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다크 엘프, 그리고 검사(2)
역시나. 이체르가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느낌은 정확했던 것 같았다. 로브 너머로 조각케이크를 음미하면서 먹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작게 콧소리도 흥얼거리고, 케이크에 집중하는 것 같은 고정된 모습에 마레이는 작게 웃어버렸다.
“제 거, 더 드실래요?”
“아 그게.. 그러니까… 그래도 될까?”
분명 케이크를 다 먹었음에도, 크림이 묻은 포크를 입에다 가져다 대는 발렌타인의 모습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반쯤 남은케이크를 건넸다. 로브 안은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어서 까맣게 보여야 했는데, 자세히 보자 안에 희미한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윤곽만으로도 이체르가 대단한 미인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난번에 온 남학생을 기다리면서 조각 케이크를 먹었는데도, 그 학생은 오지 않았다. 몇 번 보았다면 이름이기억났을 텐데, 한 번만 만난 사람이라 그런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조금 희미했다.
“....안 올 모양이군. 수업을 시작하지.”
물끄러미 문을 보던 이체르는 포기하고 테이블을 치우고 분필을 붙잡았다. 마레이도 책을 피고 필기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이체르가 옆에 앉았다.
“단둘인데, 판서하기에는 효율이 나빠. 직접 알려주지.”
발렌타인 교수는 펜을 자신의 책을 꺼내 마레이 옆에 두고 하나, 둘 마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흑마법이라는 말은 무척이나 포괄적인 용어야. 저주술, 혈족 특유술법 등. 일종의 비주류 마법들의 총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체르의 말에 마레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마법과 원소 마법의 차이에 대해서 강의해주던 일리엔과 이드리엔의 말이 떠올랐다. 세 개의 분류로 나눈 마법에 대해서 마법사들은 무척이나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흑마법이라고 하면 대부분 저주나 사령술 같은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사실, 흑마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종족 특유의 마법들이다.”
흡혈귀들이 쓰는 피를 이용한 신비들, 드워프 종족 특유의 불을 다루는 마법들, 수인족들의 강체술. 오크들의 각인. 종족 특유의 마법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인간의 기준으로 작성이 되어 있었다.
다만.
“대부분의 엘프들이 쓰는 정령술은 왜 흑마법이 아니죠….?”
“글쎄… 어른들의 사정이려나.”
이체르는 웃어 보였다. 아니, 웃는 것처럼 보였다. 로브 안에 흐릿한 윤곽이 왜인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파웬군은 엘프들이라고 하면 어떤 게 떠올라?”
“엘프요….?”
당연히 마레이의 머릿속에 크사크루 자매가 그려졌다. 정액 범벅이 된 채, 침대 위에 널부러져 숨을 겨우겨우 내쉬던 모습에 하반신의 피가 쏠린다. 마레이가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하고, 살짝 붉어지는 얼굴에 이체르는 뭘 생각한 것인지 쿡쿡 웃어버렸다.
“일리엔 교수님을 생각하고 있구나? 확실히 그분 같은 이미지가 보편적이긴 하지. 아름답고, 친절하고. 또 능력 있고….”
이체르 발렌타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일리엔 크사크루라는 존재를 자랑하듯, 허리를 슬며시 피며 기분 좋게 숨을 내쉰다.
“그러고 보니, 일리엔 교수님의 제자라고 했나. 학생들을 좋아하시는 분이지만, 제자는 들일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아, 네에….”
이체르의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훑고 있는 느낌. 마치 심사위원 앞에서 점수를 평가받는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들었다.
“주제로 돌아와서. 엘프들의 이미지라는 게 인간들에게는 무척이나 긍정적인 방향이잖아? 대륙이 통일되기 전에도 신성시 여기는 마을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제국이 통일 전쟁에도 승리자의 편에 섰었지.”
“예. 발테르 총독님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체르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마레이를 보았다. 꽤나 즐거워 보였다.
“그래, 너는 총독의 손자라고 했던가.”
이체르의 손에서 펜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검지와 약지 사이로 일정한 궤도를 그리다가, 엄지 위를 스쳐 지나가고, 다시 두 손가락 사이로 움직이는 펜의 모습에 마레이는 이체르를 봐야 된다 생각을 하면서도 하얀 장갑을 낀 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왕이 침략했을 때도 엘프는 인간의 옆에 있었고, 그 이전에. 수많은 이야기에 엘프들은 인간의 옆에 있었지. 커다란 위기일 때마다일종의 동반자 같은 느낌이었어. 중간중간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던 드워프나 수인족과 다르게도 말이야.”
대륙전쟁 중 일어났던 종족전쟁, 드워프와 수인족들의 광기 어린 전쟁에서 엘프는 여전히 인간의 편에 서 있었다. 그렇기에 여황제는 엘프들의 영역을 인정했다. 라벨라의 이야기로는 발테르 서쪽에 대숲이라 불리는 영역이 있다고 했다. 정확한 명칭은 엘븐하임이라는 왕국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짐작도 못 한 거대한 크기의, 발테르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숲이 엘프들의 영역이라고 했다.
“인간들도 재능이 있다면 수인족의 강체술, 드워프의 불, 흡혈귀의 혈(血)마법을 쓸 수 있어. 정령술에 적합한 사람이 적은 것처럼, 다른 것들도 비슷하지. 하지만 배우는 인간은 없어. 배울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야. 이걸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사람도 쓸 수 있었나요?”
이체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흡혈귀는 아니지만, 흡혈귀 특유의 혈(血)마법을 쓸 수 있어. 피의 창을 만든다던지, 시체를 폭발하는 그런 사령술 계열에서 내려온 가짜가 아니라, 진짜 혈(血)마법. 일종의 재능이지.”
이체르는 사람인 걸까. 마레이는 로브로 뒤덮인 여인을 보았다.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맡는 체향이 그녀에게서 새어 나왔다. 크사크루 자매의 몸에서 나던 그 특유의 청량감과 비슷하면서도 무엇인가 다른 그런 냄새가.
“특이한 일은 아니야. 수인족의 국경선 주변 마을에서는 강체술을 쓸 수 있는 가문이 있는 걸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지금도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드워프의 불을 쓰던 인간도 본 적이 있어. 드워프의 밑에서 자라던 인간이었지.”
“와….”
놀라워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이체르는 작게 웃었다. 이제 로브 속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박또박 들려왔다. 라벨라와 처음 만났을 때, 딱딱하고 낮은. 허스키한 목소리를 닮았지만, 조금 더 여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마레이를 부르는 라벨라의 목소리는 귀가 녹을 것처럼로 달콤하게 변해버렸지만…..
“귀족의 혈통(blue blood)이라는 말이 몇 년 전까지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그런 특수한 재능이라는 건 어느 정도 유전적인 요인이 있다는 거겠지. 특히, 라벨라 드 파웬을 보면…. 아, 실례. 네 어머니 이야기가 예시가 되어버렸네.”
이체르는 곤란한 듯 뺨을 긁적였다.
“나쁜 이야기도 아니고, 괜찮아요.”
“기분 나쁘지 않다면 다행이네. 이 이야기를 할 때, 라벨라 드 파웬만큼 적합한 예시가 없거든. 뭐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라벨라 드 파웬, 네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는 자주 들어봤지? 뭐 천재성같은 걸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니까.”
마레이로서는 잘 모르는 이야기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라벨라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사실 피부로 체감하는 건 항상 따뜻하게 안아주는 자신의 파트너. 아니, 이런 단어를 쓰면 안 되지. 자신의 어머니었으니까.
“용의 피(dragon blood)라는 말이 있어,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용사들이 사악한 용을 잡고 그 피를 뒤집어쓴 뒤에 피부가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시력이 좋아졌다 이런 이야기가 있거든.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버렸네. 피, 그러니까 유전적인 의미에서 재능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의미야. 마법도, 검술도, 강체술도, 정령술도 쓸 수 있는 인간이니까. 그것도 그렇게나 강력하게.“
”강체술이요….?”
라벨라가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건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없었던가. 하지만 수인족의 강체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마레이도 처음 들었기에, 라벨라가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몰랐어? 아, 이건…. 쯧. 솔직하게 말하자면, 예전에 라벨라 드 파웬과 싸운 적이 있었어. 엘븐하임이었는데, 강체술을 썼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내가 졌으니까 별 신경 쓸 필요 없어. 싸웠다고 해도, 그냥 대련 비스무리한 거라 서로 악감정도 없고.”
걱정하지 마. 이체르는 짧게 답했다. 그러고 보니 수업표를 짤 때, 라벨라의 의견이 강하게 들어갔었다. 그때 이체르와 이하운에 대해서 꽤나 좋아했던 것 같은데. 이하운도 라벨라를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라벨라가 기억하지못했거나.
라벨라에 대해서 모든 걸 알 수는 없었다. 물론, 라벨라에게 묻는다면 전부 알려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남에게 라벨라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게 묘하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체르는 당황한 듯 마레이의 이름을 부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화가 나거나, 무서운 건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이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레이도 이체르 발렌타인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라벨라에 대한 이 끈적한 소유욕이. 아니, 그냥 소유욕에 대해서 요즘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어제만 해도, 일리엔이 이드리엔에게 보여준 그 어른스러운 모습에 화가 났던 자신을 명백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게 없어야 한다는 그 아집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할 뿐이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네. 조금 쉬도록 하자.”
급하게 일어나는 이체르의 모습에 마레이는 당황해서 그녀의 로브자락을 붙잡았다.
“케, 케이크 드실래요?”
“.....그래.”
이체르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는 양자라서, 어머니에 대해서 잘 몰라요. 입적한 지 얼마 안됬거든요.”
라벨라의 점의 개수, 성감대, 키스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가슴을 꽉 쥐면서 뒤에서 쳐박을 때마다 엉덩이 구멍을 움찔거린다던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 못 할 그런 음란하고도 비밀스러운 라벨라의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마레이였지만, 오히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타인들보다 더 모르고 있었다.
“......실례했어. 미안해.”
이체르는 기운이 빠진 듯 의자에 기대앉아있었다. 로브 너머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켜내듯 그녀는 조금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아뇨. 왜, 교수님께서 미안해하시나요. 저는 입적돼서 무척 기뻐요. 양자가 되었다는 게 부끄럽지도 않고요.”
방벽 주변 마을에 있을 때는상상도 못 할 일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척이나 음욕적이고, 남들에게 말하지 못 할 도착적인 행위들로 뒤범벅이 된 나날들에 마레이는 어느새 흠뻑 취해있었다.
“다행이네….. 그러고보니 들은 적 있는 것 같았어. 내가 배려심이 부족했어. 이건 사과할게. 천하의 라벨라 드 파웬이양자를 들일 줄은…..몇 년 전에 엘븐하임에 만났는데도 기억에 너무 강렬하게 남아서 오히려 시간 개념이 애매해져서 말이야.”
내가 말 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 이체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레이는 손사래 치면서 정말로 괜찮다는 것을 그녀에게 어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말주변이 없다 보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볼수록, 이체르 드 발렌타인은인간은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흡혈귀도, 엘프도 아닌 것 같았다. 수인족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 특유의 야생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슬 다시 수업을 시작할까? 아니면, 조금쉴까?”
케이크를 다 먹은 이체르 발렌타인은 조심스레 플라스틱 포크를 내려놓았다. 맛있긴 했지만, 연속으로 케이크를 먹는 건 마레이에게 조금 부담스러웠기에 이체르에게 양보했다. 그녀는 벌써 두 개의 조각 케이크를 먹어 치웠지만, 조금 더 먹고 싶어 하는 눈치 같았다.
그녀의 하얀 장갑에 눈이 갔다. 왜 온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걸까. 때 묻지 않은 장갑은 그녀가 결벽증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더쉴까요…? 케이크 더 드실래요?”
“고마워.”
이체르가 웃는 것 같았다. 로브 속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이 마레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자신을 감추는 사람에게그걸 물어보면서까지 짙은 호기심을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자,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자.”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와 케이크 때문에 수업도, 쉬는 것도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 집중해. 이제부터 속도를 더 낼 테니까.”
“네!”
판서보다는 옆에서 직접 알려주는 게 몇 배나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빠르기도 하고, 어려운 내용을 쉴새 없이 달려가기로 악명 높은 이체르의 수업이었기에 마레이의 손이 쉴 틈도 없었다.
불러주는 내용을 적고, 중간중간 자신이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다시 적어가기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오히려 버거울 정도로 빠른 수업에 잡다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법 관련 수업을 이체르 수업 하나만 들었다면 진작에 머리를 쥐어 잡으며 죽는소리를 낼 수밖에 없겠지만, 크사크루 자매의 수업과 미묘하게 공통적인 이야기에 어떻게든 수업을 들을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한참 집중해서 필기하는 소년의 모습에 발렌타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엔 언니가 제자로 삼을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네.’
오성은 나쁘지 않다. 그러고 보니 먼 방계라고 했나. 머리 색깔을 보면 용의 피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다. 마법적 재능은 몰라도, 지식을 흡수하거나 다른 분야의 지식을 끌어오는 건 꽤나 우수한 학생이었다.