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암투(暗鬪)
각자의 방에서 울리는 기상소리에 부대원들 전원이 잠에서 깨어났다. 과음을 한 자도 없었기에 다들 기상에 무리는 없었다.
그들은 백색의 정복을 입었다. 몇 개씩 달려있는 금줄이 자칫 밋밋해 보이는 그 정복을 오히려 지나치게 화려한 느낌으로 바꾸었다. 부대원들 대부분은 그런 지나치게 고급 진 느낌이 불편했다.
그대로 아침식사까지 끝마친 그들은 왕궁의 정규부대원들보다 먼저 몸을 풀었다. 여러가지 조언과 질문 답변 등을 할 예정이며, 어쩌면 대련 신청까지 받아줘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각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훈련장으로 발을 옮길 때, 요나가 막 나가려는 칼린을 붙잡았다.
"왜 그러세요?"
"칼린. 내가 어제 했던 말을 기억하겠지."
칼린은 그 말에 '어제 우리가 대화를 좀 많이 해서'같은 농담으로 받아 치려고 했다가, 요나의 표정을 보고 곰곰이 어제일들을 떠올렸다.
"...죄송한데 어떤 말씀 말이시죠?"
"누구를 피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아, 네. 결국 파티에도 안 오셨던 것 같은데 괜찮은 것 아닌가요?"
"괜찮지 않아. 그자라면 분명 너를 만나러 올 거다. 어제 안 왔다는 건, 언제 어느 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올 지 모른다는 거야. 칼린. 똑바로 들어라. 굳이 한 번 더 말하겠다."
그녀는 칼린의 양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 오른팔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라. 그 자가 말을 걸면 무조건 진실을 답해라. 낮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그자와 적대하지 마. 만약 그것이 밤이라면..."
요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생각하던 대로 말을 끝마쳤다.
"밤이라도 정면으로 맞서지는 마라. 이렇게 말은 하지만, 별거 아닐 것이다. 안심해라. 긴장하지 말고, 그냥 그런 남자가 오면 진실만 대답할 거라고 약속해라."
"...네, 영주님. 왜 그렇게 떠세요."
"난, 난 너와 계속 같이 있어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부디... 아니, 이렇게 계속 강조 해봤자 네 불안감만 키우는 꼴이겠구나. 미안하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힘겹게 웃어 보였다.
"걱정마라, 아무 일도 없을게다."
"네. 그럼 계속 가요. 뒤쳐졌어요, 우리."
벌써 저만치 앞서고 있는 동료들을 보고, 칼린은 가면을 쓰며 발걸음을 조금 재촉했다. 요나는 그런 칼린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왕국의 용사들에게 목숨보다 소중히 해야 할 덕목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지휘관이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용기, 긍지, 전우애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 모든 덕목을 갖추어 최강 최악의 비등록 마법사를 사살해낸 10명의 용사들이 있다!"
그는 단상의 옆쪽으로 팔을 뻗으며, 일렬로 서있는 부대원들을 가리켰다. 우레같이 쏟아지는 병사들의 환영속에서, 그들은 작게 손을 흔들어 보았다.
"이번 훈련은 그들이 직접 지켜봐 주실 예정이다! 전부 감사의 마음을 담아 5초간 전방에 함성!"
칼린은 아직 그들의 실력은 모르지만, 확실히 군기는 뛰어나게 잡혀 있다고 알 수 있었다. 함성이 잠잠해지자, 지휘관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평소처럼 만 훈련하는 모습을 보여라! 각 부대마다 한 명이 배치될 것이며, 훈련을 끝마치고 난다면 그들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봐도 좋다! 대련을 부탁할 수도 있고! 이상, 질문 없다면 바로 시작하겠다!"
몇 번이나 연습했던 것일까, 완벽하게 정돈된 그들은 질문 한마디 없이 정적을 유지했다.
"뭐가 평소처럼 만이냐. 나 참, 이런 건 안 바뀌었군."
부대원 중 유일하게 군대를 경험해 본 도르베가 웃었다. 칼린도 자신의 예전 군복무 때가 떠올라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은 총 세시간동안 진행되었다. 그걸 보며 칼린이 느낀 것은, 그 훈련 내용이 상당히 가혹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전생의 칼린도 저 정도의 운동은 따라잡을 수 있었겠지만, 그건 전생의 그가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눈 앞의 군인들은 그만큼 몸이 특출난 자들 같지는 않았다.
'이게 마나의 흐름을 이용한다는 것인가.'
생각보다 훨씬 굉장한 것이었기에 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동시에 이세계의 평균적인 피지컬은 원래 자신이 살던 곳에 비해 상당한 수준이라고 확실하게 결론을 내렸다.
모두가 풀페이스 헬름을 끼고 있었기에 개개인의 식별이 불가능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극적인 효과를 내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움직이는 그들은 칼린의 넋을 빼앗기에는 충분했다. 다른 부대원들도 인상 깊은 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훈련이 끝나고 다시 부대원들이 모이자,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아스타였다.
"저거 대련 걸리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건 맞냐?"
"맙소사, 아스타..."
도르베는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그들을 앞에 두고 앉은 병사들이 하나씩 질문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질문은 이른바 '팬심'에서 나오는 쓰잘데기 없는 질문이었다. 일부는 그들이 네크로맨서와 싸웠을 때 느꼈던 것을 물어보았고, 일부는 용기를 얻는 법 따위를 물어보았다. 질문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였다.
한명이 팔을 높이 들었다. 다른 병들보다 두 치수정도 커 보이는 거한이었다.
"대련도 받아 주시는 것이 맞습니까?"
그 말에 일부 부대원들은 조금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길수 있는 건 맞냐, 이런 말을 늘어놓기는 했어도 그들과의 실력차는 명확하다. 분명 조금 성적이 좋은 병사가 호기를 부리는 것이리라.
"그럼요. 뭐, 누가 상대해 드릴까요."
갤러한의 말에, 그 거구는 칼린을 가리켰다. 칼린은 그 손가락의 끝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지목된 것을 눈치채고 조금 당황했다.
"저요?"
확실히 칼린은 다른 남자 대원에 비해서 말라보인다. 기초 근력이 제일 낮아 보이는 남성. 어찌 보면 쉽게 대련을 걸기에는 가장 부담이 적은 선택이다.
그러나 칼린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영주가 한 말도 있었다. 그는 굳이 그 병사의 오른팔을 확인해 보았다. 제대로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좋습니다. 뭐 어디서 하면 되죠?"
요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이걸 피할 수는 없다. 일반 졸이 건 대련을 받아들이며, 그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부대 안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저 자식 운이 안 좋네, 살살 봐줘라?"
"뭐예요, 갤러한. 치켜세워줘도 아무것도 안 나와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갤러한은 칼린의 실력을 안다. 겉보기는 저렇지만, 그는 상당히 강하다.
부대원들과 병졸들은 훈련장 가운데에서 원형으로 칼린과 도전자를 감쌌다. 그리고 양측에게 무기가 부여되었다. 칼린은 칼린에게 맞는 나무로 만들어진 쌍수도가, 도전자에게는 윌레인의 제식 목검이 부여되었다.
"어느 한쪽이 제압되었다고 판단이 내려지거나, 한쪽이 항복을 외칠 때 대련을 마친다! 다들 어느쪽이 이기든 이 대련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도록!"
지휘관은 그 말을 하고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빠르게 내리 찍었다.
"시작!"
먼저 덤벼든 것은 도전자 쪽이었다. 칼린은 적당히 상대하고 넘길 생각이었기에 그 자리에서 가만히 그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검이 맞닿았다. 상대 측에서 꽤나 큰 동작으로 휘두른 검이었음에도, 칼린은 굳이 피하지 않고 가볍게 공격을 넘겨냈다. 도전자는 내려간 검을 그대로 다시 올렸고, 칼린은 그제서야 검을 맞댔다. 서로 눈을 마주하는 상태가 되자, 도전자 쪽에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칼린씨, 영광입니다.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아, 저야 말로 영광입니다. 너무 기쁘네요."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가면을 쓰고 계신 이유가 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 타이밍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상했다. 하지만 궁금할 수는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에 큰 흉터가 있거든요. 엄청 흉해요."
"헤에, 그렇습니까?"
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검을 높이 쳐올렸다. 칼린의 자세가 무너진 사이, 그는 다시 안쪽으로 파고 들어왔다. 칼린은 그대로 손목을 돌려 검을 돌려 쳐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기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그대로 칼린을 어깨로 밀어낸 뒤, 다시한번 검을 맞대는 자세로 돌아오게 되었다.
"와, 이걸 막아 내실 줄은 몰랐어요! 대단하시네요!"
"하, 하하! 당신이야 말로 제 생각보다 상당히 강하시네요."
칼린은 그의 실력을 조금 칭찬했다. 나쁘지 않았다. 설마 일반 병졸이 이렇게 바로 파고 들어올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칼린씨, 다른 질문입니다만, 괴물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첫 임무 때 괴물사냥에 가장 큰 공헌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그 질문을 지금 꼭 해야 되나요?"
칼린은 조금 더 진심을 내기로 했다. 거구의 남성은 조금씩 검이 밀리면서도 굳이 대답했다.
"지금 들려주시면 안될까요? 검을 맞대고 있는 지금이 가장 묻기 좋을 때 인 것 같은데."
"...언젠가 전부 척살해야 할 것들이죠. 국민들을 위협하는 것들이니까요."
칼린은 그렇게 대답하고 그를 쳐냈다. 그리고 그대로 검 손잡이를 찍어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 공격은, 상대도 똑같이 검 손잡이를 아래에서 위로 후려 올리듯 적중시켜 상쇄되었다. 칼린이 크게 당황한 틈을 타, 그는 발로 칼린을 차냈다. 그리고 그대로 목검을 휘둘렀다.
칼린은 가까스로 그걸 막아냈다. 다시한번, 검을 맞대는 대치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혹시 이 싸움을 하기 전에 영주가 뭔가를 당부하지는 않았습니까? 무엇을 숨기라고 했다던가, 무엇을 급하게 없애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칼린은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끼고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풀페이스 헬름으로 가려져 있는 얼굴, 왼손으로만 검을 잡으며 늘어져 있는 오른팔. 그는 대답 대신 먼저 확인을 하기로 했다.
칼린은 몸을 빙글 돌려 상대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검을 든 손을 역수로 바꿔 그의 오른팔을 강하게 쳐냈다. 도전자는 몸이 조금 뒤로 밀려나면서
오른 팔이 떨어져 나갔다.
"뭐야 저거..."
구경하던 자들이 전부 말이 없어졌다. 신체 결손자는 부대에 지원할 수 없다. 저것은 확실한 외부인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가장 당황한 것은 칼린이었다.
"당신은..."
칼린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 외팔이는 다시 칼린에게 거리를 좁혀왔다. 한번씩 다시 맞닿을 때 마다 점점 검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질문에 대답해라, 괴물."
급변한 상황에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미 도르베는 이 상황을 요나에게 알리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그만! 대련은 중지다!"
지휘관은 그렇게 말하며 병졸들에게 검을 뽑게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외팔이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그...걸 왜 물으시는 거죠?"
칼린은 그 검을 필사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한 팔에 실린 검의 무게가 아니었다. 마치 코끼리가 찍어내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지만, 칼린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외팔이는 아직 전력을 보이지도 않았다.
"질문은 내가 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의 다리를 걸었다. 그리고 크게 넘어지는 칼린의 허리를 그대로 목검으로 내리찍으려고 했다. 칼린은 그 상황에서 몸을 비틀어내며 어떻게든 그 공격을 막아냈다. 한 다리로만 몸을 지탱하며, 수평으로 검을 막아낸 그 자세는 칼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자세였다.
그리고 그대로, 칼린은 들어올린 다리로 그의 왼쪽 어깨를 찍어 눌렀다. 도전자는 그 공격을 옆으로 피해 낸 뒤 그대로 몇 보 물러났다.
"더 움직이지 마라! 외부인, 네놈을-"
"아, 시끄럽네."
그 거구의 도전자는 성가신듯, 검을 허리에 꽂은 뒤 헬멧을 잡아 던졌다. 지휘관의 안색이 하얘졌다.
"말릴꺼면 들어오고. 어차피 휘말릴 뿐이겠지만."
헬멧을 완전히 벗어내고 다시 검을 뽑은 그는, 칼린의 예상대로, 요나가 주의를 요구했던 제리코였다. 그는 모두를 한번 둘러본 후, 지휘관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다시 표정을 폈다.
"어이, 괜찮지?"
웃으며 그렇게 묻는 제리코를 향해, 지휘관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제압하기에 지금 인원은 너무 적다.
"...계속 하십시요."
"좋아."
"뭐가 계속 하십시요 야, 이 씨팔!"
아스타가 흥분하여 덤벼들려고 했으나, 곧 다른 부대원들에게 제압당했다.
"야, 일단 진정해! 지금 우리가 끼어 들 상황이 아냐!"
"뭔데, 칼린이랑 졸이랑 싸우는 거 아니었어? 저쪽에서 과몰입 하면 말려야지!"
"저건 졸이 아냐, 이 멍청아! 진짜 위험해지기 전까지 끼어들지 말고 대기하고 있어!"
갤러한과 릴로가 그녀를 잡아 누른 것으로, 방해꾼은 전부 없어졌다. 칼린은 목을 울리며 침을 삼켰다.
"자, 그럼 계속 해보자고. 네가 올래, 내가 갈까?"
그는 몇번 다리를 털며 그렇게 말했다. 더 이상 칼린이 상대를 봐줄 이유는 없다. 칼린은 튕겨 나가듯 그에게 덤벼들었지만, 곧 가볍게 막혀 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칼린의 계산 안의 일이었다.
"뭐야, 이렇게 단순하게 덤벼온다-"
칼린은 맞댄 검에서 한 손을 떼어낸 뒤 그의 왼 어깨를 잡아냈다. 그는 그대로 밖다리를 걸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리코는 그 공격을 박치기를 하는 것으로 밀어낸 뒤, 오히려 칼린의 다리를 걸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마치 어떤 기술을 쓸지 예상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어떻게 이걸...'
"그 기술은 뭐냐, 처음 보는 건데. 재밌는 걸 쓰려고 하네."
그는 어떤 기술이 올지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찰나의 순간에 칼린이 하려는 짓을 이해했을 뿐이었다. 칼린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경악을 참을 수 없었다.
"자, 그럼 거리도 다시 벌어졌으니...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세번째 질문은 대답한 거나 다름없는 것 같으니 넘어가고."
그는 검을 높이 들고 다가왔다. 무언가의 준비자세조차 아닌, 마치 승자가 승리를 선언하는 듯한 자세였다.
"인간이 좋은가?"
그 질문은, 너무 근본적인 것에 가까운 질문이었기에 칼린은 조금 고민했다. 그리고 제리코는 그 찰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잠깐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진 듯 한 그는, 몸을 낮추며 바닥에 미끄러지듯, 없는 오른팔 쪽을 축으로 회전하며 강하게 칼린의 하단을 노려왔다. 칼린은 발을 뒤로 떼며 가까스로 그 공격을 막아냈다. 그의 반사신경이 아니었다면 인지조차 하기 힘들었을 공격이었다.
"이걸 막는다고? 하하."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그대로 다리로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언젠가 칼린이 했던 기예와도 같은 동작이었다.
"넌 나랑 좀 비슷하네."
그는 그 말과 함께, 몸과 같이 들어올렸던 검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그리고 그 기세로 전방위로 검을 후리기 시작했다. 칼린은 그 검을 전부 막아내고 있었다.
"오케이, 점점 빠르게 가자고."
그는 이제 완전한 직립자세로, 오직 왼팔만을 움직이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린은 점점 빨라지는 검속을 막아 내기만 하는 데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 검궤의 사이로, 제리코는 가만히 칼린을 바라보았다.
칼린은 이리저리 들어오는 검들에 모든 반사신경을 집중하며, 어떻게든 검을 전부 보고는 있었다. 문제는 그의 몸이었다. 낮의 칼린은 칼바람처럼 날아오는 목검들에 전부 반응하는 데에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대답해, 괴물. 인간이 좋나?"
그의 표정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휘몰아쳐오는 공격속에서, 칼린은 한 순간, 인간이 좋냐는 질문에 긍정하면 그것이 사실이 될 지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그냥 요나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인간이 좋냐는 말은... 너무 범위가 커요...! 하지만..."
그의 검은 그 순간에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검격에 칼린의 목검이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이 있고 싶습니다!"
칼린은 양 팔에 한계를 느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눈을 보라는 듯, 집중의 한계점을 사용하며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 제리코는 휘두르는 팔을 멈추지 않으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마침내 휘몰아치던 검격이 멈추고, 그는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칼린은 더이상 팔을 드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게 네 대답이냐?"
제리코는 웃음을 걸고 칼린에게 질문했다. 칼린은 힘들게 고개를 들어 올려, 쉰 목소리로 헐떡이며 대답했다.
"...네."
구경하던 모두가 침묵했다. 둘 사이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제리코가 몰아치던 공격을 멈추고 검을 들어올린 것으로 부터 이 대련이 막바지에 도달했음은 다들 알 수 있었다.
제리코는 자신의 목검을 올려다보았다. 전체적으로 실금이 퍼져 있어 언제 부셔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가만히 그 검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뒤로 집어 던졌다.
"네 개의 질문에 두 개는 거짓말, 하나는 답을 회피라..."
그는 고민하듯 왼손을 턱에 갖다 댔다. 그리고 잠깐 얼굴을 찡그려 본 그는 곧 가볍게 말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가산점을 낸 거다. 모든 인간이 다 좋으면 그건 그냥 이상한 환상에 빠져 있을 뿐 인 거지. 합격이야, 칼린군."
"...절 그냥 보내주시는 겁니까?"
"응. 아직은 살려 줄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입고 있던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뭐, 적으로 보는 일은 두 번 다시없도록 하자고. 그럼."
그는 지금까지의 분위기가 마치 장난이었다는 듯,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압도적이었던 그 모습에 병졸들은 잔뜩 위축되어 길을 열었다. 칼린은 흐려지는 시야속에서 그의 뒷모습을 곱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