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4화 - 내가 여자라고?!
한번도 겪어본적 없는 끔찍한 작열통에 얼마간 시달렸을까?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을것을 정신을 이상하리만큼 또렸했다.
마치 이 고통을 온전히 견뎌내야 한다는 것처럼.
몸이 불타는것 같은 통증이 오는데도 감각은 무뎌지긴 커녕 계속 처음과 같은 선명함을 유지했다.
고통속에 회까닥 뒤집혔던 눈알을 끌어내리며 눈을 홉뜨었다.
혼탁한 시야속에서 억지로 초점을 맞추며 바라본 몸엔 불이 붙어있진 않았다.
비명을 너무 질러서 완전히 쉬어버린 목과 수십차례 이어진 경련으로 인해서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몸을 느끼며 그저 어서빨리 이 고통이 끝나기를 기도하는 수 밖엔 없었다.
이 공간에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10시간? 하루?
통증때문에 시간감각이 뒤죽박죽이었다.
하긴 이런 공간에 있으면 통증같은게 없었어도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진 못했을 것 같다.
고통이 사라짐과 동시에 백색의 공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유리창으로 만든 세상이 와장창 깨지는것 같았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뜨었다.
천장의 벽지무늬와 피부너머로 느껴지는 이불의 감촉을 보니 여전히 모든게 의문투성이인 그곳이었다.
악몽을 꿔도 아주 질 나쁜것을 꾸었다.
몸을 일으키는데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꿈에서 그렇게 시달렸는데 반대로 컨디션은 좋다니 알다가도 모를일 이었다.
대개 심한 악몽을 꾸면 몸이 축 쳐지고 기운이 없지 않던가?
어찌됐든 밖이 어둑어둑해진걸 보니 저녁때가 된것 같다.
"죽는줄 알았네."
"어?"
목소리가 왜이러지?
이전의 목소리도 원래의 내 목소리완 달랐지만 명백한 남성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어색하긴해도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들리는건 뭔가? 명백한 이 이질감. 얇고 높은 성대의 울림.
고장난 장난감처럼 고개를 삐그덕 거리며 아래로 떨궜다.
무언가 봉긋하게 솟아오른 신체부위로 인해 배가 안보였다.
"으아아아악!"
전방에 힘찬 비명 5초간 발사아아아아-!
후다다닥-
전광석화와 같이 화장실로 달려들어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현실성이 너무나 없어서 이미 내가 겪고있는 스펙타클한 일련의 사건들 마저 별거 아닌것으로 치부해도 될 정도의 드라마틱한 상태였다.
"내가 여자가 됐다고?"
떨리는 목소리를 느끼며 거울을 다시 바라보자, 충격을 받아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거울속에 비치는 것은 분명히 여인의 생김새였다.
스무살정도로 보이는 앳된 용모.
비단결같은 윤기와 찰랑거림을 자랑하는 등의 절반정도 오는 검은색의 긴 생머리.
둥근 반달형의 커다란 눈에 길게 뻗어나온 속눈썹과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윽한 갈색 눈동자.
오똑한 콧대는 도도하게 하늘 높은줄 모르고 솟아 있었으며 살짝 들린 코끝이 귀여운 느낌을 주며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선명한 혈색이 도는 분홍빛의 입술은 얇고 길었으며 살짝 들린 입꼬리는 기분좋게 웃는 인상을 주었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잡티하나 없는 누가 그린것만 같은 말도안되는 도자기 피부였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쁘다는 연예인을 가까이서 본적이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 거울에 비치는 얼굴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심지어 이 얼굴 쌩얼이잖아!
거울을 보며 씨익하고 웃어보이자 천사같은 미소가 나타났다.
웃는게 예쁘면 평범한 사람도 예뻐보이는것을.
천상의 선녀같은 미모를 지닌 묘령의 여인이 환상적인 미소를 띄우자 내 얼굴이라는것도 잊고 잠시간 넋이 나갔다.
기세를 모아 고개를 내려 몸 이곳저곳을 관찰하고 전신거울에도 비쳐 보았다.
165센치미터 정도 되보이는 신장에 전체적으로 슬렌더한 몸매지만 볼륨감이 넘쳐흐르는 나이스 바디를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만화에나 나오는 완전무결한 몸매였다.
딱 보기좋은 날렵한 근육과 늘씬한 바디라인 거기에 보정없이도 제대로된 S라인을 가진 극한의 여성성을 가진 몸매.
이건 화보로 찍어도 포샵 심하게 했다고 욕먹을 정도의 비현실적인 몸매였다.
관찰과 감상의 시간이 끝나고 난 바닥에 철퍽 주저 앉았다.
결코 좋아할일이 아니었다.
난 신체건강한 대한의 건아란 말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였거늘! 아예 몸뚱이 자체가 바뀌어버린 이 상황은 대체 무어란 말이냐.
소설속에 끌려들어온것도 심난한데 여자가 되다니? 기왕에 된거 전세계를 씹어먹을 초절정 미녀가 된것에 다행스러워 해야하나?
"난 망했어......"
어쩜. 목소리까지도 엄청나게 좋았다. 이 목소리라면 알람소리로 해놔도 매일 아침이 기다려질것만 같았다.
띠링-
넋이 나간채로 멍을 때리던 그때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주섬주섬 핸드폰을 주워 올리자 문자가 한통 와 있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작품에 애정이 없으신것 같아 동기부여 해드립니다.'
"미친 개 X발!"
다시 들여다보니 문자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내가 결말 안내서 작품에 애정없다고 욕했다고 복수하는거야?
날 끌고 들어온걸로 모자라서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시간만 축낼것 같으니 날 여자로 만들기까지해?
갸아아아악!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가감없이 표출했다.
바닥을 쿵쿵 내리찍기도 하고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종국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 징징대고 난리를 쳤다.
띵동-띵동-띵동-
세번이나 내리 누르는, 어딘지 미묘하게 짜증이 가득한 리듬으로 눌러지는 벨소리.
"저기요! 아랫집인데요~."
"죄송합니다. 조용히 할게요."
"아이들 자제 좀 시켜주세요."
"인간적으로 너무 시끄럽잖아요."
"제가 뛴거에요. 죄송합니다! 이제 안뛸게요."
아파트에서 너무 소음공해를 심하게 했나보다. 층간소음 조심해야지. 암 그렇지.
다 큰 어른이 내가 뛰었다고 이실직고하니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얼굴 한번 보고 얘기하시죠."
고작 한층 올라온거 가지고 유세는-
그래 귀찮게 행차하셨으니 단단히 못 박아두고 싶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경계심 없이 문을 열었다.
밖에 나가면 흔히 볼수있는 2~30대 남성이었다.
퇴근한지 얼마 안되는듯 얼굴이 피로에 쩔어있었다.
"아이도 아니고 그렇게 뛰시면 어떡합니..엇."
"미안해요. 앞으로 이런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 예에...이사 오셨나요? 처음뵙는 분이신데."
"아, 네, 얼마 안됐어요. 앞으로 주의할테니 이렇게 올라오고 안하셔도 됩니다. 이제 됐죠?"
"예, 예, 저도 조금만 참으면 될걸 급하게 올라와서 짜증내고 죄송합니다!"
그새를 못참고 윗층에 따지러 온걸 보면 성질이 좀 급한것 같지만 상대방이 사과하자 본인도 예의를 지키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를 하는것 보니 싸가지없는 놈은 아닌것 같았다.
근데 왜 인사하는데 고개만 내려가고 눈깔은 위쪽으로 치켜뜨는거지?
문을 닫고 잠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원래 체격이 있던 남자가 입고있던 품이 많이 남는 흰 티.
펑퍼짐하게 흘러내린 반바지.
상의는 속옷이 없이 티셔츠 딸랑 한장.
그렇다. 노.브.라. 였다.
거기에 티셔츠가 큰지라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차림 이었다.
"이 X발놈이?"
놈에 대한 내 평가가 아랫층 주민에서 때려죽일 변태새끼로 격하되는 순간이었다.
관음증 환자같은놈이 여자가 이런 옷차림이면 얼른 문닫고 꺼질것이지 이러니 저러니 말 붙이면서 시간을 끈거였잖아?
넌 뒤졌다.
다음에 나 마주치면 바로 강렬한 고자킥을 선사해주마.
이를 빠드득 갈며 처절한 응징을 다짐하는 나였다.
후우~
괜한것에 열내고 있다가 정신이 돌아오니 앞길이 막막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하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봤자 결론이 도출될리가 없다.
그저 한숨이나 푹푹 내쉬는 수밖에는.
다시 티비를 틀어보니 미확인 구체에 대한 보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그 광경을 송출해주는 채널도 있었다.
커뮤니티를 들어가보니 생각외로 사람들은 그리 크게 반응하진 않는 모습이었다.
하긴 고작 2미터짜리 허공에 둥둥 뜬 검은색 똥덩어리가 나타나든지 말든지.
다들 먹고사는게 가장 큰 문제지 저런 기 현상엔 별 관심 없는게 정상적인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저것이 얼마나 짜증나고 위험한 물건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겠지.
저놈이 폭주하면 일으키는 현상은 일종의 공간침식으로 실제로 그 공간이 없어지는건 아니지만 저놈의 몸뚱아리로 꽉 차버리기 때문에 사실상 그 공간에 대한 권리를 잃는것이나 다름 없다.
초창기엔 직경 3키로미터 안팎으로 자라나는 흑구만 나타나지만 나중엔 수십키로미터의 직경까지 거대해지는 것들도 나온다.
보다 거대한 저것들은 대기권을 유린하고 지표면을 깎아먹는걸로 모자라 맨틀층을 깎아먹을듯이 비대해지며,
그 크기와 단단해 보이는 질감에 비해 질량이 없는것은 다행이지만 실체는 분명히 존재하기에 높게 솟은 흑구는 대류권의 공기 순환에 영향을 미쳐 날씨와 기상에 변화를 준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늘어난 흑구들로 인해 인류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후에 관악구에 나타날 거대 흑구는 직경 20키로미터 이상 부풀어 오르며 관악구 일대를 잡아먹어버린다.
한국에서 도심 한가운데에 등장한 첫번째 재앙으로 그때부터 사람들은 발등에 아주 큰 불이 떨어졌음을 인지한다.
나중에 명명될 이름이지만 정식 명칭 '비활동형 포탈' 사람들은 대충 블랙포탈 혹은 흑구라고 불렀었다.
지금 강원도에 나타난 저놈은 일주일여가 흐르면 푸른색으로 변하고 내부로 입장이 가능해 지겠지만,
일개 시민인 내가 뭘 할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앞길이 정말로 막막했다.
그렇다고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면 재앙이 엄청나게 진행되고서야 주요 스토리에 개입을 할수가 있는데 작가놈이 그걸 바라진 않았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소설 '던패' 의 주인공은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많이 해결하려고 뼈가 갈리도록 구르니까 말이다.
아 근데 그놈은 특별한놈이고 나는 평범하잖아!
여자가 됐으니 마냥 평범하다고 할순 없지만 아무튼.
그때 핑-하는 효과음이 들리는 착각과 함께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놈이 가진 특별함?"
잊고 있었다. 잠시 망각했을뿐 나도 엄연히 통과의례를 거쳤고
특별해 졌다는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