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암투(暗鬪)
"칼린, 설마 저런 미치광이가 뱉은 말에 동조했던 것은 아니겠지?"
도르베는 방을 나와서 같이 복도를 걷는 칼린에게 그렇게 물었다. 칼린은 멍하니 있다가 퍼뜩 놀라며 대답했다.
"네? 네, 뭐. 네.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면 다행이다. 입맛에 맞게 거짓으로 퍼뜨리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만, 저런 자의 말을 깊이 듣는 것은 아니다."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을 앞서 나갔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저런 식으로 진실을 정하는 자에게 진정성이라는 것이 있을까 보냐. 언젠가 스스로의 말조차 믿지 못할 남자다."
칼린은 그 말에 천천히 발걸음이 느려지다가, 이윽고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대중에게 전달되는 진실은 다르니까요. 개인이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니까. 예를 들어, 정교한 가짜도 모두가 인정하게 되면 진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도르베는 그 말에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너..."
"제 말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래! 예를 들어 늑대가 있는 거죠. 양이고 싶은 늑대가 있는 거예요. 그 늑대는 양 사이에서 자라왔고, 양을 해칠 생각도 없고, 양들도 전부 그 늑대를 양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양치기도 그를 용인했다면, 그 늑대는 양이라고 불러도 되는 게 아닌가요?"
칼린은 조금 혼란스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마레에게 옮은 게냐? 이상한 말을 하는 군."
"제 말은... 제 말은, 늑대는 양이 될 수 있을까, 이거예요."
도르베는 잠깐 한숨을 쉬고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이봐, 칼린. 이 문제는 철학으로 넘어갈 건수조차 되지 못한다. 세상 모두가 어떻게 인식하든, 양과 늑대는 원 관념 자체가 달라. 단순히 다른 자들이 늑대를 양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관념이 바뀌지는 않는 거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도 결국 그건 거짓인 거다. 진실은 따로 있고, 언젠가는 밝혀져."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걱정이 담겨있었다. 칼린이 단순히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어 꺼낸 대화 주제 같지는 않았기에 그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진실과 거짓조차 자신의 줏대로 만들려는 것은 오만이다. 칼린, 저자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마라. 당장 봐라, 네크로맨서도 살아있지 않느냐."
"...그렇네요, 도르베. 이상한말 해서 죄송해요."
도르베는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칼린을 보며 자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는지 조금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이런 일에는 확실히 대답하는 것이 친구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럼 가자."
"아, 전 영주님을 만나 뵈야 할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여기서 먼저..."
"그런가. 그럼 나가보도록 하지. 주말에 보자고."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 복도를 따라 갔다. 칼린은 그런 그를 보며 그의 말에 대해 곱씹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레의 말이 더 와 닿았다.
"여기야, 도르베!"
저녁이 되고, 도르베는 만나기로 한 술집으로 발을 향했다. 아스타는 먼저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언제부터 마시고 있던 거냐?"
"나야 그냥 문 열리자 마자 들어왔지. 빨리 앉아봐."
도르베는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사람은 많아 보인다만... 왜 굳이 이런 곳까지 부른 것이냐? 술이라면 우리 여관에서 우리끼리 마실 수 있을텐ㄷ-"
"쉿! 목소리 낮추고, 후드 써."
아스타의 말에 도르베는 의아해하면서도 입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눌러썼다. 아스타가 올 때 꼭 입고 오라 한 것이다.
"...뭐, 적이라도 있느냐?"
"아니, 그런 게 아냐. 여기에서 너는 오늘 개싸움을 배운다."
"무슨-"
"유동적인 싸움을 배우는 데에는 술집 만한 게 없지. 빠르게 적응하지 않으면 어느새 둘러 싸일꺼야."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젓가락을 하나 집어 들고 던졌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성이 앉아있는 의자 다리에 젓가락이 박혔다.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떠돌이들이야. 벨카에서 가장 큰 술집은 우리 여관이었는데, 거기를 우리만 사용하게 되었으니까 다들 이렇게 다른 곳으로 분산된 거지."
"호, 또 그렇게 되나?"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할꺼야."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젓가락을 박아 넣은 자리로 다가가 의자 다리를 발로 찼다. 젓가락이 박혀 있던 의자는 그걸로 버티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졌다. 거구의 남성이 앉은 자리에서 몇 바퀴정도 뒤로 굴렀다.
"뭐야, 씨발?"
그와 같이 술을 마시고 있던 동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스타는 그 반응에 후드를 벗으며 빙그레 웃었다.
"영웅님들이 술 좀 마시겠다는데, 시끄러워서 꼴 받잖아. 안 닥쳐?"
그 말에 다른 손님들도 하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몇은 무기까지 쥐었다. 술집의 주인장은 일이 커질 것을 예상하고 카운터로 숨어들어갔다.
"너네가 빼앗은 귀족 술집이나 쓰시지 그래?"
낮게 으으렁대며 다가오는 무리들에게, 아스타는 천연덕스럽게 테이블에 걸터앉아 말했다.
"그러고 싶었지만, 저쪽에 있는 내 파트너가 새로운 안주가 궁금하다고 해서 말이야. 도르베! 후드 벗어!"
도르베는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일에 당황했다.
"하, 이게 네 훈련방식이냐.."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며 맥주잔을 비우고, 후드를 벗었다. 솔직히, 그녀와 같이 있으니까 그의 통념적인 상식이 부서지고 있는 것 같아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도르베! 이 술집의 누렁이밥 때문에 화났다! 꼬우면 다들 덤벼라!"
"오우, 기세 좋고!"
아스타는 그렇게 추임새를 넣으며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잠시 유지된 침묵속에서,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다음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술집싸움이다!!!"
그런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게 싸움의 신호였다.
리쿠르트는 요나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리쿠르트가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고 난 이후 부터, 그들은 간간이 이런 식으로 자리를 만들어 같이 차를 마시고는 했다.
"정말 맛있어졌어요. 요나, 매번 실력이 늘어나시는군요."
"후후, 고맙군. 좋은 스승 덕이지."
둘만 있을 때에는 그런 식으로, 리쿠르트는 요나를 그냥 '요나'라고 부르고는 했다. 그녀는 다시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칼린을 정규 학교로 보내도 되지 않을까요? 그 아이는 이제 윌레인의 고등학생수준은 될 텐데 말이죠."
"뭐야, 이제는 내 성에서 나오고 싶은게냐?"
농담처럼 던지는 요나의 말에 리쿠르트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아니, 제 말은...이제 직접 사회를 경험중인 칼린에게 언제까지 가정교사가 필요하겠냐, 이 말이죠..."
"뭐야, 그런건가."
요나는 차를 홀짝이며 머릿속에서 조금 말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뭐, 아직은 그도 모자란 점이 많다. 진짜 상식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놓치는 일도 많이 생기지. 일단은 그런 세세한 것들이나 너무 지나치게 당연해서 넘기는 일들도 가르치며 머물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겠느냐."
"그 말도 맞네요. 확실히 가끔씩 '이런 것도 모른다고?'할 만한 질문을 던지고는 하죠."
그렇게 말하며 입을 가리고 웃는 리쿠르트를 보며, 요나는 참 멍청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멍청하고 순진하다. 하지만 동시에 명석하고 이용하기 좋다.
"뭐, 이제는 저도 슬슬 성을 나올 준비가 된 것 같아서요.."
"뭐야, 진짜로 성이 문제였나."
"아뇨, 성이 문제라는 게 아니잖아요! 참!"
리쿠르트는 그렇게 말하고 또 웃었다. 그리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제 말은, 이제 다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었다는 거죠... 언제 까지고 영주님의 성에서 다 자란 제자만 붙잡으며 붙어 살 수는 없으니까. 다시 선생으로서 미숙한 아이들을 찾아 다녀야죠."
리쿠르트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요나도 그 말에 웃으며 말했다.
"그런거라면 할 말이 없지. 쉽게 말하자면 그런 거 아니냐, '사랑하는 자와 함께 라면 두렵지 않아!'란 느낌의."
농담처럼 던진 말에 귀 끝까지 붉어지며 고개를 돌리는 리쿠르트였다. 요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미안하군. 칼린은 아직 어디까지나 군인의 신분이야. 학교를 다니게 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칼린이 무사히 소금부대원으로서의 임무를 끝내고 나면, 그 때 우리 성을 나오는 게 어떤가?"
"계속 군인으로 두려던 게 아니었어요?"
"전후 복구부대는 임시개설부대다. 그 정도로 복지도 괜찮고 자유로운 부대가 계속 유지될려면 국민 혈세가 두배는 오르게 될 껄? 예측해 보건데... 아마 1년이면 사라질 거다."
사실이다. 그만큼의 지원을 받는 것은, 어느정도 상황이 안정화되면 사라질 부대이기 때문도 있다.
"흠... 솔직히 오래 있으면 저야 좋긴 하죠."
"오래 있으라고도 안 할 것이다. 칼린이 부대임무를 전부 끝마치고 나온다면 그 때 놓아주지. 걱정마라, 그 때는 내가 추천서라도 써 주마. 그러니 그 때까지는 잠자코 기다려라."
"그게 뭐예요, 악당처럼 말하시기는!"
리쿠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또 다시 웃기 시작했다. 요나는 참 피곤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그녀와 같이 웃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속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런, 슬슬 먼저 일어나 보도록 하지."
"아, 일하러 가시는 거죠?"
"그런거지. 항상 어울리게 해서 미안하군."
"전 언제든 좋아요. 아, 수업시간은 제외하고.."
"걱정마라. 다시는 수업시간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않느냐."
요나는 웃으며 방을 나섰다. 리쿠르트는 홀로 손님실에 앉아 차를 홀짝이다가, 갤러한이 한 말이 떠올랐다.
'영주님이 이상한 일을 한다던가, 그런 거는 없었어?'
'그냥 조금 의심 가는 게 있었거든...'
괜히 그 말이 떠올라서 리쿠르트는 고개를 한번 휘저었다. 갤러한이 별거 아니라고 한 일이다. 그냥 스쳐 지나간 이야기였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문을 연 리쿠르트는 요나의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요나는 영주실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반대쪽 계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서서히 조명 끝의 어둠으로 사라져가는 요나의 등을 보며, 리쿠르트는 약간의 의구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게 영주의 '이상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요나는 그저 갤러한의 말이 신경 쓰여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방으로 돌아와 차를 한 잔 마셨다. 더 의심하게 되기 전에 갤러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칼린의 방에 노크가 울렸다. 이 시간 즈음에 칼린의 방에 노크할 사람은 단 한 명 뿐이다. 그가 기쁘게 문을 열자, 문 뒤에는 요나가 서 있었다.
"슬슬 시간인가 싶어서 말이야."
"매번 감사합니다! 얼른 들어오세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영주를 모시고 들어갔다.
요나는 블레이저의 속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칼린은 그걸 보며 마치 대단한 아이디어인 듯 요나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요나씨,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그 말에 요나는 튕겨져 나가듯 벌떡 일어나 칼린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며 둥그래진 눈으로 칼린을 쳐다보았다.
"요...나씨?"
"ㄱ, 귀에 대고 갑자기 말하지 말거라! 놀랐지 않느냐!"
요나는 그렇게 말하며 붉어진 얼굴로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아니, 영주님은 자주 그러시길래... 괜찮은 줄 알았어요..."
"난 네 지휘관이니까 괜찮아!"
살짝 흥분해서 소리치는 요나를 보며, 칼린은 그녀가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기에 조금 즐거워졌다. 하지만 굳이 벌집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칼린에게 요나는 가볍게 대할 상대는 아니었다.
"죄송해요. 놀래키려던게 아니었어요..."
"...알면 됐다. 후, 두 번 다시 그러지 말거라. 아니, 두 번 다시는 말고... 그래, 그냥 갑자기는 하지 마라…"
요나는 그렇게 말하며 숨을 추스렸다. 그리고 벽에서 등을 떼며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이냐?"
"진짜 큰 일은 아닌데... 그냥 그 회중시계를 손목에 달고 다니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요?"
칼린의 말에 요나는 잠깐 벙 쪄 있다가, 자신의 속주머니에서 다시 회중시계를 꺼내 칼린에게 보여주었다.
"이걸 말하는 것이냐?"
"네. 그걸 이제 뭐, 가죽 띠 같은 걸 둘러서 손목에 차고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왜 그런 짓을 하지?"
"음... 일일이 시계를 보려고 할 때마다 불편하지 않나요? 그리고 손목에 달면 주머니 공간도 늘릴 수 있고..."
칼린의 말에 요나는 자신의 회중시계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너무 볼썽사납고 천박하지 않느냐... 팔찌도 아니고 시계를 손목에 왜 달고 다니느냐. 난 됐다."
"아... 천박한가요?"
"그럼. 천박하구나. 혹시 네가 온 세계에서는 다들 그러고 다녔던 게냐?"
"뭐, 다들 그랬던 건 아니지만... 보통 시게는 손목에 차는 걸로 나오긴 했죠."
"그 세계에 살지 않아 다행이군."
요나는 웃으며 다시 칼린의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럼..."
"아, 네."
칼린이 요나의 목 근처로 다가왔다. 요나는 목덜미에 조금 따뜻한 칼린의 숨결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살짝 떨었다. 그리고 칼린의 머리를 잡고 물었다.
"칼린, 나의 피는 맛있느냐?"
칼린은 그 질문에 벌렸던 입을 다시 다물고 조금 생각해 보았다.
"단순히 말하자면 다른 인간의 피는 빨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그딴 말이 아니다."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곁눈질로 칼린을 바라보았다.
"나의 피는 맛있느냐?"
젖은 눈, 떨리는 목. 달뜬 호흡. 칼린은 두려울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치며 입을 벌렸다.
"최고로 맛있습니다."
요나는 그 말을 듣고 서야 다시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언제나 그랬듯, 칼린의 방에서 외마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쁘지는, 않았는데 말야.."
다 부서지고 난장판이 된 술집의 안에서, 아스타와 도르베는 서로 등을 맞대고 땀에 절어 앉아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아스타는 말을 이었다.
"너무, 실력에만, 의존하지 않았었냐...?"
"하... 진짜... 버티는 게 한계였다... 중간부터는 갑자기 서로를 때리기 시작하더니..."
도르베는 고개를 푹 떨궜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맙소사, 인생에서 이런 난전은 또 처음 겪어 보는 군."
아스타는 그런 그를 곁눈질로 보고서 같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어땠는데?"
도르베는 계속 웃었다. 왠지 웃음이 터져 나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하하하! 진짜, 감상까지 묻는 거냐! 걸작이다!"
그는 그렇게 계속 웃었다. 그리고 바닥을 헤집다가, 깨지지 않은 술병을 집어 들고 그 안에 술을 한 모금 들이 마셨다.
"자, 그럼... 우리 둘이 우리 부대의 명예를 깎아 먹은 게 되는 거냐?"
도르베가 그렇게 말하고서 등을 맞댄 아스타에게 술병을 건냈다. 아스타는 그 술병을 받아 마시며 말했다.
"아니, 여기 바보들은 그런 거 기억 못해. 전부 정신을 차리고 나면 우리한테 술이나 사라고 하겠지. 밖에서 이정도 술집싸움은 일상이라고, 도련님."
"하하, 그런가... 어쩐지 지나치게 살풍경한 술집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부셔져도 오케이라는 거군."
"저기..."
그렇게 말하며 웃는 둘에게 술집의 주인장이 다가왔다. 주인장은 조금 떨면서 계산서를 내밀었다.
"7...720생텀나왔는데..."
아스타는 그 계산서를 쥐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야 도르베, 이제 귀족 안 할 거랬지?"
"...그러기는 했다만, 너 설마..."
도르베는 아직 일어나기 조금 벅찬 상태였다. 아스타는 그런 그 앞에서 준비운동을 끝마치고 말했다.
"수업료로 치자고. 맡긴다?"
"야, 야!"
아스타는 그 말을 남기고 폐허속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도르베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며 손을 뻗었다가 곧 망연하게 팔을 떨구었다. 그리고 그녀가 남겨둔 계산서를 쥐고 주인장을 돌아보았다.
"...내, 내일 가져오는 걸로..."
라드는 집에서 가만히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최근에는 좀 너무 많이 다쳤다. 그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쁘지 않아."
그는 자신에 상황에 대해 그렇게 정의를 내렸다. 이제부터 그가 해야 할 일은, 양쪽을 만족시킬 만한 정도의 방해를 반복하는 것. 그리고 요나는 아마도 칼린을 고립시키기를 원한다. 왜 그딴 걸 원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페이가 좋다.
"...나쁘지 않아."
물론 그가 실수하면 어느 한쪽은 그를 버릴 것이다. 아니, 양쪽에서 그를 죽이려 하게 될 것이다. 만약 에테롬에게 발각된 것을 들키게 된다면 일이 더더욱 곤란해진다. 그 혼자서는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지만, 그의 누이까지 챙기기에는 벅찬 상대이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의 보호까지 맡기기에는 조금 못미덥다. 하지만 괜찮다.
"...뭘 그리 쫄아 있나, 라드."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리고 바늘이 빨개질 때까지 달구었다. 그는 그 바늘을 가지고, 영주가 손까지 집어넣었던 보이지도 않는 등의 상처에 끼워 넣었다. 그의 벗은 상체는 여기저기 볼썽사납게 부풀어오르고 멍들어 있었다.
그러나 라드는 정말로 이번 일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수가 거의 두배 가까이 생겼다.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양쪽에게서 돈을 받아먹을 수만 있다면, 누님의 가족까지 챙길 수 있게 된다. 그래, 혼수도 화려하게 준비 해야지. 하고 싶은 일을 돈때문에 못하게 되는 일은 없게 해야지.
살이 타는 냄새가 난다. 눈가를 찡그리게 만드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린다. 그의 손 끝에 진물이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괜찮다. 그는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 그 돈을 아끼기 위해 배워 둔 치료법들이다.
그는 웃고 있다. 평소처럼. 아니, 오히려 더 기쁜 듯하게.
"미쉘씨, 급한 전달사항입니다!"
그녀는 윌레인의 8도시의 영주 중 하나이다. 대도시의 위광을 뽐내 듯 빠르게 도시의 복구를 끝마친, 유능한 영주이다.
"말하시죠, 뒤낭."
그녀의 목소리와 행동에는 귀족의 기품이 살아있다. 8도시의 영주들 중 가장 고풍스러운 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는 자들은 아마 전부 미쉘을 꼽으리라. 물론 그런 미쉘도 언제나 '귀족다움'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번 전후복구부대의 임무 성공을 위한 축하자리에- 제리코씨가 온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미쉘은 천천히 홀짝이던 와인을 전부 뱉어 냈다. 그리고 입가를 닦으며 두배는 커진 눈으로 물어보았다.
"아니, 그 놈이 사교자리를 왜 옵니까? 진짜로?"
"여, 여기... 편지가..."
그녀는 집사에게서 낚아 채 듯 그 편지를 빼앗았다. 무식하게 엄지손가락으로 눌린 실링왁스. 누가 썼는지는 발신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나의 성공을 추카하며 나도 감.'
편지의 내용은 그게 다였다. 어이없는 맞춤법 실수에 꼬질꼬질한 글씨. 확실했다. 그는 이번에 왕도로 찾아와 파티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어, 어떻게 합니까, 이거?"
패닉은 전염된다. 영주의 부하도 조금씩 떨기 시작하며 발을 굴렀다. 미쉘은 못 볼 것을 본 듯 그 편지를 화로에 집어 던져 버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제 사병 중에서 가장 빠릿하고 실력 좋은 놈들로 40명 준비하세요... 실력이 좋아도 예의가 없는 놈은 쳐내고, 기초적인 예절이 주입된 애들이랑 상대 기분 좀 잘 맞추는 애들. 아니, 실력은 상관없어요! 그냥 말 예쁘게 하는 애들만 모으세요!"
영주는 그렇게 말하고 박수를 한번 쳤다.
"지금부터 바로 선발 시작해요! 아무튼 시비 털려도 웃을 수 있는 놈으로만 준비한다는 방향으로! 앞으로 이틀 동안 동행인원을 전부 갈아치워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