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암투(暗鬪) (57/164)



〈 57화 〉암투(暗鬪)

도르베는 마차에서 내리고, 마부에게 팁을 아주 무겁게 주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서 꼬박 하루동안 자신이 집에서 나오기를 기다려 준 사람이다.


떠나가는 마부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그는 여관의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왠지 템포가 떨어져 있는 평소의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아, 도르베! 왔냐!"
아스타는 밝은 목소리로 환영했지만 고개를 들어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나마 좋은 반응을 보여준 것이었다. 나머지는 눈조차 뜨지 못하고 대충 손만 흔들어 댔다.

도르베는 특별히 거창한 환영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반응은 조금 신경 쓰였다. 그가 코트를 옷걸이에 걸려고 할 때였다.

"도르베씨! 그 옷걸이 쓰지 마세요!"
"뭐,  그러십니까.."
갑자기 달려드는 언데드같은 인상을 한 주인장에게 조금 놀란 도르베가 뒷걸음질 쳤다. 주인장은 그의 코트를 받아 가며 말했다.

"아, 듣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무튼 한동안 저 옷걸이는 사용 못합니다... 역시 그냥 치워버려야 겠어."
"...뭐 어떻게 노셨길래 그런 말씀을.."
도르베는 살짝 학을 떼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다시 보니 그들의 안색이 얼마나 처참한지 알 수 있었다. 딱히 그를 반기지 않은  아니었다. 방금 그게 최대 한도로 반긴 것이리라.

"영웅님들이니까요. 그런데 도르베씨, 왜 갑자기 존대말을...?"
주인장이 그렇게 묻자, 도르베는 별거 아니라는 듯 자신의 케이프도 벗어 주인장에게 건내 주며 말했다.

"별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전 이제 귀족의 이름을 버리기로 했거든요."
 말에 덜컥, 하고 큰 소리가 들려왔다. 도르베가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자, 그에게 아스타가 덤벼들고 있었다. 곧 도르베는 아스타에게 깔린 형태로 눕게 되었다.

"또 뭐냐, 아스타."
"귀족의 이름을 버렸다는 게 무슨 소리야?"
아스타는 진지해 보였다.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과 어조로 물어보았다. 주인장은 분위기를 읽고 도르베의 옷을 고쳐 쥐었다.


"전- 전  걸러 가 볼 게요."
도르베는 여유 가득한 얼굴을 하며 주인장과 아스타를 순서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스타를 밀어내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넌  달려드는 습관  고쳐라. 대형 견도 아니고..."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걱정마라, 뭐 집에서 의절을 당했다던가, 그런 일이 아니야."
도르베는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너와 칼린에게는 따로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말해주고 싶었다. 남은 머저리들에게는 기회가  때 천천히 말할 거야."
도르베는 자신에게 올라탄 아스타를 완전히 옆으로 밀어낸 후,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주인장을 향해 말했다.

"맥주  잔에 폭챱 부탁합니다.  원, 익숙하지 않군."




"아버지는 내가 도망친 후로도 가문을 포기하지 못했었다. 내 아래에는 동생이 세명 있었는데,  아이들이 내 몫까지 짊어지게 되었었지. 그리고 내가 떠난  2년정도 후에, 셋이서 같이 집을 도망쳐 나왔다고 하더군. 그 때부터 아버지는 그 집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1년간은 그저 되는 대로, 개처럼 살았다더군.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면서 떨어져 있는 마을을 왕복하며, 집안에 있던 우리들의 흔적을 닥치는 대로 팔아 넘기고 그걸로 술을 사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계기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더구나. '어쩌면 내 잘못이다.'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생각에 거울을 보니, 스스로도 못 알아볼 정도로 바뀌어 있었던 거지. 이것이 어떻게 귀족사회에 몸을 담았던 자 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완전히 미련이 사라졌다더군. 그 때부터 면도를 하고 금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뭐, 집에서 혼자 살아가면서, 마을 작은 학교의 교사 노릇을 하며 모두를 기다렸다고 하더라. 잘 된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맥주잔을 꺾었다. 아스타는 미련이 없어진 듯한 그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할 지 한순간 떠올랐으나, 그 생각보다도 먼저 입이 움직였다.


"이번에 해낸 일을 생각하면 평민도 귀족 감투를 땄을 텐데, 정말 괜찮은 거냐?"
“됐다. 요즘 귀족 감투라는 것도 전부 허상 아니겠느냐."
그 말이 너에게서 나오다니, 하고 아스타는 웃었다. 그리고 도르베에게 잔을 향했다.

"복귀 축하한다, 건배!"
"건배. 고맙군."
둘은 남아있던 맥주를 전부 들이부은  새로 두 잔을 더 시켰다.

"아스타, 부탁이 있다."
"앵간하면 들어 줄게. 뭔데?"
"다음 임무때까지 내 대련상대가 되어 다오."
그가 말을 끝마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잔이 새로 들어왔다.


"넌 지금도 약한 건 아니잖아.."
"아니, 다른 부대원들에 비하면 부족하지. 더 강해져야 해."
"그럼 뭐, 알았어. 도와 줄게."
아스타는 가볍게 말하고 잔을 다시 들었다.

"...너무 쉽게 답하지 말고, 조금은 생각해 봐라. 자유시간 중 일부를 나와 대련으로 보내게 되는 거다."
"난 좋아."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고 도르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르베는 조금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가만히 도르베를 쳐다보던 아스타는 흐뭇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대련, 재밌잖아."
도르베는 혀를 차며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는 듯 맥주잔을 꺾어 올렸다.

"그런 장난은 좀 그만 둬라! 불편하다."
"장난 아니야.."
"..뭐?"
아스타의 살짝 습기를 띈 그 말에, 도르베가 다시 얼굴이 새빨개지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색기라고는 벼룩의 다리 털만큼도 없었던 그녀가 오늘따라 요염해 보였다. 막상 그렇게 의식하고 보니 그녀의 평소 복장은 지나치게 노출이 많았다.


"무...무..무무..무슨-"
도르베가 당황하며 손사레를 쳤다. 아스타는 살짝 젖은 눈가로 도르베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지...진짜 장난 아냐. 토할 것 같아, 도르베."
"응?"
"아.. 무리다. 먼저 일어 날게. 미안!"
아스타는 그렇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틀어막고 달려나갔다. 잠시 뒤, 화장실에서 고문당하는 장정이  법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르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 앞의 고기를 뜯어먹었다.




"요컨데, 마도공학은 기계공학보다 현제 몇 수나 더 앞서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사실 당연한 거죠, 마법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기계공학으로 이를 따라잡고 있는 게  말이 안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어, 나도  놀랐어."
"... 그-렇군요."
리쿠르트는 칼린과 수업을 하고 있다. 평소처럼 똑바로 수업을 하고 있는 리쿠르트에 비해, 칼린은 묘하게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 보였다.

"그렇죠. 불과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마정석이 없이 '자동차'라는 것이 나오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지금 보세요. 기계공학으로만 만들어진 차량에, 마정석 기술은 이제 하늘까지 지배하고 있어요."
"진짜? 기계공학만으로 자동차가 나왔어? 그건  한번 타보고 싶네."
"그렇군요..."
칼린이 대답하며 쳐다보고 있는 것은 리쿠르트가 아니었다.


"맞다. 용병으로 고용돼서 비행정에는 한 번 타본적이 있었지. 와, 진짜 굉장했어. 왕도에는 에어택시도 생겼잖아. 칼린, 마법 등록하러  때 보지 않았냐?"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떠들고 있는 갤러한이었다.

"...죄송해요, 칼린. 돌아오고 나더니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아서.."
리쿠르트가 부끄럽다는  고개를 숙이며 갤러한의 얼굴을 밀어냈다. 칼린은 힘겹게 말했다.

"아니, 뭐... 둘이 사이가 좋은 건 보기 좋지만요.. 선생님이 따끔하게 말해 주시면 갤러한씨는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건  불쌍하잖아요.."
리쿠르트는 말끝을 흐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칼린은 머리를 감쌌다.


"야, 그래도 얌전하게 있잖아. 내가 뭐 방해야?"
"엄청 방해되요, 갤러한씨!"
억울한 듯 말하는 갤러한의 목소리에 결국 칼린도 폭발했다.

"그냥 뒤에 얌전히 앉아서 구경하는 거면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렇게 끌어안고 있으면서 수업 중간중간마다 끼어들면 엄청 방해가 맞다구요!"
"아니...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말이야.."
칼린은 갤러한이 더 변명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애초에 갤러한씨도! 좀 만나려고 하면 항상 선생님하고만 있고! 다들 기다리고 있다구요! 새 별명까지 만들어 놨는데!"
"칼린, 그건-"
"변명하지 마요! 선생님도 갤러한씨를 안 놓아주시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네요."
리쿠르트는 순순히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건전한 연애라는 건 서로의 다른 본분도 챙기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갤러한은 부대원들끼리 모이면  나오고, 선생님은 수업 중에는 수업만! 갤러한이 뒤에서 보고 있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이건 너무 나갔어요! 맙소사! 내가 이걸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말하다니!"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위축돼서 서로 떨어진 갤러한과 리쿠르트가 칼린을 올려다보았다.

"어...어디가니, 칼린?"
"영주님과 대련하러요! 반성하고 계세요!"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둘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   없이 웃었다.


"저 새끼는 진짜, 가끔 나보다 나이가 많은  같다니까.."
"하하, 제자에게 진짜로 쓴 소리를 들어 버렸네요.."
그렇게 말하고 리쿠르트는 잠깐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칼린과 요나의 관계가 좋아 보여서 정말 다행이예요. 시작은 정말  좋았지만, 어떻게든 둘 다 괜찮아진 것 같네요. 분명  임무때의 상처도 요나가 보듬어  거겠죠."
그 말에 갤러한은 거의 잊고 있던 문제를 떠올렸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거 말인데, 음... 혹시 우리가 임무를 나간 사이에 영주님이 이상한 일을 한다 던가, 그런 거는 없었어?"
"네? 요나가요?"
리쿠르트는 조금 생각해 보다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떠오르는 게 없으면 무리해서 말해 줄 필요는 없어. 그냥 조금 의심 가는 게 있었거든..."
갤러한은 리쿠르트를 끌어당기며 그렇게 말했다.

"...아직은, 아직은 뭐, 괜찮아. 별 일 없어."
반정도는 갤러한의 희망사항이었지만, 그런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으며 갤러한은 말 끝을 늘였다.



"대단해, 칼린. 정말 인상깊구나."
영주는 묶어 올린 머리를 풀어 헤치며 불어오는 바람으로 몸의 열을 식혔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있는 칼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말 강해졌어. 놀라운 성장속도야."
"..감사합니다, 영주님."
칼린은 요나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요나는 칼린의 손을 놓지 않고 조금 더 끌어당겨 그를 완전히 품에 안았다가 손을 놓았다.


"어... 감사합니다."
"그래. 자, 바로 그라운드기로 넘어가자꾸나."
칼린은 요즘 요나에게서 미묘한 손길을 자주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의 착각이겠지만, 요나가 요즘 필요 이상으로 신체를 접촉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라운드기를 가르칠 때에도 묘하게 달라붙어 와서 부담스러웠다.

"그,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떨까요?"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조금 목소리가 깔리기 시작한 요나에게 변명이라도 하는  칼린은 팔을 휘저었다.


"아니!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조금... 그래! 오랜만에 영주님이랑 스근하게 대화나 하고 싶어서..."
그런 칼린을 보며 요나는 요즘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달라붙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아온 그를 보고 있자면 그녀도 모르게 그렇게 되고는 했다.


요나는 그냥 강제로라도 그를 굴복시키고 침대로 끌고 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의 것이 된다면 어디까지나 그 스스로 선택하게 만들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자신의 것이 되어야 했다.


"...그러자꾸나. 오늘 훈련은 충분히 일찍 쉴 가치가 있었지."
그녀는 웃으며, 속으로 자신의 실수를 반성했다. 요즘 들어 너무 다급 해졌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그가 밟고 있는 땅을 깎아내야 한다. 그가 기대는 유일한 벽이 자신이 될 때까지, 요나는 참고 버티며 기다려야 한다.


"왕도로 가야하는 게 이번 주말이었나요?"
"그래. 이만한 업적이니까. 8개 대도시의 영주들과 왕이 모이는 자리에 참가하게 될 거다."
"대단하네요, 요나씨! 이제 벨카도 대도시로 합류되는 건가요?"
"하하, 너무 추켜세우지 마라... 물론 곧 이긴 하지만."
영주는 즐거운 듯 웃으며 와인잔을 흔들었다.

"그때는 부대원 전원이 가는 거죠?"
"그렇다만, 다른 귀족들까지 만나는 것은 너 한  뿐이다. 호위의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야."
"다른 부대원 분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왕궁내 사교파티에 참여하며 우리를 기다리겠지."
"...우리가 손해보는  아닌가요?"
칼린의 말에 요나는 담배를 들며 말했다.


"믿어라, 칼린. 귀족들의 사교파티라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지."
"하하하! 뭔가, 요나님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요!"
요나는 웃고 있는 칼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것을 말했다.


"그러고보니, 칼린. 첩자에 대한 것은 짐작가는 게 있느냐?"
칼린은 조금 갑작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그게... 첩자가 진짜 있을까요...?"
칼린은 요나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영주님을 의심하는 건 절대 아니예요! 하지만... 모두와 같이 있으면 첩자 같은 건 사실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요나는 방금 그의 말이 심하게 불쾌했다. 그가 동료들과 너무 가까워진 것 같았다. 별로 반가운 일은 아니다.

"...첩자의 일은 누군가에게 신뢰를 받고 나서부터 시작인 거다. 티나면 그게 첩자이겠느냐."
"그건 그렇지만..."
기죽은 칼린을 보면서 요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뭐, 누군가 지목할 사람이 없다면 일단 가만히 상황만 보고 있어도 좋아... 대신 몇 번이고 말하지만, 그들을 나만큼 믿지 말아라. 그게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알고 있겠지."
"...네."
흥이 조금 가셨다. 원래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칼린이 생각보다 그들과 가까워진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칼린이 너무 의심 가는 것이 많다고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돌아왔을 때의 건강한 모습을 보면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고는 알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주제는 됐다. 신경 쓰게 했군. 그것보다 너에게 부탁이 있다."
"...어떤 부탁이시죠?"
아직 조금 주눅든 칼린을 보며, 요나는 아직은 자신의 말이 칼린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말했다.

"라드라고 했나, 그에게 내일 성으로 찾아오라고 전해다오."


"라드? 걔가 어디 있는지는 갤러한 밖에 몰라."
칼린이 요나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곳은 여관이었다.

"아니, 주소는 알고 있는데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어서요.."
"그래? 줘봐."
릴로는 칼린이 영주에게 받은 종이 쪼가리를 가져가 적혀 있는 주소를 보았다.

"여기서 한... 마차 타고 1시간? 이면 가겠네. 근처 시골이야. 왜 이런 곳에서 묵고 있는 거지, 이새끼? 돈도 많을 텐데."
"아, 생각보다 가깝네요?"
칼린은 벌써 거리 개념이 이쪽에 익숙해졌다. 그는 바로 술집을 나오려 다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도르베를 보았다.


"도르베! 돌아오셨군요!"
"아, 아침에 도착했지. 어디 가느냐?"
"라드씨에게 전언을 조금..."
도르베는 그 이름에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역시 그 자식은 좀.. 미안하군, 칼린. 그건 혼자 가거라."
"하하, 원래 그럴 예정이었어요. 영주님이 개인적으로 부탁하신 거라서..."
칼린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도르베에게도 전할 말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 도르베씨! 도르베씨도 내일 성으로 오셔야 돼요."
"? 영주님이 부르시더냐?"
"아뇨, 영주님은 아니고... 마레씨가 네크로맨서의 목을 밴 저와 도르베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도르베의 얼굴이 방금  라드의 이름을 들었을 때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좋은 소식이 없군... 그 놈이 결국 벨카에 도착했나."
"뭐, 어쩌겠어요... 결국 우리의 홍보를 맡게 된 사람인데, 일단 만나 뵈야죠."
칼린은 힘없이 웃으며 술집을 나섰다. 그리고 가면을 챙겨 썼다.



라드는 좁은 집 안에서 등불만 키고 담배를 피고 있었다. 입에 상처가 다시 터져서 따가웠다. 그는 서랍을 열어서 독한 시가를 꺼냈다.

그가 불을 붙이자,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라드는 셔츠를 대충 걸쳐 입고 숨어서 현관문 구멍을 통해 밖을 보았다. 그냥 문을 열기에 그는 적이 너무 많았다.


"라드씨, 안에 계세요?"
문 밖에 있는 것은 칼린이었다. 라드는 문을 열려다가, 자신의 상처를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해 망토를 걸쳐 입었다.

"아, 라드씨! 계셨군...요?"
"왜?"
"아니, 그냥... 원래 집 안에서도 망토를 입고 계시나 해서요.."
"아, 신경 쓰지 마. 돌아온 지 얼마 안돼서 그런 거야."
"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어딘가에 다녀 왔다기에는 망토 아래에는 셔츠밖에 입고 있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셔츠는 속옷에 가까운 품목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실까?"
그렇게 말하며 술을 꺼내는 라드에게 칼린은 괜찮다는 손짓을 하며 겉옷을 벗었다.  가면도 벗은 그는 테이블에 앉아 라드가 앉기를 기다렸다.

"영주님이 내일 성으로 오시라고 하던데요?"
라드는 그 말에 아무 말없이 칼린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시면서?"
"아니, 딱히 무슨 말을  하시지는 않으셨고... 제생각엔 라드씨는 혼자 벨카 밖에서 거주하고 계시니까 전달사항들을 따로 전하시려는 것 같은데요? 왕도로 가기 전에 주의사항 같은 거?"
칼린의 말이 맞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라드의 떠돌이로서의 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가지 말아야 한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할 수는 없었다. 라드는 가만히 불이 붙어있던 시가를 다시 집어 들었다.


"... 제대로 전해 들었어. 고맙군."
"별 말씀을요. 라드씨도 가끔은 여관으로 놀러 오세요."
"뭐야. 벌써 갈라고? 1시간은 왔을 텐데."
라드의 말에 칼린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섭도록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전 라드씨가 둘이 대화하는 자리는 피하시는  알았어요."
"그 반대지. 나랑 단 둘이 이야기해보려는 사람은 별로 없거든."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술을 가져왔다. 칼린도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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