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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화 〉길고 긴 금요일(2) (293/341)



〈 293화 〉길고 긴 금요일(2)

그래도 말이야. 그래도. 셀린은 무엇인가 망설이는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흐릿하게 새어 나오는목소리에 마레이조차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선배….?”
“정령을 소환하게 된다면, 그리고 계약하게 된다면 친구로 여겨줘.”
“네.“
“혹시, 마레이는 친구에게 누군가를 상처입혀 달라거나,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지.”
“네...”

셀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응, 아마. 매우 높은 확률로.”

셀린은 확신하는  같았다.

“창조 신화부터 정령은 등장하고 있었어. 일곱 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어? 마법의 신, 에르제베르트. 무의 신, 칼펜. 천상의 신, 코르키엘, 용신 라비우스. 이런 것들 말이야. 태양신교가 주가 되고 나서는 뭐 다들 모르는  당연해졌다고 말씀하시긴 하는데.....”
“아… 그게… 처음 들어봐요.”
“뭐, 대부분은 잘 모르는 이야기니까.”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처음 듣는 이름들이지만, 이상하게 익숙했다. 왜인지는   없었다.

“태양교 교리랑은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비슷해. 태초에 어둠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빛이 생겨났고. 어둠과 빛의 경계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서 태어난 것이 태초의 용, 신, 정령왕, 악마였다는 이야기야. 처음에는 모든 존재가 한 곳에 모여있어 매일같이 전쟁을 벌였다는 이야기.”
“태양교 이야기랑 같네요.”
“뭐, 여기까지는 같아. 태양신이 모든 것의 경계를 만들었냐, 아니면 신들이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경계를 만들었냐는 차이가 있어. 뭐, 누가했는지는 중요한  아니잖아? 아무튼 차원이 나뉘게 되고, 우주와 하늘이 나뉘고, 대지와 바다를 나누며,모든 것들의 경계와 차이가 만들어져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엄청 비슷한 이야기지. 태양교 사람들에게 하면 별의별 욕을 다 들을 이야기지만….”
“셀린 선배는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어요?”
“들은  아니고, 북부의 비석에서 해독한 이야기야. 뭐, 신화라는  어차피 비슷비슷하잖아? 별 신경은 안 쓰고 있어. 아무튼 우리는 정령에 대한 이야기 중이니까, 신화에서 내려온 이야기를 조금  생각해보자. 정령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지, 그리고 상상력이 계약할 때 더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셀린의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야. 이건 그냥 정령에 대한 이미지를 잡기 위한 이야기일 뿐이니까. 오늘만 듣고 잊어버려. 알겠지?”

마레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해. 악마나 천사들이 살고 있는 다른 차원이랑 다르게 물리적인 접촉 방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이격된 차원이 공동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인지...”

셀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도 무어라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비슷한 위상에 존재하나, 다른 위상… 그러니까… 좌표값이 하나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거야. xy평면 좌표는 같지만, z축 좌표가 달라서 위에서 보자면중첩되어 있지만, 시각을 바꾸면 겹쳐지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해.”

수학은 배웠지? 묻는 셀린의 물음에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근래 이드리엔이 가끔 알려주는 공간의 관련된 내용이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맞추어 모든 감각기관이 적응이 되었으니까 z축 좌표가 맞지 않은 세계에 대해 인지하는 건 이상한 일이지. 가끔 정령안을 가지고 있다던지, 정령의 친화도가 극단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만난 적은 없지만,  사람들의 경우는 감각기관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뭐, 장애라기보다는 축복이라는 말이 정확하겠지만.”

셀린이  손을 모으고 작게 중얼거리자, 자그마한 불씨가 나타나더니 붉은색 나비로 형체화 된다.

“만져봐. 괜찮아,  아이가 만져도 된다고 했으니까.”

셀린이 붉은 나비를 마레이를 향해 조심스레 내밀었다. 날개짓만 간간히 하는 나비는, 아니. 정령은 무척이나 따뜻해서 그대로  안에 꽉 안고 있고 싶었다.

“역시….”
“네?”
“그대로 안고 있어. 계속 설명해줄게. 정령들도 분명 이 세계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형태야. 그렇기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게 정상적이겠지만, 우리들이 이 아이들을 억지로 계약이라는 비물리적인. 마법적인 방법으로 끌어당겨 오는 거야. 어떻게 보면 화신체의 개념이라고도 생각해.”

그러니까 말이야.

“약간의 힘을 가지고, 우리들의 인식하는. 아마도 우리가 통념적으로 상상하는 그런 모습으로 변환되어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라 생각해.”
“인간도… 저쪽으로  수 있나요?”
“글쎄, 이론상으로는 가역적인 반응이긴 한데…. 정령들이 우리를 소환하지 않아서, 증명은커녕 확인할 방법조차 없어. 갑자기 이상한 애들이 널 소환하더니 도와달라고 하는 건데도 도와주는 아이들이야. 반대로 생각하면 정말로 착한 아이들이니까.”

셀린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꼭. 꼭. 친구로 대해줘. 부탁할게. 자, 손을 줘. 어울리는 속성을 확인해야 하니까.”

셀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셀린은 두 손으로 마레이의 손목을  번이나 매만졌다. 필리아에 비하면 물렁했다. 므랑데도, 이하운도, 자신의 암컷들도 이렇게 손이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 마치 한 번도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같은 손. 부드럽다. 짧은 감상이 들었다.

“좀 이상한 감각이 들 수도 있지만 조금만 참아.”

-찌릿.

셀린이 붙잡고 있는 손목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겨울철 무방비하게문손잡이를 만졌다가 정전기에 된통 혼난 느낌이랄까. 아프다라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찌릿한 느낌이라는  옳은 것 같았다.

“큿..! 무, 무슨…!!”

셀린이 마레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발자국 뒤로 물러난 뒤,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마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인간이…. 아니야….”

셀린이 몇 번이나 뒤로 물러섰다. 파란색 눈동자에는 적의가 숨김 없이 흘러나왔다.

“네? 셀린 선배?”
“가까이 오지마. 방금 그 마력은…. 넌 도대체…!”

위험해. 셀린 주변으로   없는 일렁임이 보였다. 위험하다. 에르덴이 준 팔찌가 부르르 떨렸다.

“마레이 드 파웬… 방금 그건 인간이라기보다는... 아…!”

셀린은 무엇인가 깨달은  두 눈을 크게 뜨다가 머리를 거칠게 헝크러트렸다.

“파웬가였구나.... 너무 놀라서... 미안해. 미안!!”

셀린은 수업 시간에 오답을 크게 외친 학생처럼 잔뜩 붉어진 얼굴로 뺨을 긁적이며 다가왔다.

“그 다시 확인해도 될까?”
“아, 네….”

셀린이 무엇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 안에 있는 마력이라는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해했다. 크사크루 자매는 단순히 이론뿐만 아니라 제자를 키우듯 마법을 알려주고 있는 데도 이런 말은 없었기에 당황스러운 감정도 컸다.

“이게… 용의 피… 큿… 아냐, 괜찮아. 이런 건 또 처음이라…. 조금만. 더.. 더… 크흐윽…! 아아악!!”

셀린이 가슴을 부여잡고 히스테릭하게 거칠게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번이나 거칠게 기침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겨우겨우 숨을 들이쉰다.

“선배, 괜찮아요…?”
“아, 응… 너무 신기해서… 이게 용…...”

셀린은 두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인간, 엘프, 악마, 흡혈귀 그리고 순수, 전혀 연관이 없는 단어들의 나열에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미안해. 진정됐어. 방금 내가 뭐라고 했는지 혹시 들었어? 분명 머릿속에서 뭔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는데 남는 게 없네...”
“아뇨.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무슨 말을 하셨나요.”

셀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레이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다행이었다. 왜인지 그녀가 말했던 단어들을 알려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괜찮으신 거죠?”
“아아, 응. 무리해서 보려고 하다가. 수준에 맞지 않는 짓을 해버려서 오히려 잡아먹힐 뻔했네. 잠시만. 잠시만.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면 돼. 응. 조금만...”

주저앉은 채로 숨을 헐떡이는 셀린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진이 다 빠진 것처럼  분이나 숨을 헐떡이다가 그대로 푹 쓰러졌다.

“선배?! 선배!!”

몇 번이나 흔들어 깨워도 셀린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레이는 급하게 셀린의 맥박을 확인해보았다. 이상 없음. 눈꺼풀을 열어 동공의 수축을 확인했다. 이상 없음. 호흡은? 이상 없었다.

몇 번의 일련의 과정이 지나서야 마레이는 셀린이 단순히 기절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벨라가 필요한 일이 있을 거라고 알려준 방법이었는데,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그녀의 혜안에 마레이가 감탄해버렸다.

실상은 절조도 없는 하물을 가진 아들이 아무 여성이나 범하다가 실신시키길 반복하니, 중간에  확인하라고 알려준 것이지만…..

일반인이었다면 주변 사람이 기절했을 때 무슨 조치를 취했겠지만, 매일매일 여러 여성들을 실신시키길 반복하는 소년에게는 그저 편안한 자세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당연한 상식이 되어버렸고. 셀린도 우연치 않게 그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두고 떠날 수도, 그렇다고 어디에옮길 수도 없었기에 마레이는 셀린을 조심스레 일으켜 자신의 무릎에 눕혔다.

셀린이 말했던 여러 단어들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인간, 엘프, 악마, 흡혈귀 그리고 순수.가벼운 헛소리일 수도 있었지만, 육감이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말을 셀린이 한 것일까.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라벨라나 에르덴, 아니면 일리엔에게 상담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점점 이런저런 일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해결되기는커녕 여러 복잡한 일들이 계속 산적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잔뜩.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건 시험을 대비해서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자신이 해결할  없는 것들은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한다는 생각을 해도 내버려 둘  없었다. 몇 번이나 크게 심호흡하고 생각을 애써 떨쳐내서야조금은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제서야 무릎에 누워있는 셀린에게 관심이 갔다.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깊지 않은, 하지만 산속에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호수. 아침 호수에서 나는 맑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었다. 눈과 머리카락은 밑바닥이 보이는 호수처럼 너무 진하지도, 너무 얕지도 않게 파랗게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머리카락을 코에 가져다 대었다. 이유는  수 없었지만,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청아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맑다고 해야 할까. 폐부 깊이 스며드는 달콤한 향과 다르게 가볍게 폐를 훑고 지나가는 옅은 향이났다.

“........냄새나?”
“아, 아앗!! 죄, 죄송합니다!!!”

셀린은 아무런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아니, 부끄러 하는 것 같았다.

“아, 아니.. 그게… 이상하게 맑은 향기가 나서….”
“맑은 향기?”

셀린이 되물었다.

“그게, 그러니까….. 새벽의 호숫가에서 나는 맑은 향기가 계속 나서…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셀린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넌 정말로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소환해보자.”
“네?”
“준비해.”

셀린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품 안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꺼내더니 바닥에 마레이가 처음 보는 마법진을 이리저리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마법진을그린 셀린은 옷이 푹 젖을 때가 돼서야 마법진을 완성했다.

“원래라면, 이런 급조된 마법진으로 될 리가 없어. 정령들이 좋아하는 물건 들을 잔뜩 늘어놓고, 마나석을 억지로 과부하 시켜 차원의 틈을 억지로 비집고 여러 과정이 필요해. 하지만  재, 재능의 반. 그 정도만 된다면...”

스스로 자신의 재능의 반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셀린은 얼굴을 붉힌 채,  번이나 헛기침을 했다.

“웃지 말고… 자, 여기 가운데에  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셀린이 그린 마법진 가운데에 서 있자, 뭔가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간지럽다고 해야 할까. 아니, 이건 달랐다. 뭔가 보이는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는 듯하면서 들리지 않았다.

알 수는 있었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로, 바로 온다고…?”

셀린의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 자신 앞에 거대한 무엇인가가서 있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타오르고 있었다. 끝없이 타오르고,또 타올라서 결국 보이는 것은 새하얀 재뿐이었다.

[한 시대에 나를 부를 만한 아이가  명이나 있을 줄은 몰랐네.]

하얀 재가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금 타오르는 불꽃은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에서 시작되었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목소리를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렴. 흐음… 익숙한 느낌이 드는데…..]

불꽃이 제멋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니, 일렁이고 있었다.

[용? 악마? 엘프? 뭐지, 이런 잡종은….?]

불꽃이 제멋대로 말하고 있었다.

[뭐, 좋아. 심심하기도 했고 날 차버린 그 녀석을 혼내주고 싶기도 했고. 자, 꼬마야. 손을 잡으렴. 내 이름은 이프리트. 계약하자.]

불꽃이 다가왔다.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내밀었다. 왜인지 거부할 수 없었다.몸이 녹아 없어져도, 재가 되어버려도 불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불나방처럼. 끝은 재가 될 것을 알아도….

[네 이름은?]

마레이 드 파웬.

[파웬? 파에에에에웬~?! 로렌 그 녀석이야?! 야, 야!!!  돼!! 안 돼!! 취소야!! 취소라고!!! 이런 씨...!!]

손을 뿌리치는 불꽃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리고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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