영주도 참여하게 될 텐데, 그 때 확인해 보던가 하면 되지."
아스타는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잘됐네, 이리하. 칼린과 영주 사이에 뭔가 있나 본 걸?"
라드는 이리하에게 그렇게 말했다. 테라스에서 있던 일을 모르는 다른 동료들에게는 조금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이리하와 도르베는 그 말이 무겁게 닿았다.
'이건 상황이 좋게 흘러 가는 군.'
라드는 드디어 순풍이 분다고 생각했다.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은 조종이 편해진다. 칼린과 요나, 이 사이의 일을 알아낸다면, 어쩌면 지금처럼 작두 위를 걸어 다닐 필요는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차는 벨카에 도착했다.
요나는 무릎 위에서 다시 잠든 칼린을 쓰다듬으며 그저 하염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벌어진 모든 일. 부대원들은 이제 약간의 의구심을 품었으리라. 칼린에게든 요나에게든 약간의 불신이 싹텄으리라. 누군가는 알아보려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좋다. 불신으로 생기는 그 거리감이 좋다. 그 의구심이 설령 칼린에게는 향하지 않는 것이라도, 칼린이 요나의 종자인 이상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불쌍한 칼린. 믿고 있던 동료들에게 거리감을 느꼈을 때 너는 어떤 표정으로 울어 줄 것이냐. 아니, 넌 울지 않겠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괜찮은 척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주제를 꺼내면, 넌 모두에게 숨겨왔던 네 감정을 나에게 분출해 내리라.
불쌍한 칼린.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밖에 없다. 그걸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게 되어 유감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장미는 누군가 따가려는 것이다.
내가 네 가시덩쿨이 되어주마. 네가 나의 검으로 있어준다면, 내가 네 방패로 있어주마. 언젠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검이 되어 우리 둘만의 낙원을 지켜 다오.
그때는 8귀족의 안개성보다도 단단한 방패와, 제리코의 무력보다도 날카로운 검으로 무장할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때를 위하여.
요나는 조용히 콧노래를 불렀다. 언젠가 그녀의 아버지가 불러주던 자장가였다. 한때는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그저 같잖은 인간관계에 이성을 잃고 제정신을 못 차리는, 누군가의 위에 군림할 그릇이 못되는 사람이라 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염없이 노래를 불렀다. 감미로우면서도 어딘가 끈적한 노래였다.
둘이 탄 마차는 저녁에야 도착했다. 요나는 마차가 멈추고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마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하고, 정차된 마차 안에서 잠든 칼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약 1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칼린은 다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반쯤 감은 눈으로 영주를 바라보았다.
"일어난 것이냐."
"...네. 다리는 안 저리셨나요..."
"하하하, 그것부터 묻는게냐.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다."
영주는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어둠이 깔린 마차속에서 칼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마법같은 타이밍이로구나. 딱 방금 마차가 정차했다. 슬슬 일어나려무나."
"하하하... 마차가 멈춰서 깬 걸까요?"
칼린은 몸을 일으켰다. 온기가 사라지며, 한순간 따뜻했던 날씨가 시리게 느껴졌다. 칼린이 누워있던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아직 꿈을 꾸듯 멍하니 있는 영주에게, 먼저 마차를 나온 칼린이 손을 뻗었다.
"성으로 돌아가요, 요나. 벌써 마부분도 들어가셨네요."
"...아."
영주는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저 손. 몇 번이나 나를 잡아주었는가.
"아, 오늘은 동료들과 술집이라도 가려고 했는데... 뭔가 지쳐버렸어요. 몸이 아니라 정신적인 쪽으로... 일찍 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게 좋겠구나."
영주는 칼린에게 끌려 마차에서 내리고, 그의 뒤를 따라가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담배를 한 개피 꺼내 물었다.
"축제는 즐거웠느냐?"
"그럭저럭요."
"그럼 됐다."
그리고 평소의 일상처럼 성문으로 향했다. 성 안에 작게 불이 들어왔다.
"라드, 넌 또 어디론가 가는 것이냐?"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라드를 보며 도르베가 물었다. 그 말에 다른 부대원들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러는가."
"너야 말로 뭐가 문제야. 저 새끼는 그냥 보내라고. 그 쪽이 술 맛이 더 좋아."
륑게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라드는 웃으며 도르베에게 말했다.
"그렇다는데. 뭐, 내가 있으면 술 맛이 없을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잡아주는 건 고맙지만, 역시 먼저 일어나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금화를 꺼내 들었다.
"이거, 열심히 연습하라고. 그럼."
도르베는 술집을 나가는 라드를 바라보며 자신의 금화를 꺼내 들었다.
'설마 진짜 금은 아니겠지.'
그리고 다시 그 금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언젠가 완벽하게 마술을 쓸 수 있게 된다면, 그 때 아스타에게 먼저 보여줄 생각이었다.
라드는 술집을 나와 그대로 마차에 탔다. 그리고 익숙하게 지폐를 꺼내며 목적지를 말했다.
"부르카마을로."
마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라드는 바로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또 뭐지?"
"아드로 가신다고 해야죠. 요금도 먼저 주시면 안되고."
마부는 등을 돌리며 모자를 벗어 들었다. 그리고 천진하게 웃었다. 갈색 피부에 장신. 에테롬의 집사, 할란이었다.
"주인님이 찾으세요. 얌전히 따라오시죠."
"점점 수단이 거칠어 지는 군."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거친 일은 없을 겁니다."
할란은 그렇게 말하고 고삐를 잡았다. 곧 마차가 움직였다.
그를 부른 곳은 지난번과 같은 장소였다. 라드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에테롬을 마주했다.
"이야, 라드씨! 뭔가 자주 뵙는 느낌이네요."
"아아... 그렇군요."
에테롬은 평소와 같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이번엔 주위에 떡대들은 보이지 않았다.
"뭘 그렇게 두리번 거리시나요. 그러지 않으셔도 이 방에는 우리 셋 밖에 없답니다."
"그런가요."
"그렇지요. 그나저나 라드씨, 말끔해지셨네요!"
라드는 상처들을 가리기 위해 보이는 부분에 약간의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망토도 두르고 있었다. 그 화장의 뒤로, 식은 땀 한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이보쇼. 요나의 홍보가 기똥찬 건 내 잘못이 아니잖-"
"말."
에테롬은 정색하며 라드의 말을 끊었다. 라드는 그런 그를 조금 노려보다가, 말투를 고쳐서 다시 말했다.
"...요나가 그런 방식으로 홍보하며 권력이 커진 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걸로 보복하려고 하시는 거면, 큰 실수일 겁니다."
"네-? 설마요!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하하, 제가 라드씨에게 더 보복할 게 뭐가 있습니까?"
흔쾌하게 말하며, 에테롬은 웃었다.
"지난번 50대로 그 주제는 완전 끝난 거예요! 이건 상인의 계약이었습니다. 절대로 철회도 수정도 하지 않아요..."
말을 낮추며, 그는 술잔을 들었다.
"얼마나 큰 손실이 있었든 말이죠... 네, 라드씨. 사실 그 건수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계약이 그랬는데."
"거 다행이군요."
그는 명백히 라드를 압박 중이었다. 애초에 착각할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그를 데려온 뒤, 그의 기세를 한풀 꺾고 대화의 장을 시작했다. 에테롬은 더 이상 기싸움에서 밀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말하려던 것은 5일 후에 있을 접견에 대한 것이예요. 지난 번에도 접선했었던 그 조직, '디알테스트그롬'의 수뇌부와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전에는 대충만 말씀드렸죠?"
그는 다시 압박하던 분위기를 풀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 때를 위한 주의사항들만 미리 설명해 드리려는 거예요. 라드씨가 상회 용병들을 통솔하게 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