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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0화 〉잠깐, 점심시간[필리아 더 블러드](5) (270/341)



〈 270화 〉잠깐, 점심시간[필리아 더 블러드](5)

교수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라니… 혹시 무슨 흔적이라도 남은 걸까…?

“네?”
“아냐, 그냥… 아무것도 아냐. 후후, 마레이는 열심히 하니까.. 그냥...”

필리아는 서둘러 뺨을 매만지던 손을 치워내고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묘하게 상기된 얼굴과 귀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휙 돌렸다.

“혹시, 리아 질투해요?”
“아니거든.. 질투 같은  안 하거든!”

필리아는 당황한 듯 주먹으로 마레이의 가슴을 작게 두드렸다. 이전과 다르게 조금 아파서 곧장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리아, 그만. 그만요!”

손목을 붙잡힌 필리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당황한  보였다. 정말 질투한 걸까. 무엇을? 생각이 빠르게 이어졌다. 줄리아 등과의 관계를 리아가 알리는 없었다.

“그냥… 이상한 생각을. 아니다. 아니야. 잊어버려.”

필리아는 잡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털고 슬며시 마레이와의 거리를 벌렸다.

필리아는 아쉬운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에는 허공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회중시계가 놓여 있었다. 마레이의 두 눈에는 부드럽게 움직이는 회중시계의 초짐을 향해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끝이네…. 응? 이거 가지고 싶어?”
“아, 그게.. 그러니까… 그게요..”

가지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그랬다. 그렇다고 필리아에게 떼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사면 되니까. 다만 은고리에 매달려 허공에서 시계추마냥 흔들리는 회중시계에서 눈을 뗄  없었다.

필리아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시계를 마레이를 향해 가볍게 던졌다. 포물선을 따라 내려오는 회중시계를  손으로 받았다.

“선물이야. 가져.”
“괜찮은 건가요….?”

필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물건은 그게 처음이네.”
“아하하….”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지 몰랐기에 뺨을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까 전에도 그렇고, 회중시계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은데,그렇게 마음에 들어?”
“아, 네… 그게, 요즘 광장에서 만나는 노인이 계시는데….”

마레이는 이름도 모르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주름진 얼굴과 다르게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 무언가 형용할  없는 존재감과 카리스마.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회중시계에 대해서. 생각나는 거 모두.

특히 노인이 슬며시 회중시계를꺼내 시간을  때마다 두근두근거릴 정도로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수상한 사람이네.”

필리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노인에 대해서 평가를 내렸다.

“그런가요….?”
“처음 보는 애에게 먹을 것을 사주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어딜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노인인데….”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는 당황한 듯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아니, 그래도 뭔가….”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익숙했다. 하지만  그리도 익숙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노인은 누구일까. 어느새인가 노인과의 만남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무엇인가 홀린 듯이.

“노회한 사람들은 조심해야 해. 속에 수백 마리의 너구리를 키우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특히 너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주의할 필요가 있어.”
“네…..”

노인에 대한 의심은 커져만 갔지만, 나쁜 방향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불꽃이 끝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무척이나 뜨겁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은 노인 스스로를 불태우며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바라고 접근한다.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레이는 말 없이 회중시계의 뚜껑을 닫고, 열기를 반복했다. 그 노인은 누구일까. 라벨라와 관련된 사람일까, 방벽에서 만난 사람은 아니었다. 가끔 지나치는 여행자들이 있었지만, 노인처럼 뚜렷한 특색을가진 사람을 자신이 잊어버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익숙하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닌가. 왜 그 노인에게 익숙한 기분이었을까. 아니, 오히려 편하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가족같이.

“벌써 점심시간이 절반이나 지나버렸네. 슬슬 식사나 하러 갈까? ”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멈추지 않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마레이를 현실로 부르는 목소리에 마레이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서둘러 자리에 일어나서 걸어 나가는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시간이 별로 안 남았어, 빨리 가자. 빨리!”

손목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일방적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1시간이나 남았는데요…?”
“1시간밖에 남지 않은 거야!”

마레이에게 있어서 2시간이 조금 넘는 점심시간이란 건 평범한 학교에 다니던 마레이에게 널널하다 못해 지루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런 지루함을 달래주는 암컷 선생들이 존재했기에 지루함을 느낌 틈도 없었다.

그런 지루함을 달래주는 극상의 암컷 노예들이 자신만의 연구실에서 주인님을 기다리며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주체하지 못해서 애타게 문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마레이는 알지 못하고 있지만.

“점심시간의 넌 너무 느긋하다고….”
“하지만… 다른 시간이랑 비교해서 시간이 많이 남기는 하잖아요?”

필리아에게 끌려가는 모습이 부끄러운 것인지 마레이도 서둘러 걸음을 옮겨 필리아 옆에 섰다.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달콤한 체향이 그녀에게 물씬 풍겨왔다.

“마레이, 너처럼 그렇게 빡빡하게 수업을 들으니까 길다고 느끼는 거라고. 아쉽단 말이야.”

무엇이 아쉽다고 말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은 필리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필리아에게 무어라 말을 걸어야 될지 몰라서 마레이는 그녀를 따라 묵묵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체르 발렌타인 수업…. 정말 괜찮은 거지?”

필리아는 힐끔 마레이를 보고 조금 더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미묘한 속도 차이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필리아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문제가 있는 거라면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그녀였는데 조심스레 반응을 살피는 모습은 마치 무엇인가를 피하는 느낌이었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이체르 발렌타인 교수에 대해서도 피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걸까. 마레이는  없이 필리아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게 말이야. 아니, 아니야.”

필리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꾹 닫았다. 무슨 말이기에 자신만만한 흡혈귀 공주님이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필리아가 자신에게 이체르 발렌타인에 대해서 할 말이 무엇이 있을까. 짐작가는게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혹시, 필리아는 이체르가 다크엘프 인 걸 알고 있는 걸까.  사실을 자신에게 말하고싶은 걸까. 먼저 내가 이체르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하면 되는 걸까.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면? 그러면 이체르가 다른 사람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다크 엘프라는 사실이 퍼질 수도 있었다. 물론, 필리아가 소문을 퍼트리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체르 교수가 숨기고 있는 사실에 대해 자신은 그걸 지켜줄 의리가 있었다.

조금씩 멀어지는 필리아의 손이 보였다. 작고, 또 귀여웠지만 길쭉한 손가락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특히 페니스를 훑어줄 때, 그리고 뺨을 매만질 때 느껴지는그 애정어린 손길을 떠올리자 마레이는 손을 뻗어 필리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응? 아… 후후, 손잡고 싶었어?”
“네.”

마레이가 부끄럼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유로워 보이던 필리아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그리고 곧장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간다. 길쭉한 귀가 약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이지, 어떤 모습인지 하나만 하라고!!”
“네? 아, 죄송해요.”

사과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는 어쩔  없다는 듯이 웃으며마레이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줄였다. 대범할 때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거칠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멈춰달라고 해도 우악스럽게 행동하는 모습과 다르게, 이럴 때는 말하고 싶은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소심하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조심스러운 행동을 보면 이질감이 들 뿐이었다.

어떤 게, 이 아이의 진짜 모습일까. 필리아는 차오르는 한숨을 폐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여전히 알기 어려운 아이였다. 아니, 아이라고 하기에는 완연한 수컷이지만. 아니, 수컷이라니. 필리아는 고개를 털어냈다.

수컷이라니, 그렇게 비유하면 자신은 그저 암컷에 불가했다. 그렇게 칭하기에는 그녀의 고귀한 프라이드가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쯧. 속으로 혀를  필리아는 긴장한 듯 손에 힘을 주는 소년의 모습에 이질감을 털어낼  없었다.

마치 둘  하나는 억지로 형성된 모습 같아서.

-냐아아앙~!!

어린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마레이가 걸음을 멈추었고, 깍지를 끼고 걸어가던 필리아도 멈춰어  수밖에 없었다.

“응? 무슨 일이야?”
“아, 저기….. 고양이가 있어요.”
“아는 고양이야?”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분명….

“.......갈비?”

므랑데가 지어준 이름을 부르자 기쁜  도도도!!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고양이가 곧장 점프해 마레이의 품안에 달려들었다. 야생 고양임에도 므랑데가  길들여서 그런지 사람의 손길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안아 들자, 오히려 품 안에서 배를 보이며 이리저리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습에 마레이는 갈비의 턱을 매만지며 포유류 새끼 특유의 높은 체온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네가 기르는 아이야?”
“아뇨, 친구가 밥을 주는 거로 알아요… 야생고양이에요.”
“야생이라고….?”

필리아는 조심스레 마레이  안에 있는 고양이를 훑어보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면밀히 살피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깨닫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리아도 만져볼래요?”
“미안, 동물들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러지 말고   만져봐요. 귀여워요.”

고양이를 안아 들고 필리아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윽- 소리를 내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 죄송해요. 정말 싫어할 줄은….”
“아냐, 아냐. 좋아해. 좋아하는데. 조금 트라우마가 있거든.”

필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묘한 표정으로 마레이 품 안에 안긴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

“네?”
“어릴 적에는 힘 조절이 미숙했거든. 그래서손안에 있던 강아지가.. 그냥…. 쮸압… 이 되어버려서.”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떠올려서 그런지 필리아의 얼굴이 더욱 더 하얗게 질려있었다. 물론, 필리아가 말한 내용을 그대로 상상한 마레이의 얼굴도 필리아를 따라 하얗게 질린다.

“지금은  조절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잘돼서 동물을 끌어안는다고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지만, 자그만한동물들을 보면 자꾸 그게 생각나. 특히  정도 크기인 녀석들을 보면… 차라리 호랑이나 말 같은 건 괜찮은데….. 손바닥만  녀석들이 다가오면 고기완자가 되는 환상이 자꾸 보여서 말이야.”

필리아는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며 자신의 손을 보고 있었다. 혐오감과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제 손을 쓸어넘긴다.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갈비를 놓아주고 손을 잡았고, 필리아는 깜짝 놀라 몸을 크게 움츠렸다.

“......고마워.”

그리고이전에 볼  없을 정도로 활짝 웃어보였다.




필리아가 식사하러 가자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꽤나 북적이는 레스토랑이 나왔고, 예약을 잡은 자리로 가니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선배, 늦으셨네요. 무슨 일 있으셨나요?“

셀린 페르디낭이 슬쩍 시간을 보며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미안해. 마레이랑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연락이라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걱정했습니다.”
“응, 그래. 미안해. 자, 자, 우선 식사부터 할까?”

필리아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웨이터가 급하게 달려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곧장 음식 카트를 들고 왔다. 필리아에게 받은 회중시계를 슬쩍 보니 식사 시간이 50분이나 남아있었다.

“급하게 오시고, 급하게 가실 것 같아서 코스요리를 취소하고 간단한 식사류로 주문을 바꾸었습니다.”
“역시, 셀린이야. 유능해.”
“감사합니다.”

필리아의 칭찬에 약간 얼굴을 붉히는 셀린의 모습에 마레이도 서둘러 물수건으로손을 닦으며 식사 준비를 마쳤다.

간단한 식사류라고 했지만, 식탁 위에 올라오는 것은 큼지막한 스테이크 덩어리와 얇은 반죽의 손바닥을 두 개 합친 크기의 피자, 그리고 하얀 크림이 가득한 파스타였다. 다만 문제점은….

“조금 과해, 셀린. 이걸 전부 먹을 수 있는 건 마레이 정도라고.”

필리아는 각자의 자리 앞에 놓인 스테이크, 피자, 그리고 파스타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마레이 입장에서는 억울할 뿐이었다. 남자아이는 많이 먹으니까 중얼거리는 셀린의 말과 다르게 이건 양이 조금 과했다. 마레이와 필리아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이. 사람마다 각각 배정되어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아가씨.”
“뭐, 어쩔 없지. 늦은 건 우리니까. 남겨도 상관없으니까 무리하지 마. 알겠지?”
“예.”

셀린은 고개를 푹 숙인  필리아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하얀 치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분해 보였다. 무척이나 분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같았다.

필리아는 그런 셀린의 모습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식기를들었다. 식기를 들어. 라고 작게 말한 흡혈귀 공주님의 모습에 마레이와 셀린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필리아만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멘티, 멘토는 잘하고 있는 거야?”
“죄송합니다. 부끄럽게도 제가 도와줄 수 없는 것들이 많아서… 노력하고있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생각 중입니다.”
“느긋하게 해, 느긋하게. 이번 학기만 할 것도 아니고…. 동료라고 생각하고 해,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말고.”

셀린은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고, 필리아는 고개를 숙인 셀린을 앞에 두고 무심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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