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6화 - 뒤틀린 시간
해가 지기전에 도착해야 했으므로 급속행군을 지시했다.
방금 전투를 치렀으니 많이 지쳤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식수는 부피와 무게를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그리 많이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테다.
평소보다 두배는 되는 행군 속도에 목적지까지는 앞으로 서너시간이면 도착 할 듯 했다.
내 주력으로 한시간이면 왕복을 할 수 있는 그쯤에서 나는 다시 단독정찰을 나섰다.
지평선 끝에 보이던 실루엣들을 정확하게 확인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전투를 각오하고 본대를 물가로 접근시킬지, 거리를 두고 물통만 들고와 물을 채워가야 할지 가늠을 해봐야했다.
아까 정찰을 해두었던 개울에 도착을 했다.
정체불명의 생명체들은 아까랑 위치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야시경에 착용한 망원렌즈로도 잘 보이지 않을정도의 먼 거리였다.
하지만 거리가 멀다고 무시하기엔 아까전의 실수가 뼈 아팠다. 이번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틈틈이 렌즈로 시야를 확인하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다.
식별이 충분하게 가능한 거리까지 붙은 후 렌즈에 비치는건 희소식이라 할만했다.
"저건 야생 염소 떼잖아?"
족히 수백마리는 되는 규모였다.
괴수때문에 위험한 것이지, 포탈 내부의 환경이 인간에게 적대적인건 아니다.
이곳에도 생태가 있고 동식물이 살고 있다. 괴수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먹지도 마시지도 생태계에 관여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우리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서둘러 본대에 합류를 했다. 분대장들을 모아서 염소 떼를 발견한 사실을 알렸다.
고기를 먹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침울하던 분위기가 조금은 나아졌다.
그때 포탈로 향한 팀에서 무전이 날아들었다. 거리가 멀어 무전 중계를 거쳐야했다.
"여기는 델타, 본부 입감했는지?"
"여긴 본부, 수신양호."
"지원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이상."
이게 무슨 소리지?
분명히 하루보다 긴 시간이 지났다. 규모가 어떻게 되든 지원자들을 24시간 마다 넣어주기로 했는데.
원래라면 표식을 보고 따라왔어야 할 지원대에 마중까지 나갔음에도 들려온 비보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길이 엇갈려 다른곳으로 간건 아닌가? 오버."
"표식도 그대로고, 무전에 응답도 없다. 이상."
"알겠다. 일단 중계팀과 합류해서 포탈 앞에서 대기하도록. 내일 일출까지 지원이 없으면 본대로 합류하라. 오버."
"수신완료."
염소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식량걱정까지 할 뻔했다. 전투식량을 충분히 챙겨오긴 했지만 보급이 아예 끊긴다면 얘기가 또 달라졌다.
"일단 식량소모를 하루 1식으로 줄여야 할 것 같아요."
원래 두끼씩 먹던 식량 소비량을 절반으로 줄였다.
밥이야 그렇다 치고 문제는 탄환이었다. 먹는거야 가진걸 아껴먹어도 되고, 염소무리도 발견했으니 당장은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총알이 없으면 싸울 수가 없다.
남아있는 전투물자는 오늘 치렀던 대단위 전투가 벌어지면 한 번이면 끝날 양이었다.
탄환 배분을 전혀 할 수가 없는 괴수와의 전투이기 때문에 소비량이 기하급수적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 눈앞이 깜깜했다. 일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후속 지원부대가 오지 않은거지? 우릴 버린다고? 그럴리가 없었다.
원래라면 소식도 성과도 없는 탐사 임무에 몇차례에 걸쳐 수십 명의 희생양을 꼴아 박을터였는데,
내 개입으로 인해 사전에 미리 대비해서 투자해놓고 벌써부터 손절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생각을 이어가며 퍼즐을 이리저리 돌려보기 시작했다. 놓친 퍼즐을 찾아야 한다.
버림 받았다는 선택지는 지운다. 소거법으로 하나 둘씩 가정들을 지워나갔다.
우린 미지의 공간에 와 있다. 우리 몸이 압축과 팽창을 하고 뒤틀리며 이곳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시공간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공간이 뒤틀렸으니 시간선이 뒤틀렸을 수도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나름의 결론을 낸 나는 새로운 총 지휘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것 같습니다."
"확실한건 아니지만 그게 아니라면 보급이 늦는게 설명이 되지 않아요."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군요. 혹시 얼만큼의 차이가 있는지는 감이 오십니까?"
"아니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오늘이면 보급이 올줄 알았는데. 전투물자가 너무 부족해요."
일단은 대장들 끼리만 알고 있기로 했다. 모두에게 알려봐야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으니까.
후속 보급이 계속 도착하지 않으면 어차피 눈치챌테니 기껏해야 하루이틀 눈속임일 뿐이었다.
왜 지도부가 부하들을 속이는지 깨달았다. 무거운 진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묵묵히 행군을 이어갔다.
해가 지기전에 목적지에 도착해 베이스 캠프를 차렸다.
얇은 개울이었지만 강보다 작은 규모였을 뿐, 수량이 꽤 풍부했다.
이 곳이 본부이자 주요 거점이 될 것이므로 서둘러 진지 공사를 시작했다.
나는 거의 삽과 혼연일체가 되어 땅을 파 재꼈다.
주변의 병사들이 작업의 신이 왔다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부대 내에서 내 별명에 공병의 여신이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물통에 물을 채우고 목을 축여 갈증을 해소했다.
오늘은 더 이상의 식사가 없기에 물배를 채우려는 듯 거하게 마시는 인원들도 있었다.
상류에서 물을 마시고 하류에서 간단한 세면이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뜻 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씻고 싶다는 인원이 생긴 것이다.
"지금 씻고 있잖아요?"
"샤워가...하고싶어요."
"몸에 뿌리기엔 물이 찬데요."
"반합에 데워서 섞으면 되요."
한명이면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겠는데, 무려 4명이었다. 그리고 이 넷이 곧 여기 있는 여군 전부였다.
나머지는 죽거나 낙오해서 포탈 앞에 가 있다.
순간적으로 개념은 어디로 갔지? 라고 할뻔 했으나, 이들은 모두 생사가 오가는 전투를 겪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물자가 끊긴 상황도 모르고 있고, 지금 당장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런 일로 화내면 내가 오바하는거다.
"그래요. 안 될 것도 없지. 하세요."
"샤워하고 싶은 인원들 있으면 교대로 해도 됩니다."
여자들만 해주면 차별이니 부대 전체에 알렸다. 남자들은 개울가에 옷을 벗고 서서 몸을 씻었다.
말을 못했지 씻고 싶은 사람들이 꽤 됐었나 보다.
금방 해가 떨어지고 주변이 어둑해지자 서둘러 경계근무 위치에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나는 그 모닥불 근처에 판초 우의를 들고 서 있었다.
씻겠다는 여자는 네 명, 가리고 싶은 방면도 네 방향. 한소희는 쉬라고 하고 내가 투입됐다.
그녀들은 차례로 한명씩 찬물과 더운물을 섞어서 미지근하게 만들어 몸을 씻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모닥불 빛에 의지해가며 차분하게 피부를 씻어 내렸다.
아까전에 씻지 말라고 했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
앞으로 샤워는 적극 권장이다. 위생은 중요하니까.
자리에 앉아 천천히 호흡하며 눈을 감으니 오늘 전투의 광경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괴수들은 어차피 처리해야 되기 때문에 전투 자체를 회피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혀야 했고, 당시 부대의 전력이 전부 모여있는 만전의 상태였다.
그렇기에 놈들을 피하도록 경로를 바꿨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평야지대였으니 기습을 당했을리도 없다. 분명히 발견과 동시에 선제공격을 감행했을테다.
어차피 소총수인 나는 총알의 사거리가 닿는 전투가 시작 될때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므로 미리 있었어도 하등 도움도 안된다.
나는 크게 잘못된 판단을 하지도 늦지도 않았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아군이 커다란 덩치를 가진 괴수에게 뭉개지고 으깨지는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선혈과 주인 잃고 비산하는 팔다리, 납작해진 인간의 육체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충격과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마음속으로 난 잘못한게 없다고 되뇌어 보아도 크게 달라지는건 없었다.
잘못이 있고 없고는 사실 중요한게 아니었다. 평범한 소시민이 그런 참상을 목격했다는 것 자체가 정신을 심각하게 갉아먹었다.
각성이 정신까지 강화해주진 않는다. 하얀방 때문에 되려 맛이 가면 갔지.
나는 이 무리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더불어 뒤틀린 시간에 의해 예측할 수 없게 된 추가보급과 공략이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막함에 한참 동안을 잠 들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죽어간 병사들이 일어나 날 살려내라고 소리를 쳤다.
자신의 팔다리를 찾으러 다니는 병사들도 보였고, 납작해진 병사는 본인 몸에 바람을 불어 넣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전사한 총 분대장이 입에서 시뻘건 피를 튀기며 내 멱살을 잡고 뒤흔들었다.
내 주변으로 수십구의 흉측한 시체가 모여들어서 나를 둘러싸고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살려내! 살려내!"
"개새끼야! 너 때문이야!"
"썅년아! 개 같은 암캐년아!"
"아니야! 난 잘못한거 없어어!"
"이런 곳에 우릴 데려온 니 잘못이야! 니가 뭔데! 니가 영웅이야?"
"같잖은 능력을 얻으니 뭐라도 되는것 같아? 니가 뭔데 우릴 이끌지? 할줄 아는게 뭐야?"
"너 사실은 우리가 다 죽든말든 상관없잖아? 그저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 아닌가?"
"너는 필요하다면 이 세상의 모두를 죽여서라도 원래 살던 곳으로 가고 싶을 뿐이잖아?"
"아니야아아아아아악―!!"
삐이이이이-
"허, 허억. 허억..."
"언니, 괜찮아요?"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숨을 몰아쉬자 먼저 일어나 있던 소희가 말을 걸었다. 귓가엔 이명이 맴돌았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질테니까.
"응, 그래. 괜찮아. 기상시간도 아닌데 왜 벌써 일어나 있어."
"그냥, 눈이 떠졌어요. 악몽이라도 꾼 거에요? 식은땀 좀 봐. 괜찮은거에요 정말?"
소희가 소매로 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걱정을 내비쳤다.
가만보면 얘가 나보다 멘탈이 더 쌘것 같다. 포탈에 들어온 뒤로 일방적으로 위로만 받지 않았는가?
"정말 괜찮아. 그럴만한 일을 겪었으니 악몽도 꾸고 그럴 수 있지 뭐. 너야말로 괜찮니?"
"네, 누구랑은 다르게 저는 악몽도 안꾼걸요?"
"어쭈~ 언니를 놀리네?"
머리를 헝클자 이번엔 아이 취급 하지 말라고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 나름의 배려인 셈이다.
어느새 동이 터오르고 있었고 지평선 너머로 솟아 오르는 태양을 바라봤다.
푸른 초원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아름다운 일출이었다.
인간의 상황이 절망적일 뿐 자연은 늘 변함이 없다.
이내 근무자들이 소리치며 기상을 알리고 또 다시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었다.
식량을 꺼내 밤새 굶주렸던 배를 채우고 오늘 하루를 살아갈 준비를 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