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암투(暗鬪) (55/164)



〈 55화 〉암투(暗鬪)

"건배!"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며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모여 있는 인원들이 그녀를 따라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들은 그들이 머무는 여관의 술집에 전세를 내고 있었다. 오늘 그 술집에는 소금부대원들 만이 모여 있었다.


"주인장! 앞으로 일주일은 문 닫아! 우리가 오늘  치운다!"
륑게는 즐거운  말하며 앞에 있는 음식을 마구 집어먹었다. 주인장은 가족들까지 동원해서 바쁘게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그걸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 그들은 국가의 영웅이니까.

"이야, 믿고 있었다구요, 소니아씨!"
주인장은 나름 친해진 소니아에게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소니아는 그가 건내 주는 잔을 받으며 조금 도도한 표정으로 맥주잔의 바닥을 새끼손가락으로 받쳤다.

"나쁘지 않네요, 이 술 맛은 잊지 않도록 하죠.."
소니아는 그렇게 말해보고서, 몰려오는 기대감에 못 참고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주인장을 잡아 테이블에 끌어들였다.


"자자, 주인장씨도 한잔! 주목 주목! 만약 제가 술집을 만든다면, 이 사람이 엄청 도와준 거라구요!"
소니아는 빈 맥주잔을 숟가락으로 치면서 한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다른 동료들도 웃으며 주인장을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야! 륑게 벗는다!"
"우하하! 속옷도 벗어라!"
윗도리를 벗으며 흔들기 시작하는 륑게를 보며 핀도 소리쳤다. 옆에서는 릴로도
"질 수 없지!"
따위의 말을 하며 테이블을 하나 더 끌고 와 그 위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만취한 핀과 소니아, 주인장까지 그들에게 돈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재밌게 구경하던 아스타는, 머리에 얹혀진 릴로의 브라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물고 잠깐 술집을 나왔다.


밤거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어렸을 때 봤던 벨카는 이렇게 큰 도시가 아니었다. 분명 시골에 가까운 곳이어서, 포장도로는 커녕 가로등도 없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 그때는 아버지와 같이 왔었다.

북적이는 인파와 야시장을 보면서, 그녀는 왠지 도르베가 떠올랐다. 분명 이 술집에 있었다면 멍청한   그만 하라고 말리다가, 두병정도 억지로 먹이면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해서 모두에게 불평을 토해 댈 것이다. 왠지 그가 할 말까지 전부 상상이 갔기에 아스타는 작게 웃었다.


"ㅇ야야, 아슷ㅅ타, 너오ㅗ 바깥아ㅔ리ㅏㅆ어?"
팬티만 입은 릴로가 문을 열고 아스타를 불렀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그런 릴로를 쳐다보았다.


"존나 꼴사납다, 너."
릴로는 그 말에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신발조차 신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릴로는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배시시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살ㅇㄹ아남았짠아, 우리!"
아스타는 웃었다. 릴로의 꼴사나운 모습보다, 그녀가 한 말이 웃겼다. 그래, 모두 살아있다. 그러니까 꼴사나울 수도 있는 거다. 취객의 말을 대단한 철학인 것 마냥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방금 그 말이 퍽 아스타의 마음에 들었다.


"웬 일로 맞는 말을 하냐, 릴로!"
아스타는 힘차게 웃으며 릴로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릴로는 들고 있던 술병을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아! 창문 다ㅣㄷ아! 존나ㅏ아ㅜ춥단 말야!"
"그 꼴로 밖을 나오니까 그렇지, 멍청한년아!"
아스타는 도르베가 했을 말은 자신의 방식으로 전달하고 웃으며 문을 닫았다.


"릴롤끼, 아슽타씨, 갤러하니란ㅇ 칼린는 언제 오능건데요?"
"야, 야! 이롸하도 온다매애애애애!"
핀과 소니아가 그렇게 소리지르고 있었다. 륑게는 알몸으로 바닥에서 수영하는 시늉을 하며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네, 좀 늦긴 하네.."
아스타는 자신을 남자로 착각하며 입술을 들이밀기 시작하는 릴로의 머리를 밀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돌아왔어."
리쿠르트는 이튿날 전부터 성문 밖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을 통해 전원 생존했다는 연락을 받고, 영주에게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녀는 밥도 거르며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을 때, 갤러한이 서 있었다.

리쿠르트는 뭐라고 말  수 없었다. 그녀는 갤러한이 돌아왔을 때  말만을 생각하면서 지내왔다. 편지를 쓰면서도 언제나 그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녀가 준비한 모든 말들은 입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그녀는 그저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으며 문 밖에 서있는 그를 꽉 껴안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뭐, 뭐야,  울고 그래, 선생님, 것보다 나 냄새 많이  텐데..."
갤러한은 자신을 껴안은 리쿠르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그녀를 감싸듯 끌어안았다. 괜시리 그도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해서 필사적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다녀왔어."
리쿠르트는 하염없이 울면서, 그저 갤러한의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의  안에 얼굴을 박은 상태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갤러한...!"
둘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잊고, 그렇게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자, 이제 그만."
갤러한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리쿠르트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상냥하게 밀어냈다.

"얼굴을 못 보겠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며 리쿠르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칼린은 영주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콧노래를 부르며 리쿠르트의 방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영주는 자신의 성장을 인정해 준 것인지, 이번에 그가 직접 밝힌 자신이 저지른 실수들을 그렇게 강하게 질타하지 않았었다. 그저 웃으며 칼린을 바라보면서 맞장구만 쳐 줬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생에게도 모든 일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애제자가 해낸 일들을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너무 자세히는 말해 줄 수 없지만, 솔직히 리쿠르트에게는 사실을 말해도 되지 않을까, 까지는 생각하고 있었다. 한달음에 그녀의 방이 있는 층까지 올라간 칼린은 그녀의  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나, 참. 오늘은 냄새 날 것 같으니까 그냥 술집으로 가신다고 했으면서..."
어쩔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칼린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술집을 향해 걸어갔다. 술자리가 기대돼서 참을 수가 없었다. 모두에게 갤러한이 못 온다고 전하면, 그를 어떤 식으로 놀릴지 궁금해졌다. 떠돌이들의 농담은 날카롭다.

칼린의 기분 좋은 콧노래가 빈 복도에 울렸다.




이리하는 벨카의 공장단지에 있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벗고 로브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은발을 숨기기 위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저 멀리에서 그녀와 비슷한 복장의 사람이 다가왔다. 실루엣으로 보았을 때, 그쪽은 남성이었다.

"대사제님, 반갑습니다. 평등한 세계를 위하여."
"이리하 자매님, 몸 성해 보이시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평등한 세계를 위해."
그들은 서로를 마주하며 허리를 숙이고는, 양 손바닥을 모았다.  세계에서는 생소한, 기도하는 듯한 자세였다.

"여기 보고 내용입니다."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며 맞은편의 남성에게 노트를 건내 주었다. 언젠가 이리하가 칼린에게 일기라고 했던 노트였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리하 자매님. 교주님도 걸고 계신 기대가 크십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노트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일주일 후에 미사가 있습니다. 교주님이 직접 만나 뵙고 싶다 하시네요. 아, 그리고 이건 직접 전달을 부탁하신 전언입니다."
그리고 그는 소매 안쪽에서 작게 접혀 있는 쪽지를 꺼내 읽어 주었다.


"이리하 자매님, 발칙하고 천박한, 돼지와도 같은 상인이 당신이 잠입해 있는 부대의 지휘관을 새 시대의 적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우리가 먼저 부대에 손을 뻗은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부디 정체가 발각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그는 다시 쪽지를 접으며 '그렇게 말하시네요'라고 덧붙였다. 요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교주님에게 전달 드리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아, 있긴 합니다만, 자세한 것은 일주일 후 직접 말하겠습니다. 지금은 그냥  말만 전해주세요."
이리하는 웃으며 말했다.


"소개하고 싶은 인재가 있다고만 전해주세요."
남성은 그 말에 웃었다. 어두운 후드 아래로 흰 이빨만 새하얗게 드러났다.

"이리하님의 추천이라면, 확인할 것도 없이 들어오겠지요. 새로운 형제분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성은 그렇게 말하고 뒷걸음질로 그녀와 거리를 벌린 뒤, 고개를 숙였다.

"허 단 디알테스타만."
"허 단 디알테스타만."
주문같은 말을 서로 웅얼거리고, 남성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리하는 그가 완전히 시야를 벗어난 것을 확인하고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술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라드는 성을 나와 곧장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허름한 마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갈색 피부의 늘씬하게 키가 큰 마부가 마차에 기대 앉아 담배를 피다가, 늘어지는 하품을 하고 있었다.

"성인 두 명, 아드로."
"...요금은?"
"부르는 대로."
라드는 표정이란 것이 없는 듯한 마부에게 그런 말을 했다. 마부는  말을 듣자 더 묻지 않고 마차로 들어갔다. 라드가 마차에 타자, 그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벨카를 떠나갔다.


"주인님이 화나셨어요. 조금 각오하시는  좋을 겁니다."
마부의 말에 라드는 작게 코웃음 쳤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진짜 목숨을  번이나 걸었는지 몰라."
그렇게 말하며 성냥을 꺼내는 라드를 마부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린 마부는 마치 명심하라는 듯 말했다.


"...어르신은 결과만 보십니다."
라드는  말에 조용히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타 들어가는 소리가 음침하게 들려왔다.





마차는 인근 약소 마을에 멈췄다. 라드는 마부를 따라서 술집에 들어갔다. 술집 카운터 안의 철문을 두드리자, 철문의 작은 창이 열리며 누군가의 눈이 보였다.


"잘못 오신 것 같습니다, 돌아가 주세요."
창 너머의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마부는 조용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덮은 뒤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그쪽의 침묵이 너무 시끄럽습니다."
그 말에 철문의 창이 완전히 닫혔다. 그리고 잠시 뒤, 무거운 자물쇠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길게 울리는 쇳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라드는 그 문을 따라 들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술집에 앉아있던 사람들, 엎드려서 고개를 못 들고 있던 사람들까지 전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술집 안에 일반인은   명도 없는 상황이었다.


"살벌해라."
라드는 입가를 구기며 작게 말했다. 마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문 뒤에 서 있던 남성에게 겉옷을 건내 주었다. 그 남성은 라드의 코트까지 받고 다시 문을 닫아 잠구었다. 라드는 퇴로가 차단되었음을 확인하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붉은  카페트에 원형 테이블, 물담배와 어깨 8명. 비어있는 의자 맞은편에는 에테롬이 술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앉으시죠."
마부는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라드의 의자를 뒤로 끌어 주었다. 라드는  마부에게 웃음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라드가 앉은 것을 확인한 마부는 에테롬의 옆자리로 가서 그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고마워요, 할란."
에테롬은 사람 좋게 웃으며 테이블 위에 있는 과일을 하나 집어먹었다. 라드는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편히 앉아 풀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벽한 경계 태세 중이었다.


"라드씨는 안 드시나요? 카산하크의 열대과일이예요. 얼마나 달콤한지!"
그는 포도알같은 것을 입에 밀어 넣고서, 자극을 참을 수 없다는  몸을 한번 떨었다. 라드는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그대로 팔만 뻗어 파인애플같은 것에 손을 댔다.


"고생 많으셨어요. 이야, 두번째 임무도 정말 쉽지 않으셨겠네요. 제 말은, 처음에는 국가에서 버린 땅을 어떻게 해보라 하더니, 바로 네크로맨서를 사냥하라 하다니! 이거야 원, 경주마들도 그정도로 바쁘게 굴리지는 않을 텐데요! 하하, 그렇죠?"
에테롬은 풍채 좋게 튀어나온 배의 위를 통통 울리며 그렇게 말했다. 라드는 그의 말에 잡고 있던 파인애플을 입안에 넣으며 웃었다.

"정말로.  번이고 죽을 뻔 했었죠."
"오호, 예를 들어?"
에테롬은 관심이 있다는  할란에게서 재떨이와 시가담배를 받으며 몸을 기울였다. 라드는 회상해내는 척을 하며 방 안의 인원을 확인했다. 전부 어느 정도 기본적인 훈련은 받은 병사들 같았다.


"지키라 하신 칼린을 보호하다가 한번, 내부 분열을 만들었다가 두번... 그 외에도 자잘하게 뭐, 워낙 위험한 임무였지. 걱정 마쇼, 추가요금은 받지 않을테니까."
"오호호! 정말 쉽지 않은 임무였나 보네요, 라드씨!"
에테롬은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깊게 빨아 마셨다. 그리고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며, 잠깐 찾아오는 어지러움을 즐기는 듯 눈을 감았다.

"라드씨가 살아 돌아오셔서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만약 그런 일로 돌아가셨다면, 궁금했던 걸 묻지 못할 뻔했어요."
"...그게 뭐죠?"
라드의 질문에 에테롬은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은 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어려운 임무였고 라드씨가 방해도 제대로 했었다면,  저들이 성공한거죠?"
할란은 조용히 그의 주인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손을 떠난 잔에 와인을 따라 놓았다.

"...이봐요, 상인씨. 전 상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청부업자요. 그런 제가 말해 두건데, 일을 매번 성공할 수는 없는 겁니다."
"하하, 하하하하!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던 겁니까!"
에테롬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대소하기 시작하는  푸짐한 남자에게서 할란은 한걸음 더 떨어졌다. 조용한 방 안에서 한동안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하하하... 라드씨, 돈이라는  무슨 의미일까요?"
한참을 신나게 웃은 에테롬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돈이라는 건 강제력입니다... 무언가를 움직이는 힘..! 압도적인 무력이나 세상을 바꿀 학력만으로는, 더이상 무슨 힘도 되지 않아요.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은 자본과 정치로 움직이게 될 거예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라드는 장황하게 이어질 것 같은 에테롬의 말을 끊었다. 에테롬은 담뱃재를 떨어내며 목을 가다듬었다.

"요는 말이죠, 저는 라드씨에게 '소금부대를 방해'하라고 돈을 주었습니다. '소금부대를 확률적으로 방해하라'라고 하지 않았어요...예를 들어, 라드씨가 방금 드신 파인애플을 산다고 해 봅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반이 잘린, 아직 깎이지 않은 파인애플을 집어 들었다.


"상인에게 이걸 사겠다고 돈을 줬는데, 상인은 돈을 받더니 라드씨에게 파인애플을 주지 않는 겁니다... 파인애플만큼의 돈을 주면 그걸 받는 것이 사회적인 약속이자, 강제력인데 말이예요! 그러더니 갑자기 라드씨에게 흙도 뿌리기 시작하는거죠! 가끔 운이 나쁘면 흙도 맞을 수 있다면서!"
그는 파인애플의 잎부분을 쥐었다. 그리고 라드를 노려보았다.

"파인애플을 팔겠다고 돈을 받았으면, 거지 걸뱅이새끼마냥 기어서 구걸을 해서라도 파인애플을 구해야 하는 거다.. 아무 일도 없이 수월히 끝나는 것은 애초에 선택지에 없던 일이고. 네놈은 이걸 실패라고 생각하나? 이건 배신이야."
상인의 말투가 바뀌었다. 라드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그는 방금전의 사람 좋게 웃고 있던 뚱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안에 있던 어깨들이 라드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할란은 그의 주인과 이제 완전히 떨어져 있다.


"이상한 논리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요? 서비스랑 장사는 다르다고."
"네놈에게 준 돈은 그냥 푼돈이 아니야. 오히려 너같은 걸뱅이 양아치에게는 과분한 금액이었지. 아직도 모르겠나, 라드? 넌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 부대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면 최대한 잔인하고 비참하게, 모두에게 노출되는 방식으로 죽었어야 했어. 네놈이 사고가 되어야 했다. 왜 그러지 않았지?"
파인애플을 거꾸로 들고 있던 에테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병력들이 라드를 둘러쌌다.

"뭐, 이 정도로 나랑 한번 싸워보려는 겁니까? 에테롬씨, 후회할 짓 하지 마쇼."
라드가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어중이 떠중이 8명으로 라드를 상대하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상인은 그저 웃었다.

"아, 라드. 당신은 저 혼자 두들겨  겁니다."
"무슨..."
"네놈이 맞지 않는다면 네놈의 누나를 두들겨 패러 갈 테니까 말이다."
라드의 눈이 커졌다. 싸울 준비를 끝마쳤던 그의 양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네가 이번일을 맡았을 때부터 네놈의 반토막짜리 누님은 우리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힘으로는 자신있었겠지. 멍청하긴, 넌 여기 들어온 순간부터 맞는 예정밖에는 없었어. 그런데... 흥이 떨어지는군."
에테롬은 잔인하게 웃었다. 그리고 라드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50대다. 도합 50대를 때릴꺼야. 네놈은 맞는게 익숙해서 뭐, 잘 넘길 수 있겠지만, 더 때리는 건  체력이 안되서 말이지. 사실, 50대도  때릴  있을 지 모르겠군. 널 때리고 남은 개수만큼은 네 바퀴달린 누님을 팰 건데 말이지."
라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에테롬은 그 반응이 보고 싶었다. 언제나 여유로웠던 라드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도록 하지. 내가 널 두들겨 팰 테니까, 넌 그걸 응원해라.  맞으면서 나에게 때려달라고 부탁해라. 50대를 다 채울 때 까지 비참하게 빌어. 어렵지는 않지?"
"...그러면 이번 일은 불문으로 넘기고 내 누님에게는 손대지 않는 것인가?"
"50대 전부 맞으면 말이다. 그리고 말이 짧군."
에테롬은 그렇게 말하고 라드를 쳐다보았다. 라드는 가만히 서 있다가, 에테롬의 눈을 피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이건 굴욕조차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득이다. 이번 실수가 불문이 되는 거니까, 상당히 가볍게 넘어가는 일이다. 아아, 누님.

"...제 실수를 용서해 주십시요.."
누님, 무릎을 꿇는 것은 얼마나 가벼운 일입니까.


"50대 전부 맞겠습니다."
누님, 50대라는 것은 얼마나 적은 숫자입니까.

"부디 이걸로 화를 풀어주세요."
머리위에 신발이 얹어진다. 뒤통수가 자근자근히 밟히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조금 대화가 통하겠네요. 서로 존대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에테롬은 라드를 밟은 발에 힘을 주며, 그렇게 말했다.





40분이 지났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라드가 쇠문에 기대고 있다. 에테롬은 숨을 헐떡대며 할란에게서 수건을 건내 받았다.


"고마워요, 할란. 후, 정말 운동이 필요하겠네요!"
그는 떰에 젖은 런닝을 벗어 던지며, 들고 있던 빨갛게 피가 잔뜩 묻은 파인애플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며 라드에게 다가가 자신이 땀을 닦은 수건을 던져 주었다.

"라드씨, 응원에 소질이 있네요! 부대에서도 응원을 하셨나요?"
라드는 어지러운 정신 사이에서 땀냄새에 겨우 다시 눈을 뜨고, 그 수건을 쥐어 시야를 가리는 피를 닦아냈다.


"대답은?"
집요하게도 물어오는 에테롬의 말에, 라드는 흔들리는 초점을 똑바로 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입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에테롬은 만족스러운 듯 웃고서 다시 식탁에 앉았다.


"약속대로,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칠게요. 하지만 또다시 실수하는 일은 없겠죠? 믿고 있다구요."
그리고 그는 다시 와인잔을 들었다.

"모두들, 라드씨가 의자에 앉는 것을 도와주세요."
그의 가드들이 양 옆에서 라드를 잡아 의자에 앉혔다. 아직 조금 비틀거리는 라드를 보며 에테롬은 레몬을 하나 들이밀었다.


"라드씨, 이제는 힘으로 뭔가 해결할 시기는 지났지요.. 그런 걸로 상하관계가 생겨서는 안돼요. 모두가 수평관계로 있어야 해요. 전 라드씨와 수평관계로 있고 싶네요."
라드가 과일을 받아먹지 않자, 에테롬은 몸을 앞으로 끌어 라드의 입에 억지로 레몬을 밀어 넣었다. 차겁고 자극적인 고통이 라드의  안으로 천천히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나 원, 대답도 없으시기는. 라드씨는 너무 상전이 되려고 한다니까요."
에테롬은 라드의 입에서 붉게 흘러나오는, 침과 피와 레몬즙이 섞인 것을 그의 손수건으로 자상하게 닦아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주에 지난번에 만났던 그 조직의 수장을 만나러 갈 거예요. 그때까지는 전부 회복해 주세요. 정말 모든 병력이 필요하니까."
할란이 에테롬에게 다가가 그의 땀에 절은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옷을 입혀 주기 시작했다.

"그럼, 간단한 응급조치만 취하고 다시 마차에 집어넣으세요, 여러분."
에테롬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왔다. 라드는 차가운 테이블에 뺨을 대고 쓰러져 있었다. 부어올라 뜨거워진 그의 볼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치료를 위해 여기저기 더듬기 시작하는 가드들의 손을 느끼며,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아 멍청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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