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66화 - Life Goes On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었다.
조금씩 몸을 일으켰다.
손을 들여다보자 평생 보아온 그것이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분명한 '나'였다.
"정말로 돌아왔구나."
날씨도 시간도 처음 복이의 모습으로 눈을 뜬 아침과 모든 것이 같았다.
내 모습으로 내 집에 있다는 것만 달랐다.
가장 먼저 텔레비전을 틀었다.
흑구가 나타났다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다급하게 길을 나섰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으로 구성진 트로트 자락이 흘러나왔다.
"엄마, 뭐해?"
"어머나! 우리 아들이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주고? 출근 안 했어?"
"그냥 오늘 좀 쉬게. 이따가 밥 같이 먹을까?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자."
"무슨 돈이 있다고 외식을 해. 엄마가 된장찌개 끓여줄게."
"그것도 좋은데, 그래도 오늘은 외식하자.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래."
"얘가? 무슨 바람이 불었담. 그래, 알겠어. 오면 연락하구."
"응, 엄마. 그, 아니, 이따가 봐."
결국엔 목 끝까지 올라온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밥 먹으면서 천천히 하면 되겠지.
그토록 그리워했음에도...
사람은 참 쉽게 바뀌지 않는다.
목적지에 다다를 때가 되자 또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119죠? 수면제 잔뜩 먹고 자살 기도한 사람이 있어요. 네, 장난 전화 아니에요. 어젯밤에 먹은 거로 추정되는데, 빨리 좀 와주세요. 주소가 어디냐면..."
택시를 내리고 한동안 지냈던 집의 현관에 도착했다.
위층엔 진기한 부자와 아래층엔 선정우가 살고 있겠지.
망설이지 않고 문짝을 부숴버렸다.
방으로 달려들어 가자, 예의 청년 하나가 방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이로써 119를 미리 부른 게 잘 결정한 일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코에 손가락을 대 호흡을 확인해보니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비타의 말대로였다. 복이는 죽지 않았다.
얼마 안 가 구조 대원들이 도착했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복이를 따라가며 그의 휴대전화를 챙겼다.
나는 이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찰칵-
"여보세요? 복아, 요즘에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돼."
"저기, 이민지 씨? 오복 씨가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제가 발견해서 구급차에 실려 가고 있고요. 병원 주소 찍어 드릴 테니 그쪽으로 오세요."
"네, 느, 네? 무, 머, 뭐, 뭐라구요?"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는 이민지에게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복이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이내 이민지가 도착했다.
내가 아는척하며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다가왔다.
"이민지 씨 맞으시죠?"
"네, 혹시... 아까 전화 주신?"
"네, 저도 바쁜 몸이라, 여기 계속 있진 못 하거든요. 이제 보호자가 왔으니 저는 가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민지 씨, 미안한데. 오지랖 좀 부릴게요. 소꿉친구가 자살 기도를 했어요. 수술 끝나봐야 알지만 일단 목숨은 건진 것 같거든요? 내가 둘 사이를 잘 모르는데, 민지 씨는 오늘 처음 봤지만, 복이는 좀 알아요. 이렇게 하는 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그쪽이 후회하는 일은 없어지겠죠.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먼저 고백하세요. 그리고 잘 된다면, 복이에게 따뜻하게 안길 품이 되어주세요. 힘든 일 겪은 친구라는 거 잘 알고 있잖아요."
"...... 네. 조언 정말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꼭 보답하겠습니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라서, 비밀로 하고 싶어요. 미안합니다."
나는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이민지는 내 뒷모습을 아주 잠시 바라보고는 이내 수술실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손 모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 생에는 꼭 사랑에 성공해라 민지야. 저번에 얻어먹은 떡볶이 값은 이걸로 갚은 거다.'
나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골목길로 접어들자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나는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야, 담배 한 대 줘봐라."
"어억, 크크큭. 이거 완전히 미친 새끼잖아? 존나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뭘 믿고 깝죽대시나?"
"역시, 넌 또 혼나야겠구나."
양아치들에게 이전의 일이 반복되었다.
다만 이번엔 벽을 부수진 않고, 동전을 몇 개 구부리고 찢어버렸다.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니까, 나한테 걸리지 않게 착하게 살라고 해줬다.
녀석들은 호두까기 인형처럼 턱을 달달 거리며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조금 같이 걸으며, 윗집 아들놈에게 몇 마디 조언을 건넸다.
"중기야, 너희 아버지 말이야. 내가 조금 인연이 있는데, 정말 사명감 있고 좋은 기자분이셔. 잘 커서 효도해라."
"저도 아버지 훌륭한 기자인 거 잘 아는데요? 그래서 제 꿈도 종군기자에요."
그랬냐. 짜식 벌써부터 철이 들었구만.
"그래, 열심히 해라. 혹시라도 롤 하지 말고. 인간을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악마의 게임이니까."
"네, 형. 오늘 감사합니다."
이 얼마 만에 듣는 옳게 된 호칭인가.
그와 작별을 나누고 걸어가던 중 무언가 차이점을 느꼈다.
아아, 이 혈기왕성한 중생이여, 나에게는 번호를 달라고 안 했구나.
그때 또 괴롭힘 당하면 도움 요청할 사람이 없다는 둥 다 기만이었구나 이노옴!
그저 미모에 홀린 거였어!
개자식. 롤창되서 인생 조져라.
오늘의 할 일을 다 마친 나는, 엄마를 보러 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한소희가 습격당하는 건 내가 눈을 뜨고 6일째 되던 날 밤이었다.
스토커를 미리 조질까 했으나, 그러면 그녀와 나의 접점이 사라진다.
가만히 있는 놈을 폭행한 후폭풍도 감당이 안 되고.
사건 발생 전에 경찰을 미리 불러서 타이밍에 맞춰 도착하게 하고, 소희가 더러운 꼴을 보기 전에,
저번보다 빠르게, 현관이 닫히기 전에 따라붙어서 놈을 제압하는 계획을 세웠다.
나와의 인연을 위해 범죄가 일어나는 걸 인식은 하되, 그에 대한 상처는 덜 생기는 방안이었다.
어머니와 예약해둔 고급 한정식집에 들어갔다.
"아들, 이런 데서 밥을 어떻게 먹어. 다른 데로 가자. 너무 비싸 보여."
"메뉴판 받고 물도 얻어 마셨는데 어떻게 나가."
"그건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살 떨려서 못 먹겠어."
엄마는 늘 그런 식이었다. 본인이 부담돼서 못한다고.
나는 그게 정말인 줄 알았다.
아니, 그걸 진실이라고 믿으려고 했다.
세상에 값비싸고 좋은 걸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저 외면했을 뿐이다.
"이미 예약금도 다 내서 그냥 나가면 그거 뜯겨. 그냥 먹자 엄마. 나 오늘 기념일이야."
"그래, 근데 무슨 기념일? 여자친구라도 생겼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나한테 되게 의미 있는 날이야 오늘. 그래서 맛있는 거 사드리는 거야."
"얘가? 안 하던 짓을 다 하네. 아무튼 고맙게 잘 먹을게 우리 아들~."
코스로 시킨 음식들이 나오고, 나는 어머니의 밥숟가락에 갈비찜을 올려드렸다.
엄마는 어색해했지만, 그래도 잘 받아 드셨다.
"엄마, 그동안 한 번도 못 해 드렸는데.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도 우리 아들 정말 정말 사랑해."
"...... 혹시 무슨 일 있는 거야? 시한부 판정이라도 받았어? 엄마한테 다 말해줘 숨기지 말고."
"아니, 그런 거 아니고~ 그냥 하고 싶었던 말한 거야."
"정말이지? 그럼 엄마한테 더 할 말은 없는 거지?"
"아, 나 회사 그만두려고."
"뭐어? 이러려고 뇌물 먹인 거구만! 립 서비스도 하고!"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며 등짝 스매싱을 당했지만, 어찌 됐든 완고한 내 의지에 알아본 일은 있느냐고 물으며 걱정을 내비쳤다.
"앞으로 엄청 바쁠 예정이라서. 돈 걱정은 하지 마. 이제 부자로 살 거니까."
예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오를 종목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주식 차트 장난질이 아니라, 기술력과 제품으로 비전이 있어서 롱런하며 쭉 상승하는 회사들을 안다는 얘기다.
엄마를 댁에 모셔다드리고, 회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연락도 안 되고 무단결근을 해? 너 돌았어?"
"돌진 않았고요. 사장님, 말 좀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내가 사장님 새끼도 아닌데 이 새끼 저 새끼 합니까? 퇴사 처리해 주세요. 일 그만둡니다."
"무, 머, 뭐라고? 허허. 이 자식이 왜 이래? 너 여기 나가면 일할 곳이나 있어? 요즘 같은 불경기에 말이야! 어? 뭐 어디서 연봉 한 삼백 더 챙겨준다냐? 아니면 직급 하나 올려준대? 너 인마, 그런 식으로 하면 이 바닥에 철새라고 소문나서 밥줄 끊겨 인마!"
"지랄 좀 하지 마시고. 퇴직금이랑 정산해서 보내주세요. 헛짓거리하면 노동부에서 보게 될 겁니다. 앞으로 연락 하지 마세요."
개 같은 좆소 기업. 영원히 안녕이다.
쉬는 동안은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아! 이 X발 X같은 원딜 띠모 이딴거 왜 하는 거야 도대체에에! 미치겠네! 진짜로."
그리 유쾌한 시간은 아니었다.
***
늦은 밤 나는 미리부터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있었다.
조금 기다리자 손님으로 한소희가 왔다.
'역시 여기에도 있었구나. 소희야.'
놈이 소희를 미행하고, 내가 놈을 다시 미행하는, 한밤중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놈을 쫓으며 경찰에 주거침입 성폭행범을 현장에서 발견했다고 신고를 했다.
1층 입구가 열리고, 나는 그날보다 훨씬 이른 타이밍에 따라붙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놈이 현관문을 붙들고 소희를 안으로 밀어 넣으며 다시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놈이 했던 것처럼, 나도 닫히는 문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활짝 열린 문틈으로 통한의 스트레이트를 턱주가리에 꽂아주었다.
놈은 실 끊긴 인형처럼 쓰러지며 그대로 바닥이랑 진한 입맞춤을 했다.
"괜찮아요? 큰일 날 뻔했네요."
"가, 감사...합니다..."
놈의 품에서 칼까지 꺼내자 한소희는 그제야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인지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경찰도 불렀으니 이놈 때린 거 증언 좀 잘해주세요."
"네, 네. 물론이죠."
이내 출동한 경찰이 놈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한소희의 현장 증언으로 내가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쓰는 일은 없었다. 나는 경찰에게 이동 경로를 짚어주며 인근 CCTV 영상을 확인해 보라는 얘기도 했다.
경찰은 그래도 혹시 나중에 서(署)로 부를 수도 있다며 우리 둘의 연락처를 받아 갔다.
생각해보면, 한소희에 대해서 정말로 잘 모른다.
그녀와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전우지만,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저기, 저놈이 수상해 보여서 따라오긴 했는데, 사실 제가 혼자서 이거 먹으려고 했었거든요."
나는 들고 온 봉지를 들어 올렸다.
편의점에서 사 온 먹거리들과 술이었다.
"혼자 먹기 심심했는데, 같이 드실래요? 저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 네? 아, 음, 저 술 잘 못 하는데..."
"그럼 안주만 드세요. 저도 조금만 먹고 일어날게요."
술을 못한다던 그녀는 타고난 주당이었고, 나는 드디어 그녀의 속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잠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준비해둔 장비로 방송을 켰다.
제목으로 난리 쳐봤자, 어그로도 안 끌리고 누가 봐주지도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이건 기록을 남기기 위함이니까.
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일 아침 미확인 검은 구체가 푸른색으로 변한다는 이야기와 사람이 빨려 들어갈 거라는 예언을 했다.
온갖 커뮤니티에 스스로 링크를 달며 업로드 해둔 영상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녔다.
내 유명세가 없는 만큼 이전보다 파급력은 훨씬 적을 테지만 결국엔 비슷한 일이 벌어질 거다.
이번 포탈은 공략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 정도만 움직여도 충분했다.
이번엔 더 긴 준비가 이루어지고 공략이 시작될 것이다.
화기도 더 다양하게 준비할 것이다.
포탄에 총알이면 다 되는 줄 알았더니, 황충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이제 나는 정말로 직접 겪은, 제대로 된 포탈에서의 전투 경험과 정보를 가졌다.
초능력도 이미 개방되어 있었고, 그 수준이 밸런스 붕괴를 일으킬 정도였다.
막말로 반동만 어떻게든 견디면 혼자서도 포탈을 찢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타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나는 씩 웃어 보였다.
"기회는 원래 한 번뿐이야."
다시 시작된 되찾은 삶은, 계속될 것이다.
인방하는 미소녀 完.
헌터 未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