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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4화 〉길고 긴 금요일(3) (294/341)



〈 294화 〉길고 긴 금요일(3)

불에 맞닿은 손부터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은 무척이나 빠르게 팔을 먹어 치우고, 어깨를, 목을, 그리고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삼켜냈다. 곧장 이 세상에는 마레이 드 파웬이라는 존재는 사라졌다. 그저 자신은 타오르고 있었다. 타오르고, 타오르고, 또 타올라 영혼까지…..

“마레이? 마레이? 마레이 드 파웬!!”

셀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호수가에서 나는 청아한 향기, 피부를 스치는 미지근한 바람, 태양의 열기, 새의 지저귀는소리. 막혀있던 오감이 다시금 되살아나고, 더욱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괜찮은 거야?”
“아, 네. 네? 네!”

셀린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방금전 온통  투성이인, 하얗던 세상은 꿈처럼 사라져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계약은 한 거야?”
“아, 그게.. 네… 한 것 같아요…. 이건 가요…? 문양이?”

마레이는 오른손등 위에 떠 오른 문양을 흘깃 보았다.

“그건 계약자밖에 안 보이는 거야. 정령술을 극의로 깨우치면 다른 사람 것도  수 있다는데, 나는 아직 멀어서.”

셀린은 뺨을 긁적였다.

“그래서, 누구랑. 아니 뭘 보았어?”
“불이었던 것 같아요… 타오르는 불꽃.”
“불의 정령이라….  번 마력을 불어넣고 나타나 달라고 이야기해 줄래?”

셀린이 시키는 대로 하자, 손등에서 카나리아 크기의 붉은 새가 나타났다.

“귀여운 아이네. 아, 이름부터 지어줘야겠다.”
“보통 카사나 샐러맨더 같은 걸로 부르지 않나요…?”
“그저 호칭 같은 거야. 너랑 나랑을 제국인이라 부르는 느낌이지. 새로운 땅에 왔으니, 새로운 땅에 쓸만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부터 친구의 시작이 아닐까?”
“아하….. 선배 괜찮아요?”

그제서야 셀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반쯤 풀린눈. 덜덜 떨리는 팔과 다리. 명백하게 무리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처음치고는 무척 안정적이게 소환됐네. 거기에 이렇게 귀여운 새고…. 훌륭해. 너도 정령사에 자질이 있어.”

셀린이 붉은 새를 만지려 하자, 붉은 새의 형상을 띈 정령은 샐린의 손을 날개로 쳐버렸다.

“자존심이 엄청 강한 아이인가 보네. 지성도 높아 보이고…..”

샐린의 손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나무 위로 날아가 버리는 붉은 새의 모습에 셀린은 허탈하게 웃었다.

“다른 정령도 소환할  있나요?”
“소환할 수는 있지만, 그 아이랑 친해진 이후에 하는 게 좋겠다. 마구잡이로 소환하면 질투하거든.”

마레이가 손을 내밀어보았지만, 붉은 새는 나무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친해지는 노력부터 해야겠네.”

셀린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붉은 새는 마레이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매가 사냥을 할 때, 사냥감을 찾듯이 조금씩 높게, 높게 올라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낯선 세상이라 긴장하고 있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선배, 괜찮아요? 조금 쉬셔야 할 것 같은데.”
“보통 때라면 괜찮다고 말했겠지만, 역시 지금은 무리네.”

셀린은 비적비적 걷다가, 가장가까운 벤치에 주저앉았다. 붉은 새, 아니. 이프리트는 여전히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요즘 학교생활은 어때? 아니. 어제도 물어봤구나.”

셀린의 말에 마레이도 웃어버렸다.

“공부 이야기도 어제했고, 할 이야기가 없네….”
“네….”

필리아가 있었으면 둘 다 할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셀린과 마레이는 단둘이 있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애매한 거리감이 있었다.

“저기, 정령술에 대해서…...”
“정령술은 딱히 정립된 학문이 아니라서, 자기 주관적인 이야기들이야. 네가   경험해보고 나중에 의견을 나누는 쪽이지, 내가 너를 가르칠 정도로 깊은 깨달음이 없네.”

셀린은 자신 없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셀린 선배의 정령을 보고 싶은데… 괜찮아요?”
“아, 응. 어렵지 않지. 운디네. 운디네?”

몇 번이나 운디네를 부른 셀린이었지만, 정령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오고 싶지 않다고 하네. 이런 일은 거의 없는데….. 다음에 보여줄게. 지금 워낙 지쳐서 다른 아이들은 무리거든.”
“아, 네…..”

정령이라는 건 생각보다 다루기 어려운 존재들이구나. 짧은 감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정령을 다룰 수 있는  맞는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대단하네,  번에 소환할 줄은 몰랐어. 나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르겠네.”
“대단한 건가요?”
“아, 음…. 응. 대단한 거야.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우리 집은 꽤나 오래된 정령사 가문인데 다들 천재라고 치켜세워주거든.정령술이라는 걸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재능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셀린은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마레이, 너는 왜 필리아 공주님의 편에 선거야? 파웬 공작가면 그럴 필요는 없었잖아.”

‘필요’라.

마레이는 셀린을 보았다. 셀린과 자신과 필리아는 동료라고 했다. 자신은 몰라도, 셀린은 필리아의 동료렸고, 그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필리아는 이런 관계를 맺고 다니는 걸까. 입안이 텁텁했다.

“그냥, 필리아가 좋아서요. 필리아에 옆에  있었을 뿐이에요.”
“그래……?”

셀린은 아무  없이 마레이를 보았다. 푸른 눈동자에는 공허함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 차가움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좋겠다.”
“뭐가요?”
“아니, 아니. 내가 무슨  했어?”
“좋겠다고 말하셔서….”

셀린은 좌우로 고개를 털었다.

“실수, 잘못 말했어. 응, 실수야.”

몇 번이나 실수라고 대답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마레이도 그녀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었기에 어색한 침묵만이  사람 주변을 맴돌았다.

“사실, 나는….. 필리아님을 존경해. 좋아하고, 다만 계약 관계로 그분을 모시게 되었다는 게 아쉬울 뿐이야.”
“그런가요.”
“셰필드, 그 개자식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하나뿐이었거든.”

고해성사를 하듯 셀린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냥 약혼을 파기하면 안 되나요?”
“부모님이 계약에 묶여있거든.”

그래서 어쩔 수가 없네. 셀린은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 계약이 무엇인지, 셰필드는 어떤  그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셀린과 자신의 거리는 고작 이 정도였다. 마레이는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셀린과 별다른 이야기가 오고가지 않았다. 적당히 비슷한 질문과 비슷한 대답으로 그녀와의 이야기가 끝났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멀리 떨어지기도 애매한 거리감에 숨이 막힐쯤에서야 셀린이 일정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셀린이 떠나고나서야 하늘을 빙빙 돌던 붉은 새가 마레이의 어깨로 내려왔다. 반짝이는 붉은 깃은 루비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저귀기는커녕 마레이를 감시하듯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계약했을 때, 이름이...

“안녕, 이프리트.”

새는 고개를 휙 돌렸다. 만져보려고 손을 뻗자, 손대지 말라는 듯 날개를 퍼덕였다. 새침하다고 해야 할까, 무엇인가 불만이 있는  같았는데, 이프리트는 아무런 말도없었다. 귀염성 없는 친구였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이 붉은 새와 자신을 잇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오감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프리트, 저는 마레이  파웬이에요. 말했듯이요.”

붉은 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자신이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었다. 새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대화하고 싶었지만, 역시 새와 대화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란님에게 묻는다면 대화하는 법을  수 있지 않을까.

계약했을 때에는 서로의 이름을 말했는데, 역시 현실에서는 무리인가 아쉬움마저 들었다. 자신을 지켜보기만 하는 이프리트는 여전히 어깨에 앉아있었고,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근처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성가대. 성가대를 잊고 있었다. 금요일마다 연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주 찾아가기로 생각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레이가 일어나 빠르게 걷는데도, 이프리트는 소년의 어깨에 계속 앉아있을 뿐이다.

성가대 연습을 구경하러갔지만, 중간에 껴서 같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길리아가 중앙에서 높은 음역대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에 감탄해 박수를 치다가 성가대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같이 연습하게 되었다는 말이 정확했다.

거기에 마레이의 곁을 떠나지 않고 어깨에 찰싹 붙어있는 이프리트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셀린이 역소환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이프리트를 정령 세계로 되돌려 보내고 싶어도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쏟아지는 관심에 익숙해질 무렵, 성가대 사람들과 연습 중간에 가벼운 잡담을 할 무렵, 길리아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혹시 만져도 돼…..?”
“아, 이 친구요. 이프리트, 만져도 돼?”

이프리트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길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지 말고,  가족이야, 이프리트. 길리아 마리타야. 마리타, 이 아이는 이프리트에요.”
“이프리트라… 이름에 비해서 귀여운 아이네.”
“네? 이상한가요….?”
“이프리트면 불의 정령왕의 이름이잖아. 뭐, 정령사들 중에서 자기 정령에게 왕의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은 종종 있으니까 이상하지는 않지.”

이프리트는 자신을 이프리트라 소개했다. 마레이는 자신 어깨에서 벗어나지 않는 붉은 새를 보았다. 이프리트는 마레이의 시선에도 주변을 살펴볼 뿐이었다.

“정령술에도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네. 예전부터 배웠던 거야?”
“아뇨, 오늘 처음 소환했어요. 기회가 닿아서….”
“정령술이 아니어도 좋으니 마법이나 다른 것에재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길리아의 어깨가  늘어졌다.

“길리아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재능이 있다고는 말해주지는 않는구나.”
“길리아는 재능이 있어요!”
“무슨 재능?”
“그게.. 그게.. 그러니까...”

대답하지 못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길리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라벨라 드 파웬이라는 철의 여인의 양자가 된 인물이라면 비슷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상상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물론,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모습이 너무 좋았다. 의지할만한 친동생이 생긴 것만 같았다.

“타고나지 못한 것을 가지고 한탄하거나 하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길리아의 말에 마레이는 하하.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 말하기 애매할 때에는 이상하게 웃음으로 대처하는 것 같아 찜찜할 따름이었다. 연습은 무사하게 끝났다. 오늘은 샤샤가 늦게 오는 덕에 다들 빨리하고 빨리 끝났다고 하자~! 라며 서둘러 연습을 마무리했다.

“샤샤 선배의 노래는 좋지 않아요…?”
“좋아서, 문제야. 그걸 듣고 나면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거든.”

성가대원 중 한 명이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왜인지 알 것만 같았다. 길리아에 이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곧장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총독 비서실에서 이번에 대량으로 물건을 사 갔다고 하더라고. 마레이는 뭐 알고 있는 거 있어?”
“네? 아, 로렌 님 관련해서는 저도 아는 게 없어서...”
“이런저런 물건을 너무 대량으로 사가더라고. 곰 인형, 장난감 이런 건 보육원이나 시설 같은 데에 뿌린다고 하는데, 보석이나 냉병기 수집품 같은 잔뜩 사가니까… 예산을 털기에는 아직 연말도 아니고.. 혹시 아는 게 있나 해서?”
“아하하, 아는  없어서요… 로렌 님이 개인적으로 필요하신 게 아닐까요…?”
“총독이 그런 귀여운 취미가 있다고? 농담도~.”

마레이는 로렌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그녀가 증조부의 부인이라는 사실과 드래곤이라는 점, 그리고 왜인지 모르지만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기뻐했다는 점밖에 아는 게 없었다.

문제는 다들 자신이 로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거라 착각하고 있었다. 미혼인 라벨라 드 파웬이 양자를 들였다는 것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마레이는 차기 파웬 가문의 가주나 다름이 없었기에 파웬이라는 이름을 끔찍이 아끼는 로렌과 사이가 좋겠거니 지레짐작이었지만, 마레이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오히려 마레이가 생각하기에는 로렌과 자신의 관계는 나쁘다고 말하는 더 편한 관계였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시종장의 일침을 가슴에 새기는 것도 잠시. 제멋대로 떠들었다고 손을 잘라다가 선물이라고 주는 악취미.

그런 사람을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로렌 파웬을 싫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을 딱히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마레이도 로렌은 기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없는 드래곤. 모두가 싫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가문의 사람이고, 가족이었다. 좋아할 수는 없어도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래서 피하고 싶은 거고.

그러면서도 이율배반적이게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로렌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왜 사람들이싫어하는행동을 하는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것인지, 왜 용이 인간으로 사는 것인지. 란이 조심스레 꺼낸 애매모호한 이유가 아니라,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필리아 공녀가 제국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던데, 역시 집안 문제 때문에 그런 건가~?”
“왜, 저를 보고 말씀하시는 거죠….”

사람들의 시선에 마레이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필리아 공녀와 사귀고 있다고 이야기가 들려와서…. 혹시 아니야?”
“맞긴 하는데… 그래도 리아의 개인사를...”
“꺄아~!! 리아래! 리아래! 벌써부터 애칭이 있는 거야?”

필리아의 이야기를 묻는 사람들의 시선에 마레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비슷한 광경을 어디서 경험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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