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화 〉낯선 도시에서 (11/164)



〈 11화 〉낯선 도시에서

"칼린, 네 반사신경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영주가 땅에 뻗은 칼린을 보며 말했다.  말에 칼린이 고개만 들어 대답했다.


"네?"
"말한 대로,  반사신경은 경이롭다. 아마도  공격이 느리게 보이는 수준이겠지."
결론부터 보자면 영주의 말이 맞다. 칼린에게 영주의 검격은 느린 영상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린이 엉망으로 당하는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는 어디까지나 대련의 형식이기에 검을 받아내는 것이 주라는 것, 두번째는 우월한 반사신경을 따라가지 못하는 신체 능력이었다. 태양 아래의 그는 '재능의 원석 칼린'이었지, '괴물 칼린'이 아니다.


"그 반사신경을 사용해라. 단순히 검을 받아 치는 데 멈추지 말고 검격을 읽고 어디로 흘려야 할지, 그게 성공하면 상대의 빈틈은 어디가 될지, 너가 휘두르는 검의 궤도는 상대에게 막힐지 등을 전부 확인해.  재능이라면 왕국의 제식 검술을 기반으로 너만의 아류 검법을 만들어  수도 있을 거다."
칼린이 목검을 짚으며 일어났다.

"검의 궤도는 어떻게 읽으면 될까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며 요나가 살짝 웃었다.

"검에 익숙한 자 일수록 그 궤도는 읽기 어렵지. 바보같이 정직하게 휘두르는 가 하면, 중간에 꺾어버리거나 멈춰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 상대가 강할수록 검의 중간궤도는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 힘들어져."
그녀가 검을 고쳐 잡으며 칼린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도발적인 미소를 보였다.

"요컨데, 맞으면서 배워 보거라, 애송이."

#


서로에게 검과 무술을 가르치는 시간이 끝난 후, 칼린은 감사인사를 하고 리쿠르트의 수업을 받으러 성으로 돌아갔다. 어제부터 리쿠르트가 그의 대련을 지켜보며 기다리지 않게 되었지만,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던 것이 조금 부담이었던 칼린은 이를 별 생각없이 지나쳤다.

요나도 그와의 대련이 끝나고 알레프에게 수건을 받아 땀을 닦으며 영주실에 향했다. 셔츠를 벗어 던진 그녀는 런닝만 입고 가볍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의자에 앉았다.

"기분이 많이 좋으신가 봅니다, 영주님."
알레프의 말에 요나는 아직 입가에 미소가 걸린 채로 콧노래를 멈추고 알레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너털하게 한번 웃고서 다시 업무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재능의 원석을 발굴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지. 내가 찾아내는 것이든, 내 것을 발굴하는 것이든 말이야. 그와의 대련으로는 둘  한꺼번에 할  있으니 상당히 만족..."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얼굴의 미소가 사라졌다. 요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려 머리를 싸매고 집사에게 질문했다.

"...알레프. 내가 영주실에 도착해서 너가 지적하기 전까지 바보같이 웃으며 콧노래까지 불렀던가?"
알레프는 대답대신 조롱하듯 그녀의 콧노래를 따라서 흥얼거려 보았다.

"맙소사, 영주라는 자가 감정조절조차 못 해 내다니."
영손으로 머리를 감싸  그녀는 얼굴을 쓸어 내리 듯 손을 내리고 턱을 괴었다.

확실히 칼린은 천재다. 검을 맞대며 모든 감각을 사용할 줄 알고, 상황에 맞게 새로 배운 것 과 원래 자신이 알던 기술을 섞어서 쓰기도 한다. 그 얇은 몸에 맞지 않는 힘도 가지고 있다. 근력과 마나 활용실력을 키우면 압도적인 반사신경을 기반으로 오직 그 만이 해낼 수 있는 검격을 만들어 낼  있을 것이다.

다만 칼린은 '그녀의 것'도 '나라의 것'도 아니다. 그녀는 기회를 줬지만 칼린이 거절했다. 그는 기본적인 교육을 마치면 마나 측정이고 뭐고 그녀의 손에서 떠나갈 것이다.

"젠장할, 전후(戰後)복구부대 같은 소리나 하고 말이야."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잡아 던진 그녀는 담배를 꺼내 물고 눈을 감았다.

#


칼린과 리쿠르트의 오전 수업이 끝나갈 때 쯤, 성의 정문으로 떠돌이 네명이 도착했다. 갤러한 일행이었다.


"폐성에서 시체 치우던 일했던 거 기억나냐?"
륑게가  앞에서 머뭇거리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이 타이밍에 말해야 겠어?"
소니아가 그렇게 말하며 성의 정문으로 다가오자, 붉은 제복의 경비병들이 창을 교차 시키며 막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들은  날 영주가 준 쪽지를 꺼냈다. 경비병이 영주의 날인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나쁘지는 않은 곳이네."
떠돌이들은 눈이 꽤 높다. 모험담을 좋아하는 귀족들에게 초대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갤러한 일행은 윌레인 왕국에서도 손꼽히게 장수한 파티이기에 안목이 좋은 편이었다.

"빨리 들어가자. 어제 릴로가 토하는 거 도울 때 몸에 냄새가 밴 것 같아."
소니아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 나머지 일행들도 서로를 확인하며 따라갔다.

입구에는 집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내밀며 갤러한에게 악수를 청했다.
"알레프입니다. 여러분을 안내하라는 명을 받고 나왔습니다."
"갤러한이다. 잘 부탁하지."
간단하게 서로 인삿말을 끝낸 그들은 칼린의 방으로 향했다.

#

"아, 어서오세요!"
칼린이 묶은 머리를 흔들며 반겼다. 일행들이 아직 칼린에게 적응되지 않아 우물대고 있자 알레프가 말을 꺼냈다.

"그럼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부디 즐거운 수업이 되시길."
그렇게 말하며 노집사가 뒷걸음으로 문을 빠져나가고, 방 안에는 칼린과 갤러한 일행만이 남게 되었다. 칼린은 왜 그들이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지 의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어. 아직 너한테 적응이 안돼서 말이야. 미안하군. 뭐, 일단 앉아 보라구."
갤러한이 어색한 침묵을 깼다. 칼린을 앉힌 그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우리는  명이니까 말이야. 넷이 전부 한꺼번에 이야기를 하면 혼란스러울 것 같거든. 여러가지로. 그래서 한시간마다 한명씩 교대하고 두 명이 이야기할 동안, 나머지  명은 음...글쎄, 네 방에 화장실도 좀 쓰고 그럴 거야. 문제없지?"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지만 교대로 수업하신다고 말하신 거면 상관없어요."
"응. 그래. 칼린은 착한 애네."
그렇게 말하며 갤러한은 가져온 가방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냈다. 그동안 릴로와 소니아는 분주하게 짐을 풀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에..음.. 나는 이 세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최근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뭐 그런거 말이야. 아직 역사가 되지 않은 것들. 그게 중요한 거지."
그는 가져온 종이를 책상 위에 펼치며, 한 지점을 찍었다.


"아.. 생각해보니까 네 영주님은 완전히 갓난아이를 가르치듯 하라고 했는데 말이야, 대략 대륙이나 반도나 바다. 이런 건 다 알지? 난 누구를 가르치는 건 처음이니까 이해하면서 들어줘.
여기, 이 엄청 큰 땅덩이가 전부 윌레인이야. 우리의 조국이지. 내가 손가락으로 찍고 있는 여기가 우리가 지금 있는 도시, 벨카고. 도련님, 벨카는 어때 보였나?"
어쩌고 자시고 칼린은 벨카 이외의 곳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성 밖도 잠깐 나가본 것이 끝이었다.

"어제 나가보니까 활기찬 도시같던 걸요?"
"활기차다라! 그렇군! 맞지, 벨카는 활기차다. 그치만 다른 곳은 그렇지 않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지도에서 손가락을 옮겼다.

"이 산을 국경으로 넘으면 빅센마르크 돼지새끼들이 살아. 최근에 전쟁이 있었는데, 가만둬도 얼어 죽을 것들을 우리가 손수 때려죽였었지. 이놈들이 먼저 때리고 털린 거라서 이제 망할 날만 기다리는 국가야. 그런데 과연 우리 조국, 윌레인은 어떨까?"
그는 손가락을 짚고 있던 곳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옮겨서 윌레인과 빅센마르크의 접경지를 가리켰다.

"4년. 4년간 싸우면서 내가 가리키는 모든 곳이 불타서 사라졌어.  중에는 벨카랑은 비교도 안될 대도시들도 몇개 껴 있었지. "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반응을 지켜보다가, 허리를 피며 말을 이었다.

"보면 알겠지만, 그래. 접경지와 수도는  거리가 있고, 벨카는 수도와 가까이에 있는 작은 도시였지. 지금 벨카가 활기찬 건 너의 영주 요나가 난민들을 전부 받아 주기로 해서 그런거야. 그래서 지금 발전 중인 단계에 들어선 거지."
그렇게 말하며 방 안에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를 들어 지금 너네가 설치하고 있는 '신기술'인 수세식 변기 같은 거 말이야. 전쟁으로 무너진 대도시들은 그게 일반 가정에도 보급화가 되어 있었지. 돌을 갈아 만든 매끄러운 타일 바닥으로 도시 전체가 포장되어 있었고, 말해도 모르겠지만 도시끼리 이어주는 엄청 큰, 말이 끌지 않는 마차도 있어. 그 정도의 문명들이 전부 유린당한거야."
거기까지 말한 갤러한은 겉옷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씹는 담배를 꺼냈다.

"우리가 가장 최근에 했던 일은 나랏님의 의뢰였지. 전쟁이 끝나고 나면 누군가는 개판을 치워야 되거든. 그래서 저 도시들에 갔었지.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페이가 가장 짭잘했던 것은 군번줄 찾기였어. 나라 말고 개인으로도 의뢰가 많았거든. 겸사겸사 잔해들 틈에서 시체도 꺼내고 하면서 돈을 벌었지.
끓어오르는 구더기보다 좆같았던 건 악취였어. 벨카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200보만 빠져도 전장의 냄새가 나기 시작할껄? 전장냄새가  줄 알아? 코 안쪽에 매연이 달라붙는데, 그걸 긁어 내기도 전에 시체 썩은 내가 파고드는 느낌이지. 모르는 게 좋아.
그 뿐만이 아니야. 시체를 쌓아 두면 간간이 괴물들도 나오곤 하지."
갤러한은 막힘없이 이야기하며 칼린의 반응을 계속 살펴보다가, '괴물'이라는 말에 반응이 있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도련님, 괴물들에 흥미가 있나? 떠돌이들은 자주 보거든. 멀리 갈 것도 없이 왕도에서 벨카로 이어지는 숲길에만 해도 한 마리 있었어. '벨라수카'라고 부르는데,  달린 곰 같은 놈이지. 근데 곰보다 시각, 후각, 청각도 뛰어나고 뿔에서는 전기도 흘러. 물에서 그 놈을 이길 방법은 없지."
칼린은 이 세계에 온지 이틀째에 만났던 것을 떠올리고 조금 떨었다. 갤러한은 자신의 이야기가 먹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을 이었다.


"시체를 찾아오는 괴물은 여러가지가 있지. 그 중에서도 우리가 마주했던 것은 '망토이'라고 부르는 놈이었는데, 팔이 네개인 파란색 원숭이야. 먹은 사람의 목소리를 똑같이  수 있지만 말을 배우지는 못해. 그 놈들이 어떻게 사람을 사냥하는 줄 알아?"
그는 물고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뱉어 내고 고개를 숙여 칼린에게 가까이 오라는 제스쳐를 했다. 칼린이 가까이 오자, 갤러한은 할 수 있는 최대로 목소리를 깔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넷은 다 타버린 벌판에서, 조각조각난 시체들을 치우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지. '전장에서 무례한자는 전장을 무덤으로 삼게 된다'라는 말이 있어서 우리 넷은 전부 아무 말도 없이 작업중이었고, 그래서  넓은 땅은 침묵으로만 메워져 있었어.
그러다가 내가 소리를 들었지. 작게 단발적으로 아..아 하고 외치는 소리였지만, 분명한 사람의 목소리였어. 나와 릴로는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이게 분명히 부상당한 인간이 자신을 찾아 달라고 내는 필사적인 비명이라고 생각했지..
소리를 따라 간 곳은, 유난히도 시체가 모여 있는 곳이었어. 마치 시체가 탑처럼 쌓여 있었지. 우리 넷은  광경에 압도당해 침만 삼키다가, 그 소리가 시체더미 안에서 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거야. 겁먹은 신병들이 죽은 시체들 사이에 숨어 죽은 척하고, 운 좋으면 확인사살도 피한다는 건 막 드문 일도 아니지.
우리가 황급하게 시체더미에 손을 뻗어서 그걸 치우는데, 륑게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가만히 있더군. 난 말했지. '어이, 륑게! 사람이 있어!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고! 빨리 구해줘야만 해!' 그러자 륑게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여기는 전쟁이 끝난지 2주일이 지났어.. 저 안에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그의 말에 우리 넷은 얼어붙었지. 그러자, 그 힘없는 단말마의 소리도 더이상 들려오지 않더군. 우리가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시체더미에서 떨어지려고 했었지... 그러자..."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칼린이 갑자기 이야기를 멈춘 그에게 더 가까이 가려 할 때였다.

"우와아아아아악!"
갤러한이 소리를 지르며 갑작스레 고개를 올렸다. 그가 잘못 계산한 것은 칼린의 담력이었다. 생긴 것은 그래도 칼린은 3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그렇게 어린아이 골릴 때 써먹는 수단은 먹히지 않았다.


갤러한은 바로 눈앞에 무표정으로 있는 미인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자신의 실패가 무안하기도 해서 황급히 얼굴을 뒤로 빼며 말을 이었다.


"ㅁ,뭐. 그런 식으로 시체더미에서 튀어나왔었지. 아대가 없었으면 팔을 당했을 거야. 거기에 이빨자국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구."
그의 말은 전부 진실은 아니었다. 소니아를 제외한 그들 일행은 어차피 안락한 집에서 죽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갖가지 농담 따먹기를 하며 나름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신음소리를 릴로와 갤러한이 들었고, 이를 전장에서 숨어서 살아남은 병사가 내는 소리라고 판단했다.


앞서 말한 방식 등을 사용해 전장을 피한 군인은, 군법대로라면 살아 돌아왔을 때 엄벌을 받게 된다. 갤러한 일행은 그를 찾아내 타국으로 보내주고 돈을 받아 내기로 했다. 그가 그걸 거절한다 해도 왕국에 넘기면 포상금이 생기니 어쨌든 이득인 장사였다.


넷은 그 소리를 따라가며 욕심에 눈이 멀어서 이상한  하나 눈치 못 채고 있다가 습격 당했고, 그 괴물은 넷이서 둘러싸고 쉽게 때려죽였다. 하지만 이 진실이 칼린에게 전해질 일은 없었다.


칼린은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생각하다가 물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아 조금 시큰둥 해진 갤러한이 물어보자 칼린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괴물을 규정하는 기준이 뭔가요?"
갤러한이 머리를 싸맸다.

"거기부터 설명해줬어야 됐나.. 뭐, 짧게 말하자면 명확한 기준점이랄 건 없지만, 보통 인간에게 해를 끼칠  있는, 마나를 사용 가능한 모든 인외 생물...이라고  수 있겠지.  그래 봤자 명확히 규정돼서 나온 종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런 괴물들은 보통 눈에  띄거든."
그 말에 칼린은 아주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그 희망을 가지고 칼린이 질문했다.

"그러면, 혹시 말을 할 줄 알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괴물이 있다면 인간들에게 받아들여 질  있을까요?"
그 말을 들은 갤러한은 눈이 동그래 져서 뒤에 소파에 앉아있던 륑게와 눈을 마주했다. 륑게도 같은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동시에 크게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아하하! 걸작이네! 그런 괴물이 있다면 이라! 하핳! 좋은 질문이야, 칼린군!"
"그렇다면..."
"어림도 없어, 도련님. 그런 괴물도 전부 죽인다."
갤러한이 웃음을 싹 지우고 대답했다. 칼린은 갑자기 변한 그의 기세에 조금 눌렸지만, 계속 물어봤다.

"하지만.. 하지만 적의도 없고 의사소통도 가능한 생물이라면 왜 굳이 적대해야 하죠?"
그 말에 갤러한은 아직도 웃고 있는 륑게에게 눈치를 주고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말했다.


"적의가 없는 것을 어떻게 알지?"
"그야... 그걸 계속 접하다 보면..."
"그러면 그 속내를 읽을 수 있나? 만에 하나 그것에게 적의가 없다고 쳐도, 언제까지 없을지 어떻게 알지?"
"그건..."
그는 칼린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칼린이 바짝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이자, 그는 표정을 풀고 말을 이었다.


"뭐, 지극히 우리 관점적인 이야기지만, 인간을 해할 능력도 있고 혹여  사람을 잡아먹는다, 같은 이유까지 있다면 살려 둘 이유가 없지 않겠어? 인간이라는 건 결국 다른 것을 배척할 수 밖에 없는 거야. 굳이 공존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괴물이라고도 부르지."
칼린의 작은 희망을 발로 지근지근 밟아 끄듯, 그가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약간의 조롱을 담아 말했다.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면 성 안에만 있는게 안전하겠어, 왕자님."
갤러한이 칼린에게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칼린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성 밖으로 나가 모험을 하고 싶어하는 철없는 도련님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어딘가 책에서 읽은 괴물과 친구가 된 용사님 같은 걸 동경하고 물어본 거겠지.'
그런 동화책은 분명 꽤 인기있는 장르다. 하지만 직접 괴물들을 마주하며 사경을 넘나드는 떠돌이들은 그런 것을 무척 싫어하는 성향이 있다. 때문에 현실을 알려줌으로써 모험의지를 조금 꺾어 두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불편해진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영주가 부탁한 '겁먹이기'와 '성 밖으로 나갈 생각을 없애기'는 충실히 이행했다.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칼린의 방에는 릴로와 소니아가 샤워하면서 대화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올라오는 죄책감에 얼굴을 조금 찡그린 갤러한을 보고 있던 륑게는 어쩔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조금 이른 것 같긴 하지만, 갤러한 선생님의 좆노잼 수업은 여기까지로~"
"좆..노잼?"
칼린이 처음 듣는 단어에 갸우뚱했다.

"앞으로 재미없는 일에는 그렇게 말하면 돼, 도련님. 남은 시간은 내가 수업해주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즐겁게 사는 것이고, 유흥은 거기서 빠질 수 없지. 첫 수업은 카드게임이야."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카드 덱을 꺼낸 륑게를 갤러한이 끌고 소파로 데려갔다.


"무슨 생각이야? 우린 저놈을 겁 먹여서  나가게 해야 된다고! 근데 유흥을 가르쳐?"
"진정해, 갤러한. 지금 멍청한 건 너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이쪽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칼린에게 한 번 웃어주었다.

"첫수업부터 겁 먹이는데 성공해서 밤에 영주님 품으로 쪼르르 달려가 '성 밖으로 못나가게쏘용'하게  버리면 어쩔건데? 이 일을 그렇게 쉽게 버리고 싶어?"
갤러한은 그 말을 듣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맙소사, 륑게. 네 말이 맞아."
"그래, 그러니까 우리 일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질질 끌기'라구. 채찍만 휘갈겨서는 안돼. 당근과의 미묘한 밸런스를 맞춰야지... 보고있어."


그렇게 그들의  사회 수업 시간은, 30분의 인생경험 이야기 후 카드게임으로 넘어갔다. 중간에 나온 릴로와 소니아도 껴서
"도련님, 상대가 겉옷을 입고 게임하게 허락하는 것부터 게임은 진 거야."
등의 조언을 들으며 시간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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