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춘천행(1) (69/74)



〈 69화 〉춘천행(1)

4월의 지하철은 개성이 넘친다.
추위를 많이 타는지 초겨울에나 입을 법한 외투를 입은 사람.
벌써 더운지 반팔을 입은 사람.
멋 부리기 가장 좋은 계절답게 코디에 신경  티가 나는 사람.

이곳에선 차창 안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인다.
타인의 옷차림, 표정, 대화 소리, 웃음소리.
그래서 가끔은 운전대를 내려놓고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쁠 때도, 세상이 날 버린  슬플 때도.
상관없다는 듯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의 지하철은 어쩐지 묘한 안정감을 준다.

특이하게도 사람이 가장 많은 칸을 찾아 이동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어디야?  와 가?"

"저 이미 도착해있어요. 오빠는 어디세요?"

"아, 나  정거장만 가면 돼. 내려서 다시 전화할게."

"네, 조심히 오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음성은 차분하고,  예의 있었다.

용산역에 도착해 승강장으로 내려가니 저쪽에 그녀의 옆모습이 보였다.
미리부터 좌석 칸 앞에 다소곳하게  있는 걸로 그녀가 어떤 성미를 지녔는지 느낄  있었다.
평소에도 지하철 앱이 알려주는 빠른 환승 구간에서 타고 내리지 않으면 몸에 가시가 돋칠 테다.

눈치채지 못하게 뒤로 돌아가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워!"

어깨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으나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올 뿐이었다.

"오셨어요? 전화하신다더니."

친구야, 놀래키는 사람 기분도 좀 생각해주렴.

"그냥 왔어.  어차피 자리 앞에  있을게 뻔한데 뭘. 어째 놀라는 시늉도 안  주냐."

"인기척이 다 느껴지는 걸 어떡해요. 지금이라도 다시 해 드려요?"

"됐다, 됐어. 그게 더 비참해. 뭐 좀 먹었어?"

"아니요, 오빠 오면 같이 먹으려고 했죠."

아침이라기엔 늦고 점심이라기엔 이른, 요즘 말로 아점. 딱  시간이었다.

열차의 매점 칸을 이용할까 하다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고, 바깥의 토스트 가게에 줄을 섰다.

"오빠, 메뉴 골랐어요?"

"응? 우리 차례 아직이잖아."

"지금 미리 골라놔야죠. 앞에  명 밖에 안 남았잖아요. 주문을 빨리빨리 해줘야 줄도 빨리 빠지죠."

 시작되는 잔소리에 앓는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어우,  시작이네. 나는 햄 치즈 토스트로 할래."

"또 시작이라뇨. 누가 보면 제가 맨날 들들 볶는 줄 알겠네요? 당연히 미리 골라놓는 게 맞잖아요."

동네방네 떠들듯 크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다지 작게 말하지도 않은 터라, 우리의 대화를 들은 뒷사람들의 시선이 다급하게 메뉴판을 향하는  느껴졌다.
알겠으니 그만해⋯ 창피하다고⋯.

"뭐 드릴까요?"

"햄 치즈 토스트 두 개 주세요."

"네. 죄송하지만 지금 카드리더기가 고장 나서 현금이나 계좌이체만 가능한데 괜찮으실까요?"

"네, 괜찮아요. 그럼 현금영수증 해주세요."

"그것도 리더기로 하는 거라서⋯."

"그러면 번호 적어두셨다가 나중에라도 처리해주세요. 확인할 테니까 절대 빼먹지 마시고요."

"네, 네. 계산 받았습니다."

토스트 두 개 가지고 왜 그러니⋯
그녀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건 알고 있지만, 이럴 때면 괜히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그녀의 신조에 딱히 반박하고픈 마음은 없었으나, 민망한 건 별개지 않나.

빵이 노릇하게 구워지고 야채와 버무려진 계란이 익어가며 고소한 향기를 풍겼다.
철판 위에서 만들어진 국민 간식이 손에 쥐어지고 자리를 뜨려는 찰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장님, 앞의 손님들은 쿠폰 받아 가던데요⋯?"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와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벌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여기 다시 올 일도 없는데 쿠폰은 또 왜 챙기니.

"오빠, 같이 가요."

"어, 빨리 안 오고  하고 있었어."

"아니. 글쎄, 쿠폰을 안 챙겨 주잖아요."

"여기 자주 올 일도 없는데, 그거 모아서 뭐하게?"

"혹시 모르잖아요. 이거 받아둔다고 돈 나가는 것도 아닌걸요."

가끔 창피하긴 했지만, 나는 이런 알뜰살뜰한 그녀가 밉게 보이진 않았다.

승강장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자 이내 춘천행 직통열차가 들어왔다.
열차의  칸에는 자전거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북한강을 끼고 달리는 자전거 여행은 나도 좋아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한 시간을 조금 넘게 가야 하는 일정이니, 그리  시간은 아닌 셈이다.
좌석에 앉아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나머지 하나는 그녀의 차지였다.

잔잔한 발라드를 들으며 반개한 눈으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빠는 노래도 옛날 노래만 듣네요? 그것도 맨날 듣는 거만."

"아니야, 나도 최신곡 들어."

"오빠처럼 한번 재생시켜보는 건, 듣는 게 아니라, 들어본 거라고 하죠."

"듣던 노래만 듣는 게 나쁜  아니잖아. 너도 내 나이 되면 이렇게 될 거야."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시고요. 선곡 바꿔주세요. 신나는 거 듣고 싶어요."

"그럼 그냥 네 걸로 들어.  이거 들으면서 갈 거야."

"이이⋯"

그녀는 내 팔뚝을 꼬집으며 입술을 앙다물었으나 나와 이어진 이어폰을 빼진 않았다.
창밖의 풍경이 스치듯 이어지고, 어깨에 툭 와닿는 느낌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잠이 든 그녀가 기대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자세를 낮춰주었다.
유리창 너머로 봄기운이 완연한 나무들이 흔들거리며 인사를 건네왔다.

발권을 확인하는 직원이 다가오고, 나는 오른손만 조심히 움직여 예매화면을 보여주었다.

"옆자리 제 일행 자리 맞거든요? 확인시켜드려야 하나요?"

개미 같은  목소리에, 눈치 빠른 직원은 발권이 된 자리임을 본인의 단말로 확인하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 역은 춘천, 춘천역입니다]

"다 왔다. 일어나야지."

"음, 우웅. 나 잠들었어요?"

"응, 아주 잘 자더라. 피곤했어?"

"그랬나 봐요.  때문에 불편하셨던  아니에요⋯?"

침이라도 흘렸을까 입가를 문지르며 내 옷깃을 흘낏거리는 그녀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나는 잠시간 말문이 막혔다.

"⋯죄송해요. 혹시 화나셨어요?"

"아, 아니야. 그런 거. 일단 내리자."

대답이 없는  언짢음의 신호라 여겼는지 시무룩해진 그녀를 데리고 하차를 했다.
그제야 좌석에 구겨 넣었던 몸을 활짝 피자 폐부에 닿는 선선한 공기와 짜릿한 근육의 이완이 느껴졌다.

"자다 깼는데도 너무 예뻐서 잠깐 넋이 나갔던 거야. 걱정하지 마."

"으으. 틈만 나면  시작되는 멘트에요? 아무리 그래도 안 넘어가요~."

농담을 주고받으며 승강장을 벗어나려던 그때였다.

"꺄아악! 동민아악!"

반사적으로 비명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가 홱 돌아갔다.
품에 아이를 안은 여인이었다.
절규가 서린 시선을 따라가자 철도 아래로 떨어진 어린이가 보였다.

아이가 서 있는 곳으로 맹렬히 달려오는 열차도 보였다.
이대로라면 충돌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진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뛰어든다면 충분히 구출이 가능한, 딱 그 정도의 시간.

하지만 승차장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차를 마친 승객들은 이미 자리를 벗어난 뒤였고, 아이를 달래던 여인과 스트레칭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움직이던 우리만 있을 뿐이었다.

비명이 들린 직후, 내가 상황 판단을 마치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이 소요됐음에도.
내 옆의 그녀는 그조차 아깝다는 듯, 이미 바닥을 박차고 달려든 뒤였다.

쏜살같다는 말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알려주는  빠르기는.
평범한 인간의 그것을 벗어나 있었다.

조심스레 아이를 안아 들고 어미에게로 다가간 그녀는 아이를 내려놓으며 다소곳하게 말했다.

"아이는 무사하니까, 진정하세요."

"네⋯네. 고, 고맙습니다."

이내 혼비백산했던 정신이 돌아온 여성이 정신없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꼬마야, 밖에 나오면 엄마 손  붙들고 있어야지!"

한 건 없지만,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곧이어 자리를 벗어나며 그녀에게 말했다.

"용감한 시민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됐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건데요."
"어? 근데 그거 포상금 있지 않아요?"

순간 그녀의 눈이 희번덕거리는 느낌을 받았는데, 착각이겠지⋯?

"그⋯렇긴 한데⋯. CCTV라도 까서 뭐, 어디에 제보를 할  아니잖아?"

"음, 그것도 그렇네요."

우리는 역 바깥으로 나와 인적이 드문 곳 까지 걸어서 움직였다.
목적지까지는 달려서  예정이었다.
신발 끈을 다시 묶고 밑창이 멀쩡한가 확인하고 있으니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오빠, 저는 아직도 적응이 안 돼요.  모든 게 다  같기도 하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만, 안타깝게도 차가운 현실이네. 준비됐으면 출발하자."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인간의 그것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폐활량이 맹렬하게 공기를 빨아들였고.
쇠심줄을 꼬아 만든 듯한 근육이 수축하며 발바닥을 통해 지면으로  존재감을 알렸다.
질풍처럼 뻗어 나가는 두 사람의 인영은 순식간에 그곳에서 멀어져갔다.

시속 80㎞로 달리는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단순히 우사인 볼트보다   정도 빠르다는 기분이 들려나.

얼마간 달려 도착한 목적지는 언덕이라기엔 높고 산이라기엔 낮은 고개였다.
몽골인을 넘어서 맹금류의 그것조차 능가하는 시력은 가시거리가 20㎞가 넘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번째 게이트를.

점차 크기를 불려가는 선명한 적색의 구체.
그녀는 벌레를 본 듯 몸서리치며 말했다.

"핏줄이 꿈틀거리는 것 같아서 너무 징그러워요."

"그러게, 좀 징그럽긴 하네."

"언제까지 저렇게 계속 커지는 거예요?"

"다 달라. 저 녀석은 아마도 직경 3㎞ 내외일 거야. 며칠이면 성장이 끝나겠네."

"성장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검게 변하며 안정화가 되겠지. 적색과 흑색은 파괴는커녕 간섭 자체가 불가능해."

"우리는 앞으로 저걸 막아야 하고요?"

"그래, 이 싸움에서 지면 우리는 조금씩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거야."

게걸스럽게 공간을 잡아먹는 적색은 곧 실패를 의미했다.
그래,  게이트는 공략에 실패했다.

여태껏  한 번도 공략된 적이 없는 최초의 게이트.
정확하게 말하면 딱 한 번 성공했었으나, 내 목숨과 맞바꾼 성공이었기에.
그것 역시 실패였다.

그리고,
이번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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