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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낯선 도시에서 (17/164)



〈 17화 〉낯선 도시에서

안내방송이 마을로 퍼져 나갈 때 쯤에는, 칼린과 갤러한은 이미 도시 거주구의 외곽에 도달해 있었다.


벨카의 산업구는 칼린에게 익숙한 중세풍의 세상과 조금 거리가 있었다. 여기저기에 연기를 뿜어내는 회색 공장들에서 어렴풋이 근대의 느낌이 살아있기도 했다.


갤러한은 신기한  공장을 구경하는 칼린을 재촉했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자신을 계속해서 따라온 칼린의 체력에 놀라고 있었다.

'영주와의 훈련은 허투로  게 아니었나.'


그들은 마침내 준비해둔 말을 걸어 둔 마굿간에 도착했다.
"승마는  줄 아나?"


되도록이면 각자  마리를 타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갤러한은 그런 질문을 했다. 칼린의 승마 경험은 전상민 적 대학 수업으로 몇  들어본 것이 끝이다.


"전혀 몰라요."
갤러한이 말에 가볍게 올라 타고서는, 칼린에게 말했다.

"발걸이에 발을 걸고, 한번에 뛰어오르는 거야."
칼린이 말을 타기 위해 끙끙대고 있을 때였다.


마굿간은 일종의 휴게소와 연결되어 있는 시설이다. 그 휴게실 안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이게 누구야. 지금 절찬 쫓기시는 칼린님과 그의 떨거지아냐."
"여자를 꼬실 필요가 없을만도 하지. 거물을 낚았구나, 갤러한!"
"도대체 너는 왜 하는 일마다 그렇게 무모한 건데?"
륑게, 릴로, 소니아였다.

"여, 안녕?"
갤러한이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칼린은 한 순간 그들을 만난 것에 반가워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을 만나는 것이 과연 행운인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무장하고 있었고, 적의를 숨길 생각도 별로 없어 보였다.


"작은 게임을 하나 하자, 갤러한. 훌쩍 떠나 버리기 전에 한판정도는 괜찮잖아?"
륑게가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원거리에서도 공격할 수 있는 륑게의 마법은 지금 그에겐 상당히 성가시다. 갤러한이 딱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랑 게임이라니, 피하고 싶은 걸. 혹시 다음에 만나면 하는 걸로 안될까?"
"걱정마, 이번에는 릴로랑 소니아가 공정한 심판이 되어  테니까. 게임에서 이기면 갤러한, 널 도와 줄게. 지면 뭐... 알지?"
릴로와 소니아도 검을 뽑아 들었다. 갤러한은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리다가, 그의 게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말해봐."
"잠시만요! 저 때문에 싸우는 건 말이 안돼요!"
"도련님, 평소에는 되게 눈치가 빠르지 않았던가?  점도 섹시했는데."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지만, 분명한 릴로의 협박이었다.


"게임은 간단해. 떠돌이는 돈으로 움직이지. 시장경제라고. 앞으로 세번 말할 기회를 줄 거야. 넌 그 세 번 동안 우리에게 줄 금액을 말하면 돼. 마지막으로 부르는 금액이 영주가 부른 값보다 적으면 네가 지는 거지. 그럼 어디 한번 표정을  읽어 보라구."

"칼린, 말에서 내리지 마라."
"갤러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칼린을 뒤로하고 갤러한은 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검에 손을 얹고 첫 금액을 제시했다.

"600생텀."
륑게 쪽에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륑게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의 칼을 고쳐 쥐고 있었다.

"1200생텀."
그 말에 륑게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검을 쥐지 않은 손에서 약하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회는 한 번 남았다."
항상 어딘가 얼이 나가 보였던 륑게에게서, 그가 충족의 일원이었을 때의 모습이 보인 듯했다. 칼린은 갤러한이 이렇게 애매한 금액들을 부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물론 비싼 돈이지만, 영주를 상대하면서 떠돌이들에게 제시되는 가격은 아닌 것 같았다.


갤러한은 전투태세를 갖춘 륑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비웃는 듯 마지막 액수를 제시했다.


"30생텀."
게임이 끝났다. 칼린은 언제든지 이 싸움을 멈추기 위해 말에서 뛰어 들 준비를 하고 있었고, 갤러한은 검을 그들 쪽으로 겨누었다.


"소니아냐?"
살벌하게 돌격 준비를 하고 있던 륑게가 갑자기 자세를 풀며 말했다. 그러자 갤러한도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일상처럼 대답했다.

"진짜로. 그런 걸로  탕 벌고 싶었으면 소니아한테 마대자루라도 씌워 놨어야지."
칼린이 어리둥절하게 있자, 갤러한이 말했다.


"저놈들은 애초에 영주에게서 돈을 받지 않은 거다."
"고맙다, 소니아. 네 포커페이스 덕분에 30생텀이나 얻었네."
"내가 이런 거에 약하다고 했잖아!"
그들은 갤러한에게 다가가며 어깨를 한번씩 두들겼다.


"혼자 훌쩍 뜨면 남은 우리는 귀찮아 진단 말이다."
"미안하네, 륑게."
"넌 이걸로 나한테만 60생텀째  진거다.
"이번 달 안에 갚을게, 소니아."
"내가 남자 꼬시는 거 앞으로 평생 도와라."
"넌 평생 혼자 늙어 죽을 거야."
그들은 각자  명씩 갤러한을 지나치며 말에 올라탔다.

"어디로  거야?"
"오롤랑. 쭉 달리면 아마 내일 점심쯤엔 도착하지 않겠어?"
"왕도는 지나쳐 가고?"
"아니, 그쪽길이 아니야. 중간부터 샛길로 빠져야 해."
"빠르게 출발하자. 곧 위병들이 쫓아올 거야."
그들이 분주하게 탈출 준비를 할 동안, 칼린은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뭔가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갤러한의 씹는 담배 캔을 보고 머리에 번개가 꽂히듯 떠올랐다.

"맙소사."
그리고 준비를 이미 끝마친 일행들에게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지금 돌아가야 해요!"
"뭐?"
소니아가 살짝 짜증난다는  되물었다. 그러나 칼린은 그런  눈치챌  있을 정도로 말짱한 상태가 아니었다.


"두고 온  있어요! 무조건 챙겨야만 해요!"
"야 이 씨ㅂ-"
"잠깐."
갤러한이 욕을 하려던 소니아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칼린에게 물었다.


"중요한 거냐?"
"...그걸 영주님이 본다면 제가 죽을 때 까지 쫓길 거예요."
"갔다 와."
너무 흔쾌한 갤러한의 대답에 남은 일행들이 전부 반발했다.

"이 씨발, 위병이 언제 올지 몰라! 지금 재끼면 탈출 성공인데, 어차피 다시는 못 만날 영주잖아!"
륑게의 말은 틀린  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칼린의 말이 설득력있었다.

"가능하면 올 때 리쿠르트도 데려와. 30분 기다리지. 안 오면 두고 먼저 갈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인사를 남기고 칼린은 뛰어갔다. 그들은 칼린의 모습이 사라질 때 까지 보고있다가, 한명씩 말에서 내려 풀썩 앉았다.


"하... 편하게 돈 버나 싶더니 또 이런 식으로 끝나네..."
소니아가 작게 한탄했다.

#


칼린은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제대로 뛰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지 않고 달리면 그에게 성까지 왕복은 10분정도로도 충분하다.

지붕 사이를 건너면서, 그는 날아가듯 달렸다. 그가 챙기려는 것은 그가 모아둔 이빨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성으로 가서 그 캔을 챙긴다면, 리쿠르트를 찾는 데 5분정도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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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칼린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반드시 찾아내서 내 앞으로 끌고 올 것이다. 그러나 화는 내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찾는다면,  때는 관계를 재정립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해 볼 것이다.

물론 그의 탈출을 도운 버러지들을 같이 용서할 생각은 없다. 귀족에게 무례를 범한 자는 혀를 뽑아 인두로 지진다. 그리고 얼굴에 낙인을 박아 마을 밖으로 추방시킬 것이다. 떠돌이 놈에게는 상관없겠지만, 선생을 하던 리쿠르트의 인생은 나락으로 가게 되리라.


그녀는 조용히 분노를 삭히기 위해 칼린의 침대에 앉아 오늘 일을 회상해 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 장면을 지금 보이는 풍경 위에 덮어 씌웠다. 그녀의 눈에는 마치 그 둘이서 춤을 추던 장면이 보이는 듯 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그가 준 담배케이스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몸에 힘을 너무 빼 버려서 그만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카펫 위에서 한번 튕긴 그것은 내용물을 흘리며 떨어졌다.

요나는 가만히 그걸 바라보다가, 뒤늦게 이젠 모두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 담배케이스를 집어 들고 하나씩 흩어진 담배를 줍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다가, 침대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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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은 마침내 성의 정문에 도착했다. 자신의 방은  고층에 있었기에, 그는 성 벽을 타기로 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올라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요나는 손을 뻗어  반짝이는 것을 꺼내 보았다. 화장품 통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노집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칼린은 화장하는 것에 저항이 크다고 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화장품통을 살펴보던 그녀는, 화장하기 싫어서 침대 아래에 숨겨두는 귀여운 짓을  것이라고 생각해 조금 웃다가 그 통에서 살짝 삐져 나온 것을 보았다. 보기에는 휴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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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기어 오르던 그는 드디어 자신의 방을 보았다. 밧줄은 사라져 있었지만 불이 꺼져 있었다. 아마 조사를 끝마치고 방이 비게 된 것이리라. 그는 자신의 방의 창틀에 손가락을 걸쳤다. 안으로 들어가 캔을 챙기고 리쿠르트를 찾아 탈출하기만 하면 된다. 리쿠르트가 어디 있느냐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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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화장품통 안에 휴지가 있을 이유가 있는지 조금 생각해 보았다.  더 생각해 보면, 화장이 싫다고 화장품을 침대 아래에 숨기는  비정상적이었다. 전부 숨긴 것도 아니고 그 하나만 숨긴다는 것도 말이 안되었다.

그녀는 칼린이 자신이 괴물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작은 화장품 캔 안에 그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그녀는 화장품 캔의 뚜껑을 잡고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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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은 힘차게 창틀을 잡고 날아오르듯 올라왔다.  꺼진  안에서 그가 본 것은 자신의 캔을 열고 경악하고 있는 요나였다.

요나는 처음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피가 묻은 휴지를 들추자 나온 것은 몇개인지 세기 힘들 정도의 송곳니들이었다. 올라오는 철냄새에 어지러워졌다. 당장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즉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창틀에 달빛을 등지고 쪼그려 있는 칼린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요나는 그 아름다움이 무섭게 느껴졌다.


칼린이 방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요나는 캔을 덮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불이 켜지지 않은 방 안에서 조명은 환하게 비치는 달빛밖에 없었다.

칼린은 아찔한 머릿속에서 Lunatic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그래, 분명 달빛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것이다.


"카, 칼린. 저기 이빨들은 무엇이냐..."
요나가 떠듬떠듬 말을 시작했다. 칼린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기분이었다.

"뭐냐고 물었다, 칼린!!"
그렇게 소리를 치면서도 요나는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칼린은 종족의 벽이 느껴지고 있는  했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침대 위에 던져진 캔을 집어 들었다.


"전부 제 이빨입니다."
마치 감정이 절제된 듯한 담담한 목소리와 말투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요나는 그게 소름끼쳤다. 그녀는 검을 뽑아서 칼린에게 겨누었다.


"정체를 밝혀라."
그 모습을 칼린은 그저 슬프게 바라보다가, 자신의 정신이 점점 아찔하게 고양되어 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제발, 요나. 해치고 싶지 않아요. 리쿠르트가 있는 곳을 말해줘요. 그녀만 데리고 조용히 사라져서 다시는 눈에 띄지 않겠습니다. 제발..."
방금 전 그 말에 요나는 자신이 아는 칼린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너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당장 검을 내리고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판단을 계속 방해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너무 많이 들어온 말. 동시에 사무치게 이해되던 말이었기에 반박조차 못하던 말이다. 그조차도 아무도 믿지 않아 혼자 괴로워하지 않았던가. 그는 생각하는 것에 지쳐버렸다.


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칼린의 눈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칼린은 눈물을 흘리며 옅게 웃고 있었다. 그 장면은 달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다음에 요나가  것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칼린이었다.

"칼리이이이이인!!!"
그녀는 뽑아 들었던 검의 자루로 칼린의 목을 노리며 후렸지만, 그의 손에 간단히 막혀 버렸다. 검자루는 돌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검을 포기하고, 다리를 목 위에 얹어 누르며 상황을 뒤집어 보려 했다. 하지만 마치 나무에 걸린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녀와 평소에 대련하던 칼린이 아니었다.

칼린은 그 다리를 잡아 내리고 양 팔을 손으로 집어 눌렀다. 그리고 자신의 다리를 그녀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어 완벽하게 제압했다. 요나는 일련의 과정에서 완벽한 무력감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느껴 보았다.

칼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정신을 잃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요나를 제압한 그의 얼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요나는 이마를 칼린의 얼굴에 박으며 마지막 저항을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지친 그녀의 목덜미에 칼린의 숨결이 닿아왔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녀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거짓말처럼, 요나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마치 기운까지 같이 빨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처음 느껴보는 묘한 감각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익숙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쾌감으로 분류되는 감각이었다.

칼린은 계속해서 피를 마셨다. 목을 울리면서 그걸 삼켜 대던 칼린은 서서히 자신을 찾아 갔다.


"아...아.."
요나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시야에 달이 참 찬란하게도 빛나고 있었다. 서서히 뿌옇게 변해가는 시야속에서, 그녀는 인생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저항을 허락하지 않는 포근한 쾌감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름 전상민, 나이 36.'
칼린은 서서히 자신을 찾아 가고 있었다.  멀리에서부터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볼록렌즈 너머를 들여다보듯 멀고 반전된 세상이 보인다. 자신은 누군가를 깔고 앉아 있다.


'요나, 벨카의 영주.'
자신이 깔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 하지만 왜 깔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그녀는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다.

'칼린, 23세.'
드디어 자신이 떠올랐다. 지금의 자신은 칼린이다. 그리고 칼린은-
'괴물.'
빨려 들어가듯,  시야속으로 흡수 되는 듯 빠르게 움직인다. 거기에 튕겨 나가듯 칼린은 이빨을 뽑아 냈다. 마치 물리적인 반발력이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칼린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자신이 깔고 있던 영주를 보았다. 자신과 비슷할 정도의 창백한 피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박제처럼 보였다.


그는 가볍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만져 보았다. 전날 그와 검을 다투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반대손으로 집은 그녀의 오른손에는 맥이 아주 약하게 뛰고 있었다.


그는 귀를 그녀의 가슴에 가까이 댔다. 자그마하게 들려오는 고동이 아직 그녀가 미약하게나마 살아있음을 말해 주었다. 가만히 그 소리를 듣던 그는, 그대로 그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


요나는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몽실몽실하고 몸은 물속에 있는 듯해서 흐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왜 인지 인식할 수 없었다. 푸르게 비치고 있는 방 안은 마치 그녀만의 우주에 도달해 있는 것 같았다.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속에서,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돌아오는 무게감에 그녀의 가슴께에 뭔가가 올라와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니, 보이는 것은 사람이었다.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서럽게 울고 있었다.


"...왜 울고 있느냐..."
낙엽이 스치며 나는 듯한 건조한 목소리였다. 마치  십년을 한번에 늙게 된 것 같았다. 요나는 그렇게 느끼면서도, 마치 원래 자신의 목소리가 이랬다고 느낄 정도로 위화감을 못 찾고 있었다.

"아무에게도...아무에게도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영주님..."
맑고 청량한 목소리였지만,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확실히 전달 되었다.


"그래... 괴물..주제에 잘도 참아왔구나.. 고생을 시켰다..."
서서히 돌아오는 이성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칼린이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 듯 했다.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요나... 진짜 필사적으로 참아왔단 말이에요..."
요나가 힘들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천히 몸을 들어 올리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울고 있던 칼린은 조금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 이빨은.. 네가 혼자서 싸워온 흔적이로구나.."
몸을 받치던 손이 무너져 넘어지려는 요나를, 칼린이 재빠르게 다가가 부축했다.

"무슨 벌이든 받겠습니다... 어떤 저항도 없이 제 삶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선생님과 떠돌이 분들은 그냥 보내 주세요..."
요나의 눈에 서서히 이성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다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나를 침대로 옮겨주고 물을 가져오너라, 칼린. "
칼린은 요나를 양손으로 들어 올려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선반에 있는 물 주전자에서 물을 한컵 따라 마시는 것을 도와줬다.

"...모든 추격명령을 취소하고, 리쿠르트를 석방시키겠다. 네가 이렇게 돌아왔으니까 말이야."
아직 어지럽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어느정도 정신은 차려졌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요나는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일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피하지 말아다오. 네 모든 이야기를 나에게 해줬으면 한다."

#


칼린은 그녀의 옆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는 전상민이 죽은 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동물을 죽였을 때의 기분, 간간이 꾼 악몽, 지금도 겪고 있는 환각과 환청, 자신이 그 숲에서 겪었던 일들, 겪었어야 했던 감정들, 모든 것을 하나하나 말해 주었다. 하나하나를 말할 때마다 지나간 감정들이 다시 자신을 찌르는 듯해서 그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렸다,

요나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질문도 공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얼굴에서 그가 지나온 세월을 보고 있었다.


담담한 말투에 비해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시리게 다가왔다. 한마디 한마디가 자기혐오로 점철이 되어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이빨을 뽑아냈다는 것은 요나라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의 피를 빨아낸 괴물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이 돌아올수록, 그녀는 다른 감정에 지배되고 있었다.


"아무 걱정 하지마라, 칼린."
이야기를 끝마치고 영주의 말을 기다리던 칼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요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 난 네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그의 완벽한 이해자. 그가  세계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 칼린은 그  한마디에 벌써 자신의 모든 고통에서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 고양감 때문에 요나의 눈 안쪽에 숨은 검은 감정을 놓치고 말았다.

"이제 너는 '나의'괴물이다, 칼린."
불쌍하고 가여운 칼린, 어리석게도 혼자서 얼마나 참았을까.

욕구를 참으며 고립되고 싶지 않아서 매일마다 자신의 이빨을 뽑아내는 미친 짓까지 한 네놈이다. 혼자 덩그러니 여기 떨어진 네놈을 내가 전부 인정해주마.

그걸로 너는 완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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