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낯선 도시에서 (15/164)



〈 15화 〉낯선 도시에서

오늘도 갤러한 일행은 여관에서 떠들썩하게 즐기고 있었다. 릴로가 양 팔에 반 즈음 벗은 쌍둥이 형제를 끼고 갤러한에게 물었다.

"야, 내일  쉬는 건 알지? 서로 상대 꼬시는 거 도와주는 거다?"


갤러한은 그 말에 맥주잔을 들고 조금 생각하다가
"음, 내일은 혼자 돌아."
라고 대답했다.

"뭐? 야, 내일 축제다? 서로 들러리 해주면 맘에 드는 사람 골라잡을 수 있어. 알고 있지?"
"칼린의 가정교사 있지?"
"너 설마..."
"맞아."
갤러한은 맥주잔을 비웠다. 그리고 소리가 울리도록 세게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선약이 있어서리."
그렇게 말하며 윙크하는 갤러한을, 릴로는 정말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

요나는 칼린의  문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가볍게 노크 하려다가,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있는 짓을 반복했다.


그렇게 5분정도를 가만히 반복하던 요나는 결국 그의 방에 노크를 했다. 잠시 뒤, 잠옷을 입은 칼린이 문을 열었다. 그는 상당히 놀란 듯 했다.

"영주님?"
칼린은 영주와 마주치지 않은  벌써 2주일이 되어갔다. 그리고 영주는 노크보다는 호출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부르고는 했다. 그가 막 이빨을 뽑아내려  순간에 문 앞에서 영주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잠깐 들어가도 되나?"
영주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

조용한  안에서 요나는 칼린을 한 번 돌아보았다. 짙어진 다크 서클과 흰 피부에 맺힌 식은땀이 눈에 아플 정도로 시리게 박혀왔다.

그가 저녁마다 아파하는 것은 적어도 요나의 눈엔 확실하게 보였다. 분명 자신의 앞에서 평정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칼린은 그저 송곳니를 뽑으려는 중에 그녀가 들어와서 자신의 송곳니를 담아두던 캔이 들키지는 않을까 긴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저기, 영주님. 무슨 일로 오셨는 지.."
칼린의 합당한 질문이 그날따라 영주의 심기를 크게 거슬렀다.

"용무가 없다면 찾아와서는 안되나?"
쪼아 내  뱉어 낸 말에 칼린은 조금 쫄아서 급하게 대답했다.

"아니, 보통은 용무가 있으실 때만 찾아오시니까요. 갑자기 대련을 그만하시기도 했고..."
그 말 대로다. 지금 칼린의 모든 반응은 영주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나도 전부 알고는 있지만 칼린과의 장벽을 느끼는 것이 그녀에게 좋게  닿지는 않았다.


"...미안하군.  말이 맞다."
그 말을 하고 요나는 또 입을 다물었다. 그런 요나의 평소와 다른 모습이 칼린의 불안감을  키웠다.


"칼린, 요즘 네 방에서 밤마다 신음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칼린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칼린은 멍청이는 아니기에, 시종들에게 이런 일을 들켰을 경우의 변명거리는 생각해 뒀다.

"숲에서 헤매던 때의 일들이 아직도 간간이 꿈에서 나오거든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앓게 되더군요."
요나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담배를 두 개피 꺼내 하나를 칼린에게 건내 주었다. 칼린은 근처에서 재떨이와 등불을 가져와 요나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런가. 그렇게 말하는 건가."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 그녀는 칼린의 머리를 조금 쓰다듬었다.


"너라면 어떻게든 내가 생각한 대답을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기를 내뱉으며 마치 혼잣말을 하는 듯 중얼거리던 그녀는 칼린을 바라보았다.

"스쳐 지나가야 했던 인연이 너무 길어졌다. 가볍게 버려야 할 감정이 너무 깊어졌어. 내가 너처럼 초연할 수 없었던 것이 잘못이다."
옅은 웃음을 담아 그녀가 말했다.

"칼린, 다음주에 너를 팔겠다."
요나는 한순간 그의 얼굴을 스치는 갖가지 감정을 보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두려움과 아쉬움도 보인 듯 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언젠가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지었던  강철같은 얼굴로 돌아와서, 같은 웃음으로 회답했다.


"신세를 졌습니다, 영주님."
둘은 서로를 복잡함을 숨긴 미소로 마주하다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칼린의 담배가 반정도 타 들어 갔을 때 즈음에 영주는 이미  안에 없었다.


#


축제날의 아침이 다가왔다. 칼린은 습관적으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가려다가 발을 멈췄다. 그는 오늘 방 안에만 있어야 한다.

그는 리쿠르트에게 받은 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작게 접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어제 저녁즈음에 그의 함에 생겨난 종이이다. 안에는 그저 큼지막하게 O, X가 그려져 있었다.


칼린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도 안다. 그는 X에 큼지막하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다시 종이를 함에 접어 넣은  침대에 누웠다. 5시쯤 되면 함의 내용물을 리쿠르트가 다시 회수하고, 그가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알게 되리라.

그는 침대에 풀썩 누웠다가 그가 영주를 위해 샀던 담배가 떠올랐다. 벽장에서 그걸 꺼낸 칼린은 그걸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어제 줬어야 되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누웠다. 이젠 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천장을 바라보던 그는 갖가지 생각에 점점 머리가 아파져서 다시 잠을 청했다. 오늘은 맨몸운동도 못할 것 같았다.

그 시간 갤러한은, 잠든 그의 동료들을 방 안에 두고 아침 일찍 방을 나섰다. 그는 씹는 담배를 물고 상점가로 갔다.

칼린의 탈출계획은 완벽한 그의 독단이다. 반한 여자를 위해 하는 일이라도 이 정도의 리스크를 가지고 있다면 일행들을 휘말리게 할 수는 없다. 지금은 흩어지게  테지만, 어차피 떠돌이들은 살아있는 한 다시 만나게 된다. 떠돌이들 사이의 격언이다.

지금 그에게 가장 쉽게 일이 풀리는 경우는 칼린이 탈출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그도 칼린이 팔려 나가는 것은 마음이 찝찝하지만, 한 도시의 영주를 적으로 돌린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큰일이기 때문이다. 셋이 탈출은 그렇게 어렵지 않겠지만,  이후에는 평생을 쫓기게 될 지도 모른다.


그는 대형 폭죽을 한아름 들고 가면서 부디 이 폭죽들을 리쿠르트와 로맨틱한 밤을 보내는데 사용할 수 있기를 빌었다.


리쿠르트도 방에 대기 명령을 받은 사람중 하나이다. 그녀는 평소처럼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함이 들려 있었다.

5시에 그녀는 함의 내용물을 링크할 것이다. 그녀로서는 억지로라도 칼린을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지만, 스승이라는 자가 제자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만약 그가 O사인으로 답장을 준다면, 그거면 된다. 칼린은 확실히 성에서 도망칠  있다. 갤러한과 리쿠르트는 이미 그 준비를 끝마쳤다.


그녀는 가슴의 브로치를 매만졌다. 지난주쯤 외출했을  갤러한이 사 준 브로치이다. 그는 리쿠르트가 지금껏 접해온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지만,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다.


그와 함께하면 어떤 답장이 오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잘 버텨낼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브로치를  쥐었다.


요나는 오랜만에 정복(正服)을 입었다. 참전의사를 밝힐 때를 마지막으로 옷장에 넣어두기만 했던 옷이었다. 아무래도 전쟁 전보다 근육이 붙은 것 때문인지 조금 몸에 끼었다. 여기저기 살펴보며 좀먹은 곳이 없는지 확인한 요나는, 옷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압박감을 자신을 집중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녀에게 사교장이란 전쟁과 비슷한 것이었다. 갖가지 고난이나 시체가 없는 것은 전쟁보다 높게  일이었지만, 권모술수와 배신이 잦은 것은 전쟁보다 질이 나빴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자켓의 단추를 잠궜다. 그리고 평소처럼 굳건히 허리를 펴고, 자신의 마음 속 철옹성을 더욱 굳건히 했다.

이 날을 위해 준비한 고급 시가도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무장을 끝낸 그녀는 전장으로 발을 옮겼다.

#

요나가 자신의 생일축제에 지치기 시작한것은, 사교장이 시작한지 2시간정도 지난 20시 쯤이었다.

그녀는 처음보는 귀족들에게 자신의 무훈에 대해 듣는 것이 지쳤다. 전장을 구경조차 하지 않은 그들이 칭찬해 줘도 아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젊은 남성들이 자신에게 구애를 하는 것에 지쳤다. 오늘 처음 만나는 자들의 구애의 말을 일일히 들어 주며,  한번 같이 춰주고 감정 상하지 않게 돌려보내는 작업은 번거롭고 성가셨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잘 보여 두기 위해 몰려온 신흥 사업가들에게 지쳤다. 벨카의 발전을 예측하고 몰려든 고마운 자들이었지만, 대화에서 천박한 욕심을 숨기지 못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이 작자들에게서 탈출수단으로 자신이 찾던 사람에게 최대한 격식을 갖추며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조세핀경."
그녀의 영지를 담당하고 있는 왕국 공무원인 조세핀이었다.

"요나경, 반갑습니다! 정말 멋진 파티예요. 설마 저도 초대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둘은 가볍게 악수하며 서로의 안녕을 물어보았다.


"즐기시고 있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 지금 함께하시고 계신 일행분이...?"
요나의 질문에 조세핀은 자신의 옆을 돌아보고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아, 그러면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사실 조세핀경을 찾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저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조세핀은 근처에 샴페인잔을 두개 들고 요나를 따라 테라스로 나갔다.

#

"...그런 이유로 제가 전후 복구부대를 통솔하는  힘들 것 같습니다. 부디 잘 좀..."
"뭐, 요나님이 하지 않으셔도 누군가는 할 일이니까요. 금방 다른 적임자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둘은 테라스에서 업무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지 담당 왕궁 공무원과 직통으로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화국을 통한 전달보다도 효율이 좋았다. 때문에 요나는 이 기회에 전달사항이나 질문들을 전부 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파티를 즐기러 온 조세핀에게 무척 실례가 되는 일인 것도 알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즐기시려고 오신 분에게 지루한 업무 이야기 때문에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었네요."
그렇게 말하는 요나를 조세핀은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뭔가?"
요나가 그렇게 말하자, 조세핀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니요, 그냥. 요나경에게 문제가 없는 듯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파티에서는 계속 표정이 안좋아 보였거든요. 오래 봐온 저만 눈치챈 것 같지만 말이에요,"
반사적으로 자신의 얼굴에 손을 갖다  요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보던 조세핀은 살짝 웃으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업무이야기를 할 때 가장 좋은 표정을 지으신 다니,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요. 파티는 즐겨야죠."
조세핀의  말이 어쩐지 편하게 울려서, 요나는 조금 긴장을 풀고 크게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면목이 없군요. 부끄럽지만 이런 사교장은 저에게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주위의 칭찬이 어색하기도 하고 말이죠."
"저한테는 아부라고 말 해도 괜찮아요."
요나와 조세핀은 그 말에 서로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살짝 웃었다.

"칼린은 이미 에테롬에게 팔린 건가요?"
조세핀이 파티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파티장을 돌면서 인파가 몰린 곳마다 칼린을 찾아 다녔던 것이다.

"예복을 입은 그를 꼭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샴페인을 들이마시는 조세핀을 바라보던 요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직 팔리지는 않았습니다만... 뭐, 귀족도  가문의 일원도, 심지어 사용인조차 아닌 그를 여기에 참여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쯤 방 안에서 누워있거나 하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을 들은 조세핀이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와 친해지셨군요!"
"네?"
"처음 만났을 때 랑 말투가 확연히 다른 걸요! 그가  안에 있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조세핀이 급격히 관심을 가지며 다가오자, 요나는 조금 당황해서 급하게 대답했다.


"뭐, 같은 지붕아래에서 마주하다 보면 조금은 친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이야기해드릴 만한 일은 없었군요."
그 말과 동시에 여러가지가 떠올라 버린 그녀는 조금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결국 그가 팔려갈 때까지 서로 마음을 터놓는 것도 못할  같고 말이죠."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조세핀은 들고 있던 샴페인을 전부 마시고 말했다.


"요나, 지금 그에게 춤을 청하러 가죠."
"네?"
당황한 요나의 어깨를 붙잡으며 조세핀이 말을 이었다.


"영주라는 자가 아랫사람이 먼저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그대로 끝내면 안돼요. 본디 폭포도 위가 뚫려야 아래로 흐르는 법입니다. 그에게 춤을 청하세요!"
열렬하게 말하는 그녀에게서 눈을 피하며 요나가 그녀를 조금 밀어냈다.

"그렇게 말하셔도...칼린은 제 사용인이 아닙니다. 금방 떠나갈 사람이에요. 스치는 인연에 정을 주는 건 어리석습니다."
침착하게 어르듯이 말해 봤지만, 그 말은 조세핀을 더 자극하는 말이 되었다.

"영주님, 결국 모든 인연은 스쳐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인연의 깊이예요! 지금 그렇게 그를 떠나 보낸다면, 후회하지 않으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말한 그녀는 몸을 돌려 테라스에 얹어 두었던 빈 잔을 집어 들었다.

"언젠가는 비게 될 잔이라며 샴페인을 드시지 않으실 겁니까? 오히려 남은 시간이 절박하다면, 그와의 기억을 더 공고히 만들어야지요! 오늘은 영주님의 생일이며, 사교의 날이며, 축제의 날입니다! 누구와 춤을 춰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날이고, 칼린은 이 사교장 안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에요! 이런 날을 놓치려 하다니, 말도 안돼요! 요나,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그에게 춤을 청하세요!"
그렇게 일장연설을 끝마친 그녀는, 마치 막을 내리듯  잔을 테라스 밖으로 던졌다.


"축제는 즐겨야 하니까요."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거의 동시에 말한 그 둘에 의해 깨졌다.

"방금 깨트린 잔은 제가 꼭 변상하겠-"
"-조세핀경, 지혜를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풀었던 자켓 단추를 다시 걸어 잠궜다. 그리고 등을 돌려 테라스를 떠나면서 말했다.

"1시간. 아니, 30분정도라도 좋으니 제가 없을 동안 다른 귀빈분들에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멍하게  장면을 보던 조세핀은 초승달모양으로 웃으며 테라스에 기댔다.


"잔은  갚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 들일게요."
그리고 작게 혼잣말했다.

#

칼린은 창틀에 기대서 그저 한창 축제중인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을 보고 있노라면 묘하게 희망적인 기분이 들어서, 팔려 나가도 언젠가는 다시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는 중, 꽤 다급한  빠르고 단발적으로 두들기는 노크소리가 울렸다. 오늘 그의 방에 들어올 것은 시종들 밖에 없었을 터였다. 리쿠르트일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너머에 있던 것은 요나였다.

평소에는 포니테일을 하던 그녀는 오늘은 머리를 땋아 올렸다. 평소처럼 말끔하게 입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옷이 좋다. 반들거리는 원단과 몸에 붙은 듯한 핏 감에 칼린도 오늘 옷이 그녀가 '귀족'으로서 어딘가에 임할 때 입는 옷이라고 알  있었다.

그러나 가장 달랐던 것은 얼굴이었다. 짙은 화장을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 붉게 상기된 얼굴과 거칠게 숨을 고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이질적이었다. 사람으로서의 가면을  꺼풀 벗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문을 잡고 조금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머리를 붙잡기도 하고, 좌우로 흔들어 대기도 했다. 그러나 제대로, 칼린이 무슨 일이냐고 묻기 전에 용건을 말했다.

"칼린, 춤추자!"
"네?"
당황한 칼린을 떠밀며 요나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칼린의 양 손을 잡고 맹렬하게 말했다.


"축제날이고, 누구와도 춤을  수 있는 날이다. 너를 마주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숨기고 피해온 것은 나였다. 그러나 지금껏 숨겨온 백마디 말을 전하는 것 보다 이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네 주인이 말재주가 부족해서 그런거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몰랐다. 횡설수설하게, 말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저 튀어나오는 감정을 그대로 내보낼 뿐이었다. 그녀를 억제하던 철옹성이 사라진 결과이다.

"그러니까, 칼린! 내 춤상대가 되어주지 않겠나?"
칼린은 이 상황이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동시에 기뻤다.

"전 춤출  모르는데요?"
"네 영주는 말재주는 부족하다만, 춤은 좀 추지."
"이 방안에서 추는 건가요?"
"내 스텝을 따라 준다면  방의 어떤 것에도 부딪치지 않고 끝낼 수 있다."
"전 아직 잠옷인데요?"
"내 말이. 어울리는 구나."
평소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보면 뭐라고 말할까. 요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칼린도 평소와는 다른 요나의 모습에 긴장을 풀었다. 이윽고 칼린은 요나의 스텝에 맞춰 춤을 췄다.

요나가 이끌어내는 춤은 그녀와 조금 닮아 있었다. 느리고 부드러운 춤임에도 기개와 강단이 느껴졌다. 매 스텝의 끝마다 그녀의 힘이 느껴졌다.

움직임은 섬세해서, 그녀가   대로 춤을 추면서 어딘가에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조용한 방 안에서 음악도 없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마주하며 춤을 췄다.


"누군가 들어와서 우리를 보면 어떻게 해야 되죠?"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다. 귀족 간의 암묵적인 규칙이 있지."
그녀가 한 것은 방 문고리에 넥타이를 걸어 둔 것이었다. 그 신호는 그 방이 사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약 10분동안,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조용히 춤추었다.  춤은 처음 춤을 시작한 지점에서 끝났다. 완벽한  마침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너에게 춤도 가르쳐 놓을 것을 그랬군. 재능이 있구나."
"감사합니다."
그런 말을 나누면서 그들은 그대로 손을 잡고 있었다. 칼린에게 요나의 손은 조금 뜨겁게 느껴졌고, 요나에게 칼린의 손은 조금 차갑게 느껴지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칼린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선반의 서랍에서 그가 샀던 담배를 꺼냈다.

"어제 드리려고 했는데 못 드렸거든요. 하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네요."
그녀는 건내 받은 은색의 담배케이스를 보았다. 장식 없는 싸구려 양철 케이스에 자신의 이름이 삐뚤하게 새겨져 있었다. 안에 있는 시가 담배는 케이스에 걸맞지 않는 꽤 질 좋은 것이었다.

"이런 것은 어디에서 구했느냐?"
그렇게 묻는 요나에게, 칼린은 준비해둔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실을 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주님이 한창 바쁘실  갤러한과 리쿠르트와 밖에 나가서 사왔어요. 성을 떠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생신을 축하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말하는 실력은 이제 일상생활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언어 선택도 고급스러워졌고, 억양도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계속 성장하는 구나.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그는 움직였구나.'
가만히 담배케이스를 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칼린은 혹여 자신이 실수한 것일까 싶어서 모든 것이 자신의 독단이었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요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고맙다, 칼린. 정말로."
칼린은 그때 처음으로 요나의 진심을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하는 그녀는 한 순간 너무 아름다워 보였기에, 그는 말문이 막혔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만면의 미소로 지금 해야 할 말을 했다.

"별거 아닙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그 말에 영주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여러가지 감정들이 북받쳐 올랐다. 지금이라면 뭐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숨겨 왔던 것, 말하고 싶었던 것, 모든 응어리가 끓어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을 토해 내길 주저하는 겁쟁이같은 그녀의 입에서 겨우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내일이나 모레에 성에 의사가 올 것이다. 그 진료가 끝날 때 까지만 성에 있어다오. 부탁이다."
그 말에, 칼린의 표정이 역변했다. 요나는 미처 막아내지 못한 자신의 말을 주워담으려는 듯 입을 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