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50화 - 희망의 불씨
천천히 눈을 떴다.
반복되는 지독한 악몽에 이젠 놀라며 일어나지도 않았다.
손끝이 전기가 오른 듯 지릿하게 저려왔다.
심호흡하며 몇번 쥐었다 피자 점차 감각이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제 막 동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허공을 수놓은 구름들은 부끄러워하는 햇님을 가려주려는 듯 비켜서지 않았다.
내 마음만큼이나 흐린 날씨였다.
곧 있으면 근무자들이 기상시간을 알릴 것이다.
몸을 일으켜 상처들을 살펴 보았다. 다 아물었기에 실밥을 손으로 잡아당겨 뽑아냈다.
걸어보니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을 실어 무게를 더해보았으나 우릿한 통증도 없었다.
남아있는 흉터만이 이 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뿐이었다.
"기상! 기상입니다!"
또 다시 시작되는 하루를 알리는 부산스러운 목청이 귓가를 떨어 울렸다.
한소희가 일어나 기지개를 피며 내게 다가왔다.
"언니, 잘 잤어요?"
"응, 너는? 잘 잤니?"
"그럭저럭이요. 이제 좀 잘만한거 보면 불편한것도 익숙해 지나봐요."
"괜히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됐구요. 상처는 좀 어때요?"
"다 아물었어. 내가 봐도 놀랍네."
"흉터가...남았네요..."
"이 정도면 상처에 비해 큰 흉터도 아니지. 징그럽게 크게 남을줄 알았더니, 선방했어."
"흉터가 생각보다 작게 남아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일단 씻고 회의하고 올테니까, 다녀와서 초능력 훈련 좀 하자."
"네에. 무리하지 마시구요."
그녀에게 걱정말라는 제스처를 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하게 세면을 마치고 회의장소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전투에 대한 보고만 했지, 정작 중요한 공간의 끝을 발견하였고 그로 인해 면적을 추측가능 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확실히 부상에 정신이 오락가락 하긴 했나보다.
"아니, 그럼 이곳의 면적이 대한민국의 사분의 일에 육박한다는 말 입니까?"
넓은줄은 알았지만 본인의 예상을 뛰어넘었는지 당황하는 사람들의 경악성이 빗발쳤다.
그저 눈을 감으며 침음을 흘리는 사람들도 다수였다.
"그래도 서쪽 방면은 거의 다 확인했고, 저와 소희의 주력이면 나머지를 다 살펴보는데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정찰속도가 엄청난건 분명히 이득이지만, 어제 같은 일이 또 없으리라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무리한 정찰로 팀장님과 소희씨를 잃는다면 전력 손실이 너무 극심합니다."
"적을 마주하면 위치만 기록해두고 도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제도 그렇게 약속하고 출발 하셨습니다. 놈들이 너무 빨라서 떼어놓기가 어려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런 놈들을 또 만나거나 그보다 더 빠른 놈들을 마주치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맞습니다 팀장님. 본대의 화력과 너무 멀어지는건 위험도가 높습니다. 어제 치른 전투도 두 사람이 했다기엔 대단한 전공이 맞지만, 한개 분대만 있었어도 접근하기도 전에 처리했을 겁니다."
"저희를 너무 과소평가 하지 말아주십시오. 초인전력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신건 다름 아닌 팀장님 입니다."
"정찰이 팀장님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시는건 잘 알겠습니다만, 부상도 있고 했으니 오늘은 부대원들로만 정찰을 나가겠습니다.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룻밤 새에 몸이 다 나았음에도 괴물같은 나를 부려먹긴 커녕 쉬게 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제 본대가 쉬고 내가 임무를 나갔으니 나도 쉬라고 종용하는 통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보급도 끊긴 상황에 마음만 급해봤자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하루 쉬자.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캠프에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소희에게로 다가가자 미리 뜯어놓은 아침식사를 내밀었다.
"먼저 먹고 있지, 왜 기다렸어."
"그냥요.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어요. 식사 명령 지금 막 떨어졌는데요?"
"일어나자마자 배고프다고 했잖아. 니가 밥 좀 먼저 먹는다고 아무도 뭐라고 안할텐데."
"그래요, 나 배고파요. 그러니까 잔소리 그만하고 얼른 먹기나 하자구요."
식사를 하고 소희가 펼쳐 들은 판초 뒤에서 볼일을 봤다.
언제까지 생리현상을 이렇게 사람을 병풍처럼 세워두고 해결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남자들은 등 돌리고 그냥 싸는데, 여자들은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군중에 뭘 만들어낼 만한 사람도 없었다. 남자들도 여자들을 배려하기엔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다.
시간이 난 김에 화장실을 만들어야겠다.
"소희야, 이참에 화장실이나 만들까? 왜 이 생각을 못했지."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왜 계속 이렇게만 했지? 근데 어떻게 만드시게요?"
"별건 아니고, 그냥 나뭇가지 바닥에 꽂아넣고 거기에 판초 걸어서 간이화장실로 쓰게."
간단한 구상을 끝내고 작업이 시작됐다.
남아도는게 기운인지라 삽질을 시작하자 공병부대가 온것 같았다.
먼저 화장실로 쓸 지반을 허벅지 깊이만큼 파내렸다.
사람 한명이 쪼그려 앉으면 조금 넓다고 느낄 정도의 크기였다.
길고 튼튼한 나무 지지대가 없어서 바닥을 낮추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 뒤쪽으로 사람 키보다도 더 깊은 구덩이를 팠다.
이 곳에 처리를 하고 옆에 쌓인 흙을 약간 뿌리는 식으로 사용할 요량이었다.
나뭇가지에 판초를 묶어 쪼그려 앉은 얼굴이 안보이게 만들었다. 화장실 터를 파고 나니, 그냥 여기에 들어가서 하면 안보이니까 가릴 필요가 없지 않냐는 내 말에 여군들은 기겁을 하며 얼굴을 꼭 가려야 한다고 했다. 앉을 지반을 두들겨 단단히 다지고 나니 꽤 그럴싸한 화장실이 만들어졌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너무 편해졌어요."
"솜씨 발휘 하느냐고 고생 좀 했습니다~."
새로 만든 화장실을 이용해 본 여군들이 다가와 감사를 표했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나 때문인지 남군들도 땅을 파며 화장실을 만들기 시작했고, 괜히 일거리를 만든것 같아 조금은 미안해졌다. 남군들의 화장실은 프라이버시는 저 멀리 던져버린, 내가 아까전에 생각했던 들어간 사람의 얼굴이 삐죽 튀어나오는 형태의 그것이었다.
"우린 이제 초능력 테스트나 해보러 가자."
"네, 언니."
한소희의 능력 테스트를 위해 캠프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자, 어제는 느낌이 애매하다고 했었지? 지금은 좀 어때? 할 수 있겠어?"
"해 볼게요."
그녀는 집중의 미간을 만들어내며 양손을 앞으로도 뻗어보고 아래로도 내려보고, 허리를 숙여 바닥을 짚어 보기도 하고 이런 저런 행동들을 취했다.
이내 손가락 모양을 이리 저리 뒤바꿔가며 입으로 슉슉하는 소리도 냈다.
"니가 무슨 스파이더맨이냐? 푸흡."
"아니이~ 언니이. 나름 진지하게 한거라구요."
"몸동작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야. 능력이 개방될 때 떠올렸던 심상을 끄집어내봐."
"그 당시에 떠올랐던 심상이요? 으음..."
잠시 눈을 감고 코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이어가던 그녀는 불현듯 눈을 번쩍뜨며 말했다.
"그대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언니의 코앞까지 다가갔던 그 발톱들이 다 멈춰야만 한다고."
"좋아. 그 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떠올리며 유지시켜봐."
"네, 멈춰야한다...멈춰라...멈춰..."
"어때 실마리가 좀 잡혀?"
"알듯 말듯 해요."
나는 챙겨온 나뭇가지 하나를 조금 떨어진 곳에 꽂아넣었다.
"언제나 실전이 최고인 법이지. 저 나뭇가지를 묶으려고 시도해봐."
"잘 안되요. 그때의 느낌은 떠올렸는데 전혀 달라지는게 없어요. 전혀 모르겠어요."
"원래 그런거야. 천천히 계속 시도해보자. 시간은 많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을 시도한 끝에 한소희의 검지손가락 끝에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를 쳐다보니 질끈 감은 두눈에 잔뜩 찌푸려진 미간과 앙다문 입술, 꽉 물은 어금니가 보였다.
나는 그녀의 집중을 깨지 않기 위해서 숨소리 조차 조용히 죽였다.
아직 자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난지 모르는 눈치였다.
곧이어 빛이 진해지며 마치 형체를 가진것 같은 질감이 느껴지자 한소희가 감은 눈을 떴다.
그녀는 나뭇가지를 향해 손가락을 가르키지 않고 바닥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한 줄기의 푸른 빛살로 이루어진 넝쿨이 대지를 타고 나아가 목표물을 칭칭 감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빠르기가 감히 육안으로 쫓을 수가 없는 속도였다.
손끝에서 시작된 빛줄기가 바닥을 타고 넝쿨이 되어 솟아올라있는 결과만 확인될 뿐이었다.
"저 성공한거죠?"
"그래, 잘했어. 집중력이 대단하네."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어떤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지금은 한 줄기 뿐이지만, 연습하면 저번처럼 많은 양도 가능할거야."
"네. 그런데 언니가 왜 둘로 보이지? 머리가 띵한게..."
한소희는 갑자기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초능력은 몸에 부담을 준다. 어제 후유증이 전혀 없길래 의아했는데 지금에서야 찾아온 모양이었다.
능력 사용에 대한 리스크도 개인차가 있다. 그녀는 두통에 관련된 무언가가 오는 듯 했다.
"괜찮아? 편하게 앉아봐. 어때?"
"두통 같으면서...조금 달라요. 머리가 멍~ 해지는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언니가 둘로 보이면서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어요."
"원래 능력을 쓰면 몸에 반동이 와. 그러니 잘 조절해가면서 써야해. 전투중에 다리가 풀려 주저 앉기라도 하면 큰일이겠지?"
"이것도 일종의 근육과 같아서 훈련으로 반동을 수월하게 견뎌내고, 한계치를 늘릴 수 있으니까. 꾸준하게 수련을 해야해."
"언니는 정말 이 곳에 관해선 모르는게 없네요. 꿈에서 본 망해가는 세상에서 거의 인생을 한번 더 살았다고 하셨죠? 거기서도 제가 나왔어요?"
"아니, 당연히 넌 안나왔지."
나는 그녀가 겪었을 비극에 대해서 함구했다.
이젠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므로.
어느새 중천에 떴던 해가 저물어 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캠프쪽이 특히나 부산스러웠다. 서둘러 캠프로 다가가 지나가던 분대장을 붙잡았다.
"무슨일이에요?"
"방금 보급대한테 무전이 왔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정말요? 마중이라도 나가야 되는거 아니에요?"
"이미 병력 보냈습니다. 버선발로 나갈 기세던데요."
궁금한게 많았지만, 어차피 기다리면 알게 될 일에 사람 붙잡고 꼬치꼬치 캐 묻기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쯤 해뒀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 한 달음에 쪼르륵 한소희에게 달려갔다.
"소희야! 방금 보급대랑 교신됐대."
"어머! 정말요? 잘 됐다. 왜 이렇게 늦은거래요?"
"그거야 모르지. 와서 얘기해보면 알게 되겠지 뭐. 밖에서 늦어진건지 여기가 문제가 있었던건지."
사위가 어두워지자 이곳 저곳에서 불을 지펴 시야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틈틈이 야시경으로 부대가 언제 돌아오는지 확인했다.
얼마 안 있어 시야에 군중의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보급부대 였다.
"어휴, 목 빠지는줄 알았네. 드디어 왔구나 보급대. 머릿수도 많아보이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언니도 이제 걱정 한시름 놓을 수 있겠네요."
"내가 걱정? 많이 티났어...?"
"저니까 눈치 챘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테니까. 걱정 마세요. 언니 자존심 센 것도 저는 다 알아요."
"에이~ 자존심보단 책임감 때문이지."
"그게 그거거든요? 아무튼 이제 좀 내려놓으세요 언니. 곁에서 보기 안쓰러워요."
"그래, 고맙다. 동생 걱정이나 시키고 참 못났네 나도."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를 띄우며 자조하자 한소희는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입가에도 희마한 미소가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