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기분나쁘고 위험한
가장 먼저 그 자리로 달려갔던 것은 갤러한과 이리하였다.
칼린은 자리에 무릎꿇고 앉아 늘어져 있었다. 가면이 엉망으로 흘러내려서 틈새로 얼굴이 대충 드러나 있었다.
"칼린! 괜찮나?"
갤러한이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두들기자, 반응이 있었다. 칼린은 갤러한을 돌아보며 물었다.
"화..내실 건가요?"
처진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칼린을 보고 갤러한은 조금 웃음이 터져 나와 버렸다.
"좀 있다가."
그렇게 말하며 갤러한은 칼린을 일으켰다. 천천히, 괴물의 상처에서 칼린의 손이 뽑혀 나왔다.
이리하는 그 동안 괴물의 시체를 가까이에서 보고 있었다. 여기저기 뚫려있는 괴물의 시신에서는, 검은색에 가까운 그 괴물의 피에 붉은 색 피가 섞여 흐르고 있었다.
이리하는 그 피를 손가락으로 조금 찍어 보았다. 괴물의 피와 층을 지는 듯 섞이지 않고 있었다. 점성도 없었다. 그냥 피였다.
고개를 돌리고 바라본 곳에는, 칼린이 뽑아낸 팔이 보였다. 다시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야생 소가 팔 위를 밟고 지나가도 저 정도의 참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그 조건으로 괴물을 죽였다.
이리하는 칼린이 조금 무서워 졌다. 동시에 조금 더 관심이 생겼다. 그에게는 자신과 같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게 궁금해 졌다.
"칼린."
갤러한에게 부축받고 있는 칼린에게 이리하가 고개를 숙였다.
"구해줘서 고마웠다. 감사인사를 못했던 것 같아서."
이리하는 그 가면 너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정말 그녀의 모든 걸 다 걸고, 칼린은 그 때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간간이 그의 가면 뒤의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빨리 돌아가죠.."
괴물이 죽었다. 마을의 위기가 가셨다. 도르베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기절했다가 곧 깨어나 아스타의 부축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칼린은 총체적인 부상이다. 내상때문에 제대로 서있는 것도 불가능했고, 팔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나머지는 크게 다친것은 없다. 포션의 부작용으로 조금 어지러울 뿐이다.
동료들은 칼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래도 지금이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지금은 그들의 전원 생존을, 무사 승리를, 소금부대의 임무성공을 축하해야 할 때이다.
그래서, 갤러한이 부축해오는 칼린을 향해 모두가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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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렇게 강한 놈일줄 알았으면 일을 안 받았을 거야."
륑게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일행들은 거의 발을 끌면서 가고 있었다.
"하... 해롤드한테 돈이라도 받아야겠어.. 진짜 죽을 것 같아.."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철퇴를 질질 끌었다. 핀은 그 철퇴를 혹여 차게 될까 거리를 유지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한 이틀에서 삼일정도는 더 마을에 체류하는 게 좋겠어요. 도르베씨도 도르베씨지만, 칼린씨는 지금 중상 아닌가요?"
"살만해요.."
칼린은 갤러한에게 업히듯 끌려가며 작게 대답했다.
"진짜, 침착한 것 같으면서 위급할 때는 무모해진다고."
릴로가 그렇게 말하며 칼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싫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태에서 받으니 다시 뭐가 올라오려 했다.
"우읍.."
"악! 씨발! 미안!"
한번 움찔 한 칼린을 보고 릴로가 멀리 뒷걸음질 쳤다. 갤러한도 등골까지 얼어붙는 경험이었지만 굳이 티내지 않으며 말했다.
"지금은 좀 가만히 두자구. 많이 상태가 안 좋을거야."
그렇게 가고 있을 때, 라드가 천천히 그의 뒤편으로 다가왔다.
"뭐, 안좋은 건 안좋은 거지만, 지금 하나만 확실히 해 두자구."
"라드, 떨어져라."
"이봐, 너무 야박하게 굴지마.. 대답해 줄 건 칼린이니까. 네가 결정할 게 아니지. 칼린, 지금 대답 하나 가능하겠어?"
"칼린. 무시해도 돼."
갤러한의 말에 칼린이 고개를 젓고 말했다.
"라드씨도 같이 사선을 넘나들었으니까요. 궁금할게 많을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되도록 짧게 부탁드려요.. 언제든 대답해 드릴 테니까."
"그거 고맙군."
라드는 갤러한을 향해 이죽대다가 칼린을 보았다.
"그래서, 칼린. 그 나무같은 건 네 마법이지?"
"...네."
"언제 깨달았지?"
"뭔가.. 싸우는 도중에-."
칼린은 그렇게 말했다가 어딘가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커튼같은것이- 아니, 도무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분명 너무 흥분했었으리라.
"아, 네. 싸우는 중에 그냥 할 수 있겠다, 하고.."
잠깐 말을 멈췄던 칼린은 급하게 말을 끝마쳤다. 갤러한과 이리하가 아무래도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당한 마법이던데. 피를 고체로 바꾸는 건가?"
"네..제 생각에는 그래요. 아직은 더 알아봐야 겠지만 뭔가 알수 있다는 그런-"
"지금 혹시 명치가 아픈가?"
갑자기 말을 끊으며 라드가 그렇게 물었다.
"명치만 아프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살짝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칼린에게 라드가 작은 약을 하나 꺼냈다.
"그게 마나 고갈이라는 거야. 아마 전신이 다 아프고 명치부근이 눌리는 기분일거다. 무리해서 뛰었을 때 심장이나 폐가 아파지는 거랑 똑같아. 이걸 마셔둬."
라드가 그렇게 말하며 약을 갤러한에게 건내주었다. 갤러한은 못마땅하다는 듯 그 약품을 보다가, 이상이 없는 지 육안으로 식별해보고 있었다.
"이게 뭔데요?"
"마나 보충제. 꽤 쓸만해."
그렇게 말하는 라드에게 갤러한은 그 약을 돌려줬다.
"네가 먼저 한입 먹어보기 전까지는 안돼."
"나도 방금 전까지 같이 싸우던 동료 아니었나, 갤러한?"
라드가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갤러한의 표정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한모금만 들이 마셨다.
"봤지? 순수한 선의라는 거야. 네 등에 업힌 친구도 믿고 있는 거라구."
갤러한은 찡그린 얼굴로 그 병을 낚아채듯 가져가 칼린에 넘겨주었다. 칼린이 그 약을 마시는 걸 보며, 라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용감했다고, 칼린. 멋졌어."
칼린도 그 약을 다 마신후, 입을 닦고 가면을 내리며 엄지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호응했다.
"..아스타."
그런 일들이 벌어질 동안, 아스타에게 부축받으며 걷고 있던 도르베가 그렇게 말했다.
"시비털거면 나중에 해라. 지금 빈혈도 있고 해서 확 두고 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며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물게도 도르베가 자신을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 떠올랐다.
"...미안하군."
도르베가 자신의 다리를 내려보며 말했다.
"오늘 도움이 되지 못했다. 꼴사나운 실수를 해서 다리까지 부러져 부축이나 받고 있군. 내가 무시하던 너에게 말이다. 내 꼴 좀 봐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결국, 결국 나는 바뀔 수 없다는 걸까.."
아스타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르베는 그녀가 보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자조적으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너 되게 귀찮다."
아스타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미안하군."
도르베가 웃으며 답했다. 그런 도르베의 입에 아스타가 담배를 물렸다.
"물고 있어. 좀 조용해 지겠지."
그리고 성냥을 꺼내 그 담배에 불을 붙여 주고서는, 성냥불을 끄고 대충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미안하다'가 아니라 '고맙다'라고 해. 너한테서 감사인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까."
아스타의 말에 담배를 물고 있던 도르베가 조금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웃었다. 이번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선넘지마라, 멍청아."
"하, 기운좀 차렸나베."
둘은 그렇게 웃으며 길을 걸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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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하늘이 붉게 무르익었을 때 였다. 맑은 날씨에 구름도 없어서 붉은 기가 돌고있는 것마저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겁없이 그들의 주변을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을 스치며, 이제는 많이 정돈된 마을 정문이 보였다. 꽤 많은 사람들이 마을 밖으로 나와 부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갤러한은 힘껏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어-이! 부상자가 두명! 옮기는 걸 도와 주-"
거기까지 말하다가, 갤러한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멀리에 있는 그들의 손에는 각자 하나씩 반짝이는 것들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중 누구도 손을 흔들고 있지 않았다. 마치 망부석이 모인 듯 조용히 서있을 뿐이었다.
"갤러한, 왜 멈춰요?"
등에 업혀있던 칼린이 그렇게 물었다. 갤러한은 칼린을 돌아보고 물었다.
"...칼린. 잠깐만 네 스스로 서있을 수 있겠어?"
칼린은 그의 표정에서 위험을 보았다.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온 칼린은 조금 비틀거리다가 이윽고 똑바로 섰다.
"무슨 일이에요?"
"...이제부터 조금만, 아주 조금, 저 사람들이 보이는 곳까지만 걸어갈거야. 괜찮지?"
칼린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모두가 무슨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느낀듯, 한껏 풀렸었던 눈이 바뀌어 있었다.
"...네."
칼린도 알 수 있었다. 뿌옇게 보이는 시야 사이로도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본 그들은 각자의 무장을 끝마치고 있는 상태였다. 대부분은 아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보이기 시작한 거리에서, 부대원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갤러한의 질문에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는 분노를 참으며, 누군가는 눈물을 참으며 각자의 반응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환영의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일이냐니... 무슨 일이냐고?"
그 인파들 사이로 조금 비틀거리는 해롤드가 나왔다. 위태롭게 걸으며 나온 해롤드는 햇빛을 등지고 있었다.
"내가...내가 묻고 싶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해롤드도 손에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왼손에 든 것은 아주 조금 남은 술병이었다.
"무슨..무슨일을 저지른거냐, 너네들.....!"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보이지 않는 해롤드의 얼굴에, 뭔가가 턱을 타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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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헛간을 지나친 것은 결코 훌루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작은 아이는 칼린과의 약속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저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면서 지나치는 길이었다.
헛간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벽에 뭔가가 계속 부딪히고 있는 소리였다. 마리는 그 소리의 원인이 훌루는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훌루는 헛간 안에서는 실수로 깔아 뭉개도 얌전하게 있는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소리가 나면 자신의 어머니가 헛간을 들어가서 훌루를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마리는 칼린에게는 돌아오면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헛간의 문을 열었다. 빛이 비추는 헛간 안에, 훌루는 평소 앉아있던 곳에 없었다. 그 대신 이곳 저곳을 빠르게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 부딪혀 대고 있었다.
"훌루!"
마리가 처음보는 훌루의 모습에 당황했다. 훌루는 아파보였다.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난 상처가 여기저기 터져있었고,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계속 새된 소리를 내며 몸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칼린의 말대로, 훌루는 진짜 병을 앓고 있던 것이다. 적어도 마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훌루! 이리와!"
그 작은 아이는 훌루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 괴물은 겁먹은 듯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더듬이를 집어 넣으며 마리의 손길을 한사코 피하고 있었다.
"괜찮아 훌루. 이리와. 괜찮아."
마리는 자신을 피하는 훌루를 조금 억지로 잡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이 아프거나 슬플 때 하듯, 품에 꼭 안았다.
"다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괴물은 몸부림쳤다. 그러나 힘이 자꾸 빠져갔다. 아니, 힘이 빠져간다기 보다는, 얼마 있지도 않은 이성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더듬이가 길게 뻗어 나왔다. 그 이빨을 드러냈다. 그 아이의 목덜미를 바라 보았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괴물의 짧은 아우성은 그것 스스로조차 듣지 못했다.
마리의 어머니가 심부름 간 딸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울부짖으며 해롤드를 찾아간 것은, 마리가 심부름을 간 지 3시간만의 일이었다. 부상당한 자신의 부대원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기에, 해롤드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마리를 찾아 보기로 결심했다. 일부는 3시간밖에 안 기다려 놓고서 무슨 걱정이냐고 했지만, 여주인은 그녀가 말도 없이 다른 길로 새지 않을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색은 1시간정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수색대중 한명의 아들이, 헛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있다는 제보를 했다. 해롤드가 헛간에 대해 여주인에게 묻자, 그녀는 사색이 되어 곧잘 소금부대원들과 헛간으로 가고는 했다고 대답했다.
해롤드는 뻐근하고 부상당한 몸을 끌고 조심스레 헛간의 문을 열었다. 그 문을 열자마자 냄새가 났다. 지푸라기의 냄새, 썩은 나무의 냄새, 가끔씩 날씨가 좋을 때 느껴지는 햇살의 냄새, 그 사이로 나는- 피냄새.
정면에 누군가가 끌려간듯, 피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심한 양이었다. 끌려간 것은 한번에 죽은 것인지 저항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해롤드는 눈을 감았다. 술이, 술이 필요했다. 이 모든것이 그냥 전부 거짓말이라면 해롤드는 마을의 전원에게 술을 살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 준다면 해롤드는 자신의 전 재산도 기부할 것이다.
오, 제발, 마리.
해롤드는 그렇게 되뇌이며 감은 눈을 뜨고 걸었다. 그저 핏길 너머에 마리만은 없었으면 했다. 동시에 마리를 보고 싶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빨리 해맑은 미소로 돌아와 모두를 안심시켜 주면 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술을 끊을 수도 있었다.
참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그의 소원은 이뤄졌다. 그 길의 끝에는, 비정상적으로 몸이 부풀어 오른 듯한, 평소에 죽여오던 그 괴물이 벽을 보며 서있었다. 그것은 입에서 계속 기분나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를 갈거나, 동물 뼈를 씹거나 할 때 나는 그 소리가.
마리의 발이 보였다. 작고 이쁜 노란색 신발에, 그것보다 앙증맞은 발이었다. 노란 신에 튀어있는 피는 더더욱 자극적인 빛깔로 해롤드의 눈을 찔러왔다. 천천히, 혹시 다시보면 결과가 바뀔까 해서, 해롤드는 충혈되고 눈물이 흘러나오는 눈을 닦으며 다시 보았다.
몇번을 다시 보아도 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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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냐..."
해롤드는 토해내듯 말했다. 해가 지고 있다.
"해롤드.."
갤러한이 한발짝 다가가려 하자, 해롤드는 검을 뽑아 들었다.
"알고 있었던거냐, 그 괴물에 대한 것을...!"
점점 진홍에서 검붉은 색으로 바뀌어가는 마을의 풍경속에서, 해롤드의 얼굴이 점점 뚜렷하게 보여왔다.
"마리와..! 마리와 헛간에서 뭘 해왔던거냐...!!"
그가 뱉는 말 하나하나가 성대를 토해내는 듯 했다. 마침내 칼린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해롤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칼린이 그렇게 말하자, 해롤드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해롤드의 얼굴 안에는 절망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이 보였다. 그건 절대로 평소에 노래하는 건강한 것이 아니었다. 해롤드는 어떻게든 자신들을 믿어보려고 하고 있었다.
"그..그게..."
칼린은 그 얼굴을 바라 본다. 해롤드는 칼린의 입을 바라보면서, 어떻게든 납득 가능한 설명이 나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아니, 저는..."
말을 이을수가 없다.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칼린은 대체 무엇을 기대했을까. 자신조차 영주의 목을 물었는데, 더 이성이 없는 괴물에게서 무엇을 봤던 것일까. 대체 무슨 짓을 해버린 걸까.
"아...아아..."
목이 떨려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아니, 해야할 말은 애초부터 하나였다. 얼굴을 보며 해야 할 말이었지만, 눈앞이 흐려져서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말해.... 칼린, 너네는 몰랐다고 해...!"
해롤드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보이는 건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었다. 튀어나올 것 같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 해!!!!!!!!"
해롤드는 그렇게 소리쳤다. 얼굴을 한 껏 찡그리며, 슬픔이 분노로 바뀌어갔다. 입가에는 거품이 끼고 있었다.
"아...죄...죄송합....죄송합니다 해로, 해롤드...! 미안해요....!"
칼린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딸꾹질이 말을 계속 멈췄다.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에 눈이 따가워 졌다. 죄책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안그래도 망가진 몸이 전방위로 짓눌려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제가...! 제가...! 아아아... 아아, 마리...!"
심장이 찢어지고 있는 듯 했다. 이빨을 뽑았을 때 보다, 팔을 쥐어 뜯었을 때보다, 그 팔을 괴물 내장에 처넣었을 때보다, 괴물의 소음을 정면에서 전부 받아냈을 때보다, 그 어느 때보다 아팠다.
해롤드는 들고있던 술병과 검을 던졌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얼굴이 마치 한 점을 중심으로 하듯 찌그러 졌다.
그리고 그는 바닥에 던졌던 검을 다시 주워서 역수로 들어 올렸다.
"난...난 뭘 기대했던 걸까."
그렇게 뇌까린 그는 검 자루로 자신의 이마를 찍었다. 꽤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내가...!!!!외부인인 너네들에게!!!!! 뭐를!! 대체 뭐를!!! 기대한거냐!!!"
그렇게 말하며, 그는 검자루를 계속해서 이마에 박았다. 급하게 뒤에 있던 주민들이 그를 뜯어 말렸지만, 그를 멈출수는 없었다.
"난!! 난!!!!"
소금부대원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핀과 소니아도 흐느꼈다. 그들도 그들이 그럴 자격조차 없는 것을 안다.
"야...잠깐.."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던 갤러한은, 묘한 것을 눈치챘다.
해가 천천히 지면서, 벌써 땅에는 어둠이 내려 앉고 있었다. 그 검정들 사이에 붉은 경계를 늘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봐! 불이다!"
갤러한이 급하게 소리쳤다. 해롤드는 이마를 갖다 박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습기를 띄기 시작할 때 하던 짓을 멈췄다. 그리고 갤러한이 바라보고 있던 곳을 보았다.
"마을의 뒤, 성의 뒤쪽.."
해롤드의 눈에 불이 비쳤다. 맹렬한 주홍이었다. 해롤드의 표정이 점점 풀려갔다.
"술집이야..."
다들 그저, 불이 솟구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롤드는 뒤로 주저 앉았다. 그리고 그 불을 보며 웃었다.
"아름다워.. 이봐, 아름답다.. 맞지? 이쁘지? 저 불이.. 저 불이 벌이야.. 안일한 우리에게 내리는 벌이야.."
허공을 보며 그는 알수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젠장! 가보자!"
갤러한이 그렇게 말하며 마을로 뛰어 들어갔다. 모두가 이를 악물고 마을로 달려 들어갔다. 도르베는 아스타가 업었다.
성을 넘어서, 매번 지난 길을 가며, 열기가 점점 가까워 지는 것이 느껴지며, 칼린은 정신을 잡을 수 없었다. 꿈이 아닐까. 어디서부터가 꿈일까. 왜 이다지도 잔인한 일이 꿈이 아닌 것인가.
마침내 도착한 술집은 벌써 지붕까지 활활 타고 있었다. 헛간에 불이 옮겨 붙고 있었다.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수가 높은 술들이 폭발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저기!"
릴로가 다급하게 지붕쪽을 가리켰다. 불타고 있는 지붕 위에, 흰 옷을 입은 여성이 있었다. 그 여자는 마치 뜨거운 것을 못 느끼는 것 처럼, 맨발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춤추고 있었다. 불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저건.."
보고있는 모두가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모두들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내려오세요! 주인장씨!"
칼린은 호소하듯 소리지르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그 여주인장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에겐 상관없었을 것이다. 스쳐가는 모든 인연이 그녀의 이름을 알든 말든,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가족이라는 연이 있었으니까.
"아, 칼린! 어서와요!"
그녀는 밝게, 그녀를 삼키려는 불꽃만큼이나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춤을 멈추지는 않았다. 흰색의 원피스가 바람에 계속 들춰지며 이 모든것이 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일단 내려와요! 제가, 제가 받을게요! 점프해요!"
칼린은 다급하게 그렇게 말했다. 말 사이에 숨도 제대로 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는 여유로웠다. 그저 춤만 추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지붕에서 불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칼린! 제 딸, 제 딸 마리를 아시나요?"
불꽃위의 그녀는 마침내 모든 피곤과 과로를 떨친 모습이었다. 흰색 원피스는 언제나 정장만을 입고있던 그녀가 어려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아, 나의딸, 나의 보물. 그 이름을 지었을 때 부터, 그 아이는 제 꽃이었고, 소금이었고, 인생이었고, 세상이었답니다!"
위태롭게 춤추는 그녀를 보며 갤러한은 침을 삼켰다.
"도르베! 방어막 깔아! 릴로가 그걸로 올라가서 그녀를 데려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갤러한이 말했다. 불때문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언제나 저를 보며 웃어주던 아이였지요! 누군가가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이쁘게 웃니?' 하고 물어보면, 그아이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우리 엄마요!'라고 대답해주는 아이였지요!"
그녀의 원피스 치마 끝자락에 불이 옮겨 붙었다. 그녀는 마치 신기루처럼, 불꽃을 두르며 춤추기 시작했다. 뜨겁기는 커녕 덥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릴로가 조심스럽게 지붕으로 올라갔다. 칼린은 주인장을 향해 계속 말걸고 있었다.
"제발, 제발요, 주인장씨. 그냥, 그냥 가만히라도 있어 주세요..."
여주인은 그런 칼린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적어도 칼린에게는 그녀가 눈을 마주한 것처럼 보였다.
"그애가.. 그애가 그런말을 했었는데. 자기는 엄마 웃음을 빌려서 이렇게 밝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그 때 대답해주지 못했을까요."
그녀가 춤을 멈추었다. 소금부대원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야 말로 네 웃음을 빌리고 있었단다. 마리,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타오르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마치 불을 둘러 입은듯 몸에 불이 옮겨 붙은 상태로, 그녀는 발을 굴렀다. 약해진 지붕에 구멍이 뚫리고, 그녀는 불타는 술집 안으로 빠져 들어갔다. 붉게 떨어지는 그 모습은 낙화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