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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 〉8화 - 안식을 위한 투쟁 (9/74)



〈 9화 〉8화 - 안식을 위한 투쟁

얼굴이 벌개진 채로 목욕을 끝마치고 나왔다.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도 손 끝에 남아 있는듯 기나긴 여운을 남겼다.


자괴감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오면서도 뭐 어때?  몸인데 하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호기심에서 시작된 욕구의 충족은 자연스러운 거잖아?
내가 뭐 이상한짓을 한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냥 좀 몸에 꼼꼼하게 거품칠을 했을 뿐이라구.


여운이 긴 목욕을 해서 그런지 벌써 시각이 새벽 한시였다.

"몸도 나른하고 이제 그만 자야겠다."

핸드폰을 보니 민지에게 톡이 하나 와 있었다.


>>'복아 너무 걱정하지말고 기억 곧 돌아올꺼야! 얼른 병원가서 검사  받고 혹시 아픈데 있거나 내 도움 필요하면 부담가지지 말고  연락 줘 내가 도와줄테니까^^ 연락 피하지말구 알겠지? 늦은 시간에 보내서 미안 잘자'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신경써줘서 고마워. 너도 잘자.'


간단한 답문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 미쳐가지고 헛짓거리를 하고 있었지만 엄연히 몸의 원주인은 이 세상에 존재했었고
그 사람을 이리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분명히 간절한 그 마음이 내게 닿았다.


정신차리자.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곳에서 죽이되든 밥이되든 결말을 보고 원래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다.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푸념처럼 혼잣말을  뱉었다.

"잠들기 싫다."

이토록 잠들기 싫은 이유는 앞으로 내게 일어날 일 때문이다.
각성몽을 꾸며  속에서 하얀방을 마주한 적합자들과 그곳의 시련까지 이겨낸 각성자들은,

잠을 잘 수가 없다.
잠들 수 없다.
쉴 수 없다.

육체가 잠에 들면 하얀방에서 정신을 차리게 되고 깨어있는것과 완전히 동일한 사고능력을 가지게 된다.
뇌가 기능적으로 휴식하지 못하는 그런건 아니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잠이라는것은 없어서는  될 달콤한 선물이다.

줄일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정말 1분도, 아니 1초도 잠을 잘  없게 만들어 준다면 과연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물리적으로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면 모를까,
수마는 분명히 찾아오고 육신은 제 아무리 버텨봤자 언젠가는 꼭 잠을 자야한다.

문제는 잠드는 순간  거지같은 하얀방으로 끌려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얀방에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매우 불규칙적이며,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다.
누군가는 고작 몇시간이었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속에서 수십년을 견디는 듯한 고통에 시달린다.

더군다나 초반에는 개인차가 있다곤 하지만 확실한것은 처음 하얀방을 만난 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예외없이 방에서의 체감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성자의 능력이 강할수록 저 속도는 더더욱 가속도가 붙는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색 일색의 방. 그 공간에서 육체능력과 초능력에 대한 적응훈련을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서 100년도 거뜬히 수련을  수 있는 수련광이 아니고서야 맨정신으로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초인들은 본인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현실에서 시험해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시험해 볼수 있기에 상당히 유용한 공간이지만,
막상 매일같이 겪는 입장에선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까지 한다면야.
말해 무엇할까? 깨어나고 싶어도 깨지 못하는 꿈은,
그 자체로 지옥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내려진 구원은 무엇일까?
바로 포탈이다.

활성화된 푸른 포탈에 들어가면  빌어먹을 하얀방이 나타나지 않는다.
휴식을 넘어선 진정한 의미의 안식.
혹자는 잠은 죽음의 조각이라 하였다.

우리는 살아있길 원하지만 그와 동시에 편안한 안식도 원한다.
그렇기에 생과 사가 나뉘며 그 간접적인 체험으로 잠에 빠져든다.
하루를 기점으로 일종의 생과 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소중함을 빼앗긴 적합자와 각성자들은 포탈로 모여들었다.
포탈 너머 세상의 달콤함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안식을 쟁취했다.


부와 명예? 세계 평화와 정의를 위한다는 대의?
그런건 다 뒤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포탈 너머 세상에 진입하는 인간들은,
모두 스스로의 안식을 위하여 위험천만한 그곳으로 자진하여 들어갔다.

들어온 이상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했으므로 피 터지게 싸웠다.

괴수들은 지독하리만큼 강했으나 인류 또한 집요하리만큼 강했다.
역사속에서 인간들은 늘 스스로보다 더 강대한적을 상대해왔고 끝내 그들을 굴복시키고 승리를 가져왔다.
투쟁의 본능을 가장 진하게 타고난게 인간이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포탈 너머의 괴수들도 결국엔 인간에게 패배한 것이다.
첫 승리는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최초의 승리의 날에 포탈에 변화가 일어났다.
 색이 초록색으로 변한것이다.
봄날의 푸르른 나무같이 싱그러운 색깔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포탈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사상 최초의 귀환이었다.

그린 포탈이라고 명명될 이 구체는 블루 포탈과 단순히 색깔만 다른게 아니었다.

들어가는것만 가능한 푸른색과 달리 초록색은 양방향 출입이 가능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말이다.
더 중요한 점은 적합자나 각성자만 출입이 가능한게 아니라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포탈 너머의 세상은 괴수들이 인간에게 적대적일뿐 환경 자체는 지구와  다를게 없는 곳이었다.
끝 없이 한 방향으로 가다보면 마치 일렁이는 우주같은게 튀어나오며 공간의 끝이 정해져 있는걸 보면 정상적인 장소는 아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며 괴수들만 정리되면 딱히 위험할 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적합자와 각성자는 인류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자라는 의미로,
'개척자(pathfinder)' 라고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명칭에 걸맞는 활약을 했다.


바야흐로 '대개척시대' 의 시작이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세가지 혁명을 들자면 약 7만년전 일어난 역사의 시발점인 '인지혁명'
1만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  잉여 생산물을 만들어내며 인류 사회와 역사의 가속화를 부추겼다.
그리고 고작 500여년 전부터 시작된 '과학혁명'  지금까지도 인류 발전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이 변화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것이 '개척혁명' 이다.

그린 포탈을 이용해 넘어간  곳에는 말 그대로 무한한 자원이 있었다.
지구와 동일한 환경에서 채취되는 천연자원을  없이 긁어모으며,
필요하다면 그곳의 땅을 다시 재사용하기 까지했다.

 모든것이 가능했던건 입장 시 부피와 무게의 제한이 있는 블루 포탈과 달리 그린 포탈은 거대한 건설장비도 무리 없이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블랙 포탈에게 뺏긴 땅을 되찾기라도 하겠다는 듯,
인간들은 끊임없이 블루 포탈을 공략했고 이내 그린포탈로 만들어냈다.
넘쳐나는 자원과 에너지에 인간사회는 전에 없이 풍족해졌고 부자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부를 원한다지만 욕심 많은 부자들이 아무리 제 잇속을 챙겨도, 그럼에도 넘쳐나는 부에 결국 모두가 이전 보다는 확연하게  풍족해 질  밖에 없었다.


그린 포탈의 개발이 탄력을 받으며 제 3국의 아이들이 굶어죽지 않게 되었고 가난이란 개념은 자아실현을 하기에 부족한 재산을 뜻했지 밥 챙겨먹길 걱정하거나 바깥에서 얼어죽길 걱정하는 통념이 아니게 되었다.

지구에서 공장들이 자취를 감췄다.
공장들은 마음껏 파괴시키고 오염시켜도 되는 그린포탈 너머의 세상에서 생산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고
다 캐버려도 전혀 문제될것 없는 천연자원과 포탈 너머의 동식물들은 금방금방 멸종되고 고갈되었다.

인간이 환경파괴를 일삼지 않자 지구는 청정지역에 가깝게 변해갔으며,
지구상에 사는 동식물들은 모두  이상 특정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사냥 당하거나 사육 당하지 않고 소수종으로서 인간에게 보호 받았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포탈의 공략이 엿 바꿔먹듯 쉬운게 아니었기에 결국엔 문제가 생겼다.
포탈마다 난이도가 다 달랐기에 공략이 실패한 포탈은 레드 포탈로 변질되어,
그 크기를 힘껏 부풀린 후 블랙 포탈로 재변이해 인간들에게서 지구의 공간을 앗아갔다.

행성도 깨끗해지고 자원은 넘쳤으나 물리적인 공간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국 인간 사회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바로 그린 포탈로의 이주였다.


부의 양극화가 완화되었을 뿐 세상은 여전히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뉘었다.
지구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의로 또는 타의로 그린 포탈로 이주했다.
그곳에 건물을 올리고 주거구역을 마련했다.


그 과도기 속에서 개척자들 또한 그린 포탈로 이주를 해갔다.
그린 포탈에선 하얀방에 갇히는 시간이 견딜만 한 수준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개척자들은 하얀방에서 완전히 벗어날  있는 블루 포탈에 들어가기를 가장 선호하였지만,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을 전쟁만 벌이며   없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그렇게 은연중에 거주지를 기점으로 지구인과 포탈인이 나뉘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의 세상에 등장한  다른 계급이나 다름이 없었다.
장차 거하게 피어날 분쟁의 씨앗이었다.

"도대체 언제 깨어나는거냐."


나는 하얀방에서 하염없이 이 곳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적합자는 있을지라도 각성자는 아직 없을거라 추측했다.
각성자들은 등장함과 동시에 사회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굳이 나쁜쪽으로만 범죄를 일으킨다는게 아니라,
온갖 곳에서 해프닝이 튀어나와 기사화가 되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회사의 회전문을 밀다가 부숴버렸다거나 공원에서 입마개 없는 맹견이 달려들어 생존 본능에 힘 입어 반사적으로 뻗은 주먹질에 개의 머리통이 터져버렸다거나.
평범한 일상속에선 일어날 수 없는 그런일들 말이다.

물론 지들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줄 알고 천지분간 못하고 범죄를 일으키는 천둥벌거숭이들도 꽤 된다.
하지만 다수의 각성자의 존재가 알려지고 나서는 각성 사실을 알자마자 미친놈 처럼 날뛰는 경우는 확연히 줄어든다.

내가 해야할 일은 원작보다 더 먼저 포탈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 전선에 뛰어드는 것이다.
레드 포탈로 인한 피해가 커지기전에 서둘러 스토리 라인에 개입하기 위해 어떤것부터 시작해야할지 머릿속에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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