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낯선 세계에서 (2/164)



〈 2화 〉낯선 세계에서

추위 때문에 전상민이 눈을 뜬 것은 아직 짙푸른 색이 세상을 덮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딱딱하고 차가운 자갈 위에서 반쯤 기절하듯이 잠들었다가, 약해진 장작불에 추위를 참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는 눈을 뜨고 자신의 상태가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음을 확인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잎사귀라도 모아 와서 그걸 덮고 자고 싶었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애매한 시간이기에 행동하기에는 섣부르다고 판단했다.

다시 잠드는 것도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한 그가 앉아서  너머의 일출이나 구경하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맞은편에 거무스름한 초록색의, 구형 군복같은 색상을 한 곰이 있었다. 일어서면 대략 3미터가량 될  같은 크기는 둘째 치고, 그의 이마에 당당하게 달려있는 흰색의 일각이 위협적으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전상민은 굳었다. 사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성인 불곰이 트럭도 따라잡는 다는 것을 생각하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그는 그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압도당해서 숨 쉬는 것도 겨우 하는 중이었다.

곰은 강에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아직은 전상민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넙죽 엎드리는 걸로 자세를 바꾸고 싶었지만, 움직임을 읽은 곰이 이쪽으로 뛰어오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기에 얌전히 있었다.


그러자 곰이 강으로 들어와서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전상민의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전에 겪어온 모든 적색 상황  최고의 긴장상태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나쁘게도 곰이 튀긴 물 한방울이 그의 몸에 닿았다.

"아.."
큰 소리도 아니었다. 간간히 독서실에도 울리는, 하품 후에 나오는 작은 탄식소리, 딱  정도 수준의 소리였다. 그러고는 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의 불운은, 그가 마주한 곰이, 이 숲 안에서도 손 꼽히는 청력을 지닌 종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와 곰이 눈을 마주했다.

'제발, 그냥 돌아가라, 제발'
그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눈을 마주하는 것은 전에 인터넷에서 본 지식 덕분이다. 눈을 떼지 말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면 곰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는 급한 나머지 인터넷에서 배우는 지식은 믿을 게 아니라는 것도 잊었다. 곰과 그의 대치가 잠깐동안 이어졌다.

'제발, 좀 돌아가라'
그의 필사적인 부탁이 통한 것 처럼, 곰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다가, 네다리로 황급하게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전상민도 그 곰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한참을 쳐다보다가, 이내 기력이 소진된 듯 옆으로 넘어졌다. 그는 그렇게 일출도 놓치고 누워 있었다.


그가 제정신을 차린것은 해가 중천에 있을 때였다. 단 이틀만에 너무 많은 감정기복의 변화 때문인지 그의 몸은 상당히 지쳐있었다. 어지로운 몸을 질질 끌면서 일단은 식량 확보가 최우선일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 숲의 최상위 포식자를 마주한 그는 자신의 활동범위를 더더욱 줄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낚싯대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 정도의 손재주는 없었다. 그렇다고 몸을 따뜻하게 할 수단도 없이 무턱대고 물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을 수도 없다. 적어도 옷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가 숲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것은, 그의 몸이 생각보다 운동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병든 자작나무같은 굵기지만 꽤 괜찮은 수행능력이 있었다.


두번째로 여기 있는 동물들의 경계가 상당히 얕다는 것이다. 근처까지 가도 도망치지 않는 동물들을 보고, 그는 이 숲 전체가 하나의 양식장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알게 된 것은, 우연히 알게 된 것이지만, 가장  만한 것이었다.

그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근처까지 갔는데도 도망치지 않고 있던 토끼 '비슷한 것'을 잡으려고 했다가 그게 도망치기 시작할 때였다.

"제발!"
그의 간절한 마음이 육성으로 터져 나오자,  토끼가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봤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차-착하지? 이리와?"
그는 정말 빌어먹게 필사적이었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처절했다. 그 토끼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그의 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그 품에 안긴 토끼를 잡고 멍하니 있다가, 이게 무슨 초능력의 일부인지 이 숲이 양식장인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고양감때문에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기에 이내 토끼를 끌어안고 발까지 구르며 춤을 췄다.


전상민은 그 이후에도 강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동물을 잡고 실험해 보았다. 그리고 다음의 것을 알게 되었다.
1. 소형동물들은 내 말을 듣는다. (대형 동물들은 아직 모름)
2.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한다.
3.  능력은 동물과 눈을 마주쳐야 사용 가능하다.
4. 동물들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은 시킬 수 없다. (‘춤춰봐’ 같은 것)
그는 왜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 궁금했지만, 솔직히 야시꾸리한 몸으로 이세계에 버려졌는데 이제와서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생각도 했다. 뭐가 어찌됐건 이제 식량을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대략 여섯 마리 정도의 각기 다른 동물들을 강가까지 데려온 그는, 가장 덜 죄책감 느낄 만한 것을 고르고 있었다. 부상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다람쥐 비슷하게 생긴 것을 발견한 것도 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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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딱히 정신을 잃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에게는 그저 눈앞이 번쩍 하더니, 입안에 이물감이 있다는 정도의 감각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냥 가벼운 현기증 정도였다. 다만 그는 지금 이상하게도 상태가 아주 좋았다.


그는 그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뱉어 보았다. 무참하게 씹혀서 털덩어리만 남아있는, 고양이가 이따금 뱉는 그것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털가죽에 점박이 무늬 덕분에 그는 그것이 자신이 가져온 다람쥐같은 것이었음을 알았다.

전상민은 자신의 입 안에서 피 비린 내가 진동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 피 비린 내가 왠지 향긋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망연자실하게 자신의 입에서 나온 털뭉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맹렬하게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씨발, 씨발할, 개씨빨!"
계속해서 속을 게워내려고 하다가, 손가락까지 집어넣었는데도 잔털만 나오는 것을 보고 그는 지쳐서 그 자리에 풀썩 앉았다. 두려움이 느껴 지기 이전에 너무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다른 잡아 놓은 동물들은 어디로 갔는지, 왜 피가 이렇게 맛있는지, 왜 이렇게 상태가 좋아졌는지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와는 별개로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불을 지펴야 했다. 그의 손바닥은 어제 나뭇가지를 비비다가 넝마짝이 되었다. 여러가지로 생각하면서 아려 오는 통증에 그는 소리없이 울며 불을 지폈다.

불을 지피고 그가 알게 된 것은 이정도였다.
1. 나는 피를 마신다.
2. 피는 맛있다.
3. 다른 동물들은 내가 이성을 잃었을 때 도망친 듯, 주변에서 찾을  없었다.
4. 피 조금만 마신 걸로도 허기나 피로가 사라졌다.
5. 밤눈이 밝아졌다.
6. 해가 지자 상처입은 것이 회복되었다.
5번은 그가 어제와는 다르게 해가 지고도 세상이 잘 보이는 걸 깨달으면서 알았다. 그는 마치 공포게임에서 밝기를 최대로  느낌 같다고 생각했다. 6번은 불을 지피면서 알게 된 것이다. 해가 져가면서 그의 손에 있던 상처가 눈에 보이도록 아물었다.

그는 자신이 흡혈귀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인식했다. 배고픔이라는 감각이 있는 이상 식사로 허기를 채우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흡혈 쪽이 효율이 훨씬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하지 않으면 오늘처럼 또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어둠속이 이상할 정도로 잘 보이는 처음 하는 경험에 그저 하염없이 맞은편 숲을 쳐다보다가, 자신에게만 모든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 홧김에 힘껏 자갈을 하나 쥐고 던졌다.

"씨발할!"
그리고 그 자갈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 나무  여섯 그루를 뚫고 지나갔다. 고요한 숲에 한바탕 소음이 일었다. 그는 잠깐 자신이 한 일을 쳐다보다가, 목록에 한가지를 추가했다.
7.해가 지면 나는 상당히 강해진다.


망연하게 오늘 자신이 한 일을 떠올리던 그는 이런 영문도 모를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다가 낙심했다. 불안감이 꼬리의 꼬리를 물며 커져갔다. 그가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이 세계에 지성체가 있기는 할지, 있다면 자신과 같은 모습일지 등이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무엇보다 오늘 자신이 한 일이 너무 괴로웠다.


그는 자신이  다람쥐였던 것을 묻은 곳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상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기에 그냥 누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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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민은 목이 까끌 거리는 감각에 눈을 떴다. 목 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마치 안에서 무엇이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 그가 반쯤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목 안쪽이 구불텅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겁먹은 그가 뒷걸음질치다가 넘어지자, 그 움직임은 점점 커지다가, 그의 목젖을 찢으며 나왔다. 그 안에 있던 것은,


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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튕기듯이 일어난 전상민의 몸은  범벅이었다. 그는 일어나서도 거친 숨을 내뱉으며 한동안 자신의 목을 더듬다가, 그것이 전부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세계에서는 처음으로 담배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햇빛이 따뜻하게 내려앉은 오전이었다. 그는 꺼진 장작불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일어나서 오늘 할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예상 대로의 능력이라면 옷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첫 끼는 놀랍게도 새였다. 그가 사냥을 다닐 때 계속 들려오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로 우는 새였는데, 그는 흡혈을 할까 구워서 먹을까를 고민하다가, 식사로도 허기가 채워 지는지 확인을 위해 털을 뽑아 구워 먹었다. 그에게는 꽤나 무리인 작업이었기에 그는 참새의 배를 가르면서 계속 헛구역질을 했다. 허기는 채워졌으나 피로도 증가했다.

 끼를 해결한 그는 강 너머로 가보기로 했다. 평소보다   깊이 들어갈 예정이기에, 그는 나무에 표식을 남기기 위한 작은 돌을 챙겨갔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빛이 점차 주홍이 될 때쯤, 그는 자신이 찾던 것을 찾았다. 그것은 고라니와 비슷하게 생긴, 아니 그냥 고라니였다. 지 멋대로 흉 스럽게 자라난 이빨부터 맹하니 맛 간 듯 한 표정까지 고라니  자체였다. 다만 몸의 색이 나무색과 닮은 위장을 띄고 있어서 전상민도 자칫하면 놓칠 뻔했다.


그가 찾던 것은, 물론 고라니가 아니다. 어쨌든 대형동물이면 좋았다. 그는 몸을 낮추고 공격당하지 않도록 천천히 고라니에게 다가간  눈을 마주했다.


'내 예상이 맞았나.'
고라니는 전상민과 눈을 마주하고 천천히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전상민은 뒷걸음질 치면서 자신이 해 놓은 표식을 따라 강가로 갔다. 그가 확인하려던 것은, 대형 동물에게도 자신의 능력이 통할지의 여부였다.


천천히 숲 밖으로 나온 그는, 타오르고 있는 듯한 강가를 등지고, 고라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큰 돌을 집어 들었다. 전상민에게는 그저 이미 몇 놈을 죽였으니 더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는 감각이었지만, 사실 그의 정신이 이 삼일  극한을 경험했기에 일종의 각성상태를 겪고 있는 덕분에 생긴 감각이었다.

그는 큼지막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라니의 머리에 돌을 내리 찍었다. 느린 울음소리를 내며 세뇌가 풀린 듯 엎드려서 네 다리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버둥대며 허공을 휘젓고 있는 고라니를, 그는 제대로 마주하면서 다시 머리를 찍었다. 세번째부터는 반쯤 무아지경으로 찍기 시작하다가, 찍는 감각이 질퍽해 지는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살아야 해. 살아야 해."
라고 뇌까리며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고라니의 시체를 내리 찍는 중임을 눈치챘다. 그는 더이상 원형도 알아볼 수 없게 터져버린 고라니의 머리를 멍하니 지켜보다가, 아무런 감상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닫고 그저 기계적으로 합장했다.

"살아서 돌아가자. 적어도 원하는 방식으로 죽자."
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그 말을 되뇌었다.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그저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그가 고해성사하듯 웅크린 사이 주홍이 지나가고 다시 어둠이 내려 앉았다. 전상민은 그걸 눈치채고, 천천히 일어나 고라니 시체를 짊어졌다. 해가 지기 전의 그에게는 무리였을 것이다.

그는 강 너머의 모닥불을 두는 장소 근처로 시체를 질질 끌고 간 뒤, 돌을 하나 주워 깨트리고 갈아내서 가죽을 찢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민감해진 후각에 악취가 강렬하게 파고들었지만, 그는 반사적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냄새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찢어낸 가죽을 자갈 위에 고르게 폈다. 그리고 방광을 꺼내 뒤집어 강에 깨끗이 씻어내고는 가죽 옆에 뒀다. 그걸로 물통을 만들 생각이었다.


"살아야 했어."
벌거벗고 갈라진 고라니 시체를 보며 정당화하듯 내뱉은 그는 그 시체가 보이지 않도록 저 멀리에 던졌다. 문득 피와 고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사냥이 힘든 일도 아닐 것을 알았기에 미련을 버렸다. 그는 불을 붙이기 위해 나뭇가지를 들었다가, 밤눈이 이렇게 밝으니 더이상 필요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대충 누워 버렸다.

전상민은 감상적인 데에 지쳐버렸다. 단 3일만에, 그가 여지껏 살아오며 가졌던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교감이 그리워져서 혼자 자장가를 부르다가 잠들었다.

#

4일차의 아침에서야, 그는 그의 위생상태가 처음과 그닥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강에서 물로만 씻는데 머릿결이 유지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말그대로 알몸으로 숲을 활보하는데 몸에 벌레에 물린 자국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전생에서도 느끼지 못한 입안의 개운함을 아침마다 느낄 수 있었다.

일어나서 말리고 있던 것들을 살펴보니,   아직 축축한 채였다. 애초에 하룻밤만에 되는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므로 실망은 하지 않았다. 그는 갈아 놓은 돌을  갈아 나름 잘드는 돌 칼까지 만들어 냈고, 그걸로 피를 담아 마실  있는 그릇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저 가죽과 방광이 마르는 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보기로 했다.

근처에서 두꺼운 나무토막을 주워 온 그는 돌 칼로 그 안을 둥글게 파내기 시작했다. 생각한 것처럼 둥글고 깊게 파내는 것은 무리였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형태로 나오게 됐다.
"이 정도면 다이소에서 팔아도 되겠다."
그는 혼잣말이 늘었다. 그도 알고 있다.
이어서 그는 사냥을 나섰다. 딱히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다. 뭐라도 해야 겠다는 생각에 움직였을 뿐이다.


"이리와!"
그는 이제 동물을 부를 때, 최대한 목소리를 내서 부른다. 그에게는 그거라도 필요했다.

"그래 그래, 따라와!"
이번에 사로잡은 것은,  끝이 붉은색인 멧돼지같은 것이었다. 귀가 쳐져 있기에 그는 그것이 멧돼지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하다, 착해."
그는 자신의 말을 잘 따르고 있던 그것의 머리에 어제 썼던  큰 돌을 다시 사용했다.

"괜찮아, 괜찮아."
어제와는 다르게 계속해서 상냥하게 말을 걸면서, 눈을 보면서 내려찍었다. 덕분에 어제처럼 머리를 완전히 곤죽으로 만드는 일은 피할  있었다.


멧돼지의 다리를 질질 끌며 강을 건넌 그는, 지나가면서 생긴 붉은 길을 잠깐 보다가, 피 묻은 자갈을 하나 집어 들어 핥아 보았다. 그리고 오늘부터 피를 마시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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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질 때까지 시체를 방치해 두던 전상민은, 해가 지자 본격적으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튼튼하고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서 간단한 받침대를 만든 그는,  위에 낮에는 못 들던 멧돼지 시체를 올리고 돌 칼로 배에 상처를 냈다. 이윽고, 돼지의 피가 그릇에 모이기 시작했다. 모닥불에 불을 붙이고 돌아와 보니, 피는 이미 얕은 그릇에서 넘쳐 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 그릇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

입을 대는 부분이 두꺼운 탓에, 반정도는 그의 몸을 타고 흘러 내렸다. 장작불에 번들대는 그 장면은 고혹적이다 못해 귀기가 서린 듯 했다. 담긴 피를 전부 마신 그는, 모처럼의 고양감에 마구 소리지르며 춤췄다. 근처에 있던 모든 동물들은 그 직감으로 위협을 느껴 자리를 떠났기에, 숲에서는 강이 흐르는 소리와 그가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만이 퍼져 나갔다.

그는 그날 꿈을 꿨다. 자신은 옛날 몸 그대로이고, 가족과 함께 외식을 가는 꿈이었다. 식당에서 만화에서나 나오는 큰 은색 쟁반에 원형 뚜껑이 덮여서 식사가 나왔다. 웨이터가  뚜껑을 열자, 거기엔 아직 살아있는 고라니의 잘린 머리가 있다. 가족들이 전부 토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그걸 맛있게 먹는다. 마지막에는 게걸스럽게 머리통을 들고서 먹더니 흘러나오는 피 한방울까지 빨아먹는다. 가족들은 경악하며 그를 피한다. 그는 울면서 그것을 계속 먹는다.

그는 눈을 떴지만, 의외로 불쾌하지는 않다. 그런 꿈에서 라도 자신의 가족을 다시 본 것이 퍽 기쁘다. 그렇게 느낀 그는 이윽고 고라니 가죽과 방광의 건조 진척상태를 본다.

방광은 갈색으로 변색까지 되어 완전히 말랐고, 가죽도 저녁에는 다 마를  했다. 그는 그걸 엮을  있도록 튼튼하고 가는 덩굴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그는 모르는 일이지만, 어젯밤의 소동으로 그 근처에 살던 작은 동물들은 전부 떠나갔다. 때문에 덩굴을 찾아 다니면서 동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에 그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어차피 자신도 이곳을 곧 떠날 것이니 별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해가 떨어지고 그는 가죽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덩굴로 엮어서 치마와 망토를 만들었다. 되도록이면 바지와 윗도리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 정도 손재주는 없었다. 그리고 방광으로 만든 물통에 강물을 조금 담고, 덩굴로  주둥이를 묶었다. 그는 그릇과 돌 칼을 가지고 갈까 고민하다가, 돌 칼은 챙기고 그릇은 두고 가기로 결정했다. 망토의 안쪽에 돌 칼을 얇게 꽂아 넣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난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망설이지 않고 강 너머로 길을 나섰다.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된 이상, 이 숲에서도 개죽음 당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숲을 벗어나서 이 세상에 있을지도 모르는 지성체가 만나고 싶었다.
"가자."
그는 짧게 혼잣말을 하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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