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7화 〉아버지와 아들 (47/164)



〈 47화 〉아버지와 아들

"다들 준비 끝났지?"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 모두를 돌아보았다.

"소니아, 철퇴보다 검이 좋지 않겠어?"
륑게의 말에 소니아는 자신의 철퇴를 흔들어 보였다.

"꼭 잘게 베야 못 움직이냐. 이걸로 곤죽으로 만들면 일어나고 싶어도 못 일어날 껄?"
"뭐, 그럴 것 같지만..."
"야 그럼 나도-"
릴로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갤러한이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넌 검 써야지. 너클로 부수는  무리가 있잖아?"
주눅든 릴로를 뒤로하고 갤러한은 핀에게 다가갔다.


"핀, 정말로 같이 싸울 수 있겠어?"
"뭐... 보수는 N빵이니까 같이 싸우는 게 맞죠."
부상이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핀의 화살은 그닥 효과가 없다. 그리고 주 무장을 교체했을 때 가장 불리한 것이 핀이기도 하다.

"...한명이라도 쪽수가 많으면 큰 도움이지. 핀, 고맙다."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 그의 어깨를 두 번 정도 쳤다. 그리고 모두의 앞으로 나왔다.

"보험금은 인당 400생텀 모였다. 400생텀은 큰돈이다. 남한테 줄 일 없도록 알아서 발악해봐."
한 명씩 돌아보던 갤러한은 이어 말했다.


"잡초 제거랑 비슷한 일이 될 거야. 단 잡초들이 우리한테 덤벼드는 느낌이지. 많이 지치고 끈질긴 작업이  예정이다만, 그래도 수작업으로 해야 한다. 아스타는 특히 조심해줘. 이번에 네 마법은 절대로 금지야."
아스타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표시를 만들었다.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아 보였지만 몸상태는 좋아 보였다.

"불이 번지는 것 까지는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어. 근데 폭발했을 때 파편이나 충격파 같은 거는 감당이  될거야. 다들 알아 두라고. 그럼."
갤러한은 소니아를 바라보았다. 영주에게 보고가 끝났냐는 의미를 담은 시선이었다. 소니아도 말 없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일하러 가자, 얘들아."

#


라드는 약간의 불안을 담고 걸어가고 있었다. 마레에게 자신의 정체까지 들켜버린 듯했다.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없을 정도의 또라이였다. 어젯밤 그 이후로 마레는 자신에게 30생텀정도를 쥐어 주었고, 라드가 제안한 곳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라드는 원래 그를  지점에서 원하는 타이밍에 넘어뜨리던가 해서 전장에 휘말리게 할 생각이었다.


"라드씨?"
핀의 말에 라드가 뒤돌아보았다.

"무슨 생각하세요, 이제 싸움이 눈앞인데."
그 말에 라드는 가만히 있다가 평소같이 웃었다.


"일이 우리의 계획대로 흘러가길 빌고 있었지."
핀은 그 말에 조금 안심이라는  웃었다.

"라드씨도 긴장을 하시는군요.. 항상 여유로워 보이시길래 아예 인종이 다른 느낌인  알았어요."
"난 항상 필사적이라고."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저기, 전장이 보이네요."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한 그 황야에, 빽빽하게 시체가 서 있다. 이리하는 그 풍경이 눈에 담기기 시작하자 칼린에게 다가왔다.

"진짜 위험한 임무가 될 거야. 믿을 사람정도는 직접 고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안 그래도 불안함에 떨고 있던 칼린이었다. 그에게는 다 집어 치우고 인간형태를 밴다는 것 부터 무리인 임무이다.

"제가 또 실수해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면 어쩌죠?"
극한의 상태에서 나온 칼린의 솔직한 말에, 이리하는 자신이 알던 그가 조금은 돌아온 것 같아 웃었다.

"다른 모두가 네 똥을 치워주겠지. 팀으로 움직이자고."
마침내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오게 되었다. 갤러한은 그 무리를 보며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망설였다.

"핀, 저거 50마리 정도 맞냐?"
"전 아직 그렇게 느껴지는데요."
그런 핀의 말을  귀로 흘리고 있던 갤러한은 하나하나를 카운팅  보려다가 중간에 세는 것을 포기했다.

"저걸 매일 밤마다 용케도 세어봤구나, 칼린."
나즈막히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위급한 상황에 하나씩 까서 마셔. 부상으로 못 움직일 것 같은 상황에 도움이  거다."
그리고 도르베에게는 그걸 하나 더 주었다.


"...알겠지? 넌 네크로맨서 잡을 때 까지는 필요한 인력이야."
"고맙군. 신경 써 줄 것 없다."
도르베는 각오한 표정으로 그걸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번에야말로 명예와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아버지..."
나즈막히 그렇게 되뇌이는 도르베를 보며 아스타는 꼴사납다는 듯 혀를 찼다.

라드는 지정해 둔 위치 쪽을 망원경으로 보았다. 마레가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오래 보다간 다른 모두도 찾을 수도 있으니 그는 대충 시야를 돌렸다.


"가자!"
그리고 갤러한의 말에 따라, 다른 전원과 같이 전장을 향해 발을 옮겼다.

언데드들이 부대원들에게 반응했다.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 기계적인 반응에 가까운 그것이다. 목이 달린 것들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끔찍한 광경이로군."
흘러나오는 륑게의 말에 핀은 자신이 장님인 것에 감사했다. 갤러한은 검을 들며 말했다.


"둘러쌓이지 않게, 10명 수평으로 한 줄로, 오는 것들만 죽여가며 처리한다."
언데드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각자의 무기를 고쳐 쥐었다.

"실시!"

 말을 하며, 갤러한은 검을 내리 찍었다. 달려오던 언데드의 팔이 날아갔다. 여기저기 그들이 베어내는 파편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베면서 앞으로 가!"
갤러한이 소리질렀지만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이미 그들은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머리를 베는  의미 없어! 활동을 못하도록 팔과 다리를 잘라내!"
륑게는 그렇게 말하며 눈앞의 언데드의 다리를 잘라냈다. 그러나 어디를 잘라내도 그 시체들이 움직임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전부다 한꺼번에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신호에 맞춰!"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며 기어 다니던 좀비의 몸을 짓밟으며 한발을 내딛었다.

"한발!"
갤러한에 맞춰, 모두들 시체들을 베어 가르고 밀어내며 한발 앞으로 전진했다. 좀비들이 내고 있는 음산한 신음소리들 사이로 그들의 비명같은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발!"
갤러한은 반대쪽 발을 옮기며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도르베는 자신의 방어막으로 시체들을 밀어내면서 근처 동료들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피가 묻어 붉어지고 있는 방어막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는 듯했다.

"도르베! 방어막은 계속해서 새로운 걸 꺼내라!"
"마나를 아껴야 해!"
"나한테 마나포션도 있어! 일단 써!"
갤러한은 그렇게 소리질렀다. 지금 도르베의 능력은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다. 하나 둘씩 무너져 가는 시체들을 짓밟으며 그들은 계속 발을 옮겼다.

"한발!"
이번에 외친 것은 핀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아직 움직이는  한짝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언데드들은, 마치 앞에 무언가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듯 서로를 밀치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두.. 씨발!"
칼린은 말을 끊고 다리 쪽을 보았다. 아직 다 썩지 않아 벌레가 느글거리는 머리통 하나가 그의 아킬레스건을 물고 있었다. 그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고, 방독면 속의 화학적인 냄새에 몸을 맡기며 눈을 크게 떴다.


"두발!"
이리하가  머리통을 단검으로 찍어버리고 그가 하려던 말을 이었다. 언제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던 이리하는 이번 임무에서 상당히 유리한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야! 뒤로 돌아서 온다!"
"뭐라고?!"
아스타의 말에 갤러한은 검을 앞으로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체들은 기어서, 끼어서 그들의 뒷쪽으로도 서서히 자리를 넓히고 있었다.

"어떡해! 뒤돌아서 저것들부터 잡아?!"
"아니! 등을 보이지 마! 그대로 앞으로 가!"
갤러한은 그렇게 외치고 건틀렛으로 정면에 있던 시체의 머리를 밀어내 넘어뜨렸다. 점점 벅차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발! 전략을 바꾼다! 전부 최대한 서로 붙어!"
""서로붙어!""
갤러한의 말에  옆에 있던 릴로와 륑게가 외쳤다. 그리고 부대원들끼리의 간격을 최소한으로 좁혔다.

"두명씩 조 잡고 서로 등을 맞대! 그리고 지금 방향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등을 맞대고 그들은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벅찬 전황에도 그들은 나쁘지 않은 실적을 내고 있었다.


"핀!"
도르베가 등을 맞대고 있던 핀을 바라보았다. 핀은 검을 들고 눈 앞에 있는 시체의 몸뚱이를 꿰뚫은 참이었다.

"네?"
도르베는 핀의 검에 꽂힌 좀비를 그의 방어막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있던 좀비의 무릎 아래를 베어내며 몸을 낮추었다.

"이것들을 상대할 때 찌르는 공격은 하지 마! 아무 의미도 없이 검이 고정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소리쳤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한 발짝을 옮기며 앞섰다.


"두 발!"
칼린은 방독면에 튄 피를 그의 옷에서 젖지 않은 부분을 찾으며 닦아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보인 시야의 끝에,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저건 뭐죠, 이리하씨?"
그는 등을 맞대고 있던 이리하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리하도 잠깐 검을 멈추고 그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건..."
그리고 비슷한 말을 흘렸다. 오른쪽 끝을 맡고 있던 라드도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씨팔-"
거친 비탈을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려오고 있던 것은 마레였다. 낭패였다. 설마 마레가 변변찮은 자기 보호 수단조차 없이 이 곳으로 몸을 던져 올 줄은 몰랐다.


"이리하씨! 저거 뭐냐고요! 민간인 아니에요?!"
"민간인이 이런 다 죽은 땅에 왜 와! 여기에 '민간인'같은 건 없어!"
이리하도 놀라서 대답했지만, 정말 감이 잡히는 게 없었다.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 누군지 알 방법이 없었다.


"젠장!"
라드는 작게 말하며 아직 모두가 눈치채지 못한 지금이 그를 죽일 기회임을 알아챘다. 원하는 타이밍도 아니고 쉬운 상황도 아니지만, 지금 해내야 했다. 라드는 마법으로 작은 돌맹이를 하나 들어 올렸다.

"무슨 일 있어?!"
뒤만 보고 있던 릴로가 등을 맞대고 있는 아스타에게 물었다. 아스타는 앞에 있던 시체를 베어 넘기고 정면을 보았다. 좀비떼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남성이 보였다.

"이쪽으로 뛰어오는 미친놈이 있는데?!"
"뭐?!"
하나 둘 씩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한 그 남자의 존재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라드는 더 이상 주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 있던 언데드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도박인데..."
그리고 팔을 끌어 내려  언데드의 허리를 굽히게 한 뒤, 그것의 머리를 밟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의심을 받지 않게 자신의 검을 주변의 시체들에게 휘두르면서-


'닿아라!'
띄워 두었던 돌맹이를 그의 무릎으로 쏘았다. 그 누구도 라드가 마법을 사용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최악의 타이밍에, 칼린이 다른 것을 눈치챘다.


"저거! 저 옷! 마레씨예요!"
"뭐 씨발?"
그제서야 갤러한이 고개를 들으며  남성을 보았다. 달려오던  남자는 타이밍 좋게 뭔가에 얻어맞은 듯 다리를 뒤로 날리며 넘어졌다. 후방에 있던 언데드들이 넘어진 남자에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칼린! 저거 마레가 확실하냐?"
"옷은 똑같잖아요! 그럴 것 같아요!"
"핀! 저거 마레냐?"
"이런 썅, 갤러한!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핀은 전장에 취해 있었다. 검으로 베는 감각이 익숙하지 않은 그는 인생에서 최고조로 민감한 순간을 겪고 있었다. 징병당해서 온 신병들이 전장에서 느끼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라드는 그가 넘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검을 쥐고 웃었다. 나머지는 이 움직이는 시체들이 알아서  줄 것이다. 라드는 그렇게 판단하고 다시 진형을 잡았다. 다음에 일어날 일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구해 올 게요!"
칼린이 그렇게 말하며 눈 앞에 덤벼들던 시체를 가볍게 피해  뒤 그것에 올라탔다.

"뭐? 야!"
한순간에 등이 비게 된 이리하는 빠른 판단으로 아스타와 릴로의 옆에 붙어 삼각진형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계속 소리질렀다.

"야! 저기로 혼자는 못 가! 진짜 죽어!"
칼린도 알고 있다. 여기 시체들은 조각 토막을 내도 전부 따로 움직이는 진짜 좀비같은 것들이고, 해가 떠있는 한 자신에게 뾰족한 탈출수단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야한다.


"영주님이 그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미친새끼..!"
릴로가 나즈막히 욕을 뱉었다. 그러나 칼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좀비떼 위를 밟으며, 자신의  밑에서 무너지는 썩은 시체의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야! 기다려!"
그렇게 말하는 이리하를 뒤로 하고, 칼린은 좀비떼 사이를 밀어내며 그가 있던 방향으로 뛰어갔다.


'혼자서라도. 혼자서라도 해내야 해.'
여기저기 얽혀 오는 언데드의 팔들을 특유의 유연함으로 피해내며, 칼린은 계속 뛰었다.


'영주님만 믿으면 돼.'
그리고 앞으로 뛰어 구르며 언데드들의 사이까지 들어왔다. 그의 시야 안에 남성이 보였다. 무장도, 몸을 움츠리지도 않고, 그저 노트와 펜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적으며 다친 다리를 잡고 앉아 뒷걸음질하고 있는 남자였다.


"마레씨!"
"아? 칼린씨입니까! 아, 아쉽게도! 지금은 방독면을 쓰고 계시는 겁니까! 아쉽네요! 설산의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우실 거라는 이야기만 들으며 이런 기회가 생겨도 칼린씨의 얼굴을 못 보는 것으-"
"입닥쳐요! 지금 구하러 갈게요!"
칼린은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사방이 시체들이니 방향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었기에, 그는 시체들 사이로 보이는 마레를 나침반으로 사용하며 달려나갔다.

"읏! 씹!"
계속해서 전진하던 칼린을 막아낸 것은,  덩치가 있고 폭탄을 두르고 있는 시체였다. 폭탄의 내용물이 새어 나온 건지 그것의 배는 맨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지고 녹아들어가 있었다. 시체에서 나는 악취가 방독면 너머까지 흘러 들어왔다.

그것은 운 나쁘게도 팔에 녹아버린 검을 달고 있었다. 휘둘러진 검을 피한 칼린은 이윽고 반토막나서 발견조차 못하고 있던 시체에게 다리까지 잡혔다.

칼린은 발목의 상처에서 가시를 뿜어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시체들을 밀어내는 정도의 수준밖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언데드들은 몸에 박혀 있는 가시를 밀어내며 그에게 하나 둘 씩 덮쳐 오기 시작했다.


"마레! 도망치세요! 지금!"
칼린은 직감했다. 자신의 죽음이 눈 앞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렇게 소리치면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 몸에 생기고 있는 모든 상처에서 피를 벽처럼 만들어내 주변의 언데드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칼린이 만들어낸 벽을 넘어서까지 언데드가 올라오며, 그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할 때였다.

"벽 치워!"
벽 너머로 그 소리가 들려왔다. 칼린은 그게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치울리가 없잖아.. 벽 너머에는 언데드가 밀려들어오려고 하고 있다고."
자조하면서 혼잣말하고 그는 자신이 만든 벽으로 기어들어오는 언데드들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벽 치우라고!"
다시 한 번 들려온  목소리는 환청이라기에는 너무 뚜렷했다.  마른 목소리. 칼린은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다.

"라드?"
칼린은 벽을 치웠다. 밀려들어 오는 언데드들 사이로 누군가가 밧줄을 던졌다. 라드가 도르베의 방어막을 밟으며 그의 바로 근처까지 와 있었다.


"잡아!"
"마레를 구해야 해요!"
라드는 칼린과 마레를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얼굴을 구겼다.


"이런 젠장, 일단 잡아!"
칼린이 밧줄을 잡자 그를 끌어올린 라드는 자신의 쪽을 바라보고 있는 도르베에게 엄지를 세워 올리고서, 다시 검을 들었다. 마레는 이제 위험해 보였다.

"하, 난 너무 정직하게 일한다니까.."
라드는 눈가를 가리며 그렇게 말하고서 도르베의 발판에서 뛰어내렸다. 칼린은 주변을 보았다. 동료들의 진형이 흐트러져 있었다. 칼린은 도르베의 보호막 위에 서서 손을 입에 갖다대고 말했다.


"무슨 일이예요!"
"널 구하려다가 진형이 망가졌어! 일단 난전형태로 계속 진행한다!"
갤러한이 그렇게 소리질렀다. 칼린의 방독면 뒤 얼굴이 새하얘졌다.


"제 멋대로 나간 건데 저를 왜 구해요! 다들 그렇게 멍청해요?"
"지금 그딴거 따질 때냐, 이 씨발놈아!"
륑게가 그렇게 소리질렀다. 그러나 칼린의 말에 어찌되었건 대답은 돌아왔다. 이리하에게서였다.


"넌 우리 전우야! 이제 다시 싸우라고!"
칼린은 말문이 막혔다. 만약 그 자리에서 그가 죽었더라면 완전한 그의 책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자신을 돕기를 선택했다. 안정적이었던 진형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움직여! 칼린!"
이리하의 호령에 칼린은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 튀어 오르며 정신을 차렸다. 그제서야 발판을 유지하며 싸우고 있는 도르베를 보았다. 칼린은 검을 집어 들었다.

"죄송해요!"
그리고 검집을 뽑아 던지며 발판에서 뛰어내리고, 크게 한 섬을 내딛었다.


"정신 차렸습니다!"
칼린이 향한 곳은 라드가 있는 곳이었다. 라드는 마레를 등에 업고 싸우고 있었다.

"어이쿠! 생각을 바꾼 건가요, 라드씨? 혹시 죄책감? 아니면 알 수 없는 동질감? 아니면 다리의 부상이 너무 인위적이라서 고치려는 걸까요?"
마레는 벌써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전부 파악하고도  미친 자식은 전장의 안쪽까지 더 기어 들어온 것이다.


"...지금은 조용히 하시죠, 마레씨."
라드는 그를 한번 노려보며 말했다. 마레는 과장된 몸짓으로 양팔을 들어 올리고 어깨를 으쓱 한 후, 달려오는 칼린 쪽으로 팔을 흔들었다.

"지금 갈게요, 라드 씨!"
칼린은 눈 앞의 시체들을 넘기고 베어내고 찢어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라드의  앞까지 왔다.

"라드씨!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인사는 살아서 해. 일단 저쪽으로 합류해. 나한테 계획이 있어."
"넵!"
두번째 임무 시작후 가장 씩씩한 대답을 해낸 칼린은 라드에게 자신의 등을 맡겼다. 라드는 그 모습에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평소의 입가를 긁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참, 이용할 새도 없이 빠르게 성장하고 말이야."
"뭔가요? 무슨 말인가요? 제가 모르는 칼린씨의 일인가요? 저도 같이-"
"지금은 조용히 하자고 했습니다, 마레씨."
라드는 다시 떠들기 시작하는 마레를 조용히 시키고, 백스탭으로 칼린을 따라 가기 시작했다. 난전속에서 그들은 다시 모였다. 그러나, 다시 진형을 만들기에는 너무 중심부에 들어가 있었다.

"갤러한! 계획이 있다!"
갤러한은 라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급하게 앞에 있던 시체를 어깨로 밀어내고 그와 조금 더 가까이 왔다.


"짧게 말해!"
"불을 쓰자!"
"...조금만 더 길게 말해!"
라드는 웃으며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동안 칼린과 갤러한이 그를 보호했다.


"이걸 여기서  줄은 몰랐는데..."
그가 꺼낸 것은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말뚝과 같이 생긴 것이었다. 라드는 갤러한에게 재차 확인 질문을 했다.


"불이 번지는 것 까지는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다고 했지?!"
"진짜 어떻게든 막아낼 수는 있어!"
"그거 믿고 하는 작전이다!"
라드의 대략의 계획 설명을 듣고서, 갤러한은 믿을 수 없다는  라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정신이냐?"
"할거야, 안할거야!"
달려드는 반토막난 시체를 발로 차내며 라드가 물었다. 갤러한은 방독면에 붙어있는 굼벵이 시체를 닦아내며 말했다.

"그걸로 가자."
그리고 빠르게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전장 이탈이다! 들었다면 주변인들도 들을 수 있도록 재복창!"
"전장 이탈!"
칼린을 시작으로, 하나  씩 전장 이탈을 외치기 시작했다.  9번이 들려온 것으로 보아 아직은 전원이 무사한 듯했다.


"전장이-"
"입닥쳐요, 마레! 카운팅에 혼동이 온다구요!"
칼린은 라드의 등에 업혀 있는 마레에게 그렇게 말하고 빠르게 시체들 사이를 건넜다. 하나 둘 씩 썩은 시체들의 사이를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진열 다시 짜서 들어가려는 거야?!"
"아니, 뒤쪽에 있던 언데드들도 자극되었으니까 이젠 그렇게 쉽게는 못해! 도박수를 쓴다!"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서 쇠로 된 공모양 물체를 6개정도 꺼냈다.

"너.. .뭐할려고 그걸 6개씩이나-"
"아스타! 칼린! 마법 쓸 준비해라! 칼린은 최대규모로 발동할 준비하고!"
소니아의 말을 끊어낸 갤러한은 잡고 있던 공의 반절을 잡고 비틀듯 돌렸다. 그 공모양 물체는 마치 시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일정한 속도에 맞게 비틀어 진 만큼 다시 돌기 시작했다. 갤러한은 하나하나 그 작업을 하며 계속 말했다.


"도르베! 도핑이다! 가방에서 마나물약 가져가!"
"알았다!"
언데드들이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토막나면 토막난 대로 그들을 향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처럼 기어오고 있었다.


"도르베, 라드, 칼린이 셋이서 맨 앞줄! 나머지는 전부 뒤로 일렬로 서!"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 라드의 뒤에 섰다. 라드는 셋 중 가운데에서 한 다리를 꿇고 앉아 그 말뚝같은 것을 바닥에 박았다. 덜 죽은 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갤러한의 손에 들고 있던 공들이 계속해서 틱톡대고 있었다.

"준비 끝!"
도르베는 갑작스러운 마나 도핑에 약간의 고양감과 현기증을 느끼며 외쳤다. 칼린도 소드 브레이커를 꺼내 팔에  상처를 냈다.

"저도 준비 끝났어요!"
"간다! 도르베! 할  있는 최대한으로 방어막을 만들어! 넓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충격파만 막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여러 개 겹쳐서 만들어! 칼린은 내가 신호하면 그 앞에 장벽을 만들어! 최대한 넒고 두껍게!"
"그런걸로는-"
"그것만으로 못 막는거 알겠으니까 서둘러!"
그의 손에 들려있는 6개의 공이 점점 빠르게 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시체들은 전차처럼 눈앞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몰려왔다. 마레는 신이 나서 발작적으로 글을 적고 있다.


도르베의 다중겹 방어막이 완성되었다.

"지금이다, 륑게! 써!"
륑게는 그 신호에 맞게 바닥에 박혀 있던 마정석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마정석에서 푸른색 빛이 나기 시작했다. 곧 지진이 일어났다.


"뭐, 뭐야, 씨발!"
"아스타! 당황하지마! 지금이다!"
갤러한은 아스타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피를 날려! 그리고 3초후 마법이다!"
"...오케이! 믿는다!"
아스타는 팔을 힘차게 휘둘러서 시체들이 있는 방향으로 피를 흩뿌렸다. 많이 닿은 것은 아니지만, 그쪽으로 한방울이면 충분했다.

"칼린! 장벽!"
칼린은 그 신호에 맞게 장벽을 세웠다. 앉아있는 모두의 시야를 가릴 정도 크기의 장벽이 올라왔다. 두께는 약 500원짜리 동전의 두께였다. 그리고 그 장벽이 완전히 세워지기 전, 갤러한은 들고 있던 6개의 공을 전부 그 너머로 던졌다.

"전부 몸 숙여! 아스타! 지금이다!"
그 신호와 함께 땅이 울렸다. 거대한 토벽(土壁)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스타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공기가 갈라질 정도의 폭발과 함께 찢어지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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