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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2화 〉길고 긴 금요일(1) (292/341)



〈 292화 〉길고 긴 금요일(1)

무척 넓은 신사였다. 발테르의 여름은 시작되었는데, 이곳은 아직도 봄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니, 아주 먼 곳일까. 마레이는 멈추지 않는 의식의 흐름을 진정시키고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토라이를 지나 계단을  개 내려가자. 갑자기 모든 게 뒤바뀌어 있었다. 구름 한  없었던 하늘에는 구름 떼가 지나가고 있어 태양이  흔적을 남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미덥지근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불쾌한 습기가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단, 란의 신사로 들어갔던 위치 주변이었던  같았다. 일단 도로가 보일 때까지 걸어야 했다. 산의 봉우리가 보이는 방향의 반대로 무작정 걸었다.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수풀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걸어가고 있는 마레이를 따라서 수풀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낯선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

대답은 없었다. 불길한 기분에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수풀에서 동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익숙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므랑데가 밥을 주고 있는 아이들. 므랑데의 동물 친구들이었다.

곧장 마레이를 향해 달려든 녀석들을 뿌리칠  없어서 마레이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안겨드는 토끼라든지 배에 몸통 박치기를 하는 뿔 없는 사슴이라든지, 심지어 새끼 멧돼지도 있었다.

“애, 애들아? 나, 약속이 있는데…. 비, 비켜주면 안 될까… 아, 아, 간지러워. 핥지는 마..!”

동물들이 정신없이 달라붙고 있었다. 거기에 뺨을 잔뜩 문지르며 핥기까지 하는데, 이런 말을 하면 므랑데가 화낼지 모르겠지만, 동물들의  냄새는 고약했다. 억지로 뿌리치고 갈까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새 추가된 새들이 마레이 위에 올라탔다.

이제는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 정확했다. 동물들은  새 없이 마레이를 핥고 있었고, 부위는 가리지 않아서 옷이 축축하는 게 느껴졌다. 제멋대로 바구니를 탐하던 므랑데가 울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있을 것 같았다.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또다시 수풀을 헤집는 소리가 났다. 마레이는 잔뜩 긴장을 했다. 사슴이 튀어나올 때보다 더욱 큰 소리였다. 이번에는 뭘까. 산에 뭐가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곰은 아니겠지, 곰은 아니겠지.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늦는다 했더니… 여기서 놀고 있었구나.”

셀린이 허탈한 듯 웃어 버렸다.

셀린 페르디낭. 정령사, 마레이의 멘토, 필리아의 가신.

“선배, 놀고 있는 거 아니에요… 동물들이 제멋대로...”
“그게 동물들에게 인기가 좋구나.”
“정말이라구요….”

셀린이 점차 다가오자, 동물들이 겁을 먹은 듯 마레이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몸을 일으킨 마레이의 뒤에 숨어서 셀린을 보고 있었다.

“그래, 믿어. 순간 드루이드인 줄 알았다니까. 자, 아이들아 이리 온.”

헬린이 손짓하자 동물들이 마레이의 등 뒤에서 나와 다가가기 시작했다.

“네가 기르는 아이들이니?”
“아뇨, 친구가 먹이를 주는 아이들인데… 갑자기 오늘 달라붙어서...”

셀린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뺨을 부비는 암사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정령술에 관심 있다고 했던가?”
“아, 네.”
“재능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

셀린은 마레이를 보지도 않은 채, 달라붙는 동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물들의 중심이 이제 셀린으로 뒤바뀌었다. 동물들의 관심이 다른 곳을 향한 것은 좋았지만, 묘하게 섭섭했다.

오늘따라 므랑데가 짙게 남아있었다. 묘하게 그녀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해할  있게 된다. 착각이겠지만. 외톨이 소녀를 떠올리면 무어라 자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들 건강하네.  정도면 되겠네. 다들, 집으로 돌아가렴. 우리는 일이 있거든.”

셀린은 동물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동물들은 알아들었는지 곧장 제 갈 길을 떠났다.

“셀린 선배, 동물들이랑 대화할  있어요…?”
“의사소통은 못 하고 그냥 느낌 정도?”
“대단하네요….”
“정령술에 재능이 있으면 이런 것도 할  있거든. 정령 친화도라는 건 자연 친화도랑 비슷해서… 드루이드로서도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고.”

란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이니 말은  하겠지만, 누구든 노력하면 동물이랑 이야기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므랑데가 배우면 사람들을 피해서 숲속에서 살아갈 것만 같아서 작게 웃음이 나왔다.

“진짜야, 웃지 말고….”
“믿어요, 믿어요. 그냥 아는 친구가 떠올라서요.”
“그래, 그래.”

셀린은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나풀거렸다. 그녀는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딱히 화가 난 것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공부는 어때? 잘 돼가? 필리아님이 잘 돌봐달라고 신싱당부하시는데, 나랑 겹치는 과목도 별로 없어서 큰일이네...”
“나쁘지는 않아요. 다 재미있고요.”
“시험을 보면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갈걸? 원래 시험을 생각하면 모든 과목의 재미가 반의반토막이 나버리거든.”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까. 셀린은 무덤덤하게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같은 과목이면 숙제 검사라도 해줄 텐데…. 일과표 같은 건 만들어?”
“아, 그게.. 일단 만들 수는 있어요.”
“그럼 만들어 볼래? 아, 저기 테이블 있으니까 자리는 옮기자.”

셀린의 말대로 시간표를 만들어 보았다.

04:00~04:30:기상  신변정리
04:30~06:00:샤워 및 아침 식사 그리고 가벼운 운동.
06:00~06:30:개인 과외 시간.
06:30~06:45:등교
06:50~07:40:연구실에서 공부
07:40~08:00:수업 준비
08:00~17:00:수업
17:00~17:30:하교
17:30~18:00:저녁 식사 및 샤워.
18:00~20:00:공부.
20:00~22:00:숙제  공부
22:00~22:30:야식
22:30~02:00:공부.

“거짓말이지…?”

셀린이 시간표와 마레이를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그게… 거짓말은 아닌데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라벨라나 이드리엔, 일리엔이 말하기로는 섹스가 아니라 육체 공부, 보건 체육, 인체생리를 공부한다고 했으니 공부라고 적었을 뿐이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 바꿔 적는다면...

04:00~04:30:아침펠라 기상, 침대 위에서 질내 사정.
04:30~06:00:샤워 시중받으며, 식사하며 평균적으로 다섯 번 정도 사정.
06:00~06:30:한 몸이 된 라벨라와 가벼운 아침 이야기.
06:30~06:45:1 교시 수업이 자신의 암컷들이면, 등교.
06:50~07:40:1 교시 수업인 암컷의 연구실에서 육욕을 해소.
07:40~08:00:수업 준비라고 쓰고 간단한 숙제 검사하며 핸드 잡.
08:00~17:00:수업
17:00~17:30:하교
17:30~18:00:저녁 식사  간단히 학교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아침에 보는 풍경과 비슷.
18:00~20:00:개인 과외 수업. 참가자는 보통 매일매일 달라지는 편.
20:00~22:00:이드리엔이나 일리엔, 라벨라가 달라붙어서 숙제 점검 및 순수한 공부 시간.
22:00~22:30:야식을 먹으면서육욕을 해소.
22:30~02:00:침대 위에서 교육.

이런 걸 어떻게 이야기할까. 중간중간 무슨 일이 있거나, 차이가 있었지만 지난 6주 정도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람이 두 시간밖에  잔다고? 거짓말 하지 말고. 오랜만에 웃었네. 아하하하…. 하하…. 진짜?”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2시간 정도 자고. 아니 때때로는 30분쯤 자고 일어나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오늘도 두 시간 자고 온 거야?”
“대충이요…?”

오늘은 30분 정도 잔 것 같았다. 아니, 란님의 허벅지가 부드러워서 1시간 정도 잤으니. 1시간 30분 정도 잤으니 비슷하지 않을까.

“이게 몇 개로 보여?”
“네 개?”
“이 건?”
“세 개?”

셀린은 이어서여러 질문을 했다. 간단한 산수, 오늘 날짜. 간단한 문장을 따라 하기 정도.

“정말 두 시간 잔 거 맞지? 아니, 믿어야 하는데. 그게, 좀 그렇잖아. 믿는 게…. 힘들지.”
“아, 저도 잘 믿기지 않는데.. 어떻게 생활이돼서...”
“공부할  집중은 돼?”
“네에… 뭐….”

라벨라가 파악하기로는 섹스하는 시간 내내는 푹 쉬는 것과 같은 시간이라고 했으니 실질적으로 하루의 대다수는 쉬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괜찮을 수밖에 없었으나, 자신의 체질이나 암컷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필리아님도 하루에 3~4시간 자고 힘들다고 자주 그러시는데. 그분이 너랑 같은 체질이었으면 지금보다 덜 힘들어하셨을 텐데. 아쉽네.”
“아… 네.”

필리아는 하루에 네시간 밖에 잠들지 않는구나. 그녀는 정말 열심히, 그리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뭐 하루종일 공부만 하고 있으니, 내가 오히려 배워야겠는데… 하아… 필리아님께 잘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왔는데. 자신이 없네….”
“죄송합니다...”

네가  사과하는 건데. 셀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레이를 다시금 살펴보았다. 파웬이라는 이름은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수면 시간이 두 시간이라. 기가 질리다 못해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대부분 시간은 공부, 공부, 또 공부였다. 이런말 하기 부끄러울 뿐이었지만, 자신은 그저 타고난 재능 때문에 좋은 성적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출발점이 다르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뛰다 보면 이미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을 뿐. 가끔 목숨을 걸고 달리는 사람들이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면 박수를 칠 뿐이었다.

‘그리고 이 아이.. 정령술도… 혹시나...’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눈앞의 소년을 보았다. 귀엽게 생긴 얼굴, 아마 이런 동생이 있었으면 매일매일 끌어안고 귀여워해 줬을  같이 생기긴 했다.남자라기보다는 여자아이. 아니, 묘하게 중성적이게 생긴 외모.

눈에는 독기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눈에 초점이 없는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두 시간만 자고 생활할 수 있는 거지. 자꾸만 생각이 수면 시간에 머물렀다. 의심이 갔다. 그래, 거짓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 표정 없이 거짓말을 할 정도로 삐뚤어진 녀석이었다면 필리아가 자신에게 전심전력을 다  도와달라고 직접 부탁할 리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필리아님은 왜  아이를 좋아하는 걸까. 처음을 가져갔다고 하면 벌써 해버린 건가?

“셀린 선배?”
“아, 음… 미안! 다른 생각을 하느냐!!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지?”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의식의 흐름을 붙잡지 못했다.

“시간표 이야기요.”
“아, 맞다…. 일단 시험을 보고 나서 이야기해야  것 같아. 그전에는 뭐라 이야기하기가 애매하네.”

공부하는 시간으로 따지면 감찰국나 법무국으로 손을 뻗는 괴물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런데 자신이 공부에 관해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주제가 넘었다. 적어도 시험성적이 좋지 않다면 뭐라 할 말이라도 생기겠지. 지금은 의미도 없는 멘토멘티 시간에 필리아에게 마레이 드 파웬을 최대한 도와줬다는 모습을 보여드려야만 했다.

“혹시 궁금한  있어? 아,  마법 관련은 정말 몰라서… 미안!”

마레이가 슬쩍 꺼내는 이체르 발렌타인의 교재에 셀린은 곧장 백기를 들었다. 마레이도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하하 웃어버렸다.

“그러면 정령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다행이도 알려줄  있는 이야기네.”

셀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이라는 건 자연  자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해. 물론 인류가 알아낸 것은 없지만 말이야. 결론을 보고 현상을 역추적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뭐가 옳은지는 알 수 없어. 다만, 정령이라는 것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친화력이라는 게 필요하며,  계약이라는 관계로 묶여있을 수 있다는 게 현재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야. 물론, 정말로 위대한 정령사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 은거하거나, 비밀을 알면서 발설하지 않는 분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야.”

셀린은 자신이 말하고도 허탈한지 웃어버렸다. 그녀의 미소에 마레이는 따라 웃어버렸다. 자신에게 누나가 있었다면 셀린 같은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보통 등급을 나누고는 하지만, 그건 인간밖에 없었다고 하네. 엘프들은 원래 나누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느새 인간처럼 정령을 등급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고 하더라. 그 뒤로부터는 소환되거나 계약하는 정령들의 모습이 통일이 되었다는데. 이건 아마 인식과 관련된 게 아닐까 생각을 해. 사람들의 인식이 만들어낸공통된 어떤 부분이 정령이라는 존재를 고정시키는 거지. 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령사들은 화내겠지만.”
“인식 필터….?”
“재미있는 표현이네. 뭐,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고. 공부는 하고 있는데, 마법사처럼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알고 있는  다 감추고 있는 느낌이라서. 나도 뭐 밑바닥에서부터 정립해야 하다 보니 뭐가 맞는지, 틀린 지는알  없어. 뭐, 지금 중요한 건 정령에 관한 이야기니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 정령과 계약하면 봉신 관계나 주종관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설명하기 쉬운 것도 있고, 뭔가 있어 보여서 그런 말을 하는 편이야.“

셀린이 ‘부끄러운 이야기지.’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웃으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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