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낯선 도시에서
"내 팔을 잡고서?"
요나가 노집사를 붙잡고 다시한번 물어봤다.
"몸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서 내던졌습니다."
집사는 그녀가 이해하기 쉽도록 그의 자세를 조금 따라해 보았다.
"그건 본능처럼 내던진 느낌이었나, 노린 듯한 움직임이었나."
그녀가 그렇게 묻자, 집사는 상황을 회상하는 듯이 잠깐 허공을 보다가 대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단련이 본능이 된 움직임이었습니다."
"무슨 소리지?"
그녀가 되묻자 집사는 기다렸다는 듯 부지깽이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휘둘렀다. 그녀는 그걸 가볍게 검으로 튕겨 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퍼지며,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알레프?"
"그런 겁니다, 주인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직선적인 공격은 막으실 수 있으시죠. 단련이 본능의 단계까지 간 겁니다."
노집사가 침착하게 부지깽이를 들어 올렸다.
"그게 주인에게 부지깽이를 휘두른 이유가 되나?"
요나는 칼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알레프는 그 모습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가 섬겨온 베일라 가문은, 무공이 없는 약소 귀족이었음에도 그 긍지를 잃은 적은 없습니다. 귀족이면서 긍지를 가볍게 여기는 자는 천박한 자본주의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알레프가 장갑을 고쳐 끼우며 말을 이었다.
"긍지라는 것은 아주 가볍게 무너집니다. 예를 들어, 전장 밖에서 무기를 내려놓은 상대를 공격하는 때 무너지지요. 지금 제 목을 치신다면, 주인을 잘못 섬긴 대가로 받아들이고 달게 죽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알레프는 마치 자신의 목을 베라는 것 마냥 옷깃을 정리했다.
요나는 그 말에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전장에 오래 있었던 탓일까, 그녀는 확실히 몰상식한 실수를 저질렀다.
"미안한 일을 해버렸군. 이번 무례는 나에 대한 반성으로 묻어두도록 하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제서야 노집사는 양손으로 잡고 있던 옷깃에서 손을 뗐다.
"그렇다면 알레프, 너는 그를 어떻게 보지?"
"그에겐 적의가 없습니다."
노집사는 즉답했다. 요나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맨손계열의 무술을 익힌, 우리말을 못하는 사람에게 적의가 없다? 난 그가 조난당한 타국의 자객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사용한 그 기술은 누군가를 해하기 위한 기술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적을 제압하기 위한 기술, 자객이 사용할 만한 기술이 아닙니다."
"근거리에서 확실하게 숨통을 끊기 위해 제압하는 것은 아닌가?"
"그에게는 이어지는 동작이 없었습니다. 넘긴 것으로 끝. 다음 동작을 준비하지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본능 단위로 이뤄진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그가 사용하는 기술은 애초에 누군가를 해하기 위한 기술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검을 형편없이 다루는 자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그 말을 듣고 반박하듯 손에 든 펜을 들어 올렸다.
"그가 초보 자객이라면? 일종의 연습생같은 개념으로 이 영지에 온 가능성은 없는가?"
"훈련 받은 자객도 윌레인 왕국의 내륙까지 쉽게 숨어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저런 초짜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죠. 그리고 그의 기술은 초보자가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사는 그렇게 말하고서, 시계를 한 번 보았다. 다음 업무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이 사람보는 능력은 꽤 자신 있는 늙은 몸종이 감히 아뢰옵건데, 그에겐 확실히
적의가 없습니다."
요나는 그 말을 듣고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가 서류를 살짝 구겨 버렸다,
"나 원, 이래서야 혼자 다른 세상에서 뚝 떨어진 자식같군."
그렇게 말한 그녀는 집사에게 다음 일을 하라고 하고 서류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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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은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잊고 있던 그의 흡혈욕구가 최악의 형태로 다시 깨어난 것 때문이지만, 리쿠르트는 다른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칼린, 그녀는 우리 왕국의 최강의 전력 중 하나입니다. 그녀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에요."
이 말은 그녀가 칼린을 몰락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나온 말이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칼린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계속 이렇게 있는 것이 선생을 걱정시키는 것을 알아서 서둘러 대화주제를 찾아냈다.
"어떻게 그 체구로 그렇게 강한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리쿠르트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칼린군은 혹시 남성만 있는 곳에서 오셨나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칼린은 실수했음을 직감했다. 그 한순간의 표정을 읽은 리쿠르트는 별 다른 질문 없이 대답을 해줬다.
"뭐, 모를 수도 있는 일이지요. 칼린군이 제 말을 완벽하게 알아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남성은 평균적으로 근육량이 여성보다 많죠. 여성은 평균적으로 마나량이 남성보다 많아요.
마나의 사용법은 두가지로 되는데, 마법에 적성이 있는 자라면 그걸로 마법을 사용하면 됩니다. 마법에 적성이 없는 자라면, 그걸 순환시켜서 에너지, 즉 힘으로 변환시킬 수 있죠. 그녀가 그 근육량으로도 그렇게 강력한 힘을 내는 것은 마나의 순환을 이용하는 겁니다.
개개인마다 타고난 근육량이 다르듯, 마나량도 똑같아요. 단 근육보다 그 양을 측정하는 것이 어렵죠. 마나량의 측정은 그런 고유마법을 가진 자들 만이 할 수 있어요. 아주 드문 마법은 아니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지니는 마법도 아니지요.
이 이야기는 조금 어려우셨을까요?"
내용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아직 이 언어를 통달하지 못한 칼린에게는 슬슬 한계였다. 칼린은 아직은 이른 이야기 같다며 감사를 표했다.
'마나인가.'
칼린은 그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자신의 괴력도 이 마나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해 뜬 것과 해 없을 때의 마나의 양이 다른 경우가 있나요?"
조금 선을 벗어난 듯한 질문에 리쿠르트는 꽤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런 경우는 발견된 게 없네요. 그럴 이유도 없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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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라는 것은 보통 그렇게 바쁘지 않다. 매일의 일과만 한다면 하루종일 일하는 날은 보통 생기지 않는다. 요나가 지금 몇일을 꼬박 일하고 있는 것은, 넓어진 영지에 추가로 적용되는 갖가지 사항들 때문이다.
그녀가 영지에 도착한 다음날 이미 영지 확대 문서는 작성이 끝났기에, 공무원 조세핀은 왕국으로 돌아갔다. 확대된 영지에 적용할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그녀만의 일이다.
상인은 기본적으로 돌아갈 때 호위할 기사들만 보내주면 됐기에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물론 알게 모르게 그 상인에게 도시 내 혜택을 누리게 해주고 있었지만, 그것도 전화국만 잘 이용하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칼린이었다. 집사를 내보내고 일을 하던 그녀는 아무리 일에 집중하려 해도 그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 감정은 사랑이나 호감같은 달콤한 감정이 아니었다. 점점 커져가는 미지에 대한 불안감과,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으면 그에게 경계를 풀 것 같은 자신에 대한 경계심이 섞인 감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이성을 한번 잃어버리고 일을 저지를 뻔 했다. 그 공격이 칼린에게 직격 했더라면, 그녀의 귀족으로서의 위신은 무너질 것이고 상인은 그녀에게서 신뢰를 잃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그녀의 공격을 받아 친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다만 커져가는 불안감은 그와 별개다.
그녀의 집사는 매우 유능하다. 아마 그 집사가 한 말은 사실이다. 만약 그렇다면, 칼린은 적의도 무엇도 없이 그저 색기를 흘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녀는 그 의미 없는 요염함에 홀려서 자신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때문에 그를 더 마주하기로 했다. 가로막는 것은 전부 맞부딪쳐 보기로 결심했기에. 당당하게 그를 마주하고 교육이 끝나면 당당하게 그를 팔아 넘긴다. 그렇게 다짐을 굳혔다.
더 이상 그를 경계할 필요 없다. 이제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뿐이다. 완전한 그를 마주하고, 온전한 자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요나는 그렇게 되뇌었다.
한편 칼린도 요나의 생각에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나의 생각이 아닌 흡혈의 생각이었다. 피를 빨린 사람이 어떻게 되는 지는 모르나, 그는 이미 입에서 바싹 마른 털뭉치를 뱉어 낸 경험이 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일단 그 지옥같은 숲에서 구해준 은인이다. 그런 모습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두려움이 커져가면서, 그가 잊으려 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다시 그를 좀먹었다. 성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잠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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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눈으로 밤을 지샌 그는 어제 생긴 상처가 사라진 것을 숨기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훈련장으로 나섰다. 서로에게 복잡한 심경을 가진 둘이 마주하게 되었다.
"칼린, 나는 너를 더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요나였다.
"나의 집사는 매우 유능하다. 그가 너가 안전하다고 직접 장담했다. 난 그의 말을 믿는다."
그녀가 어제처럼 목검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너에 대한 의문을 모두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도 이제 너를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하지."
그녀가 어려운 말을 많이 사용한 탓에 칼린은 그녀의 말을 반정도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말은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난 너에게 나의 검술을 전수하겠다. 너는 나에게 네가 어제 사용한 그 기묘한 기술을 가르쳐라."
요나가 꺼낸 최선의 답은, 칼린에게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잘 부탁한다, 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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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을 알려드리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칼린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요나의 표정이 숨기지 못할 정도로 구겨졌다.
"이유를 묻지."
칼린은 그녀의 피를 빨고 싶어서 그렇다고는 차마 못 말해서, 그가 생각해도 조금 어이없는 변명을 했다.
"나이가 찬 여성분과 살을 맞대는 것은 조금, 제가 꺼려집니다."
요나는 그 소리를 듣고 표정이 한순간 풀렸다. 그리고는 폭소하기 시작했다.
"아하하! 그 얼굴로 이성을 꺼리는 거냐! 진짜로 사람과 마주한 적 없이 어디에 갇혀 있다가 나온 것 같군!"
그렇게 말한 그녀는 한순간에 표정을 바꾸며 덧붙였다.
"신분의 힘도 모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
"예?"
칼린이 되묻자, 요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를 줍고 받아들인, 영주인 내가 너에게 '명령'으로 한 말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거절하겠다고?"
요나는 그에게 검이 닿을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오고서 발걸음을 멈췄다.
"오만하구나, 칼린. 아직 언어밖에 배우지 않아서 그렇겠지. 넌 지금 내가 하룻밤을 바치라고 해도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던 목검을 칼린의 배에 가볍게 찔러 넣었다. 칼린은 그녀의 말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뒤로 내빼고 싶은 것을 억지로 버티고 있는 칼린을 올려보며, 영주는 즐거운 듯 웃었다.
"더 이견은 없겠지. 대련을 시작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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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과는 다르게, 요나는 정말 제대로 그에게 검을 가르쳤다. 칼린과 수준에 맞게 대련을 하며 상황에 맞는 조언을 해주었고, 중간중간에 대련을 멈추고 자세나 대응방법 등을 설명해 주었다.
아직 마나를 순환시키는 법은 모르는 듯 하나 기초 근력이 뛰어나고 압도적인 반사신경을 가졌다, 그것이 요나가 내린 칼린의 총평이었다. 초석만 다져 놓아도 분명 훌륭한 전사가 될 것이다.
40분정도의 그녀의 강의가 끝났다. 남은 시간 동안은 칼린이 그녀를 가르칠 차례이다.
"어제 그렇게 맞았는데도 움직임이 바뀌지 않더군. 솔직히 좀 놀랐다. 좋은 근성이야.
칼린은 그 말을 듣고 왜 대련을 피할 핑계로 그걸 대지 않았는지 조금 후회했다. 하지만 그런 핑계를 댔어도 조금의 참작을 해줬을 뿐, 훈련은 그대로 진행했을 것이다.
"그러면.. 기술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영주님은 안전하게 떨어지는 방법을 아시나요?"
그가 굳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이세계에서 낙법을 뭐라고 하는지, 그 개념이 있기는 한지 몰랐기 때문이다.
"낙법 말이냐? 우리 국가의 군인들은 전부 배우지."
"그렇게 부르시는 군요. 그러면 그 낙법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그녀는 능숙하게 낙법들을 해냈다. 자잘한 차이는 있었지만, 칼린은 그 차이가 갑옷을 상정한 낙법이기에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낙법을 알고 계신다면 바로 기술을 가르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장 기본인, 제가 어제 사용했던 기술부터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괜찮을까요?"
"좋다."
칼린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겨드랑이 안쪽으로 반대손을 밀어 넣은 뒤, 팔 접합부로 단단히 잡아 몸을 돌리고 그녀를 허리로 튕겨냈다. 맞대고 있는 등으로부터 그의 욕구를 자극하는 향기가 그를 방해했다.
"한 번 당하고 나면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더 쉬워집니다. 그대로 해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칼린이 한 손을 내밀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방금 전을 회상하고서 최대한 그가 했던 것을 흉내 내었다. 칼린이 거칠게 바닥에 꽂혔다.
"힘으로 던져서는 안됩니다. 허리로 굴리며 떨어 질 때 튕겨 내 듯, 그래야 부드럽게 넘겨지고 편하게 넘겨집니다."
칼린이 바닥에 누워서 그렇게 말했다.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던 지라 세게 내팽게 쳐진 것이 차라리 그에게 좋았다.
수업이 끝날 때 즈음엔, 요나의 업어치기는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말도 안되는 재능이다.'
칼린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요나는 대련시간이 끝나자 등을 돌리고 성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발을 멈추고 칼린을 불렀다.
"아직 말하는 실력이 많이 부족하더군. 상식 수준도 심각해. 다음주부터는 상식에 대해서 강습을 듣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단어라도 최대한 외우도록."
그리고 그녀는 등을 돌렸다. 칼린은 머릿속으로 해석과정을 거치고는 급하게
"예! 영주님"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대련을 지켜보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리쿠르트를 따라 강의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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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님께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칼린의 실력은 충분히 빨리 오르고 있어요.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리쿠르트가 그 말을 꺼낸 것은 혹여 칼린이 자신감을 잃을까봐 였다. 그리고 대련이 끝날 때 마다 확연하게 바뀌는 칼린의 수업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신경을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칼린은 바로 사과했다.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리쿠르트는 오늘부터 그의 수업에서 산수를 제외하고 전 시간을 말하기. 듣기. 쓰기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주와 마주하는 시간이 따로 생긴 것으로 말하기와 듣기 실력을 더 높일 필요가 생겼다. 때문에 리쿠르트는 칼린과 대화하는 비중을 조금 더 늘렸다.
"혹여 이 나라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보세요, 칼린. 언어도 어느정도익혔으니, 상식의 예습같은 느낌으로 아는 한에서 가르쳐 드릴게요."
그녀가 그렇게 묻자 칼린은 잠깐 고민하다가 질문했다.
"이 나라에 피를 빠는 동물은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고서 리쿠르트의 눈치를 보다가, 질문이 너무 노골적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숲에서 살 때 빨린 적이 있어서 그렇다고 황급하게 덧붙였다. 흡혈욕구 때문에 멍한 상태라고 해도 이 숲에 흡혈을 하는 동물이 없다면 수습 불가능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리쿠르트는 그 질문에 작게 웃고는 대답했다.
"정말 칼린은 이상한 질문들을 하네요. 상식에 대해 질문해도 너무 당연한 상식이나 너무 좁은 범위의 상식을 물어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마치 회상하듯 잠깐 천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네요, 피를 빠는 동물이라... 모기나 흡혈박쥐 같은 것이 있겠지요. 아, 모기는 작은 벌레인데, 암컷들만 피를 빨아요. 박쥐라는 것은 가죽 날개를 달고 있는 쥐인데... 설명하기 힘드니 다음 수업 때 도감을 가져와 보여 드릴게요. 그 이외에 흡혈을 하는 동물은... 근방 숲에는 이 두 종류가 다 일 거예요. 저 멀리 동쪽에는 흡혈을 하는 지렁이도 있다고는 들었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서 흡혈이 무엇인지 단어를 풀어줄 동안, 칼린은 '혹시 피를 빠는 사람은 없는 건가요.'라 묻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보면 뻔한데다가, 이 질문을 하는 의도같은 것은 뻔할 것이다. 또 배척당할 수도 있다.
결국 그는 그 환각의 말대로, 사람들 속에서도 고립되어 버렸다. 아직 들키지 않았지만 흡혈욕구 때문에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계속되는 수업속에서 그는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단 둘이 있는 강의실이 그에게는 너무 시끄러워져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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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오늘의 작업 할당량이 끝나고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에 했던 대련을 되 세겨 보고 있었다.
역순서로 회상하고 있던 그녀는, 유도를 배웠을 때부터 시작해서 이제 검술 대련 전의 상황까지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칼린이 말했던 것을 떠올려 혼자 소리내서 웃었다.
"하, 하하! 뭐가 이성을 꺼린 다는 거냐, 얼빠진 자식."
그리고는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머금고서 마치 되뇌는 듯 말을 이었다.
"맹한 것. 과한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 같군. 교육도 순조로우니 한달정도면 바로 팔 수 있을.."
판다?
그 말을 하던 와중 그녀의 머릿속에 칼린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 만약 그가 괴물도 첩자도 아니라면, 굳이 그를 팔아낼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오히려 원래 괴물이나 첩자였으면 내 선에서 처리했어야 되는 것이 아니었나?
아니, 지금 그런 것을 찾는 것은 망설임이다. 그녀는 지금의 망설임의 이유를 생각했다. 아마 그의 기술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로서 재능을 가진 자를 가르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뭐, 내가 그 기술을 완벽하게 수행한다는 전제 하에 두 달 정도는 걸리려나..."
그렇게 되뇐 그녀는 자기 전에 마시는 술을 꺼내 한 모금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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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은 다시 기어올라오는 환각과 밤을 보내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마주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것들의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것 같아 칼린은 이불에 숨듯이 덮여 있었다.
'우리말을 무시하더니 예상대로 됐구나, 칼린. 아니지, 넌 그냥 전상민이야.'
"조용해."
'이 세계에 받아지지도 못했는데 왜 이 세계의 이름을 쓰는거야? 넌 원래 있던 세상에서는 죽었고, 이 세계에서는 받아들여 질 수 없는 전상민이야. 불쌍한 괴물. 우릴 먹은 업보야.'
"미안하지 않아."
'괴물에다가 거짓말쟁이구나, 미안하지 않다면 그 눈좀 떠보지 그래?'
"너희는 그냥 환각이야."
'괴물의 친구로서는 완벽하군. 죽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칼린에게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가 않아 뒤척이며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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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이 성에 들어 온지 6일차의 아침이 밝아왔다. 전날과 같이 그의 회복을 숨기기 위해 일찍 일어나서 탈의실로 뛰어가는 중이었다.
"일찍 일어나는군."
그 길에서 요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 성 안에서 그가 괴물인 것을 알게 되면 가장 위험할 사람에게.
칼린은 당황해서 급하게 발걸음을 멈추고 얼어버렸다. 다행인 것은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조명이 꺼진 성 안이 어두웠다는 것이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급하게 인사하고, 몸을 끌어 안 듯이 하고 칼린은 요나를 지나쳐 갔다. 요나는 왜 저러는가 생각하다가 자신이 지금 잠옷차림인 것을 알았다. 살짝 투명한 재질이었다.
"나 원, 이성에 서투르다 한 건 진짜였나."
그녀는 황급히 뛰어가는 칼린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