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아버지와 아들
"어떻게 부대원 전원이 모르는 지명이 있어요? 다들 떠돌이 출신이 대부분이면서..."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그 금속 케이스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라드씨나 갤러한씨 둘 중 한 분은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그는 군번줄들을 확인해 보았지만, 파나빈이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글자를 잘 못 쓴 건가? 예상가는 거 없으세요?"
"난 몰라. 궁금하지도 않고."
넌지시 릴로에게 물어봤지만, 냉랭한 대답만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칼린은 전화기를 들었다.
'칼린! 일찍 전화했구나!'
환영하는 듯한 영주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영주님, 지금 잠깐 괜찮겠습니까?"
'음! 좋을 때 전화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녀는 웃으며 자신과 대화하던 선객에게 수신호로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무슨 일이냐, 칼린.'
"아, 이번 언데드 토벌건에 대해서 보고 드릴 것과 질문이 있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안 그래도 오전에 보고가 들어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다. 보고하거라.'
칼린은 가운데에 모인 유품들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체크해 놓은 것과 차이가 없는지 개수를 세어 보았다.
"시체는 총 124구, 군번줄은 식별 불가능한 것이 22개, 식별 가능한 것이 19개입니다. 무기는 전부 이데에 발전 지원금 명목으로 넘겼고, 틀니 하나에 담배케이스 11개, 그리고 양철 케이스가 8개 발견되었습니다."
'훌륭하다. 질문은 뭐지?'
"양철케이스는 따로 찾아낸 윌레인의 배틀메이지가 가지고 있던 것인데, 식별 가능한 군번줄 19개중 14개가 이자가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 양철케이스 8개에 각 지역명과 날짜가 적혀 있는데, 부대원 중 누구도 시작지점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답니다."
'8개 지역을 날짜순으로 말해봐라.'
칼린은 바닥에 순서대로 늘어진 양철케이스를 보며 하나씩 읽어주었다. 요나는 그 말을 듣고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파나빈이라는 지명은 정말 처음 듣는다. 하지만 다른 지역명과 날짜로 그가 어느 부대 소속인지는 알아볼 수 있겠군.'
"아, 영주님도 모르십니까?"
칼린이 조금 놀라 그렇게 묻자 요나가 말했다.
'처음 듣는 지명이다. 배틀메이지라면 적어도 분대장급 위치였을 테니 외국인도 아니겠지. 내가 찾아보마.'
"넵, 알겠습니다."
'그러면 태세를 재정비하고 내일 아침 이데를 뜨도록.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나?'
칼린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리하가 했던 말에 대한 것이었다. 이리하가 자신의 무슨 비밀을 아는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아직 확실하지 않다면, 누군가는 죽게 될 선택지를 고르고 싶지 않았다.
칼린은 고민하다가, 맞은편에 있는 이리하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칼린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칼린은 입을 열었다.
"...이상입니다. 더 보고사항이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믿고 맡기고 있다, 칼린.'
전화는 그걸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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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은 이데의 술집에서 먹게 되었다. 그들은 부대원의 할인 혜택을 이용해 메뉴판에 있는 모든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다.
"자, 그럼, 삐뚫어지게 마셔보자, 새끼들아! 앞으로 일주일은 이동만 할 테니까!"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높이 올렸다. 모두들 조금씩 고양되어 있었다. 전장 근처 영지를 돌면서 설마 제대로 된 술집을 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 정말.. 이게 너무 그리웠어요.."
"야 너 지금 우는 거냐??"
눈물을 글썽이며 고기를 먹는 핀을 보고, 륑게가 놀란 듯 물었다. 도르베는 그 장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원래 이런 자리는 즐기지 않는 그지만, 그도 조금 신나기 시작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앞접시로 고기를 조금 베어가던 도르베는 거북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칼린을 보고, 고기를 조금 갖다 주려고 했다.
"잠깐."
그런 도르베를 저지한 것은 갤러한이었다.
"칼린은 고기를 못 먹거든.. 곧 칼린용으로 주문한 야채수프와 빵도 나올 테니까 그냥 두도록 해."
"하지만 육포는 먹었었는데."
"그게.. 심리적인 요소 때문에 못 먹는 거거든. 지금 저것도 많이 좋아진 상태니까, 괜히 건드리지 말라고."
도르베는 넘겨주려던 고기덩어리를 들고 물끄러미 칼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르베의 시선을 눈치 못 챈 것인지,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그 나름의 고기 냄새나 그 자체를 견뎌내는 방법 같았다.
"..정말 알수록 모르겠군."
"흐? 허하고?"
갈빗살을 잡아 뜯던 아스타가 맞은편에서 그렇게 묻자, 도르베는 대충 얼버무리고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언제 부터인가 느껴지기 시작한 칼린과의 거리감을 곱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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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씨-팔.."
감당 못할 정도로 술을 퍼 마셔서 죽어가는 일행들을 돌아보는 것은, 칼린에게는 슬슬 익숙한 일이었다. 고개를 푹 꺾은 륑게와 아예 창 밖으로 목을 빼고 있는 핀, 마차 바닥에서 누워 있는 아스타를 보며 칼린은 전화를 꺼냈다.
"요나, 출발했어요. 알아 낸 것이 있을까요?"
'아. 그 자의 신원을 파악해 냈다.'
"정말요?"
칼린이 놀라서 조금 크게 말하자, 핀은 손만 뻗어 칼린에게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칼린은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다시 말했다.
"그러면 그 분의 유품은 가족에게 전달될 수 있는 건가요?"
'아니, 기초적인 신원정보는 알아냈다만.. '
전화기 너머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지원한 부대명, 이름, 지원 동기까지 전부 알아냈다만, 그의 출신지가 누락되어 있다. 유일한 단서는 그 파나빈이라는 지명 뿐인데, 글쎄...'
"그러면 이 유품들도 그냥 식별 불가 품목에 넣을까요?"
'급하게 판단할 건 아니다. 정보부에게도 한 번 물어보마. 배틀메이지 정도의 위치라면 정보부에 기재되어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할게요."
'이만.'
칼린은 그걸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니, 도르베가 머뭇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그건 영주님이었지?"
"아, 그렇죠. 간단한 보고였어요."
그 말에 도르베는 몸을 기울여 칼린에게 다가왔다.
"칼린, 넌 영주님의 사병을 목표로 부대에 들어온 것이냐?"
"네? 아뇨?? 아뇨, 아뇨아뇨.. 아니에요."
칼린이 강하게 부정한 것은, 그의 원초적인 목적에 대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칼린은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그의 최우선 사항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 질문으로 그걸 다시 떠올렸다. 그의 최우선 상황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부대에는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느냐? 이야기를 조금 해 다오."
칼린은 차마 도르베에게 시민권을 얻게 하기 위해 영주가 집어넣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대화 주제를 바꿔보려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소니아는 잠들어 있었고 나머지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것도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나. 미안하다... 요즘 이런 일이 잦아진 것 같군."
풀 죽은 도르배의 얼굴이 칼린의 마음 한 구석을 찔러댔다. 칼린은 잠깐 생각하다가, 거짓말은 아닌 답을 대기로 했다.
"그.. 말했었죠, 영주님이 저를 숲 속에서 주워 주셨다고."
도르베는 이야기를 시작한 칼린에게 다시 고개를 올렸다.
"영주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까.. 이 부대에서 최대한 많은 기여를 하는 걸로 보답할 거예요. 일단은 그게 지금의 제 목표예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 조금 낯간지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도르베는 아무 말없이 그런 그를 보다가, 감탄하며 그의 양 손을 잡았다.
"훌륭해! 훌륭하다! 멋지구나, 칼린!"
눈을 반짝이는 도르베를 보며 칼린은 대체 방금 했던 말의 어떤 부분이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도르베는 그를 잡은 손을 풀며, 다시 칼린을 향해 굽히고 있던 등을 곧게 폈다.
"네가 그 지원모집서를 썼다고 했었지. 난 그걸 보고 이 부대로 온 것이다! 네 모집서가 죽어가던 나를 다시 끌어올려 준 거야!"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말아 둔 지원서를 꺼내 보였다.
"방황하던 시기였다. 술집에서 별 볼일 없는 잡일을 맡아 하는 중이었지. 그러던 중 운명처럼 네가 만든 모집문을 본 것이다.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음'이라니! 내가 가장 필요하던 것이었다."
도르베는 그 부분을 짚으며 칼린에게 보여줬다. 칼린은 다시 보니 조금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너를 봤을 때 인사한 것은 우연이었다. 네 첫인상은 상당히 예의 바르고 배려심 있는 인상이었으니까. 첫 인상이 상당히 안 좋았던 다른 부대원들에 비해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이었어. 그러나 네가 그 모집문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넌 나에게 다른 것이 되었다. 네가 나의 은인이다, 칼린... 왕도에서 잡일거리나 하고 있던 '겁쟁이 도르베'에게 자신을 재책정할 기회를 주고 있는 건, 칼린, 너라는 거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그 모집문을 말아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칼린을 바라보며, 마치 보이지 않는 가면 뒤의 얼굴을 보려는 듯 눈을 마주했다.
"난 이게 두번째 기회야... 첫번째 시도 때 내가 저지른 실수에 대한 속죄와, 첫번째 실패로 멀어진 나의 목표로 다가 가려는 수단이다. 나에게 이 모든 임무는 그런 거야.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는 멋진 동료도 필요해.."
칼린은 그의 다음 말이 두려웠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일들이 그렇듯, 원치 않는 말은 원치 않는 순간에 나온다.
"네 스스로를, 우리를.. 적어도 나라도 믿어보면 안되는 것이냐?"
도르베의 눈 안에는 두려움이 들어 있었다. 그게 그의 기대보다 크게 보이는 이유는, 아마 칼린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것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아서 일 것이다.
칼린은 그의 그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칼린의 모든 감각이 그를 믿으라고 하고 있었다. 아니, 칼린은 사실 부대원 전원을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을 남에게 맡긴 사람이 믿을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 리 없다. 요나가 그에게 준 선택지에 부대원을 믿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칼린은 자신의 선택은 믿을 수 없었다.
칼린도 자신이 다시 고장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환각과 환청 대신 불신과 의존의 형태로 그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은, 과거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집단속의 고독이었다.
칼린은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흘러내린 눈물은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도르베에게는 그저 아무 표정도 없는 흰색 가면만이 보였다.
도르베의 표정이 조금씩 무너졌다. 시리도록 선명하게 보이는 그 장면이 저주스러웠다. 칼린은 흐르는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을 도르베는 대답없이 눈을 피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칼린-"
"그만."
둘 사이를 멈춘 것은 자다가 깬 소니아였다.
"그만."
소니아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하며 둘 사이의 긴장감을 줄였다. 칼린이 바뀐 원인을 아는 그녀는 이런 일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칼린... 난 정말로.. 라무르 마을에서만 해도 우린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참 오랜만에 진심을 나눌 친우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도르베는 고개를 떨구며 다시 등을 벽에 기댔다.
"내 잘못이었다. 멋대로 기대했구나."
"야, 칼린이 라무르마을에서 겪었던 걸 생각하면 조금은 시간을 줘도-"
"아뇨, 소니아. 괜찮아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소니아를 제지했다.
"도르베 잘못이 아니에요. 전부 제 잘못이예요."
어딘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온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는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진 침묵상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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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났네, 둘이 사귀냐?"
저녁이 돼서야 제정신을 차리고 마차의 분위기를 느낀 륑게는, 텐트를 치며 소니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저 한마디였다.
"돌맹이도 너보단 섬세할거다. 잔인한 새끼.."
"아니 씨발, 친구끼리면 싸우다가 친해졌다가 하는거지 뭐 한번 어색해 졌다고 그 꼴이 나냐? 심지어 싸웠던 것도 아니잖아. 난 이해를 못하겠네."
상대적으로 인간관계에 둔한 륑게는 칼린의 바뀐 점을 잘 눈치채지 못 하고 있었다. 도나 영지에서도 륑게는 '이제 칼린은 영주 끄나풀이 된 것 같다' 정도의 반응을 마지막으로, 칼린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었다.
소니아는 칼린이 겪고 있을 일에 대해 륑게에게 설명해야 할 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부대 안에서 륑게, 릴로, 아스타, 라드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게 차라리 약일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그런게 안 되는 사람들도 있는거야. 칼린이랑 도르베는 너 같이 황량한 사람이 아니라고. 아직 어리고 여려."
"지~미, 같은 부대원인데 이 분위기 어쩔거냐고.. 또 마차 인원 옮겨야 되냐?"
소니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완벽한 반박거리를 찾았다.
"너도 라드랑 사이 안 좋잖아? 갤러한도 이제 꽤 친해진 것 같은데, 아직도 라드 물어뜯는 건 너랑 아스타밖에 없을껄?"
그 말에 륑게의 얼굴이 굳었다.
"... 넌 나랑 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 그런 말은 자제해라."
"...야 뭘 정색을 하고 그러냐.. 그냥 간접 이해해 보라고 한 말인데."
륑게는 소니아가 무안해하자 태도를 바꿨다.
"그러네. 이제 이해는 된다. 하, 시팔... 부대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네.."
담배를 문 륑게는 그렇게 말하고 불을 붙이다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니아를 돌아보았다.
"이러다가 진짜 보험금 걸고 쟁탈전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는 륑게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주먹을 쥐고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넌! 꼭!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되냐? 씨발련아!"
"야! 걍 농담 한 거지! 진짜 그런 일이 생기겠냐?"
"또 떡밥 흘리려 하네 씨발! 그냥 입을 열지마!"
칼린은 조금 떨어진 지점에서 그러고 있는 둘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멍하게 있었던 지라 무슨 대화를 하는 지는 못 들었지만, 아무튼 사이가 좋아 보이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칼린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숲 안쪽으로 들어간 그는 주머니에서 빈 길쭉한 일자 플라스크 형태의 유리병 네 개를 손가락에 끼워서 꺼냈다. 그리고 한쪽에 그 유리병에 딱 맞는 고무가 꽂힌 거대한 바늘도 같이 들었다.
그는 피의 비축분을 만들어 두려는 것이었다. 최대한 아껴서 섭취하고 있었고, 2주일 정도라면 흡혈욕구를 참을 자신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최대한 안전하게 넘어가고 싶었다.
숲 속을 조금 걷던 그는, 밝은 시야 속에서 너구리를 한 마리 찾았다. 그는 더이상 망설이지도 않으며 너구리를 부른 뒤 그것의 목부분에 바늘을 꽂아버렸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피를 유리병에 담았다.
너구리가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늘어지기 시작했을 때, 유리병 네 개가 꽉 찼다. 그 바늘을 뽑고 칼린은 가져온 붕대를 너구리에게 감아 주었다. 너구리는 칼린이 눈을 떼자 마자 몸을 비척거리며 어디론가 달아났다. 칼린은 그 너구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따뜻한 유리병에 마개를 꽂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야영지로 옮겼다. 돌아가는 길에서 그는 이리하를 찾았다.
그녀는 굳이 숲 안쪽에서 등불을 들고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칼린은 인사를 하려고 했다가, 요나의 말이 떠올랐다. 부대 안에는 첩자가 있다고 했었다.
칼린은 근처 나무 뒤에 숨어 그녀를 몰래 지켜보기로 했다. 이리하는 바위에 앉아 노트에다가 글을 적고 있었다. 글 내용은 오늘 있었던 일 같은 느낌이었다. 간단한 보고서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리하는 조금 더 끄적이다가 노트를 덮고 등불을 들었다. 그리고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와서 바닥에 뭔가를 끄적였다. 그리고 그녀는 텐트장 방향으로 떠났다.
칼린은 천천히 그녀가 있던 자리로 가서, 그녀가 끄적였던 것에 다가갔다. 어쩌면 아직 칼린이 잘 모르는 '주술'의 흔적일 수도 있고, 어쩌면 여기에 암약중인 그녀의 동료들에게 보낼 신호일 수도 있다.
칼린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가 바닥에 그렸던 것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다 보여, 병신아.'
칼린은 그 글을 보며, 자신의 뒤로 무엇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소리없고 빠른 것이다. 칼린은 경계하며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이리하가 달려 오다가 발을 멈추었다. 그녀는 설마 칼린이 자신을 눈치챌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란 듯 했다. 그러나 곧 평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칼린에게 다가갔다.
"나무 뒤로 한바퀴 돌아서 왔지."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며 칼린의 가면을 쭈욱 밀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시고 계셨던 거죠?"
칼린이 이리하의 손을 쳐내며 그렇게 묻자, 이리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건 등불도 없이 밤에 숲길에서 날 보고 있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인데 말야.."
"똑바로 대답해요."
"일기 썼는데. 문제 있어?"
칼린은 그 대답에 조금 벙쪄서 가만히 있다가 되 물었다.
"일기를 쓰신다구요?"
"쓸 수도 있지. 하루하루 기록한다는 느낌으로 말야."
그녀는 등불을 들며 말했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는 인생이니까. 너도 그렇게 느낀 적은 있을텐데?"
"제가요?"
"그래. 모두에게 쫓길 것을 두려워하면서, 자신을 경계하면서, 스스로를 숨기는- 그런?"
이리하는 칼린을 지나치며 그렇게 말했다.
"...몇번이고 말하지만, 당신이 뭘 알죠?"
신경질적으로 묻는 칼린에게 이리하는 뒤돌지 않으며 대답했다.
".. 이 밤에 등불도 없이 혼자 숲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일로든 의심받지 않겠어? 어두운 숲길도 위험하지만, 거기서 혼자서도 멀쩡히 돌아오는 놈은 더 위험한 놈인 거니까."
칼린이 그녀를 따라오지 않으려 하자, 그제서야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난 네 앞에서 등불을 들어줄 사람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엷게 웃었다. 흰색 피부와 은발이 등불에 비치며 투명하게 광이 흘렀다. 홀릴 듯한 그 장면을 보며 칼린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말을 참아낼 수 없었다.
"그건 또 뭔 개소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