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낯선 도시에서
"의사가 온다구요?"
칼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칼린, 네가 지금 아프다는 걸 알아. 숨기지 않아도 되고, 여기에 조금 머무른다고 해서 아무도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용도 걱정하지 마! 우리 성의 의사다!"
요나도 당당함을 가장하며 눌러 담은 듯 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떨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완벽했던 분위기가 역전되어 버렸다.
"전 아프지 않아요!"
칼린은 무슨 상황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수면 부족, 환각, 환청을 달고 살지만 의사가 해결할 일은 아니었다. 전에 알레프와 만난 자리에서 토를 한 것은 고기 때문이라고 설명도 했었다. 도대체 의사를 만나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경계하는 일이기도 했다. 뽑은 이빨이 하루만에 다시 자라는 그이다. 평범한 사람과 신체 구조가 같을 리가 없었다. 일상적으로 서로를 지나치니 들키지 않을 수 있었지만, 누군가가 자리를 깔고 천천하게 세심히 진단한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들키게 될 수도 있다.
그에게 최악의 결말이 그것이었다. 자신을 거두어 준 사람들에게 괴물이라는 것을 들키는 것이 무서웠다. 그 일만 피할 수 있다면 내일 바로 팔리는 쪽이 차라리 더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상황인 것은 요나도 똑같았다. 정말 완벽한 순간이었다. 물론 숨기고 있던 것을 들켰으니 일종의 반발은 생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것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네 침대보에서 혈흔을 발견했다! 평생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인정하고 얌전하게 치료를 받아 다오!"
요나는 목소리는 컸지만 마치 호소하는 듯 말하고 있었다. 칼린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 언제 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제대로 수습하지 않아 피가 튄 일이 생겼었으리라. 거기에 저녁마다 들리는 신음소리로 그녀가 그런 오해를 하게 만든 것이다.
칼린은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듯 손을 머리를 싸매며 뻐끔대고 있는 칼린을 보며 요나는 설득한다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서 밀어붙였다.
"영원히 잡으려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너를 건강하게 보내주고 싶다. 그 정도는 하게 해 다오.."
그러나 칼린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알려지고도 그들과 같이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들과는 다른 생물이니까.'생태계의 밖'에 있는 구제 대상이니까.
지금 요나가 하는 말들은 감정적이고 직선적이다. 평소처럼 숨기는 것도, 돌려서 말하는 것도 없다. 그렇기에 칼린에게는 더 질이 나쁘게 느껴진다.
"'당신들'은 모를거야...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들'?"
칼린의 지금 상태는 이상했다. 몸을 덜덜 떨며 혼자서 중얼대고 있었다. 그래서 요나는 그 말을 착란 중에 나온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일단 진정해라, 칼린. 진정하고 천천히 대화하자꾸나.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내가 춤을 요청해서 무리했구나."
달래듯이, 그녀는 몸을 낮추고 양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가까이 오지 마!"
그가 다가오는 손을 쳐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의 손톱의 날카로움이었다. 그의 손 끝이 요나의 뺨을 스쳤다.
갈라진 틈새에서 나뭇잎에 이슬이 지듯 피가 맺혀 나오기 시작했다. 얇은 선이었던 상처가 조금씩 벌어지며 이윽고 피가 흘러나왔다.
요나는 당황해서 칼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만큼 많은 것이 담겨있는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가장 큰 것은 두려움과 죄송함이었다. 찡그러진 눈썹과 크게 벌어진 동공에서 볼 수 있었다. 이를 드러내며 찡그린 입가에는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그 표정에서 알 수 없는 욕망이 보이는 것이었다.
칼린은 서서히 자신의 흡혈욕구가 올라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오늘은 아직 뽑지 않은 그의 송곳니가 간지러운 듯한 느낌이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냄새가 지독한 수준으로 그의 코를 찔렀다. 오랜만에 접하는 감각이기에 더더욱 강하게 자극되었다.
격한 감정 사이에 흡혈욕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빠르게 펌프질 되었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눈앞의 먹이를 전부 먹어 치우라고 아우성치고있었다.
"진정해라. 불문으로 부치마. 큰 상처도 아니고, 깨진 글라스에 베였다고 하마. 이 정도의 상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안심하고 제발...제발 다시 대화를 하게 해 다오."
요나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고 확실하게 칼린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평소였다면 위병을 불렀겠지만, 그녀는 지금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저 칼린을 붙잡고 싶었다.
요나가 가까이에 올 수록, 칼린의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냄새는 더더욱 폭력적으로 그의 뇌 안을 때리고, 전신에 힘이 들어가서 지금 그가 팔을 휘두르기만 해도 요나는 두 갈래가 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요나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위협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가만히. 거기 가만히 있거라."
마침내 요나가 다시 칼린에게 손이 닿을 거리로 들어왔다. 마치 정교한 기계장치처럼, 그 발걸음과 동시에 칼린의 벌어진 입이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힘껏 깨물었다. 칼린의 팔이 참혹하게 찢어졌다. 아니, 말 그대로 그의 살점을 한번에 '뜯어낼' 정도로 강하게 물어낸 그는, 다시한번 요나를 마주했다.
그 표정 안에는 그저 슬픔뿐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영주님."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팔을 휘둘러 피를 흩뿌렸다. 영주가 본능적으로 눈을 가리자, 그는 빠르게 몸을 낮추고 영주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문 밖으로 맹렬하게 뛰어서 도망쳤다.
"잠깐! 칼린!"
그녀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모든 상황이 너무 짧은 순간 안에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것을 되새길 시간조차 없었다, 그녀는 빠르게 방 밖으로 박차고 나와 칼린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사라져 버린 듯 했다.
요나는 잠깐 벙쪄서 있다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적당한 방향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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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건은 유감이야."
갤러한이 그렇게 말하자, 리쿠르트가 이불을 끌어 올리며 등을 돌렸다. 그 이야기는 별로 꺼내고 싶지 않았었다.
그는 그런 리쿠르트의 머리를 쓸어 내리며 그저 가만히 있었다. 침대 위에서 상대방의 실패담을 꺼내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의 유감을 전해주고 싶었다.
"칼린은-"
리쿠르트가 등을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킬린은 총명한 아이예요. 그런 그가 선택한 길입니다. 스스로 잘 해쳐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무엇보다,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전 그의 주인과 뭐가 다르겠어요?"
그리고 고개만 살짝 돌려 빼꼼 갤러한을 바라보았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성심성의껏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제가 일하던 그 학교로 돌아가는 것 정도 뿐이죠. 재미없는 여자가 돼 버렸을까요?"
"얼굴은 여전히 흥미로우시네요."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작게 쿡쿡댔다. 분명 둘 다 마음 한 군데가 무거웠지만 칼린의 선택을 존중하고 있었다. 리쿠르트가 아무런 반발도 없이 그걸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갤러한의 덕이 컸다. 그가 성에 들어왔을 때 까지만 해도 리쿠르트는 울고있었다.
그런 그녀의 방에 작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에 넥타이 걸어 뒀어요?"
"분명 걸어뒀는데."
둘은 분명 파티의 취객이 걸어 둔 넥타이를 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갤러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셔츠를 걸치고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있는 것은, 비라도 맞은 듯 땀을 흘리고 있는 칼린이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에 당혹감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고, 잠옷의 팔부분은 왜 인지 중간이 크게 뜯어지고 피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갤러한은 당황해서 한걸음 뒷걸음질쳤다. 칼린도 조금 당황했다.
"왜 갤러한이 리쿠르트 선생님의 방에....아!"
그는 갤러한의 옷차림에 힌트를 얻어 대뜸 손을 내밀며 악수를 신청했다.
"잘 되셨군요! 축하해요, 갤러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아, 그래, 고맙다."
갤러한은 분위기에 밀려 악수를 받아주면서도, 칼린의 찢어진 옷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마치 어디선가 도망쳐 나온듯 했다.
"칼린, 쫓기고 있니?"
갤러한의 그 말에 칼린의 분위기가 다시 변했다. 그는 지금 상당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갖가지 감정들에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지금. 지금 탈출할 수 있게 도와 주실 수도 있나요?"
그 떨리는 목소리에 갤러한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탈출하지 않겠다고 했던 칼린이다.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해도 거절할 명분은 있다. 무엇보다, 자신은 리쿠르트와 잘 될 것 같았다. 굳이 위험부담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칼린이 얌전히 팔려 나가는 걸 바란 것도 아니다. 칼린은 멋진 놈이었다. 생긴 건 곱상해도 농담도 빠르고 카드게임도 능숙했다. 몇 번은 륑게에게도 이길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릴로의 귀찮은 추파를 흘려내는 것도 잘해냈다. 소니아의 꿈을 응원하기도 했다. 그 때 하는 말은 상당히 성숙해서 일행 중 가장 연장자로 느껴 지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면서도 갤러한은 즉답을 할 수 없었다. 상황이 다르다. 영주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이라면, 그 말은 영주가 칼린과 접촉했다는 것이다. 본래의 계획처럼 요나의 시선이 없을 때 휙하고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 해진다.
즉답이 나오지 않는 것, 그걸로 충분했다. 칼린도 이해한다. 그들은 떠돌이고, 갤러한은 리쿠르트와 잘 되었고, 지금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알고 있다. 뭐, 자신의 신체능력이라면 혼자서도 성을 빠져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칼린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때였다.
"준비 끝났어요."
갤러한의 뒤에서 리쿠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그가 뒤를 돌아보자, 이미 옷을 전부 챙겨입은 리쿠르트가 준비물을 챙겨 둔 상태였다. 그녀가 갤러한을 올려보며 물었다.
"당신은 준비 안하나요? 바지는 필요할 것 같은데."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왜 반했는지 떠올랐다. 간간이 보이는 이 얌전함과 무모함의 갭에 끌렸었다.
"거 해 봅시다."
그들은 아침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각자의 함을 통해 필요한 물건들을 서로 성 안팎으로 전달하며 준비했다. 성에 들어오기 위한 초대권은 리쿠르트가 갤러한에게 보냈고, 성을 나오기 위한 갈고리줄은 갤러한이 리쿠르트에게 보내주는 식이었다.
"갈고리 줄이 담길 만한 함이었다구요?"
칼린이 놀라서 물어보았다. 함의 크기는 그녀가 동봉하는 신체부위의 크기에 비례한다.
"아, 머리카락을 한 뭉텅이 잘라냈죠."
그러며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보여주듯 한번 쓸어냈다. 칼린은,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은 준비한 밧줄을 묶어 창 밖으로 던졌다. 바닥 까지만 내려 가면 갤러한이 찾아내 경로를 통해 성 밖으로 나가고, 말을 타고 영지 밖으로 도망치면 된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숨어서 살아간다.
"조심하세요, 갤러한."
"당신이야말로."
서로 인삿말을 하는 그들을 보고 칼린이 의문점이 생겨 물었다.
"리쿠르트 선생님은 안 오시나요?"
"누군가는 시선을 끌어야죠, 칼린."
말도 안되는 일이다. 자신을 탈출시키고 리쿠르트가 남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일이다.
"사람수가 많은 쪽이 탈출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선생님, 말도 안돼요! 그냥 이 밧줄 타고 같이 내려가요!"
그렇게 말하는 칼린에게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갤러한, 당신은 막아야죠. 리쿠르트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구요!"
갤러한은 리쿠르트를 한번 바라보았다. 서로 눈을 마주친 그들은 잠깐 눈빛을 교환했다. 요나에게 한번 노출이 되었다면, 이젠 정말로 교란이 필요하다. 리쿠르트도 갤러한도 그걸 알고 있다. 갤러한은 고개를 돌려 칼린을 달래듯 말했다.
"저게 내가 반한 여자고, 네 스승님이란다. 무모해질 때 끝내주게 섹시하지. 그리고 난 사귀는 사람을 의심하는 타입은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고 갤러한은 리쿠르트에게 말했다.
"무사히 다시 만날 거라고 약속한 겁니다."
리쿠르트는 그 말에 분주히 폭죽을 옮기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돌아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그 상태 그대로 대답했다.
"선생님은 약속은 꼭 지켜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쿠르트는 폭죽과 등불을 들고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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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먼저 칼린이 있던 층을 전부 살펴 보고 계단을 통해 다음 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위병 하나가 거친 숨을 뱉으며 그녀에게 달려 왔다.
"영주님, 보고입니다. 여기서 두 층 아래에서 폭죽이 터졌습니다. 성 안의 것이 아닙니다. 어떡합니까?"
"폭죽이?"
파티용 홀에서 한층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요나는 급하게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창 밖을 보았다. 정말 폭죽이 쏘아 올려지고 있었다. 성 내에 사람들은 전부 귀족이다. 불꽃놀이나 터트리는 놈은 없을 것이다. 누구든 그게 침입자의 미끼일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그 미끼를 성 내에 있는 귀족 모두가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창문을 닫고 방안에서 거사를 치르고 있던 남녀에게 가볍게 사과한 후 방을 나왔다. 왜 인지 지금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근위병을 11명 골라서 폭죽을 쏘고 있는 장소로 보내고, 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준비한 거라고 이야기를 전달해라. 빨리!"
그렇게 말한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했다. 위급상황이 될 지도 모른다. 칼린을 빨리 찾아내야 한다. 그녀는 그가 성 내에서 자신에게 도망친다면 누구에게 향할지 생각해 보았다.
"리쿠르트.."
그를 진정으로 아끼는 그의 선생. 지레 혼자 겁먹어 버리는 겁쟁이 위선자. 칼린은 분명 그녀를 찾아 갔을 것이다.
"젠장할!"
그녀는 이걸 바로 생각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 화가 나서 머리를 싸맸다. 그녀의 방은 이 층으로 부터 세 층 아래에 있었다. 그녀는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병들이 폭죽이 쏘아지고 있는 곳에서 본 것은, 익숙한 얼굴인 리쿠르트였다.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며 폭죽을 하나씩 하늘로 쏘아 올리는 중이었다. 꿈처럼 그걸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위병 대장이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선생님, 여기서 뭐하고 계신 겁니까?"
리쿠르트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활기찬 웃음으로 대답했다.
"남자친구가 성 밖에서 폭죽을 사서 전달해 줬거든요. 저는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이정도 폭죽이면 둘이 같이 볼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로맨틱하죠?"
선두에 서있던 위병이 그 말에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선생님, 성 내에서 불꽃놀이는 금지입니다. 남은 폭죽 들고 방으로 돌아가세요."
그녀는 들고 있던 폭죽의 마지막 한발을 쏘아낸 후 얌전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잡은 위병에게 말했다.
"네, 뭐. 그도 지금쯤이면 분명 그걸 봤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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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폭죽을 신호로 갤러한과 칼린은 밧줄을 타고 성 밖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분산되어 수가 적어진 위병들 사이로 숨어서 성을 나왔다. 중요한 것은 마을에서 부터였다. 축제 중에 북적이는 마을에서, 갤러한과 칼린은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그들은 도시 외곽에서 말을 빌려 왕도로 통하는 길을 타고 왕도를 지난 마을까지 도망칠 것이다.
칼린은 미칠 것 같았다. 도저히 감정이 가라앉을 틈이 생기지 않았다. 요나를 마주하고, 리쿠르트를 마주하고, 그녀를 두고 성 밖으로 나와서, 흥분한 인파들을 뚫고 있었다. 여기저기 밝은 조명과 군중의 사이의 자극적인 분위기 모든 것이 그의 흡혈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그는 양 팔을 꼭 끌어안고 입술을 깨물며 달리고 있었다.
요나는 리쿠르트의 방에 도착했다. 그녀는 먼저 감정을 식혔다. 그리고 문에 노크를 하려다가, 그 문에 넥타이가 두개 걸려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런 씨발..."
그녀의 입에서 결국 참고 있던 욕이 튀어나왔다. 감정이 요동쳤다. 그녀는 문을 부술 기세로 세게 발로 차서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침대에 묶여 창 밖으로 늘어져 있는 밧줄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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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죽을 쐈던 것은 리쿠르트 경이었습니다."
"나도 알아."
위병이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요나에게 말을 걸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를 어디로 보냈지?"
"...방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만."
요나는 그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따라오고 있던 위병이 같이 발걸음을 멈추자, 손등으로 그의 뺨을 아주 세게 후려쳤다.
"찾아."
그렇게 말한 그녀는 성 내 방송실로 들어갔다. 마을의 확성기와 연결된 곳이었다.
"비상. 역병에 걸려있는 자가 있다. 키는 185정도에 마른 체형, 얼굴은 미남형이고 일행이 한명이상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역병에 걸려있다. 솔직한 제보 부탁 바란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마이크를 껐다. 격하게 올라오고 있는 감정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파티를 중단해버리고 싶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영주님."
뺨을 맞았던 위병이 방송실로 돌아왔다.
"2층 파티홀 근위병이 성에서 나가려고 하는 것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양팔을 잡힌 리쿠르트가 방으로 끌려 들어왔다. 꽤 강하게 저항하며 끌려 왔는지 머리와 옷 매무새가 헝클어져 있었다.
"리쿠르트."
요나가 그런 그녀에게 다가오며 근위병들에게 놓으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근위병들이 그녀를 잡은 팔을 놓음과 동시에, 요나는 쥐고 있던 주먹으로 리쿠르트의 얼굴을 세게 후렸다.
그녀는 말 그대로 날아서 굴러갔다. 요나는 처참하게 쓰러진 리쿠르트를 향해 걸어갔다.
"칼린의 도망을 도왔구나."
리쿠르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요나는 발로 그녀의 배를 세게 차냈다. 그녀는 바닥을 몇 바퀴 더 구르고 숨을 헐떡댔다.
"버러지같은 꼴이구나, 너 같은 걸 가족처럼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니. 수치스럽군."
헐떡대는 그녀에게 다시 다가간 요나는 그녀의 갈비뼈 위에 발을 얹고 지근지근 밟아 댔다. 리쿠르트의 벌어진 입에서 피와 살점, 작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근위병들은 전부 그걸 말리고 싶었다. 리쿠르트는 성 안에서도 덕망이 높아 인기가 좋았고, 이대로 두면 정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 안의 그 누구도, 요나가 이정도로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요나는 쪼그려 앉아 리쿠르트의 머리채를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질문했다.
"내가 언제까지 이정도로 친절할지 모른다. 군대에서 말하는 기능 빼고 전부 부셔버리는 법을 배운 적이 있거든. 그를 어디로 보내는 거고, 누가 협력했지?"
리쿠르트의 입이 작게 뻐끔대는 것을 요나는 보았다. 그녀는 리쿠르트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 자신의 근처로 옮겼다.
"효까.."
그게 리쿠르트의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이 될 비속어 사용 순간이었다. 요나는 그 말을 듣고 그녀의 멱살을 쥐고 팔 힘만으로 들어 올렸다.
"이런 씨발, 리쿠르트! 그는 의사가 필요하단 말이다!"
요나는 눈의 촛점을 맞추지 못하는 리쿠르트의 뺨을 쎄게 때리고서 꾹꾹 담듯 이야기 했다.
"그렇게 아끼고 아끼는 제자가 병 때문에 각혈을 하면서 매일 저녁 혼자 앓고 있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나 보지? 성 내에 소문이 퍼졌는데 말이야. 넌 그냥 내가 그를 판다는 소식같은 거만 어디서 대충 주워들어서 생각없이 행동한 거겠지. 네놈의 그 선생놀이로 모든게 망했다! 앞으로 하루나 이틀이었으면 의사가 와서 그는 진단을 받아 볼 수 있었어! 이제 그가 걸린 것이 역병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를 영주민이 전부 모인 곳에 풀어버렸군."
요나는 이 말을 하며 리쿠르트의 표정변화를 지켜보았다. 망가지고 터진 얼굴이지만,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르고 있는 것은 확실히 보였다.
"오, 이제야 알겠나? 칼린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잘나시고 고매하신 선생에게는 숨길 수 있었나 보군. 아니, 어쩌면 숨길 필요도 없었을 지 모르겠군. 그 갤러한이라는 부랑자놈과 물고 빠느라 바빴겠지!"
갤러한에 대한 이야기는 칼린이 선물을 주면서 했던 이야기에서 대충 유추한 것이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리쿠르트의 표정을 읽고 정답이었다고 판단했다. 요나는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까지 리쿠르트의 엉망이 된 얼굴을 끌어당겨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넌 정말 네놈의 제자를 신경써서 이 일을 벌인 걸까? 아니, 아닐 껄? 분명 마음속 깊이는 자신의 편한 자리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나에게 한방 먹여보려는 반발심같은 것이 섞여 있었을 거다. 진짜 칼린을 위해 이 모든 지랄을 벌였다면, 지금 그가 갈 곳과 누가 돕고 있는지 말해!"
리쿠르트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다음은 요나의 계획 대로였다. 작게 입술을 떨고 있는 리쿠르트의 입에 귀를 갖다 댄 요나는, 그녀를 그대로 내팽개치고 방송용 마이크에 다가갔다.
"저년을 감옥에 쳐 넣어둬."
그렇게 말한 요나는 마이크에 방송을 송출했다.
"역병 환자의 동행인은 남자 한 명, 키는 180정도에 건장한 체구, 입가에 흉터가 하나 있다. 이 마을에 체류하던 떠돌이이다. 솔직한 제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