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잠깐, 점심시간[필리아 더 블러드](6)
셀린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눈을 질끔 감고 있었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선배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셀린 선배가 주신 공부 노트가 많이 도움이 되고 있어요…. 리아.”
“흐응~.”
필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셀린을 보았다. 파란색 눈동자가 조심스레 제 주인을 향해 움직였다. 긴장한 듯, 몸을 꼿꼿이 세우고 필리아를 보는 셀린은 마치 시험 성적을 확인하기 직전의 상위권 성적의 학생 같았다.
“잘하고 있나 보네. 후후, 긴장하지 마, 셀린 페르디낭?”
“예, 감사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학점이 30이라서….”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셀린의 모습에 필리아는 쿡쿡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한 번 호된 꼴을 당해봐야다시는 그렇게 무식하게 커리큘럼을 안 짤 테니까, 이번 학기는 적응한다고 생각해도 좋아. 성적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성장을 기대하는 거니까.”
“저, 리아….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요?”
마레이의 대답에 필리아는 묘한 시선으로 마레이를 보았다. 그리고 곧장 셀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흐음.. 셀린은 어떻게 생각해?”
“라벨라 드 파웬을 생각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셀린의 대답에 마레이는 자신과 라벨라를 비교해보았다. 엉덩이를 주무를 때마다 슬며시 허리를 들어 올려 박아달라고 유혹해오거나, 봉사하겠다며 기세 좋게 올라타다가 몇 번 찔리는 것만으로 한심하게 실신해서 벌을 주듯 교배프레스를 당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라벨라 드 파웬이라는 발테르 감찰청의 주인.
“마레이, 네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아닌 라벨라. 그러니까 감찰국에서 사람들을 찍어누르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흠칫 놀라게 하는 지적이고 강인한 여성.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필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레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라벨라 드 파웬. 네 어머니는 네 어머니고, 너는 너야. 비교하지 마 마레이.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필리아의 말에 두 눈을 있는 힘껏 뜨고 마레이를 보는 셀린은 위협적으로 반짝이는 필리아의 붉은 눈동자에 고개를 숙이고 아무것도 못 들은 듯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러면 될까요….?”
“그래, 노력하면 되는 거야.”
셀린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간신히 삼켜냈다. 자신이 아는 필리아 더 블러드는 결과가 만든 괴물이었고, 따라서 그녀를 만든 부모인 결과를 최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셀린은 답답한 기분을 참을 수 없어서 잔에 반쯤 차 있는 탄산수를 억지로 위로 밀어냈다.
말로만 하는 위로가 아니라, 마레이 드 파웬에게는 결과를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노력하면 된다니, 그 말을 필리아 더 블러드에게서 들을 줄이야. 셀린은 자신보다 연하의 소년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는 필리아의 모습을 힐끔 살펴보았다.
파웬이라는 이름은 분명히 영향력이 있었다. 아니, 차고 넘쳤다. 하지만 저 소년은 라벨라 드 파웬의 양자였다. 라벨라 드 파웬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지금 저 소년이 가진 위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쓸 수 있을 때 최대한 사용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필리아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게 답답하면서도 이해가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을 이용한다는 게 마음 편할 리가 없었으니까.
“다음은 검술 수업이었나? 그러면 든든하게 먹어야지, 자, 아~ 해봐!”
필리아가 먹기 좋게 썰어놓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소년에게 먹이고 있었다. 애정표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어미 새가 아기 새에게 모이를 주는 것 같았다. 혹시나, 혹시나. 우리 공주님은 저 파웬이라는 소년을…..
“옳지, 올지, 잘 먹는다. 자, 아~”
“부, 부끄럽다고 리아. 머, 먹을 테니까…!”
두 사람의 행동에 셀린은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른 데도 자꾸 아~ 아~ 하면서 스테이크를 먹여주는 필리아 때문에 마레이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라벨라나 일리엔 같은 연상의 여인들이 먹여줄 때에는 뭔가 우쭐함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부끄럽다는 감정만 들 뿐이었다.
“배고프지 않아?”
“아, 배불러요. 솔직히 필리아의 스테이크를 저 혼자 다 먹었다구요….”
셀린은 수업을 준비해야 된다며 곧장 자리를 떠났다. 무례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필리아는 흔쾌히 셀린을 보내주었고, 디저트를 앞에 둔 채로 마레이와 필리아만이 식탁에 남아 있었다.
“남자아이라면 잔뜩 먹어야지. 그래야 키가 쑥쑥 크지.”
“아이 아니거든요…..!”
그래, 그래. 필리아는 눈을 감고 웃고만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필리아도 아이였다. 내년에 성인이 되지만, 그래도 몸집만 보자면 자신과 크게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데, 필리아에게 지는 듯한 기분에 제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필리아도 작잖아요….”
“뭐, 지금은....다음 각성시기가 되면 더 자라겠지. 지금은... 일종의 정체기니까.”
“흡혈종은 몇 살까지 크나요?”
“글쎄, 개인별로 차이가 있어서… 대충 3번 정도 각성을 하니까…. 20대 후반 정도까지 큰다고는 들었어. 공국의 나이를 세는 법은 따로 있긴 한데, 뭐 이제는 제국법으로 통일되어있으니까. 대충 그쯤일 거야.”
10년 동안 필리아는 계속 자란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자신은 앞으로 4~5년이 고작일 텐데, 나중에 둘다 완연한 성인이 되어 있는데, 필리아보다 키가 작은 걸 생각하니 우울해진다.
“왜, 그리 죽을상이야?”
“그… 필리아가 저보다 한참이나 크면...”
“키가 큰 여자는 싫어?”
마레이는 서둘러 고개를 도리질했다. 이미 자신에게 종속된, 아니 길들여진 암컷들은 전부 다 팔다리가 길쭉하고 아이를 몇 명이나 임신시키기에 적합한 몸을 가진 극상의 여인들이었다. 사실 필리아가 라벨라처럼 쭉쭉빵빵한 몸매가 되면 좋을 것 같았지만, 지금의 아담한 체구도 매력적이라 생각해서 아쉬울 뿐이었다.
“그러면 마레이가 많이 먹고, 더 크면 되는 거 아니야?어차피 키는 대충 부모님을 따라간다고. 어머님이 165cm쯤이니까…. 나도 대충 그것보다 조금 더 크거나 작겠지. 솔직히 여황제처럼 180cm 정도로 크고 싶긴 한데, 그렇게 크면 징그러울려나?”
“리, 리아라면 190cm라도 좋아요! 제가 한참 올려봐야 되다고 해도…!”
필리아는 눈물이 찔끔 맺힐 정도로 웃었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좋았다. 다만, 정색하고 말하는 소년의모습을 보면 진실을 말하는 거겠지. 필리아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은 배 안에 꾸물꾸물 거려서 집중을 방해하는 정액 덩어리를 집으로 돌아가서 긁어내야만 했다.
“자자, 너는 이제 곧 수업이야. 지금 안 일어나면 달려가야 할 껄?”
“아, 벌써 시간이...”
마레이도 빠르게 자리에 일어났다. 계산을 치루지 않고 나서는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가 깜짝 놀라 필리아를 붙잡았다.
“이미, 계산했어. 카드를 맡겨놓았으니까 마레이도 오고 싶을 때 와서 먹으면 돼.”
“아, 네…..”
부잣집 아가씨. 마레이의 머릿속에 필리아의 존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팔찌의 가격이나 보석 장신구, 마법 물품들의 가격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정말 부잣집 아가씨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말을 하면 필리아가 화를 낼 테지만, 그녀가 공주님이었다는 사실을 가끔 잊어버리고 만다.
강의동 앞까지 데려다준다던 필리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필리아, 무슨 일 있어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필리아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꽤나 지나다니고 있었다. 조심스레 손짓하는 그녀의 손에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자,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흘러내리고 있어…..”
마레이는 깜짝 놀라 필리아의 얼굴을 보았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에 마레이는 숨이 턱 막힌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걸을 수 있겠어요?”
필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하필이면 검은 스타킹이라 그런지 흰색 덩어리가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아직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어서 그런지 가까이 와서 보지 않는다면 눈치채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수치심에 고개를 숙이는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그대로 필리아의 오금 뒤로 손을 밀어 넣고, 그녀의 옆구리를 붙잡아 한 번에 들어 올렸다.
“꺄앗?!”
“일단 움직여요!!”
깜짝 놀라서 발버둥 치던 필리아가 치마를 내리눌렀다. 공주님 안기보다 지금 팬티스타킹 너머로 흘러넘치는 정액을 더 수치스러워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몇 번 넘어질 뻔도 했지만, 요근래 근력이 늘고 있는 마레이는 간신히 필리아를 인적이 드문 곳까지 안아서 옮길 수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올라오고 머리가 멍할 정도로 달렸지만, 말 없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흡혈귀 공주님의 모습에 후회는 없었다.
“제길.”
필리아의 입에서 험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제길, 제길! 제길!!”
그리고 곧장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든 마레이의 품 안에서 발버둥 쳤다. 물론, 몸집이 비슷하다 보니 공주님 안기라기보다는 그저 중학생 소년소녀의 장난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넘어져요! 리아, 넘어진다구요!”
“됐어! 됐다고!!”
소리를 치며 마레이의 가슴을 마구잡이로 두드리는 필리아의 행동에, 겨우겨우 그녀를 내던지지 않고 조심스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필리아는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최악이야…!”
“죄, 죄송해요.”
필리아는 히스테릭하게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니, 아니. 너에게 화가 난 게 아니야. 거기서… 거기서….”
하아. 필리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페부 아래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숨까지 끌어내 토해내듯, 길게.
“고마워. 마레이. 그냥.. 그래, 고마워.”
“아니에요. 제 잘못도 있는걸요.”
필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필리아는눈을 감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역린을 건드린 것 같았다.
“나는…. 나는 말이야, 마레이.”
필리아가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는 흉흉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위협하는 것처럼. 핏빛 눈동자는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필리아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리고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한번 ‘나는.’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필리아, 자신 스스로도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전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언어로 표현하기 너무 힘들었다.
연설할 때도, 사교 회에서 사람들을 끌어드릴 때에도 이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게. 나는 지금 엄청화가 나 있어. 나 스스로에게. 거기서 왜 내가 걸음을 멈춰선 걸까? 그저 조금 움직여 사람이 없는 골목길로 갔으면 됐어. 다른 방법도 많았어! 누가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그 희박한 확률에 나는 왜 두려워한 거지? 왜 아무것도 못한 것이지? 하고 너무 화가나 미칠 것 같아!”
리아. 마레이는 짧게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근데.. 더 화가나는 건. 아니, 무서운 건. 너야. 너라고, 마레이 드 파웬.”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네가 너무 커져 버리고 있어. 내 안에서 자꾸 커져 버려서, 너에게 의지하고 싶어져. 빌어먹게도, 나는 어른인데. 자꾸. 하아… 그래, 그래서 화가 난 거야. 날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아서. 너랑 있으면 즐겁고 행복한데, 이렇게 내가 바뀌면 안 되니까.”
“그러면. 그러면요. 제가 바뀔게요.”
필리아가 눈을 떴다.
“제가 더더욱 커지고, 더더욱 바뀌어서 필리아가 변하지 않도록, 네. 변해도 끌어안을 수 있도록 자랄게요. 그래서 필리아가 어떻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될게요.”
자신 있게 말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는 멍하니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작게 코웃음 쳤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가 의미도 없이 식어 내렸다. 기운이 빠졌다. 필리아는 몇 번이나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딱딱하게 굳은 마레이의 얼굴을 가볍게 매만졌다. 자신의 뺨을 매만지는 손길이 간지러운 것인지, 아니면 좋은 것인지 몰라도 희미하게 웃는 모습에 필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레이의 양 뺨을 좌우로 쭉쭉 늘렸다.
“그래, 그래.. 그렇구나. 그래….. 그런데 이제 수업 시간인데, 강의실에 가서 수업을 듣는 게 먼저겠네. 멋진 어른이 되려면 말이야.”
“네!!”
크게 대답하고 달려 나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았다.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보았다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빌어먹게 밝은 하늘이었다. 비라도 잔뜩 내렸으면 그나마 좋았을 텐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그냥 기뻐서 웃음이 나왔고 또 참을 수 없을 뿐이었다. 필리아는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실성한 듯 계속 웃어버렸다. 그렇게 웃고, 또 웃고 웃다가 정신을 차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소년이 들어간 건물의 입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위험해. 위험하다. 필리아는 명확하게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생각보다 마레이가 너무나 빠르게, 그리고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만 있던 세계에, 진짜 침입자가 나타나버렸네.”
누구도 듣지 못할 허무한 중얼거림이 허공에 흩어졌다.
“네가 마레이를 좋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문은 내가 열어버린 것일까.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