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암투(暗鬪)
라드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둔하게 그의 몸에 통증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눈을 끔뻑이던 그는, 천천히 기대서 자고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직 푸르스름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어둠에 익숙한 눈으로 능숙하게 옷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보았다.
방에 있는 라드가 누워 자기에는 지나치게 작은 침대에, 칼린이 극한으로 몸을 쪼그려서 자고 있었다. 라드는 그런 칼린을 그냥 가만히 지켜보았다.
임무를 수행하면서 라드는 칼린이 자는 장면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집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제 칼린이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방을 나와서 어제 깠던 술병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분명 엄청 쎈 거였는데 말이지..."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한번 향을 맡아보고, 술이 약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칼린은 마치 밑빠진 항아리 같았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집안의 술을 거덜내고 나서야,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시간이 늦었으니 가야겠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자고 가라고 뜯어 말린 것이었다.
라드는 셔츠 안에 넣어 두었던 솜뭉치를 빼냈다.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챙겨 나온 옷을 입은 라드는, 그 솜뭉치를 칼린이 볼 일이 없도록 벽난로에 넣은 뒤 불을 붙였다. 불은 빠르게 그 솜을 집어 삼켰다. 그래, 어제 깐 술들은 분명 독주에 가까운 것이었다.
"말이 안되네. 괴물인가?"
라드는 불이 올라오는 걸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망토를 고쳐 입었다. 전신이 쑤셔왔다. 하지만 아침에 이 일을 끝내야 한다. 칼린이 정신 차리고 성에 돌아가기 전에.
아스타와 도르베는 아침부터 대련을 시작했다. 총 8번의 합에서 도르베는 3번을 이긴 상태였다.
"어째서... 네 검술은 전장에서는 풋내기정도에 불과한 수준인데..."
도르베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스타는 들고 있던 단검 두자루로 저글링을 하며 말했다.
"너무 검이 정직하잖아. 좀 속임수도 써가면서 싸워야지."
도르베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아스타를 보았다.
"무슨... 나한테 약이라도 타고 시작한 거냐?"
"하하하!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귀여운 면이 있다니까!"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며 저글링을 멈췄다.
"예를 들어보자고. 방금 전 한판 할 때, 너가 대각선으로 베던 검을 한순간 멈춰서 내 단검에 닿았 잖아? 그 때 왜 멈췄지?"
"...네 단검이 태양빛을 반사해서 내 시야를 가렸다."
"그런 게 속임술이지!"
도르베는 이해하지 못하고 조금 갸우뚱하다가 질문했다.
"아니, 태양빛 같은 건 네가 조정하는 것이 아니잖느냐. 그저 우연으로 일어난 일을 전략이라고 하고 있는 거냐?"
"그것부터 문제지. 싸움은 그 환경마다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고. 언제나 같은 방식을 고수해서는 안돼."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며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가리켰다.
"싸움이라는 건 그 환경을 아군으로 만들면서 하는 거야. 단순히 검 실력으로 따지면 네가 나보다 한참을 앞서는 데도 나에게 밀리고 있는 건 그런 이유야. 넌 계속 검술로만 우직하게 들어오니까."
"...그런가. 그리고 넌 그 환경을 잘 다루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검술로도 나를 이겨낼 수 있는 건가."
"그렇지. 아, 그런데...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렇게 유동적으로 잘 싸우는 건 갤러한이랑 라드가 부대 안에서는 최고일 것 같아. 둘 다 진짜 머리 돌아가는 속도가 빨라."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고 도르베를 보았다. 도르베는 가만히 있다가 다시 한번 검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아스타를 바라보았다.
"네가 좋다."
아스타는 그 말에 싱긋 웃으며 검을 다시 쥐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좋은 대답이야."
그녀는 바로 한 합을 시작하려다가 발을 멈췄다. 그리고 뭔가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뭐냐?"
"아니... 도련님, 분명 오후쯤 에 칼린이랑 성에 갈 거랬지?"
"그렇지."
아스타는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웃었다.
"저녁에는 시간 돼?"
"들어와라."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요나의 목소리에, 라드는 문을 열었다. 영주실은 처음으로 들어와 보는 것이었다.
"라드, 너인가. 조금 일찍 왔군."
"지휘관님의 명령이니까 말입죠."
그는 삭막한 웃음을 걸치며 영주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의자를 끌어 앉았다.
"아직 허락은 한 적 없지만... 뭐, 그 정도 무례는 눈감아주지. 자네도 이제 영웅이니까."
요나의 의외로 흔쾌한 모습에 라드는 조금 놀랐다. 그러나 굳이 내색하지 않으며 자신의 페이스를 만들기 위한 다음 동작을 꺼냈다. 그는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일이시죠?"
요나는 라드가 왜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지 알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자네에게는 별거 아닌 일일수도 있겠다만, 감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지. 칼린을 구해줬다면서?"
라드는 그 말에 자세를 고치지 않고 눈을 끔뻑이며 영주를 바라보다가, 꼬아 둔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야 뭐, 동료니까요."
"하하, 동료니까 구한 건가. 사실 당연한 일이지만, 몸이 그대로 움직일지는 다른 문제가 아니겠느냐. 난 자네와 도르베에게 상당한 감사를 느끼고 있어."
요나는 그렇게 말하며 물이 들어있는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칼린은 나에게 조금 중요한 존재거든... 그는 내가 필요하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마 나도 그가 필요하게 된 것 같아서 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물을 죽 들이마신 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책장을 열며 말했다.
"기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시간이 많이 이르지만, 가벼운 술은 괜찮겠지. 아니면 라드, 혹시 상관의 술은 달게 받지 못하나?"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라드는 자신의 감이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정도의 경계를 한 것에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일촉측발의 상황이었으니까.
영주는 양주와 함께 라드의 글라스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 술을 따라 라드에게 다가갔다.
"난 자네를 부대원중에서도 특별히 믿게 되기 시작했어. 그래서 자네에게 특별한 임무도 하나 부탁하고 싶군. 아, 부담가지지는 말고.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고, 거절하고 싶다면 거절해도 좋아."
라드는 그녀의 말에 조금 고민하다가 가볍게 대답했다.
"추가수당이 있는 일입니까?"
"아하하! 그래야지. 마음에 드는 군. 자기 몫은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 아니겠나!"
요나는 라드의 뒤로 크게 돌아, 그녀의 왼손을 라드의 어깨에 가볍게 얹었다. 그리고 몸을 낮추며 술잔을 건내 주었다.
"부탁은 간단하네, 라드. 우리 부대원 안에 첩자가 하나 있거든."
라드는 그 말에 흠칫 놀랄 뻔했다. 그러나 그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그 술잔을 자연스럽게 받아냈다. 그러나 술잔을 건내 받았는데도 요나는 라드의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우리 부대에 위기를 불러내서 임무를 실패하게 만들려는 첩자이지… 나와 다임 상회 사이에는 분쟁이 하나 있었거든. 그리고 그 분쟁의 중심이 칼린이었어."
요나는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라드의 어깨에서 손을 쓸어 올리기 시작했다. 흰색의 손이 마치 뱀처럼 라드의 승모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오싹한 오한을 느끼면서도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가요?"
"그렇지. 그리고 만약 그 첩자가 다임상회에서 파견된 자라면, 분명 일을 망치면서도 칼린이 다치게 하는 것은 피하게 만들겠지... 말해봐라, 라드. 칼린은 뭐 때문에 좀비 떼의 안쪽으로 들어갔었지?"
요나의 손은 계속해서 올라오다가, 목과 승모의 사이 즈음에 멈추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천천히 손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이제 등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구경을 나온 마레를 구하려다가 그렇게 되었었죠."
"그런가. 확실히 그랬지. 용케도 그 둘을 한꺼번에 구했어. 마레는 편리하게도 다리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는데."
그녀의 손이 마침내 멈췄다. 손이 멈춘 지점은, 에테롬에게 맞으면서 크게 벌어진 상처 즈음이었다. 그리고 요나의 손이 뾰족하게, 상처를 파고 들어왔다. 라드는 작게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참아내며 술잔을 세게 쥐었다.
""내 부탁은, 그래. 라드, 네가 그 첩자를 찾아내고, 그에게서 에테롬의 정보를 얻어다 줬으면 하네… 말했다시피 거절해도 좋아. 물론 추가수당도 있을 것이고."
"...그 첩자를... 축출해내지는...않는겁니까...!"
라드는 이를 악 물며 웃음을 유지하면서 말했다. 요나는 그런 라드를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무슨 소리. 발각된 내부첩자는 활용가치가 높아. 그쪽은 아직 상황을 모른다면 두배로 높아지지. 그러니까 만약 첩자를 찾는다면, 부디 계속해서 부대를 훼방 놓아 달라고 말해 주면 좋겠군. 다만... 선은 넘지 말라고 하면서 말이야."
요나의 손가락이 상처의 안쪽으로 깊게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라드는 출렁이기 시작한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 첩자가 말이야, 어디까지나 방해는 계속하되 임무는 성공하게 했으면 좋겠네. 장기적인 계획을 보면서, 임무 자체보다는 부대원 내부의 신뢰를 깎아내면 좋겠어. 그래, 칼린이 부대원들에게서 신뢰를 잃게 된다면, 그건 그 첩자에게도 이득인 장사가 아닐까?"
"....그...런가...요.."
라드는 똑바로 말할 수 없었다. 그제서야 요나는 손가락을 빼내며, 라드를 향해 웃었다.
"이런, 안색이 많이 안 좋군. 너무 무거운 임무였나?"
그렇게 말하며 요나는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라드는 거친 숨을 정돈하며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아랫입술에 피가 나도록 세게 깨물어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보수는..."
요나는 그 말에 기쁜 듯 웃음을 머금었다.
"아하, 아하하하! 그래! 보수. 보수를 말해 줘야겠지."
그녀는 다시 그녀의 자리 쪽으로 돌아가, 서랍에서 돈다발 네 뭉치와 담배를 꺼냈다.
"뭐, 이건 보수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칼린을 구해준 데에 대한 보상금이네. 일단 받으라고. 보수는 매달마다 두뭉치로 하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에 기대 듯 걸쳐 앉아 라드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라드는 입을 벌려 담배를 받아 문 뒤, 의자에 겨우 움직이는 손가락을 탭 하면서 빠르게 계산을 해보고 웃었다.
"너후 저거(너무 적어)."
요나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세뭉치로 주지. 그럼, 첩자의 발견 및 관리를 부탁하겠네, 라드군."
라드는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 뒤, 웃으며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잡았다.
혹시나에 대비하며 자신의 집에 두고 있던 칼린이라는 패는 사용하지도 못했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년이다, 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담배연기를 뱉었다. 그리고 요나와 서로를 마주보며 소리내서 웃었다.
14시가 되어서야 칼린은 마차를 타고 여관에 도착했다.
"죄송해요, 도르베씨! 왜 인지 라드씨가 저를 깨우지 않아 주셔서.."
"뭐야, 거기에서 자고 이제 돌아온 거냐?"
"? 네, 그런데요?"
도르베는 그 말에 조금 걱정되는 듯 칼린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양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뭐 이상한 짓을 당하지는 않았나? 묘하게 술을 계속 맥인다던가, 자고 일어나니 허리가 뻐근하다던가.."
그의 말이 악질적인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칼린은 더 반응이 어려웠다. 그는 그냥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쉬며 도르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라드씨도 말투가 그래서 그렇지, 그렇게 기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뭐, 생각해보면 술을 계속 권유하기는 했었죠."
"뭐? 그 자식이-"
"진정해요! 취하지도 못했으니까. 잠든 것도 그냥... 임무 중에 한숨도 못 자고 있다가 임무가 끝나니까 뭔가 잠이 잘 오기 시작해서 그랬어요. 이제 그냥, 마레씨나 만나러 가요 우리.."
"...네가 괜찮다면야 더 할말은 없다만.."
도르베는 아직 의심 간다는 표정으로 칼린을 여기저기 보았다. 칼린은 귀찮은 듯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그의 가면을 다시 착용했다.
"아! 오셨군요! 구국영웅, 네크로맨서 슬레이어, 벨카의 자랑! 지금은 어떤 휘황찬란한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겠네요, 두분! 얼마나 이 날을 기대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2시간밖에 못 자며 기다렸답니다! 평소의 반 밖에 자지 못했어요! 여러분도 기대되셨나요? 아! 대답하지 마세요! 절 실망시키지 마세요! 아니, 조금만... 아! 역시 됐습니다!"
마레는 여전히 지랄맞게 시끄러웠다. 도르베는 사실 홍보같은 건 그렇게 필요 없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자, 그러면 바로바로 들려주세요! 네크로맨서를 죽인 이야기를 해 주세요! 그 극악무도한 범죄자와 어떻게 싸웠는지 말해 주세요! 그는 얼마나 강하게 저항했죠? 얼마나 많은 시체들을 모독하며 싸웠죠? 인질은 잡았-"
"조용히 좀 해라. 바로 말해주고 빠르게 나갈테니까.."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적당히, 칼린과 같이 준비해 뒀던 이야기를 했다. 마레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신난다는 듯 노트에 받아 적었다.
"뭐, 그래서.. 미안하지만 우리 둘만 딸려갔을 때 그렇게 격렬한 전투는 없었어. 오히려 전투는 부대원들과 다같이 있었을 때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거다. 우리가 따로 주목받을 이유는 전혀 없어."
아야가의 결론은 그렇게 났다. 마레는 그 말에 노트와 펜을 내려놓고 잠깐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도르베를 보며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르베씨, 잘 알겠습니다만, 벼룩같이 하찮은 제가 이해가 안가는 게 딱 한가지가 있네요."
성가셔 지겠군. 칼린과 도르베는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뭔데. 주술관련은 우리도 잘 모른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왜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 거죠?"
그의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낸 말에 도르베와 칼린의 눈이 커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신지.."
칼린은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그렇게 물어보았다.
"칼린씨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읽을' 수 없지만... 도르베씨는 같은 마차에 있었으니까, '읽히'거든요. 왜죠, 도르베씨? 어디서부터 거짓말인 건가요?"
도르베는 확실히 거짓말을 자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옆에서 칼린이 봤을 때 딱히 어색한 점이 보이지는 않았다. 말도 더듬지 않았고 막히는 부분도 없었다.
칼린과 도르베 둘다 말이 없어지자, 마레는 계속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머리를 갸우뚱하다가 다시 표정을 풀었다.
"뭐, 사실 그 이야기는 재미가 없긴 했어요! 네크로맨서가 악당이 아니었다니, 그만큼 김새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그런 이야기를 쓰느니 차라리 스컹크가 방귀뀌는 것을 구경하겠습니다! 그냥 제가 전부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고쳐 써 보겠습니다! 안심하세요!"
"자, 잠깐!"
칼린은 그 말에 조금 신경이 쓰여서 등을 돌리려는 마레를 멈춰 세웠다.
"뭐라고 고쳐 쓰려는 건데요...?"
"음... 범죄자들만 모여 사는 무법지대, 파나빈에서 태어난 악당 네크로맨서가, 전쟁 후 시체가 많이 모인 것을 눈치채고 그걸로 군세를 만들어서 윌레인을 침공하려 한 거지요! 죽은자들을 모독하고, 약자들을 능욕하며 대 군세를 이끌며, 전장의 모든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고, 그 언데드로 언데드를 또 늘린 겁니다!
마지막에는 왕도까지 침입해 오려는 그를, 용맹한 소금부대원들이 결사를 다짐하며 그가 만들어 놓은 언데드 군세들을 격파해내면서 그를 추적! 그리고 하인킬에서 그를 조우하고 격렬한 전투! 아, 강력한 네크로맨서였지만, 윌레인의 긍지와 희망을 등진 10명의 젊은이를 어떻게 당해낼 소냐! 비겁하게 등을 돌려 꽁지 빠지게 도망치려던 네크로맨서는, 두명의 추적자에게 잡혀서 비참하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목이 베인 겁니다!"
마레는 눈 앞에 벌써 장면이 보이는 듯 손을 휘젓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전부 진실이 아니잖아요! 파나빈은 그렇게 사악한 곳도 아니었고, 그도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칼린의 말에 마레는 휘젓고 있던 손을 멈추고 눈을 떴다. 그리고 칼린을 돌아보았다.
"칼린씨, 그렇다면 도르베씨가 말한 것은 진실이었습니까?"
"그, 그건..."
"모르겠습니까, 칼린씨? 진실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마레는 완전히 칼린에게 고개를 돌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더라도 하등 쓸모가 없는 게 진실입니다! 진실이란 건 결국 그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예요! 널리 퍼진 것이 진실이고, 더 많이 아는 것이 진실이고, 주류가 진실이예요! 승리한 게 진실입니다!"
흥분해서 얼굴까지 빨개진 마레는 칼린을 보며 웃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보를 승리하게 만드는 것은 뭘 까요? 정보의 무력, 그게 재미입니다. 글은 재미있어야 해요! 단편적이고 빠르게 퍼지며 중독적으로 입소문에 오르도록, 자극적이여야 해요! 진실이란 거는 더 받아들이기 편하고, 재밌는 쪽이 됩니다!"
왜 일까, 완전히 미쳐 버린 자가 내뱉는 듯한 그 개똥철학이-
"완전히 미친놈이군. 마음대로 해라. 가자, 칼린... 칼린?"
칼린에게는 꽤나 마음에 닿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