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5화 - 귀환
눈을 떠보니 하얀 방이었다.
끝없는 암흑 속에서 내 의식은 아주 흐릿하게 존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영겁의 시간을 견뎌내지 못했을 터였다.
"내가 왜 여기에......"
잠이 든 건가? 내가 보냈던 기나긴 시간은 어떻게 된 거지.
그때 하얀 방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말을 걸어왔다고 하는 게 맞을까?
음성에 의한 자극이 아닌, 머릿속으로 의지가 전해졌다.
끝없이 반복되는 공간 전체가 나를 향해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선택권을 주겠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배경이 바뀌었다.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무려 1년이나 누워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 옆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병문안을 다녀가는 나를 아는 사람들, 그들이 나를 찾아와 한 얘기, 그들이 나를 위해서 한 일.
저 정도로 의리가 깊은 사람들이었나? 나는 별것 아닌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내 내 심장이 멈추고 의료진들이 달려들며 흘러가던 세상이 멈췄다.
다시 배경이 바뀌었다.
도심에 포탈이 열리고, 하늘에 열리고, 바닷속에 열리고, 땅속에도 열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수십 배는 되는 숫자였다.
진입부터가 장벽인 골치 아픈 위치들에 열린 포탈도 상당했다.
세상은 내 안배에 의해 침식 초기부터 허둥대지 않고 잘 대응했으나,
그 숫자가 너무 많았기에 점점 피해가 가중되고 있었다.
다시 배경이 바뀌고 바라본 그곳엔 내가 아니, 그녀가 있었다.
"언제 또 들어가냐고요? 아니, 여러분은 제가 그런 위험한 곳에 자주 갔으면 좋겠어요?"
바짝 올라붙은 치마, 깊게 파인 가슴골 그리고 높은 하이힐.
나라면 상상도 못 할 복장과 카메라를 보며 즐거운 듯 떠드는 얼굴.
혹시 여성으로 사는 삶을 받아들이고 행복해진 건가?
그냥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한 거야?
그녀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매일 방송을 하고, 이따금 포탈을 공략하기도 했지만, 절박함이 사라지고 관성적인 모습만 보였다.
오히려 본인의 일상에 더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가끔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어째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야? 포기한 거야?'
도무지 납득이 가지않는 표정을 하고있던 내 머릿속에 음성이 들려왔다.
"첫 번째를 택하였을 때 그대의 모습이다."
첫 번째? 선택했다고?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나는 흥분으로 입에서 침을 튀기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내가 왜 저렇게 살고 있는 거죠? 나는 처절하게 노력했는데! 저 안일함은 도대체 뭐냐고!"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움만 남은 채, 그대는 저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저런 게 어딨어. 나는 싫어요! 그럼 모든 게 물거품이 돼버린 거잖아. 내가 해온 노력들은? 죽어간 사람들은!"
돌아가지 못한다고? 바뀐 삶을 받아들이라고? 싫다. 싫어! 나는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남아서 저러고 있어! 거짓말 치지마. 저런 선택을 내가 했을 리가 없잖아!"
그는 내게 대답하기보다 다른 이야기를 먼저 풀어냈다.
"침식이다. 행성을 잡아먹고, 성계를 잡아먹고 이윽고 은하까지 잡아먹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그 크기를 키워가지. 지구가 먹히면 태양계 전체가 침식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담담히 선고하듯 감정의 고저 없이 나열되는 이야기는 여태껏 알지 못했던 진실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침식은 일종의 척후병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아주 강력한 침식체가 존재하지. 그걸 그대가 저지해냈기에, 도리어 더 빠르고 강력한 침식이 찾아온 것이다."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에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대가 이곳에서의 삶을 택한 이유는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다."
이제 와서 나타난 주제에 뭘 잘했다고? 부당하게 나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최초가 건드리면 안 되는 녀석이란 건 일언반구도 없었다.
나는 그 정보의 부재가 너무 억울했다.
"책임이라니? 그럼 당신이 건들지 말라고 귀띔을 해줬어야지! 다른 놈으로 만드는 거로도 모자라서 여자로 바꾸기나 하고! 도와준 게 뭔데 도대체! 왜 나보고 책임을 지라는 거야. 난 책임 못 져!"
잔뜩 흥분해서 마치 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은 나에 비해서 그는 지독하리만큼 차분했다.
"최초의 침식이 발생한 시간대에 진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대도 알다시피, 이는 책 속에서 다뤄지지 않은 시간대이다."
시간대에 진입했다니? 처음이라니? 온통 모르는 소리만 늘어놓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계속해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대의 부재로 인해 이 세상이 망한다 해도 상관이 없는가?"
"나 하나 없다고 세상이 망하긴 왜 망해. 그리고 여기 소설 속 아니었어? 넌 대체 정체가 뭐야."
"이곳은 실존하는 세상이다. 나와 닿아있는 자여. 나는 이 행성의 의지. 그대가 가졌던 힘은 곧 나의 힘이었음에. 나는 수 없이 시공간을 비틀어, 수많은 평행세계를 만들어냈다. 오직 침식을 막기 위해서."
"그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대의 외형이 바뀐 것은, 평행세계엔 그대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내게는 더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힘이 남아있지 않다. 저 모습은 그대가 남기를 선택했을 때의 편린을 잠시 비춘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
"뭐라고...? 그럼 작가인 척 그런 건 도대체 다 뭐야? 그리고 몸이 왜 두 번이나 바뀐 거고?"
"인과(因果) 때문이다. 그 생을 다 한 줄 알고 처음에 들어간 몸이, 그렇지 않았기에, 그의 수명이 다하고 다른 여자의 몸이 된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제대로 접촉하려면 최후의 순간이 와야 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대가 행동하게 하기 위해서 책이라는 안배를 한 것이다."
충격적인 진실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소설책은 예언서였고, 등장인물 빙의가 아니라 평행우주의 딴 놈 몸에 들어간 거라고?
"그럼 이젠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지금 그대의 영혼은 육체에서 빠져나온 상태이다. 그래서 지금 심장이 멈춰있지.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곳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선택을 하거나."
"다른⋯선택?"
"그래, 이게 두 번째 선택지다.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침식을 겪는 것."
"그럼 원래대로 돌아가면 되는데, 내가 왜 안 돌아가고 저런 선택을 한다는 거야?"
"그대가 본래의 자리에서 이 비극을 감당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기억하고 있는 세상이, 태초부터 존재하던 원래의 세상이다. 나도 그곳에서 태어났으며, 우리 모두의 진정한 고향이다. 침식을 막기 위해 그대와 나만이 시공을 비집고 영겁을 헤맸을 뿐이다."
그래, 나는 그런 놈이다.
늘 최후의 순간에 도망치는 비겁한 겁쟁이.
수많은 반복을 했으면 뭐 하는가? 기억조차 없는 것을.
어떠한 성장도 없는 제로에서의 반복은, 똑같은 실패를 낳을 뿐이다.
"돌아가면 지금의 기억도 잃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남겠다고 했겠지? 가 봤자 결과가 뻔하니까."
"원래라면 그렇다."
"그대는 처음으로, 나의 힘을 온전하게 다 사용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의 기억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시공의 폭풍을 지나 특이점에 닿는 순간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여, 나의 오랜 친구여. 어찌하겠는가?"
친구라⋯그는 나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을 테다.
감정의 높낮이가 없는 음성이었음에도 묘하게 느껴지는 친근함은 거기서 오는 것이겠지.
그는 외로움을 느꼈을까. 매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나를 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돌아가고 싶다. 너무나도 원했었다.
하지만, 또 실패한다면? 나를 아들로 둔 내 어머니의 불행을 목도해야 한다면?
원래의 내가 살던 세상이, 그곳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아는데도 지켜내지 못한다면.
가는 게 맞다.
여기에 남아봤자 어차피 개털이잖아.
여자로 살아야 하는 데다가 침식도 막지 못할 거다.
나는 늘 도피를 했다.
노력에서의 도피, 경쟁에서의 도피, 감정에서의 도피.
'남들만큼만'이라는 비겁한 명분하에 남들보다 적게 노력하고, 적게 사랑했다.
그 본성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냥 여기서 혼자 죽으라고.
어머니가 행복한 걸 보지 않았냐고.
너에게도 이곳에서의 삶이 더 행복할 테니, 그냥 전부 다 새로 시작하자고.
나는 고개를 들고 그가 있을 어딘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가 만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인가?"
"그렇다. 나는 의지를 잃고, 그저 행성 에너지로 돌아갈 것이다."
"너도 참 고생이 많았겠네. 작별 인사나 하자. 뭐라고 부르면 돼?"
"이름 같은 건 없다."
"그럼 내가 지어줄게. 비타(vita). 그동안 고마웠어. 나를 돌려보내 줘."
"그대다운 이름을 지어주는군. 하지만 마음에 드는 이름이구나."
작별 인사로 그에게 생명, 삶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천천히 하얀 방이 무너져내렸다.
이내 거대한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가며, 나를 한점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조언을 잊지 않고, 머리를 왕관으로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