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40화 - 히로인을 강탈하다
손가락 뼈가 꺾어지는 상황에도 반격을 하다니, 보통 독종이 아니었다.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키 차이를 생각하면 180센치미터는 되는 건장한 남성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칼날이 번뜩였다.
왼쪽으로 한걸음 움직이며 어깨를 뒤로 뺐다.
공격이 빗나간걸 깨닫자 마자 그대로 왼쪽 어깨로 나를 들이받으려고 성난 황소 처럼 달려들었다.
다시 한걸음 비켜서자 그게 노림수 였던지 비켜선 자리로 이미 칼날이 날아오고 있었다.
내 예상을 넘어서는 전투력이었다. 이 미친놈한테 대인전투능력이 떨어지는 경찰이라도 출동해 오면 그대로 토막날 판이었다. 왼손이 부러진 채로 발광하는걸 보니 진압봉으로 두들겨서 해결될 놈이 아니었다.
이런 일에 출동한 경찰이 실탄을 가지고 올리도 만무하니 실로 여러사람 피보게 할 위험한 놈이었다.
상처입은 짐승처럼 울부짖는 놈이 재차 칼을 휘두를 때, 사선으로 찍어 내려오는 칼날 사이를 상체를 숙이며 파고들었다. 마음만 먹었으면 첫 합에 끝낼 수도 있었지만, 놈의 공격을 다 받아낸건 나름의 제재를 가할 수위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계산이 끝났다. 그냥 살려두기엔 놈은 너무 위험했다.
흉기를 들고 강도 및 주거지 침입을 하긴 했으나, 내 개입으로 인해 강력범죄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만큼, 형량이 얼마나 나올진 법원에 가봐야 아는 법이다. 이놈은 몸 성히 기어나오면 또 이런짓을 벌일게 분명했다.
상체를 들어올리며 장심으로 턱을 가볍게 후려쳤다.
뇌를 흔드는 일격에 놈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니 주저 앉은채 흔들리는 동공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 숙이고, 눈 감고, 귀 막아요."
그녀는 군말없이 내가 시키는대로 행동했다.
나는 놈을 바닥에 똑바로 눕히고 양 무릎을 그대로 밟아 으깨버렸다. 무릎뼈와 관절이 산산조각 나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앉은뱅이로 살면 타고난 힘으로 나쁜짓은 못하겠지.
원래라면 제압하고 경찰을 부르려고 했으나, 다리를 박살 낸 시점에서 되려 내가 폭행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상황을 형법21조, 즉 정당방위 법에 의거하면 법적으로 완전히 내 쪽이 가해자였다.
더군다나 나는 현재 평범한 사람이 아닌걸 만천하에 공개한 상태다.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무슨 정의의 사도씩이나 된다고 저 미친놈의 무릎을 아작을 내놨단 말인가.
놈을 짐짝처럼 들어올려서 계단을 내려가 길바닥에 내다 버렸다.
정신을 차린 놈이 악을 써대면 마음씨 착한 누군가가 119라도 불러주겠지. 저 미친놈이 나한테 맞았다고 증언하면 골치가 아플테지만, 경찰이 날 특정했을 즈음엔 이미 포탈에서 내 생사가 갈리고 있을 것이었다.
"좀 괜찮아요?"
"네, 네..."
"문을 부숴버려서 어떡하죠? 배상은 해 드릴게요."
"아뇨, 도움을 주신것만으로도 감사한데...괜찮습니다."
이 시간에 새 문고리를 달아 달라고 사람을 부를 수 있나?
현 상황을 해결할 생각만 하다가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찢겨진 옷을 넝마처럼 걸치고 속옷이 다 드러나는 상태 그대로 주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세심하지 못한 나를 탓하며 우선 옷걸이에 걸린 겉옷을 가져와 덮어주었다.
"이름이 뭐에요?"
공포심을 덜어내주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무심코 물어본 말에 나는 벼락을 맞은 듯 온 몸을 부르르 떨 수 밖에 없었다.
"한, 한소희요..."
이런 미녀를 보고 왜 그 생각을 하지 못 했을까.
상처 입은 히로인 한소희. 그녀는 주인공 파티의 일원이다.
원작에서 그녀는 오늘 밤 험한꼴을 당했을 것이다. 그것도 밤이 다 새도록.
내일도 감금된 채로 하루종일 놈에게 처참하게 유린 당할테고.
아까 그 싸이코놈은 그녀를 원 없이 취한 후, 질리면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블루포탈이 개방된 영향으로 각성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그녀 또한 각성자였다.
힘을 얻은 그녀는 놈에게 처절한 복수를 행하고 살인죄로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인력난에 시달리는 포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남은 형량 동안 노역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속에서 주인공과 만나게 된다.
분량 자체가 비극뿐인 히로인이다. 설정이 설정인지라 독자들의 애정도 그리 깊지 않아서 대우도 별로 좋지 않았던걸로 기억한다.
그런 그녀가 망가지지 않은 채로 내 손에 들어왔다.
난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초능력은 꽤 좋은편이니까.
"소희 씨. 몇살이에요?"
"스, 스무살이요."
"그럼 내가 위니까 말 놔도 되니?"
"네, 네. 그러세요..."
"문짝도 이렇게 됐고, 오늘 겪은 일도 있어서 무서울텐데 오늘 우리집으로 갈래?"
예상치 못했던 말에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나를 빤히 올려다 봤다.
"네? 그...게..."
"아, 잠깐만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이거 좀 봐볼래?"
내 신원을 보장할 방법이라곤 방송 뿐이었다.
나는 가장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기부에 관련된 기사들을 보여줬다.
나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내게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죠?"
"내가 한번 도와줬으니 기왕이면 끝까지 도와주고 싶어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옷을 갈아 입고 방 안에 있는 짐을 챙긴 뒤 나를 따라 나섰다. 애초에 짐도 별로 없었다.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문이 부숴졌다고 말하고 집을 비운다고 하는걸 보니 이 동네를 뜰 모양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여기서 더 살긴 싫을 것 같았다. 원룸이야 다른데서 구하면 되고.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원하는 만큼 지내도 좋으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냉장고나 찬장에 있는거 먹어도 돼."
"방은 여기 쓰면 돼."
남는 손님방을 소희에게 내 주고 내방에 있는 침대를 거기로 옮겨주었다.
이걸 내 주고 안방에 있는 침대는 내가 써야할 것 같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언니...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그, 제가...흑...윽."
이제서야 모든 긴장이 풀리며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는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녀를 꼬옥 안아주며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으니까. 아무일도 아니야. 그래그래."
"따뜻한 물로 씻고 푹 자렴. 무슨 일 생기면 나 부르고."
그녀를 위로하고 문을 닫으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내일이면 블루포탈이 개방 될테고, 그녀는 잠에 들면 각성을 할 것이다.
그녀가 소설과 같은 초능력을 개방한다는 확신은 없었으나, 그래도 걸어볼만 했다.
초능력이 인간 자체에 내재된 잠재력에 기대는건지 경험이 영향을 미치는건진 알 수 없었다.
만약 후자라면, 내가 원하던 한소희는 영영 없을 것이다.
그녀가 먼저 씻은 후 잠자리에 들고, 곧이어 나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 방송을 켜고 시청자들과 잠들기전 막간 토크타임을 가졌다.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잠을 청하니 곧 수마가 찾아왔다.
아침햇살에 눈을 떴다. 아직 알람이 울지 않았는데 조금 일찍 일어나버렸다.
핸드폰으로 뉴스기사를 확인해보니 흑구가 파랗게 변해 있었다.
이미 최초 접촉자가 내부로 빨려 들어간 상황이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한소희가 자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살짝 문을 열어보니 아직도 꿈나라에 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각성몽을 꾸고 있을 것이다.
각성하는걸 지켜보는건 처음이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크게 없었다.
그저 이 거리에서도 뜨거운 열감이 느껴진다는 것이 특이점이라 할만했다.
이때는 외부자극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잠에서 깨울 수가 없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그녀의 각성이 끝나길 기다렸다.
"꺄아아악!"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찢어지는 비명소리에 서둘러 방으로 달려갔다.
"무슨일이야?"
"악몽...악몽을 꾸었어요."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나를 꽉 붙잡으며 말했다.
"혹시 끔찍한 고통이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꿈을 꾸었니?"
"그걸 어떻게...?"
말 없이 그녀에게 붙잡힌 팔뚝을 쳐다보자 한소희는 얼른 팔을 놓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일단 힘 조절하는 법부터 익혀야겠다."
"힘 조절이요?"
나는 냉장고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왔다.
"이거 손으로 세게 쥐어봐."
"네? 네."
왜 이런걸 시키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의 그녀가 사과를 움켜쥐자 그대로 사과가 산산조각이 났다.
"꺄악!"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저지른일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기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곧바로 내 팔뚝을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팔은 괜찮으세요...?"
"걱정하지마. 나도 너랑 같아. 그 꿈을 꾸고나면 더 이상 평범한 사람이 아니게 되지."
나는 그녀에게 내가 출연한 뉴스의 인터뷰 장면을 보여줬다.
그리고 덧붙여서 포탈에 대해 알려주고 나를 도와주겠냐는 질문을 건넸다.
"소희야. 우리같은 초능력자들은 일종의 의무를 지게 돼. 저 포탈이 폭주해서 세상을 망가뜨리기 전에 처리를 해야하는데 나 혼자선 힘이 부쳐. 어제 처음 만난 사이에 목숨을 걸어 달라는 부탁을 하는게 참 염치 없지만, 그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라는걸 알아 줬으면 좋겠어."
"네, 언니 무슨 말씀이신지 알았어요...생각해 볼게요..."
당장 오늘 들어갈게 아니니 지금 결정할 필욘 없었다.
여리디 여린 스무살의 그녀에게 이런 얘길 한다고 포탈 안으로 데려갈 수 있을지 싶었지만, 얘기는 다 해놨으니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끌고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강제로 데려가 봤자 짐만 될테니까.
간편식을 준비해 한소희와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나는 오전에 방송 일정이 있어서 나갔다 올테니까,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어. 답답하면 나가서 바람 쐬도 좋고."
"네, 언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계속 혼자 살다가 집에서 배웅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방송을 키자 시청자들의 질문공세가 폭격처럼 이어졌다.
[정말로 니 말대로 됐네...이제 어떻게 되는거야?]
[복아 나 하얀방에서 엄청 아픈 꿈을 꿨는데 설마 매일 이러는거야?]
[정말 뭐가 어떻게 되는거야?? 아는것 좀 제대로 말해줘]
나는 시청자들에게 차근차근 대답을 해줬다.
"일단 꿈에서 고통을 겪은 친구는 몸이 나처럼 됐을거야. 생각보다 더 강하니까 평소에 힘 조절에 유의하고, 고통은 더이상 없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갑자기 세상이 멸망한다거나 그런건 아니니까 다들 너무 겁먹거나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말고. 그냥 저 파란놈을 해결하지 못하면 폭발같은걸 일으켜서 그 일대가 영영 못 쓰도록 날아간다고 생각하면 돼. 실제로는 약간 다르긴한데. 비슷하게 생각하면 돼."
공원을 걸으며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고 있자니 연락이 왔다.
어제 만났던 행안부 공무원이었다.
"방송은 여기까지 할게."
방송을 마치고 전화 통화를 연결했다.
상부의 지시사항을 이행하겠다고 연락해온 그는 내게 국방부로 가라는 말을 전했다.
국방부 장관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용산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