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화 〉독안에 든 고양이[이하운](2)
이하운은 마레이에게 사과한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르덴에 뒤에 서서 마레이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색 캐미솔을 입었다. 옅은 하늘색 청바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선물이야.’
에르덴은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가볍게 윙크를 하고 자리에 일어나,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이하운을 앉혔다. 에르덴의 하얀 실크 롱 장갑이 이하운의 맨 어깨를 매만졌다. 마치 연주하듯이.
“자자, 오늘부터 가까워지는 두 사람이니까. 서로 인사해. 뭐, 알고 있는 사이니까. 이런 게 더 어색하려나~?”
에르덴은 축 늘어진 이하운의 고양이 귀를 접었다 펴길 반복하며 장난치고 있었다. 깃발 들기 게임처엄 좌우를 번갈아가며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에르덴의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연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라벨라가 일일이 행동을 지정해주었을 때와 다르게, 에르덴은 마레이에게 자율성을 주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하운 선생님.”
“.........응.”
평소에 쾌활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던 이하운의 모습은 없었다. 그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마레이의 시선을 피하고 조심스레 대답할 뿐이었다. 무릎 위에 올린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수치스러운 걸까.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이하운은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곧장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자자, 둘 다 오늘부터 친해질 사이니까. 어색해하지 말고. 응? 평소에는 평소처럼 지내도 돼. 그러니까, 너무 거리를 두지 말라고. 자, 마레이 손을 내밀어.”
에르덴의 말에 따라, 마레이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이하운도, 올려야죠?”
이하운이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면서도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자, 이제 악수해.”
이하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마레이는 조심스레 이하운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따뜻했다. 이하운의손이 움찔 떨렸다. 고양이의 노란색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마레이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고, 이하운은 입술을 잔뜩 오므린 채 마레이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 고양이에게 하나, 하나 가르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하운의 손이 자신보다 한참 어린아이의 손을 꽉 붙잡았다. 마치, 제 어미 젖에서 떼어놓는 아기 고양이가 발톱을 세워 허공에 뻗듯, 그렇게 무의미하게.
“후후, 좋아. 좋아. 서로 알고 있으니까. 빨라서 좋네. 자자, 이제 더 친해질 시간이야.”
“친해질 시간이요?”
마레이가 에르덴에게 되물었다. 이하운은 죄를 지은 것처럼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 모습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자자, 팔짱부터 껴봐. 어색하게 걸어가기만 할 거야~? 좀 포옹도 하고.”
연인처럼 말이야. 연인처럼. 에르덴의 말에 이하운은 떨리는 손으로 마레이의 팔을 슬며시 끌어안았다. 이하운은 새끼 고양이 같았다. 게으른 호랑이처럼 느껴졌던 그녀가 오늘은 자그마한 소동물이 되어서 자신 앞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이하운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에르덴은 입술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마레이도 엉거주춤 이하운을 끌어안았다. 이하운에게서 베이비 파우더 냄새가 났다. 체온은 다른 사람들보다 무척이나 높아서, 몇 분만 끌어안고 있으면 땀이 날 것 같았다.
“이, 이상한 냄새…..지? 처음 산 거라...”
이하운은 조심스레 마레이를 밀어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베이비 파우더 향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뇨. 좋아해요. 베이비파우더 향.”
“거짓말하지말고.”
이하운이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뭐라 말해도 그녀가 믿지 않을 것 같았다. 마레이는 고개를 숙여 이하운의 목덜미에 코끝을 가져다 대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베이비 파우더향.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느낌의 체향
“뭐, 뭐하는 거야!”
이하운이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레이를 떨어트리기 위해 노력했지만,매일매일 제 어머니와 섹스용 펫들에게 애무를 하며 밤기술을 익힌 소년에게는 이하운의 반응은 그저 앙탈정도만 보일 뿐이었다.
“하, 하지마!”
이하운은 참다못해, 마레이를 밀어냈다. 잔뜩 힘이 빠진 것인지 그저 가볍게 떠밀 뿐이었다. 고양이 선생님의 귀와 꼬리가 빳빳하게 세워져 있었다. 잔뜩 경계하는 이하운의 모습에 마레이는 한 걸음 물러섰다.
“이러면 믿을 수 있죠?”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소년의 모습에 이하운은 자신이 너무 과잉 반응을 하는 것일까 생각을 하며, 야릇한. 아니, 어린 아이에게 야릇한 감각을 느낄 리 없었다. 소년의 코끝이 긁어서 그런지 묘하게 간지럽게 느껴지는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믿을 수 있죠?”
되묻는 마레이의 모습에 이하운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아이였나. 자신 옆에서 있는 남자아이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저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이하운 선생님. 어디 아픈가요….?”
“아니, 아냐. 아니야.”
몇 번이나 고개를 저으며 부정한 이하운은 자신도 모르게 마레이에게서 뒷걸음질 쳐버렸다. 마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이하운이 에르덴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 있나요, 이하운?”
새끼 고양이가 덜 여문 손톱을 세우는 걸 본 것처럼 에르덴은 가소로운 듯 웃고 있었다. 이하운은 애써 에르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연인처럼 행동하라니까요. 후후, 이하운은 계약을 위반할 생각인가요?”
계약. 계약. 계약. 단, 두 단어였지만 무엇이든지 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 같았다. 이하운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소년에게 꽉 달라붙었다. 슬쩍 물러나려는 마레이의 팔을 꽉 붙들었다.
“응응, 좋아요. 이런 그림을 원했어.”
에르덴은 손뼉를 치며 적극적으로 마레이에게 달라붙는 이하운의 모습에 만족스레 웃어 보였다. 마레이가 자신을 향해 도와달라는 듯이 바라보는 모습에 천박하게 젖어버렸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 이하운 선생님… 너무 가까운데요...”
“계약이니까, 미안해.”
이하운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마레이 팔을 꽉 끌어안았다. 연애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기에 그저 막무가내로 달라붙을 뿐이었지만, 필리아와 다른 풋풋함이 좋았다. 그렇게 의미도 없이 이하운과 마레이는 걸었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주변에서는 관심도 없을 지도 몰랐다. 과잉으로 부풀어 오른 자아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하운은 아는 게 없었다.
차라리 인간들과 싸우던 때가 마음이 편했다. 자신은 이런 에두른 표현 따위는 알지 못했다.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지금 배 안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자궁이 주는 미묘한 느낌에 이하운은 작게 한숨을 토해내고 마레이를 귓가에 조심스레 속삭였다.
“오늘…. 뭘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지?”
마레이는 대답하는 대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달아오른 귓가에 이하운은 그래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이 아이도 알고 있었구나. 적어도 겁간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최악에서 차악을 찾을 수 있었다.
“마레이랑, 연인의 데이트 하기로 했잖아요. 난 아직 만족 못 했다고요, 이하운.”
“알아, 안다고. 재촉하지 마.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고.”
연애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의 인생에서 첫 데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제자였던 그녀의 남편과는 이런 낯간지러운 데이트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으니까.
“일단, 음식을 떠먹여주는 걸 보고 싶어. 슬슬 점심시간이니까,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둔 곳이 있거든.”
에르덴은 마레이와 이하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짓궂게 웃고 있었다. 멀리서 본다면 연인인 소년과 소녀, 그리고 보호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이하운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어린 소년과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고개 들어, 이하운. 들라고 했어요.”
에르덴은 말에 이하운이 주먹을 잔뜩 움켜쥔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술을 꽉 깨문 채 자신을 노려보는 저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허덕일 거라 생각하니 귀엽게 느껴질 뿐이었다.
“지나가는 저 꼬맹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세요.”
이하운은 시키는 대로 아장아장 걸어가는 어린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5~6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이하운의 인사에 기쁜 듯 손을 흔들었다. 보호자로 보이는 부모가 이하운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쳤다.
“왜, 부끄러워요?”
이하운은 에르덴의 추궁에 시선을 피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눈가에 맺힌 물방울에 에르덴은 가학적인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에, 에르덴 누나…?”
“알았어. 알았다고, 마레이. 뭐, 더 놀리고 싶었지만…. 인지 필터를 끼워놓았어. 신성력으로 만든거니까 그 녹색용을 제외하고 알아볼 인간은 발테르에 없어.”
“정말이야?”
“이게 미쳤…!”
이하운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에르덴의 웃음기가 사라지고 곧장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하운의 뺨을 향해 후려치려다. 옆에 있는 마레이를 보고 이하운의 뺨을 거칠게 주물렀다.
“이하운씨, 부디. 제 말에 토를 달아주지 말아 주세요. 저는 화를 내고 싶지 않다고요.”
모욕적일 정도로 뺨을 거칠게 주무르는 에르덴의 행동에도 이하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마주 보지 못했다.
예전이었다면막는 시늉이라도. 아니, 반격이라도했을 텐데. 눈을 질끔 감고 몸을 움츠린 모습에 에르덴은 이하운의 뺨을 더욱더 거칠게 주물렀다. 꼬집는다는 말이 정확할지 몰랐다. 그래, 이거야. 자신을 노려보기는커녕 두려운 듯 눈을 내리까는 모습에 에르덴은 차오르는 충족감에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야생성이 거세된 고양이에게 딱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조심스레 자신의 눈치를 보는 마레이에게 혹시나 폭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이와 동시였다.
“아, 아… 해!”
이하운은 위협적으로 포크로 마레이에게 들이밀었다.
“저, 저 음식은….?”
“아… 그게… 지금 찍어줄게. 자, 아 해.”
-챙!
작게 썰린 고기를 거칠게 파고든 포크가 접시를 거칠게 찍어내린 소리가 났다.
“아, 해. 입 벌리라고!”
“아, 아직 다 안 먹었다니까요… 씹고 있어요….”
이하운은 부끄러운지 귀를 파닥거리며 마레이의 입가에 고기를 밀어붙일 뿐이었다. 에르덴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하운의 행동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이다음은 뭘 해야 해….?”
“저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겠어요….”
라벨라와 일리엔이 음식시중이 떠올랐지만, 야외에서 할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거기에 남이나 다름없는 이하운에게 시킬만한 행동도 아니었고. 그렇다면 정상적인 연인들이 식사를 생각해야 하는데, 자신이 아는 것은 필리아와의 식사뿐이었다.
기품 넘치는 식사예절의 일련의 과정. 생각하는 건 그 정도 밖에 없었다.
“흐음… 그래, 마레이. 고기를 씹어서 이하운의 입안에 넣어줘. 그리고 이하운은 그걸 먹고.”
태양을닮은 노란색 눈동자가 있는 힘껏 커졌다. 잔뜩 혐오감을 담은 눈동자가 에르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일 같은 경우 잔뜩 씹고 타액과 함께 키스를 하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마레이로서는 고기를 씹어서 넘긴다는 건 조금 당황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이하운에게는 ‘조금’ 정도로 표현할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계약이야.”
이하운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는 에르덴의 얼굴에 억지로 웃어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입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정도로 에르덴은 조급한 성격은 아니었다.
이하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이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아니. 더욱 열악한 처지라 마음을 비운 것일 수도 있었다.
두 사람 다 이 자리에 있지만, 자신과 마레이는 엄연히 다른 이유로 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자신은 망가진. 아니, 긁어낸 자궁을 다시 받을 수 있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소년은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스승님이라고 했던가. 얼핏 듣기로는 가족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인 건가. 므랑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빌어먹을 꼬맹이는 자신이 지켜줘야 하는데, 그래야 했는데. 그러기로 했는데.
이건 므랑데에 대한 배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해.”
“네?”
“씹은 걸… 나에게 먹이라고….”
이하운은 눈을 질금 감은 채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에르덴은 만족스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혀를 내밀어 허공에 이리저리 내밀고 있었다. 씹던 음식을 먹이라는 건 그저 구실에 불과했다.
‘키스해버려.’
이하운의 말에 마레이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도. 역시 고기는 조금 무리일지도 모르겠네.과일로 하자. 음… 마레이는 망고를 좋아했던가?”
에르덴이 마레이 앞으로 잘 잘린 망고가 가득 든 접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