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56화 - 눈물의 맛 (57/74)



〈 57화 〉56화 - 눈물의 맛

시간이 얼마나 지난거지?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게 왠 놈이 소희의 가슴팍에 손을 넣으려고 단추를 풀고 있는거였다. 혹시 의료 행위인가 싶어 잠시 지켜봤으나 놈의 표정과 손길이 그게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구창을 시원하게 돌려주자 놈은 눈을 까뒤집으며 그대로 기절했다.
시선을 내려 몸을 점검해 보았다. 외상은 다 회복됐고, 한쪽씩 눈을 감아보니 양안이 다 보였다.

'역시 모두 당한건가......'

나는 왜 항상 늦는걸까.
조금만 빨리 각성 했더라면.
내게 주어지는 상황들은 언제나 후회만을 안겨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쪽으로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보급대가 붙은걸 보니 최소 3일이 지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이동시간까지 감안하면 나흘은 누워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 동안 공격이 없었던걸 보니 포탈에 더 이상 괴수가 없는것 같은데, 공략이 완료된건가?
저 사람들은? 구조대가 들어온건가? 설마 보급대?
조심스럽게 한소희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나는 분명히 한소희만큼이나 능력을 폭주시켰었다. 의식을 찾는데 오래걸리긴 했지만, 소희만큼의 타격이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소희가 능력을 첫 번째로 사용했을때 별 다른 탈이 없었던 걸 떠 올렸다.
최초의 각성시에 사용된 능력은 상당히 적은 반동이 오는 것이다.

"그...왜 갑자기 보급대장님을 공격하신 겁니까?"

"짜증나게 해서요. 자세한건 이따가 얘기하죠. 근데 보급대라고요? 포탈이 아직 파란색인가요?"

"네, 저희가 들어올땐 그랬습니다만."

아직도 8할 이상이 처리되지 않았다고? 어찌됐든 전투가 일어난 모든 괴수부대를 괴멸시켰기에 그 숫자가 엄청난데도 아직도 남아있다고?

"보급대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싶네요."

"그건 대장님이 아시는데요. 저희는 그냥 물건만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몇 명인지 뭘 들고 왔는지도 모른다구요? 아, 아니에요. 그니까 이 인간 깨우면 된다는거죠?"

일어나서 발로 툭툭 차 놈을 깨웠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으...감히  때리다니? 미친년 아니야 이거! 괴수한테 조종 당하는년이다! 사살해!"

그는 총구를 들이대더니 정말로 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방아쇠에 넣어야 할 손목이 붙잡혔고, 총구는 다른 손에 쥐어진 채로 엿가락처럼 휘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끼이익-

"그냥 잠깐 홀려서 그런줄 알고 봐줄려고 했더니, 완전히 미친놈이었네."

그대로 놈의 손모가지를 꺾어서 분질러 버렸다.

"끄아악!"

"보급 물품 보고야 뭐. 내가 다시 파악하면 되지. 넌  더 자라."

때린데 또 때리려다가 공평하게 반대쪽 턱을 돌려주었다.
놈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고 옷도 벗겨서 팬티바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개를 돌리니 총을 든 인원들이 전부 나를 겨누고 있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 생존자임은 알겠으나 다짜고짜 대장을 묵사발을 내다니 납득시켜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발포 하겠습니다."

"하, 이것 참 곤란하네. 옆에 누워있는 아이도 생존자고요. 이놈이 옷을 벗기고 몸을 만지려고 하길래 한방 먹여줬고, 깨웠더니 총질 하려고 하길래 한방  먹여준겁니다. 됐습니까? 그리고 들어오기전에 교육 안 받았어요? 나 누군지 몰라?"

"공략팀장님 이라는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보급대장을 저런 꼴로 만들 권한이 있다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성추행에 대한 것도 팀장님 개인의 주장일 뿐입니다. 보급대장은 당신이 조종당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무리하게 장시간 이동을 했고, 방금 막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우리의 경계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X발. 미친놈 하나때문에 제대로 꼬였네. 일단 선발대와  번째 보급대는 연이어 벌어지는 전투에 괴멸. 생존자는 초인 전력인 나와 한소희  뿐입니다. 지금 같은 전투를 수 차례나 겪었어요. 마지막 전투에서 쓰러졌는데 눈을 떠보니 저 사람이 단추를 풀고 그 틈새로 손을 넣으려고 하기에 주먹이 먼저 나갔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증명 해 드릴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네요. 쏘려면 쏘세요. 나도 지쳤으니까."

"으음......"

병장 마크를 달고 있는, 얼굴에 나 진지해요. 나 나이 많아요. 군대 늦게 왔어요라고 써붙인것 같은 사람은 판단이 어려운듯 침음성을 흘릴 뿐이었다.
그때 한 여성이 뛰쳐나오며 울분에  소리를 질렀다.

"저, 저...! 보급 대장한테 강간 당했어요...흐윽...어제 다들 나가고 없는 곳에서 몇 시간 동안 강제로 당했어요...끄윽...말하면 죽인다고 협박했어요...앞으로도 계속 제 몸을 이용할거라고 했어요."

진지한 병장도, 나도, 다른 사람들도, 크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주저앉아 통곡을 하는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녀는 그동안 어찌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방금 처음 본 내손을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숨도 잘 쉬지 못할 정도로 꺽꺽 거리며 울어댔다.

"이런 일이 있었는지 다들 몰랐습니까?"

"면목 없지만, 저희가 들어온지 고작 이틀째일 뿐입니다...무거운 군장에 미지의 환경에...남을 신경쓰지 못했습니다. 핑계일 뿐이지만...아무튼 그렇습니다. 알았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았을 겁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놈의 대가리를 으깨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살인을 했다가 나가서 무슨 책을 잡힐지도 모를 일이고. 여기선  내 선택에 동조 했다가도 나가서 살인마라고 매도할지 알게 뭔가.
그저 놈의 어깨를 탈구시키고 줄로 꽁꽁 묶어둘 뿐이었다.

"이 인간의 감시와 관리를 맡고 싶은 지원자 있습니까?"

"제,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이의 있으신분 있습니까?"

놈의 관리는 피해자인 임보람이 맡기로 했다. 내 질문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놈을 죽여버리든 말든 나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내가 나중에 따로 처리 안해도 되서 좋다고 생각했다. 저 쓰레기는 나한테 찍힌 순간부터 사형선고를 받은것이나 다름이 없다. 감히 소희를 건드리려고 하고, 포탈에 들어오자 마자 여자를 범하다니.

태양이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찾아왔으나, 시체 더미로 가득한 이런 곳에서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조금만 더 상류로 움직여서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대원들은 오랜 이동으로 지쳐있었지만, 그들도 여기 있기 싫은건 당연한거였다.

달빛에 의지해 땅을 파고, 전사자들의 시신을 모아서 매장했다.
민간인들은 물론이고, 지독한 참상에 군인들조차 도울 수가 없어서 진지한 병장 한 명만 도왔다.
그의 이름이 진지한인건 아니었다.

"김준 병장님, 힘드시면 굳이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이래 봬도 의대생입니다."

"네? 그런데  군의관 안하시고요?"

"뒤늦게 진로를 잡은지라, 입학이 늦어서요. 본과 졸업하고 의사면허가 있어야 지원이 가능한데 이미 나이가 차버려서 어쩔 수 없이 땅개로 끌려 들어왔습니다."

"땅개요? 일빵빵? 아, 이제 1111인가?"

"......이제 111101입니다. 그런건 어찌 아십니까? 어려 보이시는데 군간부 출신은 아니실테고."

"부모님이 군인이셨어요."

"아, 그렇군요."

매장을 끝내고 잠시 꿇어 앉아  손 모아 기도를 했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하는게 아닌, 어딘지 모를 곳에 있을 그들에게 하는 기도였다.
그 엄숙한 광경에 옆에 서있던 병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함께 묵념했다.

"돌아가죠."

"예..."

담담하게 말하는 나에 비해 그의 대답은 조금 시무룩했다. 직접 경험한건 아니지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상해  탓이겠지.

"아까 전에 쏘겠다고 경고한거, 정식으로 사과 드리겠습니다. 지쳤다고 말씀하실때, 무언가 잘못됐다는걸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받아들일게요. 그 상황에 합리적인 판단이었다고 생각해요. 담아두지 않을테니 괘념치 마세요."

김준 병장과 응어리를 풀고 캠프로 돌아갔다.
캠프는 술렁거리고 소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보람씨가...율현씨를 살해했어요."

겨우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보급대장이 임보람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시신을 살펴보니 대검으로 수십 차례 복부와 가슴을 찌르고 목덜미를 참수가 되기 직전까지 긁어놨다.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찔렀을 그녀의 손도 베이고 찔린 상처들로 가득했다.

내가 다가가자 눈물 범벅의 그녀는 피투성이인 손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저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제게 뭐라고 막 떠드는데, 참을 수가 없었어요...흑...흐윽..."

정신 나간놈이 묶인 상태에서 아가리를  털었단 말인가?
민간인들은 무기가 없는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까 전장의 잔해에서 하나 챙긴것 같았다.

품에 몰래 숨겨놨다가 꺼내서 찌른거겠지. 어차피 내일이면 총화기로 무장 시킬것 이었지만, 이런 돌발행동은 조금 곤란했다. 기껏해야 돌맹이로 내리치거나 목을 조를줄 알았는데.

"사안이 크다 보니, 일단 구속하겠습니다. 그리 불편하진 않을 겁니다."

간단히 응급처치를 마친 그녀의 손을 앞으로 모아서 손목을 묶어 구속했다.
거의 모든 움직임이 가능한, 가장 약한 단계의 속박이었다.
그녀의 신원은 그나마 지금 믿을만 하다고 판단되는 김준에게 인계했다.

병사들이 교대로 근무를 서고, 나는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한소희에게선  이상 진물과 핏물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김준도 겉으로 보기엔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밤새 달빛에 비치는 소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조금만 빨리 각성했어도 소희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그깟 메뚜기들 눈 깜짝할 새에 없애버릴 수 있었을텐데.
그때 병력손실이 없었으면, 독수리 떼 따위 온존한 화력으로 밀어버렸을텐데.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유난히 달빛이 밝은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출이 시작되며 하늘이 벌건 노을로 짙게 덧칠 되었다.

"기상! 기상하십시오!"

익숙한 말소리에 괜스레 눈물이  돌았다.
나를 깨워주던 그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기에.
내가 지켜주었어야 했던 이들은, 내가 그러지 못했기에, 내 곁을 떠났다.

"으음......"

그때 한소희가 신음성을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나는 최대한 호들갑을 떨지 않으려고 그녀의 손을 잡고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의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드디어 열렸다.

"언...니...?"

"그래, 소희야.  여깄어."

"우리...살았어요...?"

"응, 일단은..."

"나...배고파요..."

며칠만에 겨우 일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저거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그러고보니 어제도 뭘 먹지 않았으니 나도 한참을 굶었다.

"그럼, 같이 밥 먹을까?"

"네, 좋아요."

이마를 쓰다듬는 내 손길을 느끼며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고,
어느새 내 눈에서도 걸러 내지 못한 감정 덩어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