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각자의 일상
좁고 깊은 우물 안이다. 주변에는 시체가 쌓여있다. 살아있는 것은 그 자신과 그의 누이 뿐이다.
"아무 일 없을거란다, fkem."
이름을 말하는 부분은 잘 들려오지 않는다. 그는 겁먹어서 누이의 품에 더 깊이 들어간다.
"아무 일 없을꺼야, 아무 일 없을꺼야."
누이가 등을 토닥이며 달래듯 말을 반복한다. 그러나 누이의 말과는 다르게, 주변에 쌓여 있던 시체가 하나씩 일어난다. 그에게 고개를 돌린다.
".야꺼을없 일 무아 ,야꺼을없 일 무아"
누이의 말과 행동이 이상해 진다. 마치 역재생이 되는 느낌이다.
일어나 자신을 노려보는 시체들은 전부 익숙한 얼굴이다. 아니, 아는 얼굴들이다. 전부 자신이 죽여 온 자들이다. 실력으로, 계략으로, 음해로, 폭로로,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죽여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물 안으로 하나가 더 떨어진다. 그 시체는 퍽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떨어지고, 천천히 일어났다.
마리였다.
라드는 그 때 눈을 떴다. 그는 옆에 알람시계를 보고 자신이 알람보다 일찍 깼다는 것을 알았다.
"아-, 꿈자리가 영 아닌데.."
그는 몸을 일으키며 화장실로 기어들어갔다.
"오늘 일은 쉬어야 되는지 몰라."
소금부대의 첫 임무가 끝난 지 일주일, 모두가 각자의 아침을 시작했다. 라드의 경우에는 상회의 심부름이었다.
#
"매번 지원 고맙습니다, 에테롬 형제님."
"별 말씀을요. 평등한 세계를 위하여."
에테롬은 그렇게 말하고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으며 코트와 함께 옷걸이에 걸쳤다. 그리고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라드 형제님도 앉으시죠. 언제나 거기에 서 계시네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권하는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에게, 라드는 손을 내밀며 거절했다.
"근데... 이번에는 평소보다 지원금이 많네요?"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앞에 놓인 돈가방을 보았다. 에테롬은 고개를 숙이며 비밀이라도 말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이야, 이렇게 지원금을 드리면서 말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일을 청부하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단 말이죠. 여러분의 숭고한 뜻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 다음에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아뇨, 아뇨! 우리 조직의 기둥 중 하나이신 에테롬님인데, 설마 사심을 채우려는 부탁을 하시지는 않으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해보세요!"
라드는 그 장면을 보며 웃음도 나오지 않는 촌극이라고 생각했다.
"이야, 그러면 정말 죄송합니다만,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에테롬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고 말했다.
"그.. 벨카령을 알고 계실 겁니다. '전차' 요나가 영주인.."
"아, 네. 빠르게 성장 중이기에 조만간 거점지를 만들려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 쯤 말했을 때 그들의 테이블에 커다란 항아리가 두개 올라왔다. 조직의 주 수입원이기도 한 마약성 물담배이다.
에테롬은 호스를 물고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
"네. 그런데 제가 직접 요나경을 만나보았는데... 끔찍하더군요. 귀족주의자에 기회주의자에, 벨카에 철도를 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후드를 쓴 남성이 몸을 기울였다.
"어떤 방식의 열차로요?"
"당연히 마도 방식입니다."
후드를 쓴 남자는 다시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호스를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에테롬경의 말은 알아들었습니다. 그녀의 심판은 우리가 맡지요. 평등한 세계를 위하여."
그 말을 들은 에테롬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교주님도 오실 텐데 벌써 일어서십니까?"
에테롬은 코트와 모자를 챙기며 대답했다.
"아직은 일이 좀 바빠서 말이죠. 언제 한번 교주님을 꼭 만나 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에테롬은 등을 돌렸다.
"뭐야, 왕초도 안 만나는 겁니까? 절 고용할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라드가 그렇게 말하자 에테롬은 웃으며 라드의 등을 쳤다.
"상인이 제일 두려워 하는 게 뭔줄 압니까?"
"...돈 많은 사람?"
"이해타산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에요. 자신의 신념이 확고한 또라이들."
그는 뒤뚱거리며 걸어가면서 그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저 놈들에게는 어떤 이해타산도 없지. 신념을 반하면 즉결 처형이야. 조직 이름부터 '가장 오래된 무덤'이라니, 누가 자기 조직명을 무덤으로 짓습니까? 전부 또라이 들이에요."
라드는 웃으며 말했다.
"에테롬씨는 겁쟁이같은 면이 있네요. 왕초랑 대화하려고 어깨 부른 건줄 알았지, 나는."
에테롬은 그 말에 크고 짧게 한 번 웃고서 말했다.
"거기 '교주님'이란 년을 만나려면 최소한 분대단위의 인력은 필요할 겁니다, 라드씨."
#
여관의 술집에는 어느 날과 같은 멤버들이 앉아있다. 늘어져 있던 릴로가 고개를 들어 륑게에게 물었다.
"갤러한은 또 선생 만나러 갔냐?"
갤러한과 같은 방을 쓰는 건 륑게이다. 륑게는 의자에 기대서 있지도 않은 카드를 셔플하는 동작을 반복 중이었다.
"몰라.. 일어난 지 얼마 안됐어, 나는..."
그는 도박이 당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일종의 금단현상까지 일어나는 중이었다. 그러나 부대에 속해 있었기에 일반인과 유흥은 피해야 했다.
"나랑 뜨자고, 륑게."
아스타가 그렇게 말하는 데도 륑게는 허공만 바라보았다.
"...넌 털리면 판 뒤집잖아."
고개를 조금 끌어 내려 아스타를 향해 그렇게 뱉은 그는 다시 허공만 바라보았다.
핀은 기운없이 음식을 포크로 쪼개고 있었다. 그는 복귀 이후 밥 한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다. 꽤 수척해져서 첫 인상 때 느꼈던 건강함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소니아는 그 날 이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걱정하는 여관주인이 매일마다 그녀의 방 앞에 음식을 가져다 놓았고, 약 4일정도 후부터 가져다 놓은 음식은 챙겨 먹기 시작했다.
이리하는 매일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시장가를 도는 것인지 가끔은 모두에게 선물을 사서 돌아오기도 했다. 다만 선물센스가 괴악해서, 아스타를 제외하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 씨발! 왤케 심심하냐고! 텐션 높여, 개새끼들아!"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는 릴로에 맞춰, 아스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일단 임무 성공이잖아! 일주일 지났으면 나와라, 소니아!"
분위기가 고조되자 의자에 기대 건들대던 륑게도 일어났다.
"주인장! 술이다! 가져와, 있는 거 다 끌고 와!"
주인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고 대답했다.
"륑게씨, 아직 15시예요.."
"아, 어쩌라고! 가져와! 가~져~와!"
벌써 취한 것처럼 릴로가 악을 부리기 시작했다.
"시끄럽다 닥쳐라, 버러지들."
도르베가 그렇게 말하며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주인장에게 발을 옮겼다.
"미안하군. 다들 교육을 덜 받아서 그런 것이다. 용서하시게."
"아뇨, 뭐 매일 그러시니까.."
주인장은 놀랍지도 않은 듯 그렇게 말했다. 도르베는 그대로 테이블에 합석했다.
"너네들에게는 섬세함이라는 게 없는 거냐? 들개 같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옆에 있는 핀에게 작은 가루약을 전달해 주었다.
"소화제다. 물에 타 먹어라."
"아.. 감사합니다."
핀은 그걸 받아 자리에서 바로 먹었다. 아스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말했다.
"아니, 일주일이나 지났잖아. 일하는데 어떻게 쉽게만 풀리냐? 그런거 다 신경쓰면 떠돌이는 못한다고.."
"일주일이면 긴 시간도 아니야. 좀 더 시간을 주는 게 맞지 않겠나?"
도르베의 앞으로 그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도르베는 소세지를 베어 물며 이어 말했다.
"그런 일을 겪었다. 나도 아직 힘들어. 그 일이 아른거리는 것 같다. 그런 걸 겪고도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너희들이 이상한 거야. 다들 천부적 사이코패스같군."
"뭐? 야 핀, 그렇다는데? 너도 괜찮지 않냐?"
륑게가 웃으며 핀을 툭 치자, 핀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무리해서 이 자리에 매일 끼고는 있지만, 분위기를 따라가지는 못하겠어요... 근데 혼자 있으면 정말 미칠 것 같아서.."
핀의 말에 륑게도 웃음을 풀었다. 릴로는 자리에 앉아 불만스러운 듯 콩을 포크로 찔러댔다.
"이게 우리 방식의 추모라고. 죽은 사람을 일일히 끌고 가다 보면 정신이 못버텨."
릴로의 말에 도르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근데 거기에 시간이 좀 걸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다. 너무 재촉하지는 말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서 도르베는 부대원 한 명 한 명을 떠올려 보았다.
"뭐, 역시 지금 제일 걱정되는 건-"
#
"-칼린이지."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깎은 사과를 리쿠르트의 입에 넣어 주었다.
"부대 전체가 동의했기에 실행된 작전이니까, 칼린 혼자 괴로워 할 이유가 없거든. 그런데 걔 성격 상 자기가 한 제안이 문제였다, 뭐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사과 한 조각은 자신의 입으로 밀어 넣으며 그렇게 덧붙였다. 리쿠르트도 그가 걱정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만나보고는 싶지만.. 방에서 나오지를 않더라구요."
리쿠르트도 그를 만나보려고는 했다. 이제 그녀는 하루에 2시간 정도 성을 돌아 다닐 수도 있었다. 병실에서 칼린의 수업을 진행하기로 영주와 말을 맞춰 두고 있었지만, 칼린의 상태가 꽤 심각했던 것인지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너무 자책하지는 말아줬으면 해. 걔가 혼자서 견뎌낼 수 있을 까?"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 다른 과일을 집어 먹었다. 그러다가 대답이 없는 리쿠르트를 향해 고개를 올렸다. 리쿠르트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당신은 괜찮은 거예요?"
그녀의 말에 갤러한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가, 웃으며 말했다.
"익숙해."
리쿠르트에게 그 말은 전혀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는 말없이 갤러한을 끌어안았다. 갤러한도 얌전히 안겨서 눈을 감았다.
#
소금부대원이 복귀한 지 일주일, 요나는 서류작업에 둘러 싸여 있었다. 보고작업은 전부 편지로 이뤄졌다. 직접 만나서 보고하기에는 개운치 않은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요나로서는 만족스러운 첫 걸음이었다.
요나는 작업을 끝마치고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벽측 열쇠 보관함으로 다가가 칼린의 방 열쇠를 꺼냈다.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그녀는 칼린의 방 앞에 도달했다. 가볍게 노크한 후 열쇠를 꽂아 돌렸다. 불 꺼진 방 안에 칼린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칼린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방 안에서 술냄새를 따라 들어가 보면, 살짝 열린 화장실이 보일 것이다. 요나는 방의 불을 키고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술병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약 2궤짝은 되어 보이는 양이었다. 칼린은 변기에 머리를 기대 눕고 허공을 보고 있었다. 불꺼진 화장실에서 그가 무엇을 봤을 지는 모르는 일이다.
문이 열리자 칼린은 고개를 들어 영주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지금 일주일간 음식도 제대로 안먹으며 술만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많이 초췌해진 인상이었지만, 그게 그의 미모를 감추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는 정말 살아있는 인간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아아, 영주님...."
칼린은 들고있던 술병을 들어 올렸다. 병은 비어 있었다.
"저, 취하지를 않네요.."
그렇게 말하며 칼린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무릎을 끌어 안았다. 영주는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가져온 담배를 꺼냈다.
"자."
칼린에게 한 개피 건내 준 영주는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고 수세식 변기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칼린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래서 첨단이 좋다니까."
아무 반응이 없는 칼린을 보고도 영주는 웃음을 잃지는 않았다. 그녀는 칼린의 목에 팔을 둘렀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일주일간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싸구려 독주(毒酒)만 남겨 두고 방치해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칼린은 담배를 피기 위해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제가..제가 하는 모든 일이 엉망이에요. 영주님, 전 엉망이에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운 그는 그제서야 영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계속 이런 짓만 반복하게 될 지도 몰라요. 영주님, 전 진짜-"
칼린은 말을 끝마치지 않았다. 잠깐 가만히 있던 그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약한 소리를 해서 죄송해요. 가장 고생하는 건 영주님이시겠죠."
"괜찮다."
"일주일간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칼린."
요나는 웃으며 칼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리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널 위해 가져 온 것이 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화장실을 나와, 선반 위에 올려 두었던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박스 안에는 직사각형의 물체가 두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칼린이 전생에 보던 1세대 핸드폰하고 비슷한 형태였다.
"마도구로 만들어진 통신기다. 소니아의 능력이랑 비슷한 거지. 사제로 만들어진 거라서 상당히 희소하다. 보급화는 평생 무리일 것 같군. 하나 받거라."
요나는 그렇게 말하며 칼린에게 하나를 건내 주었다.
"이게 있다면 앞으로 나와 떨어진 곳에 있을 때에도 판단에 대해 물어볼 수 있겠지. 어려운 판단은 전부 나에게 맡겨라. 곤란한 일, 고민, 전부 나에게 맡겨. 내가 해결해 주마."
그렇게 말하고 요나는 칼린에게 속삭였다.
"'괴물'에게는 힘들만한 일이 잔뜩 있을테니 말이다."
칼린은 그 말에 흠칫 떨었다가, 곧 얌전하게 그것을 받아 들였다.
"자, 그러면 일어날까. 그나저나, 혼자 있고 싶다고 했었다면 문은 잠가두거라. 누군가 실수로 들어가기라도 했으면 사건이 될 뻔했어. 일주일간 용케도 버텼군."
요나가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칼린은 멍한 눈으로 먼저 일어난 요나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문이..열려있었나요?"
칼린은 자신이 문을 잠갔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는 취하지 않았다. 분명 문을 잠갔을 것이다.
"열려 있었단다, 칼린. 문은 열려 있었어."
영주의 말에 그는 그 기억이 불확실해졌다. 어쩌면 자신은 그 문을 잠그지 않았다. 아니, 내 방에 들어온 요나가 한 말이니 나보다 그녀가 잘 알겠지. 분명 내가 또 한번 실수한 것이리라.
칼린은 더이상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다.
"제가... 제가 실수 했나 봐요, 영주님.."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칼린을 내려다보며, 영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은 요나라고 불러도 좋다, 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