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다크 엘프, 그리고 검사(5)
다행히도, 지각은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들은 짧은 안도였다. 겨우겨우 호흡을 정리하고 가방을 보관함 안에 넣었다. 강의실이라기보다는 검술 도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공간이었다. 이하운의 강의실만 해도 각종 운동기구가 널부러져 있고, 한중간에는 링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격투기 도장이라고 해도 좋을 장소를 강의실이라 당당하게 밝히는 이하운을 떠올리며, 마레이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회중시계가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기에 잠시라도 손을 멈출 여유가 없었다.
“정확히 시간을 지키는 건 좋은 습관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여유를 가지는 게 더 좋은 결과를 불러옵니다.”
딱딱한 말투,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장발이 첫 번째로 눈에 들어왔다. 태양 빛에 반짝일 때에는 갈색 끼가 보였지만, 이렇게 건물 내부에서는 그저 검은색으로 보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가볍게 준비 운동부터 시작하죠.”
나기사는 곧장 수업의 시작을 알렸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 동작을 따라 하고 몸을 풀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검처럼 날이 선 눈매가 자신을 훑을 때마다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여러 수업을 듣고 있지만, 나기사 교수의 수업 때에 가장 긴장되었다.
“자, 그러면 그동안 얼마나 연습했는지 볼까요. 우선 기본자세를 20번씩 하시죠.”
마레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육욕으로 얼룩진 삶이었지만, 주변에 월등한 여인들의 모습에 기가 눌리기는커녕, 그녀들보다 더욱 대단해져야겠다는 생각에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연습하고 있었다.
물론, 검술 훈련을 보고 귀엽다고 웃는 라벨라의 몸에 발목을 잡은 채 입구로부터 자궁구까지 정면으로 베기, 자궁구까지 찌르기, 질육에 삽입한 채로 페니스를 좌로, 우로 크게 베어내기로 잔뜩 혼내 주면서, 얻어낸 시간이기까지 했다.
그 뒤로 오히려 검을 잡을 때마다 알몸으로 찾아와서 잔뜩 검술로 혼내주고 있지만, 이게 어느새 에르덴과 잔뜩 섹스한 이후 일요일 밤에 돌아오고 나서 가볍게 몸을 푸는 마레이와 즐기는 일과가 되기도 했다. 뭐, 요근래에는 이드리엔의 급습이 잦아서 그냥 순수하게 검만 휘두르고 있는 형편이지만….
고개를 털어내며, 잘못했다며 허덕이는 라벨라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재빨리 지워낸 마레이는 곧장 나기사가 원하는 자세를 최대한 집중해서 한 번, 한 번을 최선을 다해 펼쳐 보았다.
많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라는 평가를 받고, 나기사와 검을 나누었다. 여전히 가볍게 막아내고 마레이를 기교만으로 밀어내는 검술에 마레이는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어떻게 막는지도 모르겠다.
눈으로 분명 보이는데, 본인이 해보려고 하면 손발이 이리저리 꼬이고 있었다. 대련이 끝난 이후 자유롭게 연습하고 있는데, 나기사가 보여줬던 검의 묘리를 펼칠 수 없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는 말이 정확할까.
그저 본 대로 따라 하고 있는데, 나기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확실히 보는 눈은 감탄이 나올 재능이네요.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 남의 검술을 따라 할 수 있으면 문파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겠죠. 그래도 이건…. 아니, 아닙니다.”
“네에…..”
침울해진 마레이의 모습에 나기사는 마레이를 보고만 있었다. 노력하는 모습과 생각보다 뛰어난 재능에 마음에 들었다.문파의 노인들이 갑자기 제자를 들이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소년에게 자신의 검술을 가르칠 생각은 없었지만.
“근력은 확실히 늘었네요. 노력한 게 확실해서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기쁩니다. 검을 쓸 때, 걸을 때,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움직이는데 스트레칭할 때에는 또 뻣뻣하고… 알 수 없군요.”
나기사 교수는 한참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마레이에게도 존대를 했다. 처음에 봤을 때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수업에 들어서니 무엇인가 명백한 선이 있는 것 같았다. 나기사는 그 선 위에서 마레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선생과 학생이 아니라, 손님과 점원 같은 느낌이 강했다. 좋은 말로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었고, 나쁜 말로는 정을 붙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집중해서, 확실하게 검의 기본을 알려주었다.
“앞으로 나설 때, 뒤로 빠질 때. 발의 보폭은 일정해야 합니다. 다시 해보세요.”
“그렇게 휘두르다 보면 손목에 무리가 갑니다, 다시 해보시죠.”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네요. 다시 처음부터 연습하세요.”
다시, 다시, 다시. 수 없이 반복되는 ‘다시’라는 말에 마레이는 근육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나기사의 기준은 엄격했고, 마레이도 그 기준에 들고 싶은 오기가 들었다. 어떻게 휘둘러야, 어떻게 움직여야 이 교수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아가노 나기사는 칭찬에 무척이나 인색한 사람이었다. 잘했다는 말은 거의 들은 적이 없었고, ‘다시.’, ‘한 번 더., ‘나쁘지 않네요.’ 만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잠시 쉬도록 하죠.”
나기사의 말에 마레이는 대답하는 대신 검을 꼭 끌어안은 채 바닥에 드러누웠다. 단둘이서 하는 수업인데도, 마치 정해진 계획대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답답하다. 짤막한 생각이 들었지만,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강도에 전신이 덜덜 떨리기에 의식이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휴식은 좋지만, 근육이 너무 풀어지지 않도록 스트레칭을 하시지요. 그리고 물과 음식도 섭취하는 게 좋습니다. 일어나세요.”
나기사의 목소리에 눈을 뜬 마레이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벌써 20분 이상이 지나 있었다. 옆에는 물과 간단한 밀가루 덩어리가 들어 있는 바구니가 놓여있었다.
“감사합니다.”
물은 알겠는데, 밀가루 덩어리는 무엇일까. 아니, 사실 처음에는 무슨 하얀 덩어리인가 싶어서 나기사를 빤히 보았는데, 무표정하게 내려보는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하는 수 없이 정체불명의 하얀 고체를 입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밀가루 덩어리라 칭하게 된 계기는, 처음에는 쿠키인 줄 알고 입안에 넣고 씹었다가 너무 달고, 너무 짠맛에 혹시 자신의 미각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요리 못하시는구나….’
마레이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인지, 나기사는 흠흠!! 소리를 내며 불편한 기색을 비췄다.
“맛을 내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여기서는 벽곡단을 만들기에 재료가 부족해서 비슷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네….”
물론, 마레이는 믿지 않았다. 달달한 것과 짭조름한 것을 먹으니 몸에 기운이 좀 났다. 다만, 두 개가 적당히 섞여 있거나, 따로 분리가 되어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남김없이 먹어 치웠고, 나기사는 묘하게 우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곧장 다시 수업이 시작됐다.
“스트레칭은 중요합니다. 서 대륙의 경우, 신성력을 쓰는 신관들이 존재하더라도, 부상을 최대한 덜 입는 편이 수련을 할 때에…...”
“엄마아아아아~~!!!”
나기사의 말을 도중에 끊는 커다란 목소리가 강의실 안을 강타했다. 도도도도도! 하고 짧은 다리로 달리는 소리도 잠시, 마레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어느새 코앞에 자그만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키는 대충 마레이의 복부쯤에 올까,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젖살이 가득한 볼은 좌우로 잔뜩 쭉쭉 늘어날 것 같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 검게 물든 파란색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릴리?! 엄마 일하는 중이 잖니.”
“죄송해여…..”
나기사의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은 소녀가 뒷걸음질 쳤다.
“죄송합니다, 파웬군. 수업 중인데….”
아가노 나기사는 면목이 없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웬 오빠에게 사과해야지, 릴리…!”
“죄송합니다… 파웬오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배꼽 인사를 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마레이는 작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근육이 한계에 가까웠다.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지금쯤 덜덜 떨리는 손발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을 테니까. 이 꼬마는 일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냐, 괜찮아. 괜찮아.”
“저는 릴리아나 셰필드라고 합니다! 나이는 여섯 살이에요!”
부모에게 교육을 잘 받은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밝은 얼굴로 예의를 갖춘 인사를 건네는 소녀, 아니 릴리아나였다. 반짝이는 검은색 눈동자는 한밤중의 호수를 닮아서 묘하게 시선을 이끌었다.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검은색을 닮은 눈동자. 하얀 백합이랑은 조금 거리가 먼 이름이었지만, 무척 어울렸다.
“하아…. 누가 여기로 널 데려온 거야?”
엄한 표정으로 나무라는 나기사의 목소리에 ㄴ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듯 대답한다.
“주발렌 오빠가….”
“숙모님, 죄송합니다. 수업 중인 줄 몰랐네요.”
문 앞에서 한동안 가만히 있던 인영이 천천히 세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주발렌 셰필드, 쾌할한 미남. 마레이의 머릿속에 저장된 셰필드에 대한 간단한 평가였다. 필리아나 셀린 선배가 극도로 혐오하는 것 같아 자신도 피해야겠다 생각은 들었지만, 남의 평가만으로 누군가에 대해 정의하는 것을 피하라는 라벨라의 말에 따라 마레이는 아직도 주발렌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물론, 엄청 호색한이긴 했지만, 이미 두 마리의 엘프 암캐, 두 명의 섹스마망, 그리고 한 명의 교사를 제멋대로 범하고 있는 마레이가 보기에는 조금 주변 시선을 신경쓰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소유물이라 스스로 주장하며 다리를 벌려 주인님을 사랑을 갈구하는 극상의 여체들에게 둘러쌓인 소년에게 있어서 주발렌의 행동쯤이야 못된 장난이나, 너무 과한 농담 정도로 치부될 정도였으니, 주변 여인들의 잘못이라 할 수 있기도 했다.
“오, 마레이군도 여기 있었구나. 안녕?”
주발렌은 여전히 반짝반짝한 모습으로 마레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언제나 기운이 넘치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했다.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미는 그의 모습에 마레이도 주발렌의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필리아 공녀와는 오해가 심하게 있다 보니까, 말이야. 대화도 잘 안 되고. 공녀는 날 엄청 싫어하다 보니 서로 오해가 많아서 그런거니까. 신경쓰지 말아줘. 원래 한 번 싫어하게 되면 계속 어긋나게 되니까 말이야.”
주발렌의 말에 마레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색한이다, 뭐다 말해도 마레이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으니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마레이가 무어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다만, 필리아가 싫어하니 주발렌을 피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기사 숙모의 수업을 듣는 거야?”
“아, 네…..”
주발렌의 눈가가 잠시 파르르 떨렸지만, 다시 밝은 미소를 내비췄다. 마치, 방금 본 모습이 거짓인 마냥. 마레이는 자신이 본 주발렌의 모습이 착각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기사 숙모는 대단한 검객이니까, 배우면 너도 훌륭한 검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서대륙에서는 모르겠지만, 동대륙에서 유명한 문파의 직계 제자 중 한 명이거든.”
“문파...요?”
“동대륙에는 무림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서 비유하자면… 대충 기사단 정도라고 할 수 있으려나…..”
문파라는 단어가 조금 낯설었지만, 마레이는 처음 듣는이야기는 아니었다. 분명 라벨라가 동대륙에는 무기를 들고 제멋대로 활개 치는 무리들이 있고, 국가의 통제 따위는 무시하며 자신들의 규율을 내거는 무장한 무리들이 있고 그 무리들의 뭉침이 문파, 그리고 문파들의 합이 무림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라벨라의 냉혹한 평가를 생각해보면 기사단하고는 무척이나 거리가 멀었을 텐데...
“동대륙과 이곳은 너무 다르다 보니,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네. 하하하..! 그렇죠 숙모?”
어느새 나기사 옆으로 바짝 붙은 주발렌은 가만히 설명을 듣고 있는 마레이의 모습에 한껏 웃고 있었다. 무엇인가 우쭐한 느낌의 모습이라 알고 있다 말하기도 애매했다.
“아… 으읏… 그, 그렇지...”
다만 주발렌이 나기사와 너무 거리감이 없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었다.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나기사의 얼굴은 묘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눈동자는 마레이와 주발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왜인지 못된 장난을 치고 난 고양이가 주변을 살피는 모습 같았다. 슬며시 올라간 발꿈치와 팔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꽉 쥔 주먹, 그리고 슬며시 모인 허벅지. 무엇인가 가시감이 드는 것 같았다. 분명 이 반응은…..
“오빠야! 오빠야! 오빠 이름은 뭐에요?”
갑작스러운 릴리아나의 목소리에 마레이는 자신 밑에 달라붙은 꼬맹이에게 관심을 줄 수밖에 없었다.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은 꽃이라기보다는 태양을 닮았지만…
“아, 나는 마레이 드 파웬이라고 해. 15살이야.”
“15살?”
“응, 그래. 15살이야.”
마레이는 한쪽 무릎을 꿇어 고개를 기웃거리는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검은색 눈동자, 하지만 자세히 본다면 언뜻 푸른색이 섞여 있었다. 책에서만 본 깊은 바다는 이런 색깔일까.
“여기는 16살부터 엄마가 다닐 수 있다고 했는데!”
“응, 1년 일찍 왔어.”
“오빠 대단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손을 머리 위로 크게 뻗어 원을 그리듯 양쪽으로 벌리는 모습에 마레이는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릴리아나는 아이를 가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릴리아나도 여섯 살인데, 많은 걸 알고 있네. 대단해.”
“응! 나 대단해!! 릴리라고 불러도 돼!”
“릴리?”
“응! 응! 내 친구들은 다, 날 릴리라고 부르거든!”
릴리. 짧은 애칭을 입안에 담자, 릴리아나는 기쁜 듯 헤헤헤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운 아이네,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어느새인가 짤막한 두 팔로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