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아버지와 아들
둘은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스타는 엄지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곁눈길로 보이는 시야속에서, 라드의 뒤로 다가오는 릴로가 보였다.
아스타는 그걸 굳이 말하지 않으며 조용히 자세를 유지했다. 릴로가 라드를 조져준다면 일이 편하게 흐를 것이다. 그러다가 라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도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스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눈치챘다.
"...내 뒤에도 누가 있는 거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갤러한쪽으로 돌렸다. 갤러한은 유감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대치상태면 뒤를 잡기 쉬워지니까.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고 갤러한은 둘 사이에 들어왔다.
"아스타, 네 뒤에는 륑게가 있어. 라드 뒤에는 릴로가 있고. 설명할 것도 없겠지만, 내가 그 둘로 고른 이유는 수틀리면 정말로 너넬 죽일 수 있는 애들이라 그래."
아스타의 목에 차가운 것이 걸쳐졌다. 륑게의 곡도였다.
"믿어줄지는 모르겠는데, 난 라드한테 자원했었어."
"하, 너라면 그랬겠지, 륑게. 알고 있어."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려 놓았다.
"너도 올가미 풀어라."
라드의 척추에 너클을 갖다 대고 있던 릴로가 그녀의 너클 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라드는 아스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스타 주변에 띄어 놓았던 돌을 떨궈내고 올가미를 풀어냈다.
"아직 움직이지 마."
륑게가 아스타의 목에 칼을 더 가깝게 들이 밀었다. 아스타가 양손을 피고 대기할 동안, 릴로가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라드의 목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둘다 그냥 서로 주먹질만 하고 끝나면 좋잖냐.. 왜 이런 방법까지 쓰게 만들어?"
"이봐, 난 진짜 이렇게 제대로 싸울 생각은 없었어."
"입 닥쳐. 따지고 보면 네 잘못이니까."
라드의 변명같은 말에 갤러한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상황이 종료되는 듯-했다.
"아스타, 진짜냐?"
그 말을 한 것은 도르베였다.
"...뭐가."
륑게가 칼을 치우고 나서, 아스타는 목부근이 간질한 느낌에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르베는 다시 묻는 것이 두려웠으나, 곧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각오를 잡았다.
"네가.. 네가 네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 말이다. 무슨 오해가 있던 거냐?"
도르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만들며 물었다. 아스타는 그 말과 표정을 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오해를 전제로 깔아가며 자신이 한 일을 부정하려는 도르베가 아니꼬웠다.
"위험도 B급의 1면 마법사이자 살인자, 아스타. 약물 중독자였던 아버지가 그녀의 첫 마법 대상자였다지."
아스타가 대답하지 않자, 라드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아스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럴리가.. 짐승조차 지 아비는 알아본다. 뭔가의 오해가 있는 거겠지!"
도르베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현실을 부정하려는 도르베에게 쐐기를 박은 건 아스타 본인이었다.
"내가 죽였어."
"...뭐?"
"내가 직접 죽였다. 내 마법으로. 확실하게. 후회도 안 해."
아스타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녀는 도르베가 자신과 비슷한 문제를 앓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쓰레기같은 부모에게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 허덕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도르베는 그걸 붙잡고 있었다.
그걸 깨닫게 된 것이 아스타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유는... 이유는 무엇이냐.."
"거창한 이유 달면 죽은 게 살아 돌아오냐? 니미."
아스타는 퉁명스럽게 뱉고서,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륑게를 옆으로 밀쳐내고 자신의 텐트로 들어갔다. 도르베는 그런 아스타를 보며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그녀가 자신이 알던 그녀가 아닌 것처럼 보여서 말을 걸 수 없었다.
"... 만족스럽냐? 쓰레기자식아?"
갤러한의 말에 라드는 살짝 웃으며 릴로의 주먹을 조금 밀어냈다. 그리고 갤러한을 지나치며 말했다.
"누군가는 말했어야지. 그리고 결국 도르베가 다친 이유라는 주제를 피했어. 난 아직 아스타를 못 믿겠군."
그렇게 말하고 그는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되도록 아스타 앞에서는 아버지 이야기나 마약이야기는 피하자고.. 도르베가 운이 좋았던 걸 수도 있잖아? 그럼.."
벌써 마차의 창 밖으로 몸을 반쯤 빼고 있는 마레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라드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하.. 씨팔.."
"야, 이정도면 선방이지. 남은 건 보고인데..."
신경질적으로 씹는 담배를 물어 대는 갤러한의 어깨에 손을 얹고, 릴로는 주변 상황을 둘러보았다.
바닥을 더듬으며 어떻게든 마정석 덩어리에 조각나고 부서진 스피커 조각을 갖다 대 보는 칼린에, 그걸 평소같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이리하, 부상당하고 아마도 정신도 나간 듯 한 도르베, 자리를 뜬 아스타까지. 환장할 것 같은 장면이었다.
"이걸 뭐라고 보고하냐.."
소니아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이상인가?'
"이상입니다..."
소니아가 머리를 감싸 매며 말했다. 그녀가 그런 것은 보고 내용이 워낙 많아 그런 것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도르베는 부상이 심한데다가 그 통증을 잊으려 마약에 손대려 했고, 칼린은 전화기를 실수로 부셨다고?'
"네."
"소니아, 빨리 제대로 전달해요! 이리하가 제 전화기 부순 거잖아요! 라드씨랑 아스타씨가 싸운 건 왜 말 안 하고 넘기는 건데요!!"
크게 말하면 혹시 전달될까 해서 칼린은 악을 부리며 말해 보았지만, 소니아의 마법은 술자의 목소리만이 전달된다. 칼린은 쪼들리는 속을 붙잡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혹여 달려들었다가 힘조절에 실패해서 소니아를 다치게 할 까봐 달려드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진짜 해결책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임무 끝나고 제가 직접 보고하면 전부 허위보고 징계라구요!"
칼린은 딱히 겁주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전부 사실이다. 지금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 칼린이 말하면 가중처벌로 돌아올 뿐이다.
"그 전에."
그러나 이리하는 일이 그렇게 돌아가도록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너를 다시 용기 있던 칼린으로 돌려놔 주지."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며 칼린을 뒤로 끌어 잡았다. 칼린의 뒷통수에 딱딱하고 차가운 갑옷의 감각이 닿았다.
'도르베에게 그대로 전해라.'
와중에, 소니아는 요나의 말을 전하기 위해 멍하니 있는 도르베에게 다가갔다.
"도르베, 영주님 말씀이라 생각하고 들어. 그대로 전달하는 거니까."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싸울수 없는 상태겠군. 안 그런가?'
"싸울 수 없는 상태겠군. 안 그런가?"
"아..아뇨, 영주님! 더 싸울 수 있습니다! 약 같은건 처음부터 필요 없었습니다! 기회를! 기회를 주세요!"
정신을 되찾은 듯 간절하게 외치는 도르베를 보고, 소니아는 착잡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기 말로는 아직 싸울 수 있다고 기회를 달라고는 하는데.. 마약은 커녕 진통제도 없는 상태니까 힘들 것 같은데요.."
'윌레인을 위해 죽으려는 것이냐, 도르베?'
"윌레인을 위해 죽으려는 거냐? 도르베?'
건성으로 전달된 소니아의 말에 도르베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국가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두 번도 죽겠습니다!"
"뭐... 죽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맘에 든다. 원하는 대로 하게 두어라.'
"맘에든.. 네? 진짜요?"
소니아는 생각없이 따라 말하다가 깜짝 놀라 되물어 보고 말았다.
'떠돌이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저것이 윌레인 군인의 정신이다. 그의 선택을 존중해라.'
"영주님은, 영주님은 뭐라하셨지? 알려다오!"
"영주님, 이대로면 도르베는 확실히 죽을 겁니다!"
'두번 말하지 않는다. 그의 선택을 존중해라.'
소니아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도르베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응답이 없는 영주의 무음 양쪽에 끼인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힘없이 도르베에게 말했다.
"...영주님은 네가 부대에 남아있는 것을 허락하셨어..."
"그런가... 그런가! 다행이다! 걱정할 것 없다! 보조기구와 함께라면 다리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절뚝이는 것을 숨기듯 달려 텐트로 들어갔다. 소니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칼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너도 같이 말려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칼린은 소니아가 끝까지 자신의 말을 전해주지 않은 것 때문에 조금 화나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대답은 해 주었다.
"어떤 기분인지 이해는 가니까요. 그리고.. 영주님 판단이라면 틀리지 않을 거예요."
"너 진짜..."
그 대답은 소니아는 물론이고 갤러한도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이리하. 가볍게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아세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마정석 덩어리를 주웠다.
"네 전화기를 부셨을 뿐이야. 비싼 물건이긴 하지만, 그것도 배상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아."
이리하의 말에 칼린은 울컥해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제 '선택'을 부신 거예요. 뭐라고 말하시든 이게 제 성장이었어요. 전 아직 이게 필요하단 말이에요..."
"20살 넘어서 그러고 있는 거 보면 좀 역하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건 성장이 아니야. 뭐가 널 지금 상태에서 구해줄 수 있는 지 알아?"
"예, 알고 있었죠! 영주님이 절 구해주고 있었어요!"
"아니! 네 과거는 네가 극복하는 거야. 네 실수도 네가 극복해야 하는 거고."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그리고 마치 비밀을 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가끔 네 실수나 과거를 극복하게 만드는 것은, 어쩔 수도 없이 거칠게 흐르는 현실이야. 거친 흐름 속에서는 과거에 묶여 있을 수 없게 돼. 사는게 그래."
"그래서 뭐, 의지할 것 없이 좆같이 굴러보라고 제 전화기를 부셔버린 건가요?"
쏘아붙이는 칼린을 마주보며 이리하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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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공은 곤란하다니 무슨 소리십니까?"
그들이 이데에서 출발한지 8일차에, 즉 라드와 아스타의 싸움 이후 4일만에 카마인 영지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화공은 곤란해요. 피해가 번지게 될 겁니다."
갤러한은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받아 쳤다.
"영주님, 밖에 좀비떼가 느글거리고 있다면 그것 보다 우선시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지금 말하시는 피해가 농작물 피해같은 거라면-"
"시체들 중 일부가 폭약을 두르고 있어요."
영주는 갤러한의 말을 끊었다.
"...뭐라구요?"
"정확히 따지자면 폭약을 두른 것이 아니라 파쇄성 수류탄을 두르고 있어요.. 터지면서 끈적한 기름과 파편들이 터져 나올 텐데 그러면 여러분은 물론이고 인근 숲까지 불이 닿을 수도 있어요."
칼린은 정말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위기에 대해 말한 지 나흘만에 이렇게 위기가 찾아왔다. 이리하는 칼린의 그런 생각을 읽은 듯 칼린에게 윙크하고 있었다.
"아니, 시체가 그런 거는 왜 달고 있던 겁니까..."
"빅센마르크 군에 화염법사가 있었어요... 특단의 조치로 취했던 방법이었습니다. 폭탄을 두른 소수 기습 정예 부대로 마법사를 상대했었어요."
"그것 참 현명하시네요. 지금 꼬라지 좀 보라지."
갤러한은 그렇게 비꼬고서 담배를 꺼냈다.
"영주님에게 무슨 무례냐!"
그렇게 말하며 덤벼드는 근위병을 멈춰 세우고 영주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제 생각이 짧았었다는 것을 압니다. 전장의 땅도 그 끈적한 기름때문에 완전히 죽어버렸어요. 요즘은 이상한 가스도 올라오는데, 약간의 불이라도 터지면 근방이 다 터져버릴 겁니다. 화공은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갤러한은 영주의 사과에 곤란한 듯 고개를 꺾었다가 모두를 둘러보았다.
"들었지? 이번 사냥터에서 담배는 금지다."
"소니아, 보고하죠."
갤러한의 말에 즉각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칼린을 소니아는 필사적으로 피했다.
지난 나흘간 소니아는 칼린에게 질리도록 시달렸다. 전화기가 없어진 칼린은 모든 사소한 일에 대한 보고를 소니아에게 부탁했고, 소니아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마나가 부족하다는 이유 등을 대며 피하고 있었다. 다만 아무리 피해도 매일마다 계속해서 그러면 지치는 법이다. 거기에 속이 뒤집힐 정도로 시끄러운 마레까지 있으니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다.
"...칼린, 내가 알아서 하게 냅둬..."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소니아에게 칼린은 조금 기가 죽었다. 소니아는 요나에게 보고사항을 전달했다.
'언데드의 수량을 알아보고 다시 연락하도록. 판단은 그 후에 하겠다.'
요나는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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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50정도 될 것 같은데요?"
핀이 지팡이를 통통 튀고 있었다. 모두는 올라오는 가스로 인한 중독을 피하기 위해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뭐야, 많지는 않네."
가볍게 말하는 륑게에 비해 갤러한은 신중했다.
"어렵겠어.. 우린 여기서 아스타라는 패를 사용하지 못하니까."
그 말에 륑게는 도르베와 아스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은 나흘 전부터 서로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가끔씩 눈이 마주치면 서로 재수가 없다는 듯 시선을 피하고는 했다.
"인당 5마리 꼴이잖아? 군인도 아니고 그냥 움직이는 시첸데 어렵겠어?"
"인당 5마리가 아냐. 40명 차이다."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서 걸치고 있던 망토를 여몄다.
"방독면을 쓰고 있으면 시야도 호흡도 제한되지. 이번 일이 진짜 고비가 될 거야. 모두 오늘 저녁까지 제대로 준비하고 내일 아침에 작업에 들어간다."
갤러한이 무겁게 말했다. 륑게는 모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내 보험금 100생텀 더 건다. 다들 받아?"
"지금은 아니죠, 륑게.."
핀은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100생텀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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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원들은 성에서 숙박을 취할 수 있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마레 덕분이었다.
"큰일을 하시는 분들이 큰 곳에서 주무시지 않으신다면, 그 날개를 언제 펼쳐 쉬겠어요? 큰 꿈은 큰 침대에서 자라나는 법이고 큰 지혜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법입니다. 다행이도 카마인의 영주님에게 허락을 받아 놓은 덕분에 여러분 모두 좁아 터진 텐트가 아니라 성에서 주무실 수 있게 되었네요. 저한테 감사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요! 전 여러분의 팬이면서 홍보를 맡고 있으니 뭐든지 저에게 부탁하세요! 그래! 예를 들어 말입니다만, 여러분의 영웅적인 행위를 옆에서 생생히 바라보며 기록해줄 누군가를 찾으신다면-"
"마레. 우린 당신을 전장으로 끌고 갈 생각이 없어요."
이것이 부대원들이 성을 떠나 언데드의 수를 재러 가기 전의 일이다. 부대원들은 성에 그를 맡겨두고 정찰을 갔다 왔었다.
돌아왔을 때, 영주와 마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영주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상태로 갤러한에게 다가왔다.
"마레씨는 정말 타고난 인재입니다. 단 나흘 같이 있던 것 만으로도 여러분의 칭찬을 끊임없이 하더군요.. 타고난 예술꾼이에요. 요나경의 앞길에 커다란 등불이 되어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갤러한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이제 와서 카마인 영지에 두고 간다 던가 하신다면 묶어서라도 벨카로 보낼테니 두고 가실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갤러한은 헛웃음을 치며 영주를 지나쳐 들어갔다. 마레는 부대원 모두의 사이로 들어가 질문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용사님들은 어떤 역경에 도달하신 거죠?"
"오, 별거 아니에요, 마레. 불똥만 튀면 우리 전부를 희나리로 만들어버릴 곳 안에서 반 토막을 내도 죽지 않을 시체놈들을 상대할 뿐인 일이지요."
라드는 최대한 과장하며 말했다. 이건 어떻게든 마레를 전장으로 끌고 오기 위한 도박이었다.
"...듣기만 해도 전율이 돋네요!"
이 반응은 합격이다. 모두의 시선이 찡그려지는 것을 확인한 라드는 마레를 치우겠다는 명목으로 그에게 어깨동무를 걸어 데리고 모두의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마레, 모두는 마레를 전장에 들이는 것에 반대하지만, 전 조금 다르게 생각하거든요.. 예술가라는 것은 언제나 칼날 위를 걸어 다니는 일 아니겠습니까?"
라드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마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몰래 그 전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조건은 두가지로. 제가 안내했다는 걸 비밀로 하는 게 첫번째, 약-간의 비용이 두번째입니다. 어떨런지?"
입꼬리를 비틀며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동그라미 형태를 만들어 보이던 라드는, 의외로 즉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라드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라드씨, 실례지만... 아스타씨와 싸울 때부터 긴가민가 했었는데.."
마레는 웃었다. 눈은 그대로였지만 입은 함박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라드씨, 바위 밑 뱀장어처럼, 고목(古木)의 달콤한 열매처럼, 몸을 낮춘 승냥이처럼 혼자 다른 꿍꿍이를 달고 사시는 군요. 그게 뭔지 말해주지 않으렵니까?"
라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천천히 어깨동무를 걸쳤던 팔을 풀려고 했으나, 마레가 그의 팔을 잡아 다시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렸다. 그리고 라드에게 얼굴을 들이 밀었다.
"재밌지 않습니까, 재밌지 않습니까! 라드씨, 최고로 재밌네요! 걸작이야! 받아들이죠! 그 조건 전부 받아들이겠습니다. 전부, 전부 받아들였습니다! 전장의 위치따위 이미 알고 있었고 사실 몰래 들어갈 생각도 이미 하고 있었다마는, 저는 굳이 라드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라드씨에게 돈을 드리겠습니다! 뛰어들 곳이 초고열의 불덩이임을 알면서도, 매료되고, 매혹되고, 현혹되어 열을 탐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덤벼드는 나방과도 같이!"
조금 떨어지려는 라드의 뒤통수를 마레가 붙잡았다. 그리고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전부 다 싸그리 불태워 보세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의 커다랗게 뜨여진 충혈된 눈에 비치는 것은 거대한 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