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8화 〉47화 - 한소희 (48/74)



〈 48화 〉47화 - 한소희

초등학교를 다닐즈음엔 그럭저럭 괜찮은 가정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며 부친의 사업이 망하며 집안이 폭삭 내려앉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빨간딱지가 집안 곳곳에 붙었다.

단칸방으로 이사를 하고 고기반찬은 꿈도 못 꿨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무너지지 않으려 열심히 노력하는 듯 했고, 학생인 자신은 그저 공부나 열심히 하는게 본분을 다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기울은 가세에 악착같이 공부를 하려니 교우관계가 그리 좋지 못했다.
중학생때부터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의 외모도 한몫했다. 들이대는 남자들을 기피했더니 거지같은게 싸가지도 없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두살 터울의 동생과 사이가 멀어졌다. 웬만한 물건들은 다 줍거나 얻어서 썼으며,
 마저도 언니에게 다 물려받기만 하던 동생은,  불만의 화살을 나에게로 향했기에.

결국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포자기 해버린 부모님은 무서우리만큼 빠르게 돌변했다.
술독에 빠져사는 아비와 어딜가서 뭘 하는지 모르겠는 바깥으로만 도는 어미.

남들이 쓰고 버린 문제집을 줏어서 공부했다. 준비물을 구비할 돈도 없어서 매 맞으며 학교를 다녔다.
사정을 알고 봐주는 선생님들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더 독하게 구는 선생들도 있었다.

그때부터 아비란 사람은 정신이 완전히 나갔는지 딸에게 성적인 관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거부하자 무차별적인 폭행이 이어졌다. 어미라는 사람은 보호는 커녕 도리어 자식을 매도했다.
두들겨 맞은 몸은 삐그덕거리고 얼굴에는  멍자국과 피딱지를 달고 학교를 다녔다.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그날은 현관부터 무언가 평소와 공기가 달랐다.
신발도 벗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자 잔뜩 취한 아비에게 엉망이  얼굴의 동생이 깔려있었다.

그대로 도망쳐 집을 뛰쳐나왔다. 경찰에 신고를 하자 현장에서 적발된 아비는  구속됐다.
어미는 그나마 있던 살림을 털어서 야반도주를 했다.
며칠  동생이 투신을 했고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이 가족들 인생을 말아 먹은년이라고 비난했다.

당장 먹고 살 길이 요원했기에 고수익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바에서 술을 따르면 된다고 했는데 처음엔 정말로 그랬다. 어려울것도 없었고 무리한 요구도 없었다.
한달, 두달 근무기간이 늘어가자 은근한 2차 접대 압박이 들어왔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원래라면 일주일만에 했어야하는데 팔자 좋은줄 알라고 비아냥 거렸다.

삶이 지독하리만큼 쓰게 느껴졌다.
아직 험한꼴도 안봤고 그런대로 원룸 보증금 정도는 마련했으니 그만두고 평범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날이었다. 생필품을 사들고 자취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닫히는 현관문을 누군가가 붙들었다.

억울한 기분 조차 들지 않았다.
두려움에 몸은 떨리고 눈물은 쉴  없이 흘렀지만, 내 인생은 이런일만 일어나는게 맞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살고싶었다. 더러운 시궁창을 구르더라도 아직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는게 싫었기 때문이다.

애원하며 목숨을 구걸하였지만 마주친 두 눈에 비친 광기에 그가 그렇게 해주지 않으리라는걸 단박에 알  있었다.

그녀라는 꽃이, 활짝 피어보기도 전에 무참하게 꺾이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급하게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것은.
정확하게 같은 층에 멈춰선 그 누군가는 이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동시에 놈의 칼날이 내 목위로 얹어졌고 나는 숨소리 조차 죽여야했다.

쿵 쿵 쿵!

옆집과 우리집의 현관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요, 저 여깄어요. 도와주세요.'
마음속으로 수십번은 외쳤다.
제발 나를 알아봐주기를.
부디 그냥 떠나지 말기를.

콰앙- 콰앙-

간절한 외침을 누군가가 들어준 것일까?
그 사람은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태연하게 걸어들어와 어두운 방안의 불을 밝히는 그는 아니, 그녀는.
한소희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준 구원이었다.

***


한소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맛없는 밥을 억지로 먹고 있는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꼭 지켜줄게요. 언니가 내게 그랬듯이.'

"정찰조 이동한다!"

정찰준비가 끝나고 임무가 시작됐다.
3개 분대가 한번에 움직이자 대열이 그럴싸 하게 갖춰졌다.
분대 당 하나씩 있는 통신장비를 나와 한소희가 둘러메니 숫자도 딱이었다.
본대는 북서쪽으로 진행하고, 나는 서쪽으로 한소희는 북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린포탈로의 변이 조건은 괴수들의 개체수와 관계가 있었다.
우리가 클리어 또는 공략한다라고 지칭하는건 이 곳에 있는 괴수들을 8할 이상 잡아냈을 때를 뜻한다.
어떻게든 클리어만  내면 그 뒤는 일사천리다. 기갑부대를 투입시켜 전차로 싸그리 밀어버려도 되고, 공군 전투기를 투입시켜 융단 폭격을 해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곳의 몬스터 규모가 도무지 감이 안온다. 지금 여긴 얼마나 넓으며 몇 마리의 괴수가 있는걸까? 포탈들은 모두 천차만별 이었다. 수백마리 규모로 끝나는 간단한 곳도 있었고, 수천에서 수만마리가 평균적이었다. 최악의 경우는 수십만에서 수백만이 존재하는 공략 불가능한 포탈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뒤틀리는 경우는 원작에는 거론되지 않은 내용이다.
왜 이런 변수가 나타난걸까. 여기가 첫 번째 포탈이어서?
혹시 이곳의 규모와 시간이 뒤틀리는 정도가 관계가 있는건 아닐까?
확실한게 없으니 그저 이런저런 추측만을 해 볼 뿐이었다.

이곳은 굉장히 넓다. 하지만 그 넓이에 비해 괴수가 가는 곳 마다 발에 차이는것도 아니었다.
한번 마주할때의 군집 규모는 컸지만, 그게 가뭄의 콩나듯 하니 도무지 감이 안왔다.

두시간을 달려 나왔음에도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몇시간이고  달려가고 싶지만, 지금도 이미 거리가 멀어 무전이 닿지 않는다.
혼자서 더 멀어져봤자 의미가 없었다. 본대쪽으로 복귀를 시작했다.

본대에 합류를 하자 소희는 이미 와 있었다. 나랑 비슷한 거리를 보고 왔음에도 특이사항은 없다고 했다.
합류 상태로 대원들과 함께 북서쪽의 정찰까지 마치고 캠프로 복귀했다.

정찰팀 모두가 허탕이었다. 아무래도 숲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는데, 추가 보급이 없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캠프엔 낙오자 무리와 그를 인솔했던 인원들이 도착해 있었다. 지원부대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캠프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 앉았다.

분대장 회의가 시작되었다.

"지원 문제로 부대원들이 다 침울해 졌는데, 저번에 발견한 염소무리를 찾아서 사냥하는게 어떻겠습니까?"

"제대로 된 고기를 먹으면 사기 진작에 효과가 좋을 겁니다."

"그렇게 하죠. 사냥에 아까운 탄환을 쓸 수도 없으니, 저와 소희가 손으로 잡겠습니다. 몰이꾼으로 인력지원 조금만 있으면  것 같네요."

사냥조 인원으로 50명이 차출되었다.
염소는 도축하면  마리에 15명은 너끈히 먹을  있는 가축이었다.
딱 스무마리만 잡을 예정이었다.

염소 떼를 찾아 움직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녀석들 무리를 발견했고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인근에 괴수가 없기 때문에 비무장 상태로 나와 오랜만에 몸이 홀가분한 대원들은 이동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염소 몰이를 하기 위해 큰 원을 그리며 녀석들을 둘러 쌌다.
수백마리의 대형 무리이니 만큼 사람을 들이받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무리하게 막아서지 말라는 지시도 잊지 않았다.

나와 한소희가 염소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위기를 감지한 염소들이 사방팔방으로 울어재끼며 도망을 쳤다.

"매애애애~." "음매에에에~."

가장 후미에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 순식간에 등 위를 덮쳐 체중으로 찍어누르며 바닥에 잡아 눕혔다.
발버둥치는 앞다리와 뒷다리를 모아서 잡은채 들어올렸다.
잡은 염소는 대원들에게 인계하고 날뛰지 못하게 끈으로 다리를 묶어 제압해뒀다.
얼마간 몰이와 사냥이 이어지고 목표치 였던 스무마리의 포획을 성공적으로 끝 마쳤다.

염소를 어깨에 둘러업고 캠프로 복귀를 하자 부대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해줬다.
나는 사냥에 성공한 원시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숫염소는 그대로 도축하고 암염소는 젖이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전부 쥐어짜고 도축했다.
대원중에 고향에서 흑염소 농장을 하는 인원이 있어서 그의 진두지휘를 받아 그나마 일이 수월했다.

염소사냥을 간 동안 땔감을 구하러  인원들이 나무와 마른풀을 잔뜩 구해왔다.
여기 저기서 모닥불이 타오르고 반합이 주렁주렁 걸리며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어느새 일몰이 시작되었다. 석양이 지며 하늘을 보랏빛 노을로 물들였다.
하늘과 구름을 빽빽하게 색칠한 선연한 노을은 어쩐지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맛있네."

갓 짜낸 비릿한 우유와 간도 안하고 그냥 삶아낸 고깃덩어리 였지만, 따뜻하고 기름진게 입안에 들어오니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있었다. 요 이틀간 퍽퍽한 벽돌만 먹다가 드디어 제대로된 식사를 하는 기분이었다. 염소의 살과 내장은 영양분이 많이 들어있는 훌륭한 식재료다.

개울도 있고 염소무리도 아직 많이 있었으므로 식수와 식량 걱정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이대로 최대한 버티면서 전투물자의 보급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따뜻한 고깃국물로 배를 채운 부대원들의 표정이 한껏 풀어졌다.
보급이 늦어지고 있지만 적어도 굶어죽진 않을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이 된  했다.

모닥불 앞에 모여앉은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부대원들과 안면을 텄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삭막한 곳이지만, 그럴수록 인정에 더 기대야 하는 법이기에.

"팀장님이랑 소희 씨는 너무 미인인거 아닙니까? 이러다가 눈 높아져서 장가도 못 가겠습니다."

"에이, 김 중사님이  이러실까? 눈을 바닥까지 낮춰도 못 가는거 모를줄 알아요?"

"어이쿠, 들켰습니까? 영락없이 노총각으로  팔자라 구실이나 만들어 볼까 했더니.허허."

"특별히 허락해 드릴게요. 어디가서  때문에 눈이 높아져서 장가 못 간다고 핑계 대도 좋습니다."

"약속 하신겁니다?"

계속해서 자리를 옮겨 다니며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간부가 아닌 병사들도 숫자가 상당했다. 고작 이십대 초반에 의무복무중에 전장으로 끌려 들어오다니.

"표정이 왜 이렇게 침울해?"

"아,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혼내는거 아니야. 내가 군인도 아니고 그렇게 딱딱하게 할 필요없어."

"네, 네에...알겠습니다."

"그래, 우리 최 상병님 께서는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으실까?"

"이런 말 해도 되는진 모르겠지만...살아나갈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을거야.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해야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저, 팀장님. 그...외람되지만, 부탁드릴  있습니다."

"응? 나한테? 뭔데?"

"무사히 살아 돌아가면, 데, 데...이트 해주실  있습니까?"

"뭐어? 이놈 봐라? 내가 만만해보여?"

"죄, 죄송합니다!  대해주시니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봅니다!"

"농담이야. 그 까짓거 열번이고 해줄테니까 꼭 무사히 돌아가자. 같이 집에 가야지!"

"저도요! 저도  주십시오!"

"이놈들아!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야! 짬순으로 줄서어~."

흔쾌히 떨어지는 내 허락에 주변에 있던 어린 병사들과 젊은 간부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열광을 했다.

"내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나? 크큭. 지원자가 많으니 다 같이 펜션이라도 통째로 빌려서 밤새도록 신나게 놀자고! 그러니까 다들  살아 남아야 된다? 데이트 생각에 억울해서 죽지도 못할거다 아마도~."

"팀장님 최고오!"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함께 전장에 섰던 전우들이 살아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까짓 데이트가 뭐가 문제겠는가. 실컷 어울려 주니 얼음공주인 줄 알았는데 털털하다는 둥 온갖 이야기가 떠들썩하게 울려퍼졌다. 내 자리로 돌아가자 한소희가 가까이 다가왔다.

"언니, 너무 무리하시는거 아니에요? 언니도 많이 힘드시잖아요."

"괜찮아,  정도 쯤은. 가벼운 농담 따먹기로 대원들이 긴장을 풀 수 있으니 다행이지."

소희가 내 걱정이 많이 되나보다.
내가 그렇게 힘들어 보이나? 최대한 티를 안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회식이나 다름이 없었던 식사자리가 정리되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악몽이 찾아왔다.
괴수들이 몰려오고 탄약이 떨어진 부대원들이 무력하게 죽어나가는 꿈이었다.
나는 대원들이 죽어나가자 혼자서 미친듯이 달려서 도망을 쳤다.

맞서 싸우라고 도망치지 말라고 악을 써봤지만 목에선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머리만 달랑거리며 날아온 소희가 비아냥 거렸다.

"이럴줄 알았지. 니가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질 깜냥이나 되는줄 알았어? 넌 그저 패배자야."
"니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니?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했어?  하룻밤 꿈처럼 금방 잊혀지는 먼지같은 하찮은 존재일 뿐이야."

칠공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내 주변을 맴도는 소희의 잘린 머리통은,
내가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집요하게 저주스러운 말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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