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위로해주는 엄마들[에르덴 파벨& 라벨라 드 파웬](1)
답답했다. 이하운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그저 사과만 할 뿐이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해줬으면, 그리고 사과를 했으면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이하운의 얼굴에는 수치심이 가득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부끄러운 그런…..
“무슨 잘못인데요. 저는 이하운 선생님을 미워하지 않아요.”
“아냐, 아냐. 이건 아니야. 놓아줘.. 난 이럴 동정받을 가치도 없는 년이야.”
이하운은 덜덜 떨고 있었다. 죄악에 시달려 그녀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레이는 그녀에 대해서, 그녀가 저지른. 아니, 저지를 일에 대해서 아무런 일도 아는 게 없었다.
“괜찮아요, 이하운. 괜찮아요. 저는 괜찮으니까….. 아, 혹시 엄마나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는 일이에요?”
이하운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라벨라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마레이도 이하운을 용서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침묵 끝에 이하운이 입을 열었다.
“......아니. 너만… 너에게….”
이하운은 그런 말만 했다. 그리고 마레이도 간신히 들릴 정도로. 아아, 신이시여, 신이시여를 중얼거리다 마레이를 밀어냈다.
“이하운.. 저는 괜찮아요.”
“.....그 말 후회할 거야.”
이하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거친 손바닥, 상처뿐인 주먹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가늘고, 부드러웠다.
“....넌 왜 이렇게까지. 하아.”
착한 거니. 끊어질 것 같은 여린 목소리에 마레이는 이하운의 손목을 더욱 꽉 잡았다.
“우린… 친구잖아요.”
“친구…. 친구라...”
이하운은 몇 번이나 그 단어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반복되는 친구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내뱉어질 때마다 그녀는 점점 힘없이 말을 내뱉다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네가 므랑데랑 아무 관계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무슨 말인지 알려주세요.. 이하운.”
“네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이하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하운의 눈을 보았다. 겁에 질린 듯한 호박빛 눈동자에서 질척한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토하고 싶었다. 아니, 토해낼 수가 없었다.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끈적한 감정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왜 네가 울고 있는 거야….?”
“네? 아.. 그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내가 울고 있는 거지. 하지만 호박빛 눈동자에. 거대한 인력이 있는 것마냥 자신을 끌어당기는 그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하운의 감정인가.
“이하운은 왜 울지 않아요….?”
이하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울 자격조차 없으니까.”
고해성사를 하듯 그녀는 나즈막하게 중얼거렸다.
“울 자격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슬픈데. 울어야 해요. 이하운. 울지 못하면 못 버텨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목에서 끅- 끅- 소리가 계속 새어 나왔다. 이게 이하운의 감정이라면, 이게 이하운이 느끼고 있는 죄악의 편린이라면 왜 그녀는 울지 않는 걸까. 목에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겨우겨우 흘러나왔다.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끌어안지 않으면 이하운이 부서질 것 같았다. 므랑데보다 더욱더 약하게, 그리고 흐릿하게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이를 꽉 꺠물었다.
“난 네가 싫어, 마레이 드 파웬. 정말로. 정말로 싫어. 너무 싫어.”
이하운은 웃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으로 마레이를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상처투성이 손이 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높은 곳에서 발버둥 치는 고양이가 손톱으로 매달리는 것처럼 움켜쥔 그녀의 손에 마레이는 조심스레 그녀를 끌어안았다.
“넌 이렇게 어린데… 이렇게 착한데….”
칭얼거리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여린 외견과 다르게 딱딱한 몸. 손끝에 근육이 만져진다. 이렇게 강한데도, 이하운은 너무나도 약했다. 아니, 약해져 있었다. 이런 사람이 뭐가 두려운 걸까.
“넌 날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울어도 돼요, 이하운. 제발요.”
이하운은 어느새 이하운은 소년의 셔츠를 꽉 깨물고 있었다. 짐승 같았다. 버려진 짐승. 상처 입은 짐승. 몇 번이나 버려지고, 버려져서 마지막 주인의 품에 매달린 그런 자그마한, 불쌍한 아기 고양이.
상처입힌다는 말, 위험하다는 말. 그 말이 자꾸만 밟혀서, 자꾸만 목을 꽉 붙잡아 누르고 있어서 위로의 말을 내뱉지 못했다. 자신은 이하운을 믿지 못하고 있는 거구나. 그걸 깨달아버렸다.
이 고양이 선생님과 자신의 선은 분명히 있었다. 이하운이 그어놓은 선, 그 선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도 명백했지만, 너무 높아서, 너무 두꺼워서 그 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분명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터.
그러니까.
한 걸음 더,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서.
이하운이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입을 맞추면 되는 걸까. 이하운은 젖은 눈동자로 마레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려움으로 떠는 그녀에게 입맞춤이 맞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더이상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숨결이 닿는 거리. 조금만 더 용기를 내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하운은 떨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이게 옳은 일인가. 그런 생각에 더이상 거리를 좁힐 수밖에 없었다. 눈을 꼭 감았다.
“믿어요, 믿어요. 이하운. 정말로 믿어요.”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허무한 외침일 뿐이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낮은 목소리로,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하는 소년의 모습에 이하운은 웃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마치 부서질 것 같은 유리잔마냥 그렇게 웃었다.
이하운이 손을 뻗었다. 마치 깨진 유리 조각을 만지듯 조심스레. 그녀의 손등이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옅은 한숨이 목을 간지럽혔다.
“따라오지 마. 부탁이야. 제발….. 나중에 다 이야기해줄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따라오지 말아줘.”
“이하운…..”
손을 뿌리치고 취한 듯 비틀거리며 걷는 이하운의 모습에 마레이는 차마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하운은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자신에게 무슨 일을 하려고 하기에 저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차라리 말해준다면,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웃으면서 해줄 텐데.
무겁게 걸어가는 이하운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마레이는 골목길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한동안 광장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갑자기 뒤에서 달려들었다. 몸이 휘청일 정도로 저돌적인 돌진에 마레이는 겨우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우앗..?!”
-물컹.
목주변에서 느껴지는 물컹물컹한 느낌에 마레이는 뒤를 돌아보자, 이드리엔이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붙잡은 표범처럼. 아니, 제 주인을 발견한 대형견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마레이~ 누굴 그렇게 기다리는 거야?”
“아니에요…..”
집에 가는 중이에요. 짤막하게 대답한 마레이는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핥짝!”
“읏… 그, 그마안...”
자연스레 귀를 핥는 끈적한 혀에 마레이는 작게 앑는 소리를 냈다. 광장에서 꽤나 떨어지기도 했고 골목길이다 보니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는 않았지만, 야외에서 스킨쉽은 꽤나 부담스러웠다.
“이, 이드리엔.. 밖인데...”
“어머, 이렇게 예쁜 누나가 잔뜩 끌어안은 게 싫어?”
누군가를 짓밟고 또 언제나 우위에 서 있어야 만족하는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엇이든지 포용할 수 있는, 모성이 넘치다 못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거대한 가슴에얼굴이 파묻는다.
“수, 숨 막혀요. 이드리엔.”
“이 꼬맹이가, 누나가 이렇게 매달리는데 다른 생각이나 하고 있고!”
품에서 바둥거리는 마레이를 사랑스럽게 끌어안은 이드리엔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소년을 꼭 끌어안고. 옆구리에 손을 뻗어 간지럽힌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것인지 반팔 스웨터 너머로 물컹물컹한 생가슴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읏.. 읏… 이, 이드리엔 그마안… 그만.. 흣..!”
“킁킁… 다른 여자 냄새가 나네…”
오똑한 콧날로 머리, 귓가, 그리고 목까지 샅샅이 훑으며 냄새를 맡은 이드리엔이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이 못된 자지는 우리 쌍둥이랑 엄마를 따먹었는데도, 다른 곳에 쓰고 싶은 거야?”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이하운에 대해서 말해야할까. 말하면 조금 편해질지도 몰랐다. 미묘하게 불편한 이드리엔의 행동에도 멋진 변명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마레이의 모습에 이드리엔의 미간에 슬며시 주름이 잡혔다.
“뭐, 됐어. 어차피 넌 내 꺼니까.”
-지이이익….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꽈아악…!
오늘 몇 번째 갈아입은 지 모를 팬티 너머로 가느다랗고 길쭉한 손이 페니스를 자연스레 움켜쥔다.
“읏… 밖인데..”
“절조 없는 자지를 교육하는 것도 보호자의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후후. 기쁜 듯 웃는 이드리엔은 자연스레 페니스를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못이기는 척, 야생마처럼 제멋대로 날뛰는 이드리엔에게 져주는 척이 상황을 즐길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누군가에게 맞춰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 손은 뭐야….”
이드리엔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살기에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산에서 포식자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몸의 힘이 풀린다.
“이드리엔.. 그만….요.”
“너….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이드리엔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토해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레이를 노려보고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마레이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리고 강압적으로 마레이를 밀어내고 벨트를 있는 힘껏 잡아당겨 바지를 벗기다가, 눈이 마주쳤다.
“울….. 어…..?”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 이드리엔은 믿기지 않는 듯, 돌이 된 듯 굳어버렸다. 마레이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힘들었다. 누군가에게 맞춰주기에는 너무 지쳐버렸다. 고개가 저절로 아래로 숙여진다.
“마레이? 여길 봐봐. 날 보라고.”
마레이는 자신의 턱을 잡아 시선을 맞추는 엘프 교수의 손길에 힘없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드리엔은 마레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마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드리엔 때문은 아니었다. 이드리엔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오늘 힘들었으니까.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그리고 관계적으로도 오늘은 한계였다.
“울고 있지도 않고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너 지금….쯧”
이드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주변을 흘깃흘깃 살피면서 끈적한 눈빛으로 적의를 토해내고 있었다. 방향성 없는 분노가 아무렇게나 터져 나오고 있었다. 다만, 질척이는 그 감정이 마레이를 피하고 있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거지?”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하운이 속 시원하게 말해줬다면, 무슨 일인지 알려줬다면 좋았을 텐데. 이하운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다는 건 이해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이하운과 같이 고민할 수 있으면 이렇게까지 답답하지 않았을 텐데. 마레이는 힘 없이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발목을 꽉 움켜쥔 게 무엇인지, 그림자 밑에 숨겨져 있었다.
위험한 걸까. 그러면 라벨라에게 이야기하는 게 옳았다.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면서도 보호자이자, 어머니이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연인에게는 괜찮지 않을까. 결심이 약해진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한 아무렇지도 않은 결심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드리엔의 손이 바지 속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한쪽 무릎을 꿇어 마레이와 비슷한 눈높이로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나 때문에 화난 거 아니지?”
이드리엔은 조심스레 다시 되물었다. 부모의 눈치를 살피는 어린아이처럼 이드리엔은 마레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드리엔은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서로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자자, 이드리엔. 에르덴 파벨님이 직접 너에게 의뢰를 맡겼는데. 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 어느새 이드리엔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일리엔. 갑작스레 등장한 쌍둥이 언니의 모습에 이드리엔은 마레이를 흘끗 보다 큰 죄를 지은 것마냥 몸을 크게 움찔거린다.
“언니… 여기는 어떻게?”
“그런 것보다. 빨리 가. 성녀님이 잔뜩 화나셨을지도 몰라?”
“그게 뭐가 중요한데.”
이드리엔은 일리엔의 시선을 피하고 칭얼거렸다.
“내가 알아서 다 해줄 테니까, 응? 빨리 가봐. 성녀님이 직접 지목한 건데...”
“남의 성녀건 뭐건…. 마레이….. 나는 말이야.”
“그만, 그만. 그만. 언니가 잘 이야기할 테니까 빨리 가. 주인님도 지금 뭐라 말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잖아. 빨리 가.”
옆구리를 잡아 일으키는 일리엔의 힘에 이드리엔는 못이기는 척 슬그머니 일어난다. 마레이도, 이드리엔도 지금 무어라 말해야 할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될지 알지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드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 잘하고 오세요.”
“하아…. 미안해. 정말로.”
이드리엔은 도망치듯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저 아이도….. 어렵네요.”
일리엔이 싱긋 웃어 보였다.
“렌은,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요?”
“주인님이 가는 곳은 전부 알고 있다구요. 후후….!”
기쁜 듯 웃는 일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기운이 다 빠져서 벽에 기댔다. 기운이 빠졌다기보다는 안도했다는 말이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