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낯선 세계에서
전상민이 강가를 떠나고 열흘이 지났다. 길이 있는 것도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정면으로 하염없이 걸으며, 중간에 강의 상류에 도달해서 또 이틀정도 머물기도 했었다.
전상민의 정신은 계속해서 피폐해지고 있다가, 6일차부터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더이상 자신이 가는 길에 사냥한 동물들의 환각과 진짜 동물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반면, 그의 육체는 현재 그 숲속에서 가장 월등한 것이 되었다.
흡혈을 지속적으로 해온 그는 이제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생물이 되었다. 시각, 후각, 청각의 비약적인 발달은 그가 미터 단위의 거리 밖에 있는 생물의 성별까지 구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민감해진 반사신경은 이제 다가오는 것이 느리게 보일 정도였다. 더 섬세해진 야간 투시 능력은 그에게 낮과 밤의 시야의 차이를 없애 줬다.
그가 입고 다니던 가죽은 그의 행동능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금방 망가졌다. 이젠 너덜너덜해지고 구멍까지 마구잡이로 뚫린 그 넝마를, 그는 다시 가죽을 수선하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대충 고쳐 걸치고 계속 전진해왔다.
"돌아갈 방법이 없을 거라니, 말이 좀 심하군."
그는 나무에 기대 그의 환각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가장 괴롭히는, 짓눌린 고라니의 환각이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돌아 간다는 거야. 달도 두개나 떠있는, 너가 살던 곳이랑은 아예 다른 곳이라고. 분명 너가 몇 년을 걸어가도 숲만 있는 원시 세계일 거야. 그냥 죽자.'
환각이 말했다. 정확히는, 그가 목소리를 바꿔가며 혼자서 얘기하고 있었다.
"입 닥쳐. 살아서 돌아가거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죽거나야. 널 죽인 걸 후회하지 않아."
'박정한 것 같으니, 살기 위해서 너를 따르는 동물들을 죽이는 너가 이제 와서 무언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아? 피까지 빨아먹는, 빌붙기만 하는 너는 이제 그냥 모기같은 놈일 뿐이야.'
"그건.."
말을 이으려고 하다가, 어느 순간 환각이 사라진 것을 눈치챘다. 그도 그것이 환각이고 환청이고 자신이 미쳐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독한 외로움이 그것을 부정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팔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손가락이 팔에 파고들어가며 흰색과 빨간색의 자극적인 색조화가 드러났다. 슬슬 해가 뜨고 있기에, 그는 그의 누더기 망토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11일차의 저녁이 왔다. 전상민은 자신의 능력에 익숙해진 이후부터, 나무 사이를 건너는 방식으로 이동하는 것을 택했다. 사실 그는 더이상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쉬지 않고 이동하는 것은, 그저 이것마저 그만 두면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면서 잡은 올빼미 새끼같은 것을 물고 달리던 그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성체의 흔적을 접하게 된다.
"이게 뭐지?"
그가 주운 것은, 바람에 날아온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천 조각이었다. 빛이 투과될 정도로 얇은 재질에, 자연에서 보기 힘든 고운 파란색을 띄고 있었다.
"!이건..."
전상민은 그 천을 보고 감격에 휩싸였다. 언제나 자신의 목 언저리를 노리고 있는 다람쥐의 환각조차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흥분했다. 그는 그 천을 잡아 늘려도 보고, 뺨에 갖다 대보기도 하며 이것 저것을 다 해보다가, 그 고양감을 못 참고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말 했지 씨발새끼들아!!"
좋아서 한참을 방방 뛰던 그는 한참 후 그 자리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지성체는 있다. 분명히 있다. 그리고 아마도, 내 생각보다 근처에 있다."
전상민은 혼잣말을 하며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다.
"어쩌면 그들은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줄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일단 이 빌어먹을 숲에서 탈출이 가능해!"
잠깐 혼자서 웃던 그는 다시 진지해졌다.
"다만, 이곳의 지성체가 전부 나와 같을지는 다른 문제로군. 이곳의 모든 지성체가 흡혈을 하고 나와 같다면 좋겠지만.. 아니, 사람 형태이긴 할까?"
그의 불안함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만이 다른 형태라서 그들과 적대되고 지성체들에게도 고립 당하는 것이다.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갈 것 같냐?'
'그 때 가서 실망하면 정말 괴로울 거야. 죽자고.'
"조용해봐. 생각 중이잖아."
그는 바쁘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만나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난 그들의 문화를 모르는데, 불쑥 튀어나왔다가 '신성한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같은 이유로 공격 당하는 거 아냐?"
그는 이런저런 고민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하루를 꼬박 보냈다. 그러나 그가 이세계에 온 후 가장 행복하게 보낸 날이었다.
전상민은 먼저, 그의 바뀐 생활패턴을 되돌리기로 했다. 그는 더 손쉬운 사냥을 위해, 능력이 강해지고 야간투시의 어드밴티지가 있는 야간에 활동했었다.
하지만 숲 근처를 지나다닌 다면, 지성체라면 분명 낮에 지나다닐 것이다. 해가 지고 가는 일은 리스크를 감안하는 일이니 드물 것이고, 어둠속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다면 경계하는 그들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 자신과 같은 흡혈귀같은 타입이라도 낮에 마주하는 편이 훨씬 도망치기 편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밤을 완전히 지새우고 바로 숲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두번째로, 지성체를 만나면 그의 누더기를 벗고 만나기로 했다. 그게 덜 문제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언어가 다를 경우, 그는 일단 바디 랭귀지를 사용해보며, 인사같은 것은 이쪽에서 최대한 흉내를 냄으로서 자신이 지성체라고 보이기로 했다. 섣불리 말했다가 그 언어가 무슨 일을 초래할 지 모름으로 최대한 말은 안 하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이로서 그들을 만났을 때 대처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의 12일차의 아침은 그 어느때보다 활기찬 발걸음으로 시작되었다.
두시간정도 걸었을까, 그는 마침내 바퀴자국이 남아있는 길을 발견했다. 짐승들이 다니며 자연스레 생긴 길같은 것이 아닌, 제대로 가공된 흙 길이 거기에 있었다.
"하..하하"
전상민은 마치 끌려가듯 양 팔을 앞으로 휘저으며 길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그 가공된 평평함을 몸으로 즐기듯이 그 위를 굴렀다.
"아-하하!"
잠깐 웃으며 자축하던 그는 누군가 오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옛날 중세에는 표지판에 걸린 모자에 인사하지 않으면 처형한다는 이상한 법률같은 것도 있었다고 들었다. 지성체들의 문화 수준을 모르는 이상 조심의 조심을 거듭해야 했다.
그는 그 길에 누군가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이 인간형태의 지성체라면 그 때 자신의 넝마를 벗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전상민은 몸을 수그리고 풀숲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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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라 클로 반 요나는 왕국에 속한 벨카라는 작은 땅의 영주이다. 선대부터 큰 무공이 없어 업신여겨지던 그녀의 가문은, 이번 전쟁에서 그녀가 세운 공으로 상당한 권한을 얻게 됐다.
그녀는 국왕의 부름으로 왕국에서 갖가지 헌상품을 받고, 넓어진 땅만큼의 문서를 새로 작성하기 위한 공무원과 그녀의 영지에서 상품을 사 갈 왕국의 상인을 동행시킨 마차에 타고 있었다. 전신을 덮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마차를 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드디어 자신의 영지에도 수세식 양변기의 제조기술이 전달된 다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투구를 쓰기 편하도록 짧게 묶어 올린 금발을 풀고, 바람을 만끽하며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공무원이 차 멀미에 약간 수그리고 있었기에 생각보다 마차 안이 조용해지자, 상인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강하신 영주님이 계신 영지라면 분명 판매하실 상품이 많으시겠군요?"
그는 왕국의 상회 중에서도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상회의 우량 상인이다. 요나는 신분차에도 불구하고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왕도가 익숙하신 상인분께서 보시기에는 시골 촌동네로 보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 영지에서 최고로 치는 것들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아하하!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기대하겠습니다."
상인이 튀어나온 배만큼 호탕하게 웃으며 응대한다. 요나도 가볍게 웃으며 가죽 주머니에서 그녀의 담배를 꺼낼 때였다.
갑작스럽게 멈춘 마차에 차 안이 흔들렸다.
마차가 흔들리면서 실수로 담배를 부순 요나는, 조금 불쾌해져 마부석을 향해 작은 창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귀중한 손님들과 짐이 있다."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에는 왕국의 공무원이 탑승 중이라는 의미를 가진 보라색 기가 꽃여 있었기에, 어중이 떠중이 들은 멈춰 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이것이 분명한 마부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 그치만, 영주님..."
마부는 뭔가에 홀린 듯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입조차 다물지 못하고 파르르 떨고 있는 마부를 보고, 그녀는 이게 마녀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선을 잡은 건가.'
생각보다 귀찮아질 것 같아 모두에게 말을 전달하려 할 때였다. 자연스럽게 마부의 시선 끝을 따라 갔다가 그녀도 곧 마부와 똑같은 반응으로 굳게 되었다.
"맙소사.."
그녀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색기를 뿜어내는 나신의 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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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국경선에서 전쟁 중 딱 한번, 현혹마법에 걸려본 적이 있다. 적이 고용한 마녀가 시전한 것이었다. 마법을 담은 진흙을 대상의 눈에 뿌려서 거는 방식이었다. 그 때 그녀는, 말그대로 전장 한 가운데에서도 정신을 잃게 만들 만한 요염한 환각을 봤었다.
그녀는 그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마부도 진흙을 맞지는 않았으므로 현혹마법은 아닐 터였다.
마차가 멈추고 확인하러 간 사람도 움직이지 않고 있자, 상인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궁금해서 옆의 창을 열어 머리만 빼고 상황을 봤다. 이윽고 전상민을 발견한 상인은 앞선 두사람과는 달리, 감탄사를 내뱉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실레합니다, 숙녀분, 아니 신사분. 왜 이런 곳에 알몸으로 계십니까?"
전상민은 풀숲에서 꼬박 하루를 대기하며 기다리다가, 마차와 마부를 보고 인간과 문명이 너무 반가워서 뛰쳐나갔었다. 반쯤 튕겨지듯 나온 전상민에게 말들이 놀라서 급정거했고, 마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어서 마차 안에서 금발의 기가 세보이는 미녀가 나와서 무슨 대화를 하다가 자신을 보더니 또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는 역시 누더기라도 걸치고 나오는 것이 맞았던 것 같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인이 나와서 그에게 인사했을 때, 상인이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의는 없어 보였기에 상당히 기뻤었다. 그래서 그는 준비했던 대로, 상인이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다.
"오호, 말을 못 알아들으시나요?"
전상민이 가만히 있자, 상인이 입을 가리키고 엑스자를 만들었다. 전상민은 거기에 손가락을 둥글게 말며 응답했다.
"'그것' 에게서 떨어지세요, 에테롬공!"
요나가 상인에게 소리질렀다. 그리고 검을 뽑아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인은 당황하며 요나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잠깐, 왜 그러십니까, 요나경. 그저 아름다운 청년일 뿐이에요."
"말도 못하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게 사람일리가 없어요, 에테롬공!"
때때로 떠돌이들이 세상에 있는 갖가지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다. 요나도 일단은 귀족인지라, 어렸을 때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마을에 온 떠돌이들을 성으로 초대해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었다. 그리고, 저 정도로 요염하게 색기를 뿜어내는 것은 괴물이 틀림없다고 그녀는 판단했다.
"진정하세요, 요나경. 전장에서 돌아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신경이 많이 예민해 진 것 같습니다. 그는 말은 못하고 있어도, 지성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요. 외국인일지도 모릅니다."
상인이 그렇게 말하자, 요나는 검을 치우지 않고 전상민에게 겨누며 말했다.
"그렇다면, 에테롬공. 무례를 용서하시고 들어 주십시요. 만에 하나 그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우리말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칩시다. 그렇다면 에테롬공은, 이제서야 전시상황이 끝난 우리 국가에 알몸으로 있는 외국인이 의심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사실 요나의 경계의 이유는 하나하나 합당한 것이었다. 지금 마차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국가 귀빈이다. 상대의 역량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제공격의 기회조차 잃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다만 전상민은 공격의 의사가 없었고, 갑작스레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여성과 분쟁상태를 보며 이걸 어떻게 해결할 지 머릿속이 하얘지고 있었다.
"요나경, 여기는 최전방이 아닙니다. 접경지도 아니고, 전쟁의 업화에도 닿지 않은 시골입니다. 그런 장소에 외국인 첩자가 들어온다고요? 그것도 알몸으로 그 근처 영주에게 덤벼들면서?"
상인이 침착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상인은 무엇인가를 도울 때엔 인간이든 아니든 손해 득실을 계산합니다. 지금 저것은 적대감 없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나중에 라도 교육을 끝마쳐 우리의 말을 완벽히 구사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적대가 없고 저렇게 아름답다면, 솔직히 저는 차라리 인간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요나는 그 상인이 벌써 계산 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인정을 베풀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요나경, 이번만큼은 제 얼굴을 봐서, 저 분을 마차에 태우고 간 뒤, 영주 성으로 모시자구요. 요나경의 영지에서 찾으신 분이니, 저에게 파실 의향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주시구요."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전상민을 마차로 안내했다. 요나는 상인의 말을 전부 인정하고 이해했으나, 그게 께름칙함을 전부 지워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 마차 안에는, 못마땅하게 팔짱 낀 요나와 왠지 조금 상태가 좋아진 공무원, 상인과 담요를 두른 전상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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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민은 같이 동승한 여성의 기분이 심히 안 좋아 보였기에, 과도하게 붕 떠있던 기분이 조금 진정됐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그저 조용히 있었다. 다행히도 맞은편에 앉은 상인과 공무원이 계속 질문을 한 덕분에 마차가 조용하지는 않았다.
"이름은?"
상인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손가락을 가리키고 글을 쓰는 시늉을 했다. 전상민도 대충 뜻은 알아들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기에 못 알아 들은 척하고 있었다. 그러자 상인이 다른 사람들도 한번씩 가리키며 이름을 나열했다.
"요나, 조세핀, 에테롬."
그리고 나서 다시 자신을 가리키는 상인을 보며, 전상민은 원래 자신의 영어이름인 마이크 같은 이름을 사용하려 했다가, 여기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고민하던 전상민은 손을 X자로 교차하며 이름이 없다고 밝혔다.
"이름도 없다니, 정말 무슨 늑대가 키운 자식 같은 걸까요?"
"그럼 몸이 저렇게 깨끗할 리가요. 왕궁에서 목욕하고 나온 저보다도 깨끗해 보이는데."
요나는 못마땅한 마음에 조금 신경질 적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네요. 머리카락에는 꿀이라도 바르신 건가요?"
조세핀, 즉 공무원이 그냥 이렇게 물어봤다가, 그가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기억해 손짓 발짓을 동원해 설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곧 꿀을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나오시나?"
상인이 그렇게 말하며 입 근처에서 손을 쥐락펴락했다. 전상민은 자신이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자신의 목을 가리키고 손을 입모양으로 쥐락펴락했다가,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
"아"
하고 목소리를 냈다.
"맙소사, 목소리까지 끝내 주는 미성이로군."
"그래야 사람을 홀려서 잡아먹지요."
계속 한마디씩 붙이는 요나에게 상인이 화살을 돌렸다.
"그렇다면 요나경, 이 아름다운 괴물의 이름은 요나경이 짓지요!"
"옛? 제가 왜..."
"요나경의 것이니 요나경이 이름을 붙여 야지요!"
그녀는 이 상황이 굉장히 불쾌했다. 지금 이 행동들의 이유는, '지금의 주인'을 요나로 굳히기 위한 상인의 계략이다. 만약 그가 진짜 요괴같은 것이었다면, 그는 주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소정의 보상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즉, 상인은 그가 안전한 것이라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 책임권 밖에 있겠다는 뜻이었다.
"칼린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부하가 살던 지방의 비속어로, 남창이라는 뜻이었다. 상인은 조금 당황했으나, 뜻을 모르는 공무원은 벌써 예쁜 이름이라며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름으로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아무튼 전 칼린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꽤 북적이게 된 마차 안에서, 전상민은 뭔가 자신의 이름이 칼린으로 결정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곳에서 사용하게 될 이름을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칼린."
그 나즈막한 소리에 마차 안에 있던 모두가 조용해졌다. 상인은 가만히 있다가 포기한 듯 고개를 숙였으며, 공무원은 신나서 더해보라며 손짓하기 시작했다.
요나는 그런 그를 보며 잠깐동안 이름을 남창으로 지은 것을 후회하다가, 그를 더 뚜렷하게 바라보면서 다시한번 말했다.
"그래, 칼린. 넌 칼린이다."
이세계에서 이름까지 생긴 전상민은 전생에 주민등록증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이 세상에 한 걸음을 내딛은 느낌. 그는 자신의 이름을 계속해서 되뇌이며,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 지 생각했다.
숲 밖에서 보는 세상은 또 색다르게 아름다웠기에, 창 밖을 보며 자신이 빠져나온 숲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잠에 들었다.
그가 어느 순간 잠들자 소란스러웠던 마차가 다시 조금 조용해졌다. 조금 그 상태가 유지되다가, 요나가 상인에게 조용히 으름장을 놨다.
"만약 저것이 제 부지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힌다면, 가볍게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능구렁이같은 대답에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던 요나는, 주머니에서 부러진 담뱃잎을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제는 외워버린, 벨카로 가는 길을 바라보며 크게 한모금을 빨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