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독안에 든 고양이[이하운](1)
“좋은 선물이 있으니까, 조금 ‘연기’라는 걸 부탁해도 될까?”
마주앉은 에르덴은 갑작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에르덴 누나, 갑자기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엄마라 불러달라니까, 뭐. 라벨라가 없을 때에는 누나도 나쁘지 않네. 아니, 더 좋은 것 같아. 당분간은 ‘누나~’도 괜찮을 것 같아.”
에르덴은 참 변덕스러웠다. 하지만 그 변덕스러움이란 방향을 알 수 없이 부는 바람 같았다. 거부감이 드는 대신, 그렇구나 하고 짧은 감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대신, 라벨라랑 같이 범해줄 때에는… 그때는 엄마로 불러주기야?”
“노, 노력해볼게요!”
엄마를 자칭하는 두 명의 누나들. 마레이는 나쁘지 않았기에. 아니, 이거대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극상의 여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매혹적인 두 누나들이 엄마(마망)를 자처하며 끈적하게 달라붙는 걸 거부할 사람은 없을 터.
“그래서 ‘연기’라는게 무슨 이야기에요?”
“마레이를 위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선물이요?”
에르덴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왜인지 우쭐해하는 표정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라벨라와 다르게, 나는 마레이의 씨받이들은 더욱더 늘어나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 라벨라는 자신이 완벽하게 쥐고 흔들수 있는 것들이어야만 안심하니까 지지부진해. 이드리엔이라고 했나, 그 쌍둥이 엘프중에 망아지 같은 이름이?”
“망아지… 네. 맞아요.”
망아지라니, 그래도 이드리엔을 생각하면 참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처음에는 잘 조교할 생각이었나본데, 요근래에는 역으로 조교당하는 것 같더라. 뭐 예상한 범위 안이겠지만,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끌면 언제 씨받이들을 늘릴 건데. 여유로운 것인지, 독점욕이 강한 것인지...”
“아하하...”
에르덴의 말에 마레이는 볼을 긁적였다. 라벨라도 이드리엔을 조교한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막상 마레이가 중간에 끼어들고 판을 뒤엎고 하다보니 이드리엔이 버릇나쁜 망아지마냥 날뛰고 있었다.
물론, 마레이로서는 그런 이드리엔도 좋았기에 그러려니했지만. 슬슬 라벨라도 서열정리를 해야겠다는 말을 침대에서 하고는 했다. 꽤나 충격적일지도 모르니 마레이도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마레이로서는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나 생각이 들어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니까.
“뭐,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마레이에게 주고 싶은 건, 수인족 씨받이야. 건강하니 아이도 잔뜩 낳을 수도 있을거고. 앞으로 너에게 도움이 많이 될 년으로.. 흠흠. 말 실수야. 도움이될 여성으로 선별했지.”
“갑, 갑자기 그렇게 이야기해도….”
선물이라기에 바이올린일까. 하는 기대가 조금있었지만, 갑자기 씨받이로 쓸 여인이라니. 마레이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머, 싫어?”
“네…. 갑자기 임신시킬 여성을 선물이라고 주시면….”
노예제도 시절도 아니고,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면 마레이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소년의 거절하는 기색에 에르덴은 턱을 괴고 티스푼으로 커피잔을 휘휘 저었다.
“학교에, 재미있는 걸 발견했어.”
“재미있는 거요….?”
갑자기 학교의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걸까. 혹시 샤샤 선배를 이야기하는 걸까. 생각해보니 태양교에서 천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재미있는 결계가 있더라고.”
“결계…..?”
“로렌, 그 망할 드레곤이 만진 것 같은데. 거기서 신기한 여우 소녀를 발견했거든.”
여우 소녀. 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에르덴이 갑자기 란 님의 대한 이야기를 어째서 하는 걸까.
“마레이는 악마라는 걸 알아?”
“아…!”
최초의 악마. 란의 이명이었다. 마레인느 조심스레 에르덴의 눈치를 살폈다.
“마레이도 알다싶이, 나는 성녀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래도 악마를 발견하면 해야될 도리라는 게 있어.”
마레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에르덴을 바라보았다.
“근데, 악마를 못 발견했단 말이야.”
거짓말이었다. 에르덴은 웃고 있었다.잔뜩 비틀린 웃음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 연기라는 거… 무슨 이야기인지 알려주세요.”
“사랑스러운 마레이. 응, 응. 좋아해. 난 마레이 밖에 없어. 란이라는 여우 소녀, 참 예쁘더라. 악마를 찾으러 다니다가 수인족 아이를 발견해서 깜짝 놀랐다니까.”
에르덴의 협박에 마레이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성녀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에르덴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이상하게 숨을 제대로 내쉴수가 없었다. 여전히 웃고 있는 에르덴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미모로 누구를 성녀님이라 부른다는 것은 무척이나 모욕적인 일일 수도 있지만, 마법으로 가리지 않는 에르덴의 얼굴을 보면다면 성녀님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에는 항거할 수 없는 신성함이 담겨있었다.
이걸 말로 표현하는 게 과연 제대로 표현하는 게 맞을까 생각이들었지만, 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보라색 머리카락은 라벨라의 눈동자 색을 닮아서 무척이나 신비롭게 보였다.
“...레이. 마레이!”
“아, 응. 네…!”
에르덴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옅게 미소지었다.
“몇 번이나 불렀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혹시…. 기분나빴어…?”
부모님에게 혼나는 어린 아이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는 에르덴의 모습에 마레이는 그제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순간 에르덴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긴장해버리고 말았다.
“.....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선물로 준다고 하고, 씨받이라고 하고. 그런 건 그렇잖아요.”
여자가 싫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남자로서 하렘을 꿈꾸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다만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껄떡거리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설마 아무나 데려 왔겠어? 정말이지… 내가 그렇게 무심한 여자로 보이는 걸까...”
에르덴은 볼을 잔뜩 부풀렸다.
“제가 아는사람이요….? 수인족이면….”
“응, 이하운이야.”
“이, 이하운 선생님이 왜….?”
어제 이하운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그 말을 하던 이하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지만, 이하운은 수인족 대전사 출신의 묘족이야.”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 이상하게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였다.
“예전에 마룡 토벌을 한 적이 있었어. 꽤 오래된 이야기긴 해. 내가 성녀가 되고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였으니까. 여러 종족들의 실력자들이 모여들었어. 엘프, 드워프, 수인족, 나, 황제. 뭐 많은 인원은 아니었어 8명 쯤이었나.”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 에르덴이 중간에 되물었다.
“거기서 이하운이 마룡의 발톱에 자궁이 꿰뚫렸어. 치료해줄 수는 있었지만, 아란치니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들어내기 전이다보니. 이하운은 수인족을 통합할 대영웅이라 칭송받았거든. 나나 여황제나 제국 내부의 문제로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밟아높은 수인족이 다시 통합되어 전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어.”
그래서 치료를 안했어. 못한다고 말하고 그냥 자궁을 적출해버렸지. 에르덴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그 열등한 종족들의 최고의 가치는 번식이야. 번식을 하지 못하면 아무리 싸움을 잘하던, 똑똑하던 병신일 뿐이지. 그렇게 수인족의 대영웅이자, 대전사인 이하운은 병신 취급을 받으며 남편에게 버림받고 인간의 세계로 도망치듯 빠져나온 거야. 뭐, 제국 내에서 수인족은 여전히 무서운 종족. 이라는 느낌이잖아?”
끼리끼리 뭉친다는 거지. 공국에서 몇 년 의탁하다가, 로렌 그 망할 녹색용이 학교로 부른거지.
에르덴의 말은 끝나지 않았지만, 마레이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하운을 저에게 선물로 준다는 건….”
“응, 자궁을 회복시켜주기로 했어. 없던 장기나 팔을 만드는 건 귀찮은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힘든 일은 아니거든. 물론, 이하운에게는 너무나 많은 도구가 필요했고, 너무나 많은 댓가가 필요하다고 말해서. 허락을 받았어.”
“무엇을….?”
“세 명. 딱 세 명만 낳으라고 했어.”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이하운이 불쌍하다거나, 에르덴이 무섭다거나 생각보다는 그 근육질 복근 속으로 페니스를 쑤셔넣으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이 들면서 하복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싫어? 이하운 같은 스타일은 별로야? 지난 번에 좋아하는 것 같아서 준비했는데. 나쁜 역할은 내가 전부 할 테니까. 마레이는 그 귀여운 암고양이를 굴복시키면 되는 건데….”
에르덴은 조심스레 마레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마레이는 이하운을 떠올렸다. 그 약한 모습을 떠올리고, 므랑데의 보호자라는 걸 떠올렸다. 그런데도 그녀를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저에게 말이라도 해주세요.”
“응!!”
에르덴은 기쁘게 웃어보였다.
“별 일은 아니야. 이하운도, 마레이도 모두 나에게 협박을 당해서 오늘 이자리에 모였다는 거지. 라벨라 때문에 연기는 익숙하지?”
마레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덴은 ‘연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마레이를 너무좋아하는데, 아이를 가질수 없는 상황이니까. 아이를 가질만한 씨받이를 구하고 있어. 마침 마레이의 약점을 찾은 거야~! 마레이의 부모님과도 같은 스승님이 이교도라는 거지. 이하운에게 자궁을 돌려줄 테니, 나대신 아이를 낳으라고 했어. 나는 마레이의 스승님을 인질로 시키는 걸 모두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오늘 여길 불렀어. 이하운에게 한 이야기는 이게 전부야.”
에르덴의 이야기에 마레이는 가만히 그녀를 불렀다.
“응? 마음에 안 들어…?”
“에르덴 누나는 그걸로 괜찮은 거요?”
“뭐가?”
에르덴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듯 되물었다.
“이하운에게 미움을 받을 거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남에게 미움받는 건 익숙해. 그리고 난 마레이를 위해서라면 모든지 할 수 있어.”
에르덴의 녹색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맹목적인 그녀의 모습은 두렵지 않았다. 전심전력을 다해 구해하는 암컷의 모습처럼 보일뿐이라 오히려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명…. 이하운을 임신시키라는 건가요?”
“뭐, 이야기는 그정도고. 자궁을 회복시켜줬지만 임신은 못하게 막아뒀어. 네가 성인이 되서 라벨라나 다른 아이들을 임신시킬 때쯤 풀어줄려고. 내 예상으로는 그 암코양이는 싫다면서 달라붙겠지만. 세 명을 나에게주고 떠난다면 보내줄 생각이야. 그 세 아이는 내 아이들처럼 키울거지만.”
에르덴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했다. 마레이는 에르덴의 손목을 조심스레 쥐어보았다. 또래에 비해서 한참이나 작은 몸집 때문인지 몰라도, 에르덴의 손은 자신보다 커다랬다.
“걱정마. 이하운이 네 씨받이로 남는다면, 이하운의 아이들로 남기게 해줄거야.”
에르덴은 잔혹하게 웃고 있었다. 마레이는 그녀 안에 담긴 광기보다, 그 광기가 먹고 자랄 달콤한 과실에 눈을 돌렸다. 그저 라벨라가 시켰던 대로, 에르덴이 시키는 대로 하면 더 많은 걸 가질 수 있다. 마레이는 진실로부터 눈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덴은 독안에 든 쥐를 바라보는 눈으로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이하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었잖아, 이하운.”
에르덴은 티스푼을 이하운에게 집어던졌다. 이하운이 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날아온 티스푼을 잡았다. 물론, 스푼에 묻었던 커피가 그녀의 얼굴과 옷에 묻는 건막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이하운은 죄인마냥 에르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니, 마레이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죄송하다는 말이 에르덴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걸 마레이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