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전후(戰後)복구부대
칼린이 알기로는 이 세계의 머리색은 원래 자신이 살던 세계의 머리색보다 다양하다. 자신의 마법에 영향을 받아 색이 바뀌는 경우도 있고, 선대의 마법으로 변색된 머리색이 유전되어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은발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은발은 세가지 경우로 만들어 진다.
1. 발달되지 않은 염색기술로 인한 의료사고. 이 경우 모근은 다른 색을 띄고, 머릿결이 완전히 죽어 폭탄처럼 되어 있다. 다른 두가지 경우에 비해 구분이 쉽다.
2. 알비노. 태생적인 백색증으로 인한 백발이며, 완전한 백발은 드물고 눈썹도 같은 색을 띈다.
3. 저주로 인한 것. 술자의 목숨이 걸린 무거운 저주를 받게 되면 그 영향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색된다.
저주는 만들어 질 때 해주법이 같이 있으며, 그 개인이 설정한 해주법을 따르지 않으면 평생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보통 목숨을 걸며 저주하는 상대에게 그 해주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면 그 저주에 걸린 자는 평생 그걸 껴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은발은 보통 기피대상이 된다. 무슨 저주를 앓고 있는 지 모르기도 하고, 누군가가 목숨을 걸어 저주를 거는 사람은 보통 일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은발들에 대한 멸칭이 있다.
"..이번엔 '미망인'인가. 가지가지 하는군."
도르베가 작게 말했다.
#
"...이걸로 부대원 전원이 모인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
요나가 들고온 종이를 내려놓고 모인 인원들을 둘러 보았다. 시간도 지원자도 없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조금 문제가 많아 보이는 팀이었다. 칼린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 지 걱정되었다.
"다음주 왕도에서 부대명과 첫 임무를 하사받을 것이다. 가볍게 한명씩 통성명하고 나면 질문시간을 가지겠다."
요나는 그렇게 말하며 가장 왼쪽에 있던 갤러한을 바라보았다. 갤러한은 그걸 보고 머쓱한 듯 일어나 통성명을 시작했다.
"갤러한, 팀 원생텀의 리더. 뭐, 잘부탁한다."
"릴로, 팀 원생텀의 리더. 대쉬는 언제나 환영이야."
"륑게, 팀 원생텀의 리더. 돈놀음을 좋아한다."
"소니아에요. 음.. 그.. 잘부탁합니다?"
뭔가 불만족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릴로와 륑게를 무시하고 그녀도 다시 착석했다.
"아스타. 아스타 라진. 딱히 여기있는 모두하고 친해지고 싶지는 않네. 거기 미역머리는 전방보다 후방을 조심하는 게 좋을거야."
"핀이라고 합니다. 장님이지만, 색적에는 자신 있습니다. 모두 잘부탁드려요."
"칼린이라고 합니다. 사정이 있어 가면은 벗지 못합니다만, 모두와 친해지고 싶네요. 잘 부탁 드립니다."
"라드임다. 다들 살벌해서 무섭네, 좀 웃어요."
"...아라드 베일 반 도르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직접 고르겠다. 다들 쉽게 말걸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가장 늦게 들어온 여성이었다. 진정한 의미로 모두에게 뉴페이스였다. 모두가 주목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들이 마시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호흡을 고른 뒤 눈을 뜨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정상인이 하나가 없네. 같은 부댄데 싸우지좀 말고 다 잘좀 지내봅시다. 이름 이리하. 머리색으로 놀리지 마십쇼. 진짜 죽여버립니다."
한껏 눈썹을 찡그리며 그렇게 말한 그녀는, 다시 얌전하게 자리에 앉았다. 다만 더이상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그 신비로움과 요염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각자 개성이 강한 부대원들이라 섞이기 힘들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는 것이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첫 걸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 질문 받겠다."
처음 손을 든 것은 라드였다. 요나가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하자, 그가 일어나 말했다.
"보수에 대해 정확히 못들었는데.. 그리고 뭐, 이런 부대니까 혜택도 좀 있을 것 같거든. 설명좀 해주시겠소?"
"그게 무슨 말버릇!.."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는 도르베를 손짓으로 진정시키고 요나가 질문에 답했다.
"먼저, 본인은 이제 네놈의 직속 상관이다. 영주라는 지위를 제외하고도 네놈의 위에 위치하고 있지. 말투는 조금 교정하는 것이 좋겠군.
보수는 해결한 일에 따라 추가 보수금이 들어오며, 정기적으로 매달 2000생텀이 지급된다. 이는 타협 불가사항이다. 앞으로도 변동은 없다.
혜택은 총동원법에 의거, 임무를 위해 가는 곳마다 귀빈급의 혜택을 보증받는다. 또한 부대내에 있을 동안은 갖가지 위생시설과 도서관 등의 편의시설을 무료로 이용 가능하며, 사용 장비의 정비 및 새로운 무기 구매는 국가에서 발급해주는 어음으로 계산이 가능하다. 충분한가?"
라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음으로 손을 든 것은 이리하였다.
"질문해라."
"떠돌이들은 부대 소집때 마다 여기로 오면 되는 겁니까?"
요나는 그 질문에 볼펜으로 서류 뒷장에 뭔가를 끄적였다.
"좋은 질문이다. 본 부대는 귀하들의 거주권을 존중한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머물며 소집날에만 모이면 아무 상관하지 않지만, 특별히 거주지가 없는 떠돌이들이나 먼곳에서 온 자라면 당일 소집 참가에 곤란함이 생길수도 있지.
그래서 성 근처의 여관을 하나 매수해놨다. 군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다닐 수도 있고, 그 여관에 숙박하면서 소집에 상시 대기할 수도 있다. 2인 대실로 나누어 사용하며, 부대 내에 있는 한 원가의 절반인 40생텀으로 일주일 대실이 가능하다. 본인은 여관 사용을 추천한다."
그렇게 말하며 요나는 자신이 적은 것을 보여주었다. 여관의 주소였다.
"저거 우리가 있는 여관 아니냐?"
갤러한이 작게 소니아에게 질문한 것에 요나가 답했다.
"맞다. 그러니 너네들도 미리 4인실에서 나와 2인실 두개로 잡아 둘것을 추천하지."
비용이 싸졌으니 딱히 큰 불만은 없다. 갤러한과 이리하 모두 납득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질문이 끝났다면 해산하도록 하지. 여관에 숙박할 자들은 나갈 때 데스크에 놓여있는 명패를 가지고 나가도록. 그 명패가 할인권이니까. 모두들 정규 모집일에 다시 만나도록 하겠다. 이만. 칼린, 넌 나를 따라와라."
그렇게 말하며 요나는 방을 나왔다. 칼린도 요나를 따라가기 위해 일어나다가 누군가에게 손을 잡혔다. 도르베였다.
"칼린, 넌 영주님과 무슨 관계인거냐?"
칼린은 그 질문에 잠깐 고민했다. 무슨 관계로 정의하기에는 여러가지가 얽혀 있었지만, 칼린은 그녀를 자신의 아버지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요나님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그런 느낌이죠. 갑자기 그건 왜..."
도르베는 그 말에 눈을 반짝이며 칼린에게 가까이 붙었다.
"오! 그런가! 네 영주님은 대단한 사람이지! 동경하고 있다! 그런 분에게 직접 신세를 지고 있다니, 질투가 나는구나!"
영주를 좋게 말하는 건 왠지 모르게 칼린의 기분도 좋게 만들어서, 그는 가슴을 피며 조금 우쭐해했다. 그리고 자신을 잡고있던 도르베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시면 영주님과 한번 대화해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지금 절 따라오시면 조금은 대화가 가능할지도 몰라요."
"그래주겠나! 고맙다, 칼린! 너와는 잘 지낼 수 있겠구나!"
고양된 목소리로 도르베는 칼린을 따라 가다가, 잠깐 멈춰서서 명패를 챙기고 다시 갔다.
"태도 차이가 너무하는구만.."
갤러한은 그 모습을 도끼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스타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런 표정도 짓는구만.. 귀엽지 않아?"
그 말에 릴로조차 조금 질린 표정으로 아스타를 보았다.
륑게는 가만히 라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갈 준비를 하던 라드는 발을 멈추고 륑게와 눈을 마주했다.
"표정좀 풀어, 륑게. 다 옛날일이라구. 같은 부대니까 이제 서로 등을 맡길 정도로 친해져야지... 안그런가?"
"...저리 꺼져. 예비소집때 사고 치기 싫으니까."
"쌀쌀하구만-"
그렇게 말한 그는 발걸음을 이리하에게로 옮겼다.
"이리하...라고 했던가, 누님? 왜인지 저쪽에 계신 분들은 나를 별로 안좋아 하거든. 친하게 지내줄래?"
그렇게 말하며 라드가 내민 손을 이리하는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말투가 싸가지가 없어. 일부러 경계심을 부르는 말투를 사용하고 있잖아? 미안하지만, 싸우지 않을 정도의 관계만 유지하자구. 나도 나간다."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한 그녀는 명패를 들고 방을 나섰다. 이제 방 안에는 팀원생텀, 아스타, 핀, 라드만 남아있었다.
"뭐, 노려보지 말라구. 거절당하니 부끄럽군. 먼저 나가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고 라드도 방을 나갔다. 핀은 그와 원생텀간의 관계가 궁금했지만, 륑게가 과하게 흥분한 것이 느껴져 일부러 묻지는 않았다.
"뭐, 저새끼도 나갔으니까. 륑게 너도 조금 침착하라구. 핀, 너도 여관으로 갈 거지?"
"아, 네."
"아스타, 너는 어쩔거냐?"
"음... 여관이 좋을 것 같긴한데 조금 더 고민해볼래.. 일단 명패는 가져가야지."
"그러냐? 그럼 핀, 너만 우리를 따라와봐. 처음 만났을 때 여관 방 구조는 본 적 있지? 짐 옮기는 거 도와줄게."
"오! 감사합니다! 저녁에 술 살게요!"
그렇게 여섯이 한꺼번에 방을 나섰다. 임시모집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
요나는 그닥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칼린과 대화하려고 불렀더니 이상한 떨거지가 따라왔다.
"도르베..라고 했지. 무슨 일인가?"
그 질문에 도르베는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아! 이름을 기억해 주셨습니까! 영, 영광입니다! 당신은 저같은 몰락귀족이나 약소귀족들의 희망의 등불입니다! 자신의 무훈으로 모든 걸 이뤄내시고 계신 거니까요!"
"영광이군. 전쟁에 참가했었나?"
도르베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참가는 했었지만, 불명예스러운 끝이 났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거짓말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샬리토숲의 선발 정찰 및 교란 작전분대의 지휘를 맡았었습니다..."
요나도 그 분대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14명이 가서 단 한명만이 돌아온, 무색의 마계. 이 선발대를 이후로 윌레인 제국은 살리토숲에서의 전투를 완전히 포기했었다.
"예를 표하지. 귀공의 분대가 많은 사람을 살렸다. 수고했다."
그래서 요나는 진심으로 예를 표했다. 그와의 대화가 어느 상황에서 이루어 졌던 간에, 같은 군인으로서 그를 존중해야 했다. 적어도 요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대에서의 활약이 기대되는군. 믿고 있겠다."
도르베는 숨이 벅차 오르고 있었다. 고양된 감정이 이빨 사이로 흐를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만에 인정을 받은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 요나에게. 도르베는 졸도할 것 같았다.
"그러면 실례지만 칼린과 대화를 할 게 있으니 조금 자리를 비켜주겠나, 도르베?"
가만히 서있는 도르베에게 요나가 그렇게 말했다. 도르베는 발을 모아 경례하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부대에서 뵙겠습니다!"
그리고 칼린을 향해서도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그는 힘찬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인재가 들어왔군. 부대는 내분만 조심하면 되겠어."
"그런가요?"
"그래."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 칼린에게 가까이로 오라고 손짓했다. 칼린이 가까이로 오자 요나는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하나 필텐가?"
"지금은 됐습니다."
"그런가."
그녀는 담배연기를 한번 빨아 머금고, 재떨이를 앞으로 끌어왔다.
"임무는 벨카 영지에 한정되는 게 아니다. 우리 부대가 활동하는 범위는 윌레인 전 국토가 빠짐없이 포함된다. 즉, 이번에 얻은 빅센마르크의 영토도 포함되는 거다. 경우에 따라서 장거리 이동을 하는 일이 많아 질 것이다."
"넵."
"성 안에 있을 때에는 내가 매일마다 흡혈을 하게 해 줬지만, 임무중에는 불가능하겠지. 난 직접 임무에 참여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넵."
"잊지말고 짐승의 피를 섭취하거라. 사냥을 나설때 몰래 채취해두고, 아끼고 아끼다가 흡혈욕구가 들기 시작하면 섭취해라. 절대로, 절대로 나 이외의 인간의 피를 빨지 말고, 나 이외의 사람이 너가 흡혈한다는 것을 알게 하지 말아라. 설령 다른사람이 모른다고 해도 절대로 나 이외의 인간의 피를 빨지 마라."
요나가 힘을 주며 말했다. 당연한 거지만, 말로 들어보니 압박감이 생겼다. 칼린은 조금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그러나 확실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자리로 돌아가거라. 1시간 뒤에 약식으로 점심대련을 하겠다."
칼린은 등을 돌려 방 문을 나서다가, 머리속에 질문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물어봐도 후회만 할 것 같은 질문이었지만, 각오를 다지기에도 좋을 것 같은 질문이었다.
"영주님, 혹시...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들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요나는 그 질문에 입에서 담배를 뗐다.
"뭐, 선택지는 두개가 되겠지."
그녀는 담배를 잡고 칼린을 가리키며 첫 운을 띄웠다.
"첫번째는 너를 죽이는 것."
그리고 그 담배를 손가락으로 반바퀴 돌려 재떨이에 쳐박고, 지근지근 비벼 끄며 말했다.
"두번째로, 그 사실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
#
칼린은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제 부대에 들어가기까지 일주일이 남지 않았다.
자신이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부대 내에서 잘 적응하고 괜찮은 실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그것도 걱정이었지만, 제일 걱정되는 것은 자신의 정체를 잘 숨길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다.
요나가 확실하게 말했다. 들키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당연한 것이다. 막 성장중인 요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생겨서는 안되니까.
자신의 목숨이 아닌 요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정체를 잘 숨겨야 했다. 하지만 요즘은 왠지 모르게 하루하루가 산뜻하다.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세계 각지를 떠돌면 언젠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날 칼린은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불꺼진 극장 같은 곳에 있다. 무대의 커튼은 닫혀있고, 관람석에는 그 혼자 앉아있다.
칼린은 그저 무대를 바라본다. 그의 뒤쪽에서 갑자기 조명이 하나 켜지고, 무대를 비춘다. 빈 무대의 커튼이 이리저리 꿈틀대다가, 그 틈새에서 고라니의 머리가 익살스럽게 튀어나온다. 그러나 그 목 뒤로 가려진 부분은 부푼 기색도 없이 그저 늘어져 있다. 언젠가 본적이 있는 불길한 그림이다.
"요즘 나를 봐주지 않아서 말이야."
고라니가 입술을 찡그리며 그렇게 말한다. 싸구려 포토샵으로 입꼬리를 내린듯한 모양새이다.
"내가 그립지는 않았어, 칼린?"
고개를 180도 꺽으면서 그렇게 묻는다. 칼린은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칼린? 칼린이라...음.. 아니지. 넌 전상민이지."
칼린은 자신의 눈높이가 바뀐 것을 깨닫는다.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니, 자신은 전상민이 되어있었다.
"동물들을 도살해 댄 것도, 자길 구해준 사람에게 송곳니를 들이민 것도, 여기저기에 자신이 하지도 않은 걸로 칭찬이나 듣고 다니는 것도 전부 '칼린'이 아니라 '전상민'이야."
매직아이를 보는 것 처럼 꿈틀대기 시작한 그 고라니의 얼굴은, 어느새 같은 크기의 다람쥐의 형태가 되어 있었다.
"난 요나에게 인정받았어. 요나는 나를 용서했고, 이제 난 이 세게에서 주민증도 생겼어. 더 이상 나는 고립되지 않아."
전상민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다람쥐 형태의 그것이 작게 찍찍댄다. 전상민에게는 그것이 마치 비웃는 듯 들렸다.
"이제 난 너희에게 휘둘리지 않아. 내 인생에서 사라져."
그것은 이제 멧돼지의 형상이 되어있다. 과장된 돼지의 울음소리로 그것이 울부짖다가, 갑자기 멈춘다.
"칼린, 전상민, 네가 무엇이 되었던간에, 또 앞으로 무엇이 될 예정이건 간에-"
계속해서 입체감이 없었던 커튼의 뒤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나왔다. 얇고 앙상한 하얀색 손이었다.그 손이 커튼의 밖으로 나와, 커튼의 끝자락을 잡았다.
"언젠가는 네가 나를 찾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손이 커튼을 뒤로 잡아 끌며, 무대가 조금씩 열렸다. 여러 동물이 섞인 듯한 형태로 꿈틀대는 그 형태는 확실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대가 열리면서, 조명은 전상민을 비춘다. 다른 조명들도 전부 켜지며 커튼이 점점 걷혀진다. 무대에는 누군가가 서있다. 화려한 조명, 쏟아지는 빛, 커튼콜, 사람들의 갈채소리, 환호성, 빈 무대를 가득 매우는 아우성,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