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화 〉아버지와 아들 (49/164)



〈 49화 〉아버지와 아들

마차는 다음날 이른 아침에 출발했다. 마지막 도착지인 하인킬로 향하고 있었다. 네크로맨서의 예상 도착일자보다 하루 일찍 가서 준비를 해 두고 있을 생각이었다.

부대원들은 보험금에 돈을 더 집어넣었다. 살려는 의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였다. 의외로 부대원 개개인이 사비를 쓸 일이 적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게 그들이 무전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카마인에 엄청난 보상금이 약속되었어. 피해가 컸거든."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육포를 물어 뜯었다.

"내가 던졌던 그 공이 화제 진압용인데, 개인 공방에서 테스트용으로 팔던 거를 사둔 거였거든. 3년 전에 10개정도 사둔 거 평소에는 쓸 일이 없었단 말이지. 그 공 안에서 화학물질들이 터져 나오면 산소를 차단하면서 불을 덮어 끄는 방식인데, 그 화학물질이 엄청 유독한 거라서 사용하고 나면  땅이 완전히 죽어버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핀도 육포를 뜯으며 그렇게 물었다. 너무 딱딱해서 고무를 씹는 것 같았다.


"이제 그 땅은 약 40년간 잡초도 안 자라 날 꺼야. 어차피 유독가스가 피어 오르고 있던 땅이면  상관 없으려니 하고 썼었지. 그리고  봐, 우리 전부 살아있고 거기 근처 숲에도 불이 번지지 않았잖아?"
"근처에 있던 나무들은 전부 하얗게 덮여서 죽어가지만 말이야."
라드가 그렇게 말하며 수통을 들어 올려 뒤집어 보았다. 물을 다 마신 듯했다.

"불만 제압하면 된다매. 최선의 선택이었어."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 남은 육포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말려 있는 양피지를 꺼내 펼쳐 보았다.

"그래서 카마인의 영주가 마레의 치료비와 입원비, 전장 손해 보상을 청구했지. 뭐, 우리에게 청부한 게 아니니까 일이 끝나면 왕국으로 직접 갖다 주기만 하면 돼."
그렇게 말하고 갤러한은 그 양피지를 다시 말아 베낭 안에 넣었다. 그리고 속주머니에서 씹는 담배 캔을 꺼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전원 살아서 네크로맨서를 만나러 가게 되는 구만.."
"보험금도 벌써 4000생텀이나 모였고 말이야. 꽤  금액이 되었네."
릴로는 그렇게 말하며 갤러한 옆에 있는 돈을 모아둔 함을 들어 올려 보았다. 귀를 갖다 대고 한번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 갤러한을 돌아보았다.

"하인킬에 도착하면 이거 전부 공동계좌로 입금하는 건가?"
"그렇지. 은행에 그것만 입금하고 바로 전장에서 그 위대하신 대마법사 놈을 만나 뵈러 가야지. 그 전에 여러가지 함정같은 것 좀 깔아 두고 말이야."
"흠."
이리저리 함을 흔들어보던 릴로에게서 갤러한이 그것을 가져가려 할 때였다.

"갤러한씨는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보시나요?"
핀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떨던 다리를 붙잡고 갤러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나름 각오를 하고 나온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카마인에서  도움이 못되었었죠... 실제로 현장에서 싸워 보니 괴물 사냥하고는 부담감이 달랐어요. 끔찍했어요.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르면서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어요. 나중가서 저는 여러분이랑 언데드들을 구분하는 것도 벅차지기 시작해서... 솔직히 카마인에서 제가 살아남은  기적이예요. 누굴 죽이지 않은 것도 기적이구요."
"초 치게 그런 이야기 하지 말자고. 전부  살아남은 뒤에 이야기해도 아무 의미 없는 일이야."
"아뇨, 짚고 넘어가야 해요. 언제까지 운이 좋을 수는 없는 거니까. 갤러한, 우리가 네크로맨서를 이길 수 있을까요?"
핀은 꼭 대답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갤러한이 그럴 수 없다고 말해도 탈영을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어느 대답이 나오든 각오를 정해야 했다.


"참.. 나라고 본적도 없는 마법사랑 싸워서 이길지 어떻게 알겠냐. 다만,"
갤러한은 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가 이기던, 지던,  살아남는 방향으로  꺼야. 너네들도 그래라. 전부 살아남아서 보험금 엔빵하자고. 그거면 되는  아니겠냐?"
그의 말은 터무니없었다. 당당하게 임무를 저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멍청할 정도의 솔직함이 믿을 만했다. 핀은 안심이 아닌 여유를 찾았다.

"그러네요, 갤러한. 사는 게 제일 먼저죠."
"그래. 우리가 군인도 아니고. 그치?"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 마차에 편하게 등을 기대며 몸을 풀었다.

"애초에 저축을 시작하자마자 죽는 다니, 농담도 아니야."
"목숨달고 400생텀이나 꼬라 박고 있는 놈이 저축한다는  농담이지."
릴로는 그렇게 말하고 웃다가 갤러한에게 뒷통수를 맞았다.


"야, 라드!"
갤러한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그를 노려보는 릴로를 무시하며 창밖을 보고 있던 라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라드는 마레의 암살을 실패해서 영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무슨 일이지?"
"난 이제 너를 믿어 볼 수 있을  같다."
갤러한은 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는 라드에게 갤러한이 덫붙였다.


"칼린이 고립되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갔었지. 사람은 좀  되 쳐먹었고 속 꿍꿍이도  수 없는 너지만 동료로는 믿을 만해 보였어."
라드는 그 말에 빠르게 머릿속의 계산기를 돌려 보았다. 그 때 무리했던 것은 부대 내의 이미지 개선에 상당한 도움이  듯했다. 그는 살짝 굳었던 표정을 완전히 원상복구하며 갤러한의 손을 맞잡았다.

"칭찬할 때는 칭찬만 하자고."



한편 칼린의 마차는 조용했다. 이리하가 다시 칼린의 마차로 자리를 옮겼지만, 오히려 전보다도  조용해졌다. 칼린이 이리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많아서 일어난 상황이다.


어색한  그 둘만이 아니었다. 아스타는 도르베 쪽은 쳐다도 보지 않으며 창밖만 보던 결과 목에 담이와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상황까지 와 있었다. 그녀는 그걸 티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르베는 전날 저녁 갤러한이 한 말을 완전히 이해할  있었다. 그도 부대원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다. 따지고 생각해 보면 얼마나 후회할 일이 많았는가. 아스타와 대화는 해 보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스타 쪽을 계속해서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화가 많이 난 것인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소니아는 달달 떨면서 아랫입술이 하얘지도록 이를  물고 있었다. 떨리는 몸을 멈추기 위해 스스로를 붙잡고 있었지만, 손가락 끝이 하얘지도록 눌러 보아도 몸의 떨림이 멈추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모아둔 돈이 있었고 목표가 있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면 된다는 그녀의 다른 일행들과는 들고 있는 것의 무게가 달랐다.

그리고 륑게는... 사실 륑게는 별 생각이 없다. 그는 그저 간단한 내깃거리나 생각하고 있었다.

"야 소니-"
"힉!"
륑게는 자신이 떠올린 내기에 대해 말하려고 소니아에게 다가갔다가, 아픈 쥐새끼마냥 흠칫 놀라는 소니아의 반응에 흥이 떨어졌다. 다른 일행들도 그닥 재미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 했다. 이리하와 칼린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고, 아스타는 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도르베는 그런 아스타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륑게는 총체적 난국이라고 판단했다. 아무튼 대놓고 싸우지만 않으면 괜찮은 상태인 거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모포를 끌어올려 눈을 붙였다.




야영으로 중간에 멈추기에는 애매한 거리였기에 그들은 쉬지않고 마차를 움직였고, 결국 당일 23시경에 하인킬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이른 도착이었다.

그들은 근위병들을 따라 하인킬의 성으로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이미 영주가 자고 있었기에 만나지는 못했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각자의 방을 배정받은 그들은 꿈도 꾸지 않고 잠들었다.


부대원 모집은 10시에 이뤄졌다. 영주는 머리 뿌리가 조금씩 하얘지기 시작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무너지고 있는 듯한 안색이었지만, 눈은 아직 죽지 않고 위엄을 유지하고 있었다.

"늦지 않고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분명 힘든 여행이셨겠지요. 천천히 무공을 들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시기가 아님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얇은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깊게 빨아들이고 연기를 뱉은 그녀는 그녀의 집사가 가져온 종이를 받아 펼쳤다.


"그러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바로 네크로맨서 사냥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시면서 잠깐 보셨겠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시체는 전부 치운 상태입니다. 네크로맨서도 현장에서 시체를 구하지는 못할 겁니다만, 가장 최근인 13일 전 목격담에 의하면 동물 시체를 끌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갤러한은 같이 담배를 꺼내는 륑게를 막아 누르면서 질문했다.

"전장은 평야인데, 어떤 수단이든 사용 가능한 곳인가요?"
"예를 들어?"
"불, 물, 독, 어찌되었건 그 전장 땅을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만 한 수단들을 사용해도 괜찮은 겁니까?"
영주는 그 질문에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의 진격을 멈출 수만 있다면 수단은 어찌되건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를 생포할 경우 '소유권'은 우리 영지가 주장한다는 조건입니다."
"그건 우리 지휘관님이랑 사전 대화가 되었던 것 같은데요, 네크로맨서가 생포 당할 경우 소유주는 윌레인 국가가 됩니다."
소니아가 끼어 들어 말하자, 영주는 곰방대를 떨어냈다.


"네. 이건 상층부와 직접 타협을 볼 문제이니  주제는 일단 넘어가도록 하죠."
칼린은 이 대화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생포를 하고 소유권을 가진 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리하는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가,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약속드립니다. 계획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떠오르는  있다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네크로맨서는 오늘 저녁에서 내일 모레 사이에 올 겁니다. 시간단위까지는 알 방도가 없으니 부디 감안해 주시고 계획을 짜 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탁자에 모인 하인킬의 영주를 비롯한 11명의 네크로맨서 사냥을 위한 계획안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정오를 기준으로 그들은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영주의 사병들까지 동원해서 전장에 대대적인 준비작업을 하며, 34명의 인구를 동원해 1시간 반정도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남은 것은 각자의 마음의 준비 뿐이었다.

"난 이 돈을 은행에 넣고 오지."
갤러한과 륑게는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타도 그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잠깐!"
도르베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쳐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뭐야?"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
"뭐?"
"아스타, 이 임무가 끝나고 우리 모두 살아있을  모르는 일이다. 난 부상까지 짊어지고 있고,  마법은  그대로 피와 살을 깎으며 나오는 마법이니까. 후회를 남겨두고 싶지 않다."
아스타는 꽤 놀랐다. 그가 그런 말을 먼저 꺼낼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내 반응이  심기를 거스른 것은 알고 있다. 실수였다. 아니, 실수같은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알던 세계와는 너무 달랐다. 새로운 시야를 알게 해 다오."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스타는 그런 그의 뒤통수를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호탕하게 웃어 제끼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걸작이구만!  은근히 사과가 잦은  알고 있어?"
"뭐냐,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도르베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기 전에 아스타가 도르베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팔로 고정시키며 그를 끌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하! 뭐, 술이나 마시면서 이야기해 보자고!"
아스타는 반대쪽 팔을 붕붕 휘두르며 도르베를 끌고 갔다. 도르베는 머리가 잡힌 상태로 엉거주춤하게 발을 옮기며 소리를 질렀다.

"칼린, 난 너하고도 대화를 해야 겠다고 생각 중이니까 말이다!"
칼린은 그 말에 놀랐다가 곧 웃었다. 그래, 그는 도르베에게 사과해야 했다. 그 장면을 보며 칼린은 막연한 안정감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위험한 임무가 다가오고 나서야 그는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보기 좋군 그래."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칼린의 뒤로 다가왔다.


"그렇네요. 뭔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진짜 팀이 된 기분이네요."
라드는 웃으며 칼린의 어깨에 손을 툭 하고 얹었다. 뒤돌아보는 칼린에게 라드는 웃으며 물었다.


"그 팀에는 나도 포함되는 건가?"
"...아직은 힘들 것 같은데.."
칼린의 말에 라드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소리가 나도록 쳤다. 칼린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소리내서 웃다가 말했다.

"농담이에요. 물론 믿죠, 라드씨.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 라드의 어깨를 한 번 친 후 성이 있는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라드는 그런 그를 보며 한동안 미묘한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난 너무 유능한 게 탈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소니아, 핀, 릴로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릴로가 겁먹은 소니아와 핀을 위해 술을 사는 자리가 될 것이다. 라드도 그 자리에 계산을 같이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낄 예정이다.

그리고 이리하는 칼린을 뒤따라 가고 있었다.




"야."
칼린은 뒤에서 들려오는 이리하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 보았다.

"이..이리하씨?"
이리하는 발을 멈춘 칼린을 향해 그대로 걸어왔다. 그리고 칼린의 옆에서 발을 멈췄다.


"나도 성으로 바로 들어가려고. 같이 가자구."
"하, 하하. 얼마든지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조용히 걷고 있던 둘은, 성이 보일 때쯤 에서야 그 침묵을 부셨다.


"왜 그러는 건데?"
칼린은 이리하의 말에 다시 한번 흠칫 놀랐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 갑자기 날 조금 꺼려하는 거 아니냐?"
"아뇨, 그냥 평소 같은데..."
칼린의 말에 이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린은 멍청하지 않다. 그걸로 속여 넘긴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다만 그녀가 조용해 준다면, 굳이 먼저 나서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도 않는다. 해명할 필요 없는 침묵이란 것은 그에게 아주 편한 수단이다.


마침내 성벽에 도달했을 때, 이리하는 칼린의 정장 카라 뒷부분을 잡아 끌었다. 놀라서 반응도 못한 칼린을 질질 끌고 간 그녀는 성벽에 칼린을 밀쳤다.

"저기... 이리하씨?"
칼린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이리하는 팔을 뻗어 칼린의 탈출구를 막아냈다. 그리고 정면으로 그를 마주했다.


"뭐라도 말해. 내가 납득하기 전에는 못 움직여."
그녀의 은발이 저무는 노을을 받아 눈에 바셨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을 머리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린은 왠지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설마하니 36살인 자신이 이제 와서 수줍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 거라고, 분명 태양에 비친 은발이 너무 찬란해서 눈을 피하게  것뿐이라며 자기 최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리하는 눈을 피하게 두지 않았다.

"여기 봐."
이리하는 반대손으로 칼린의 턱을 잡아 돌렸다. 칼린은 조금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농담도 아니었다. 눈이라도 제대로 피하고 싶었지만, 풀 플레이트 갑옷이니 머리니 너무 찬란하게 빛을 반사해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잠깐의 정적이 유지되었다.

"이리하씨는-"
칼린은 결국 지금 자신의 상황을 못 이겨 내고 입을 열었다.


"이리하씨는 어떻게 저를 믿은 거죠? 제가 영주님에게 보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신 건가요?"
"너도 비등록 마법사니까."
"네크로맨서도 비등록 마법사예요! 그러면 이리하씨는 그에게도 정체를 밝히며 아군행세를 할 생각이신가요?"
"전에도 말했잖아. 그는 그냥 사냥대상이야."
"대체 왜-"
"그는 내 동료가 아니니까."
일갈하며 이리하는 그렇게 말했다. 칼린이 그녀의 기세에 눌려 한순간 당황한 사이, 그녀는 그 때를 노렸다.

"넌 달라. 나의 동료고, 생명을 아끼면서, 겁쟁이 주제에 자기희생은 두려워하지 않아. 상대가 귀족이건 평민이건 예의를 지켜. 그러면서 대의라고 정해  것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아주 쉽게 행하지."
이리하는 칼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뻗었던 손을 천천히 벌리며 칼린의 양손을 잡아 몰아붙였다. 그리고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가 댔다.

"넌 우리 부대 안에서도, '나'의 동료가  꺼야. 아직은  못해줘. 하지만 난 너를 선택했어. 네가 영주에게 나에 대해 밀고한다면 내 선택이 틀렸다는  인정하고 깔끔히 결과를 인정하지. 하지만 봐 봐, 난 이미 겁쟁이가 되었던 너를 한번 되돌려 놨는걸. 설령 네가 지금 밀고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또 바꿀 수 있어."
바닥을 쓸던 다리는 어느새 무너지며 칼린의 몸을 낮추고 있었다. 엉거주춤하게 벽에 기대고 있는 칼린에게 이리하는 압박이라도 하듯 점점 얼굴을 들이 밀었다.


"넌 다른 모두와도 달라. 애초에 '생각하는 방식'자체가 다르다고 해야하나. 시대는 바뀌고 있고, 너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해. 필요하다면 리스크를 감당하면서라도 나는 너를 내 동료로 끌어 들여야겠어."
그녀는 마침내 칼린과 이마를 마주댔다. 그리고 즐겁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넌 영주에게 말하지 않을꺼야... 언젠가 영주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깨달을 거고. 그건 앞으로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보지 않아도 넌 영주에게 말하지 않을거야. 내  맞지? 칼린."
"이...이리하.."
칼린은 그런 그녀를 보며 침을 삼켰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이제 좀 비켜요.... 이 자세 진짜 불편해요."



노인은 별을 바라보았다. 중간에 마차를 이용했었기 때문일까, 노인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의 예정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조약돌들을 꺼내  안에 던져보고,  조약돌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 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별을 바라보았다.

그가 하려는 일은 결국 이뤄질 것이다. 높은 장애물을 거쳐서. 그의 점은 틀리지 않는다. 노인은 그 결과에 눈을 감았다. 국가에서 그를 잡으려 한다는 것은 굳이 그의 현상수배지같은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마 이 길 앞에는 자신을 막기 위한 부대가 서있으리라.


노인의 앞에는 2시간만 쉬지 않고 걸으면 하인킬의 전장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그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이 앞을 막고 있을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뒤로 돌았다.


거기에는 시체의 악취를 풍기며 그의 뒤에 서있는, 동물들의 시체들이 있었다. 바짝 타버려 반쯤 녹은 곰부터, 목이 부러진 사슴들, 화살이 꽂혀 있는 잡 짐승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그 악취만큼이나 불길함을 풍겨대며 미동조차 하지 않고 서있었다. 그 숲길에 살아 숨쉬는 것들은 본능으로 그 자리를 피했기에, 지금  숲에 서있는 것은 누워 있어야 할 것들 뿐이었다.


노인은 담배를 물며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래. 뭐가 어떻게 되든, 그가 하려는 일은 결국 이뤄질 것이다. 그래. 그래.

그가 하인킬에 도착할  까지, 앞으로 1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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